신문봉 : 고향은 연길,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시 전공으로 박사과정 밟고 있음. ‘장백산’, ‘민족문학’ 등 문학지에 현대시 다수 발표.

숲 속의 비

 

하얀 어둠이 두 눈알을 까맣게 파먹었다
고로 난 눈이 멀었다

허공에 내던져진 손
손끝의 혈관은 살갗을 뚫고 징그러운 촉수가 되었다
하얗지만 까만 어둠을
휘젓고 더듬고 또 기다린다

빳빳한 셔츠 깃을 펴서 세우고
인적 없는 정거장에서 투명색 우산을 펼쳐든 채
올 것만 같은 버스를 기다리다
이내 또 우산을 접었다
크레용으로 그려진 하늘이기에
빛깔은 선연하지만
이 퍽퍽한 질감과 친절하지 못한 냄새
비릿하고 눅눅한 후각의 암세포는 미각으로 이전됐고
나는 이미 여러 암말기적 증상을 보였다

머물고 있는 모든 것의
경계가 사라질 때 즈음하여
어둠의 빛깔도 서서히 잊혀졌다

(2018년 <문화시대>)

 

사물의 語法

 

책은 주어가 되고
오른 켠의 필은 술어가 돼

창켠을 바라보는 걸상은 명사가 되고
몰래 그를 훔쳐보는 책상, 그의 침묵은 동사가 돼

두 점이 이어지는 직선 위에
하나의 완전한 문구가 피어난다

삐걱
걸상의 시선은 책상에 돌려지고
얼굴 붉어진 책상과 걸상 사이에, 언어는 또 새롭게 피어난다

 

불안의 고리

 

약점이 된 리모컨이 내 손에 쥐어있다
마주한 TV의 눈엔 파랗게 겁기가 찼다

수백 번의 연습 끝에 찻잔에게 한계가 학습됐다
금생은 이렇듯 그 한계를 품고 산다

깊은 한 모금에 허무의 잿빛이 실린다.
담배에게 있어 시한부 인생은 숙명처럼 지독하다

TV 보면서, 차를 마시며, 담배 빠는데
세 점은 어느새 삼각형 고리로 닫겨져, 차차로 내 목을 옥죄어 온다

 

 

길을 밟자
길은 꿈틀거린다
은뱀은 발 아래서 깨어났다

뜨겁게 달궈진 발을
은뱀 등에 힘껏 달근질했다
깊숙히 찍힌 발자국과 함께 은뱀의 비명은 하늘 찢는다

찢어진 하늘 틈새로
남쪽 갔던 파랑새들 그제야 언 나뭇가지에 날아와 앉는다
새들 부리엔 남쪽 갔던 빗물도 곧 찾아온다는 쪽지가 물려있다

난 이토록 잔인한 방식으로
겨울을 쫓고 봄을 찾았다

 

 

참다 못해
따르릉!
구름 뒤에 숨은 반고의 목소리 터져나왔다

하늘 아래 혼돈하고 어지러운 세상
반고의 힘에 또 한번 젖은 곳과 마른 곳으로 갈린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른 곳으로 도망갔고
마구 꺾이고 버려진 꽃들의 신음소리는 파란 피 되어
반고의 눈물에 씻겨 내린다.

사람들은 지붕 밑에서 빨간 눈 부릅뜨고
비 끊기만을 기다린다.

(2016년 <민족문학>)

 

번져진 책장

 

책은 컵
그 속엔 곤히 잠든 물이 담겨 있다

갑자기 뛰어든
고양이 바람에
컵은 번져진다

팔락
팔락
팔락
팔락

1쪽에서 26쪽까지의 물이 흘러나왔다

 

거품

 

세수하던 난 섬뜩했다
물이 눈을 떴다

요란한 휘저음에
짐자는 그를 깨웠다

동그랗게 부릅뜬 눈
한참 나를 쏘아본다

“톡”

눈을 감고
다시 잠들었다

방바닥에 벌렁 누워서
드러렁 코구는 아버지
돌아누우며 엉덩이 긁적긁적

(2015년 <장백산>)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