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봉의 현대시를 논함

신문봉 : 고향은 연길,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시 전공으로 박사과정 밟고 있음. ‘장백산’, ‘민족문학’ 등 문학지에 현대시 다수 발표.

어쩌다 보니 모든 것이 너무 쉬운 시대에 살고 있다.과학이 발달하면서 공업은 물론이고 가정용품도 갈수록 쓰기 편해져서 요즘은 청소도 로봇청소기가 하고 있다. 아침에 바빠서 청소 못 하고 나와도 밖에서 휴대폰으로 지시하면 청소기가 저절로 돌아다니며 청소하다가 끝나면 저절로 충전기에 들어가서 충전한다. 거기에다가 인터넷이 발달하여 인터넷에만 접촉하면 모르는 것은 뭐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시대여서 그런지 시마저 쉬워져서 세상에 시가 넘쳐난다. 자연히 서두만 읽어도 그 뒤에 무슨 내용이 나올지 뻔한 시들이 행만 끊어서 시의 형태만 갖춘 채 인터넷에 그득하다. 그래서 위의 세 줄만 읽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신문봉의 시는 쉽지 않았다. 아, 신선하네. 무슨 뜻이지? 그렇구나. 재미있네. 한 번에 이해할 수 없어서 읽고 또 읽노라니 그렇게 느낌이 변해간다. 한 글자 한 구절 한 단락 놓치지 않고 되새김하며 읽으니 읽을수록 감칠맛이 나는 것이 신문봉의 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한 번 해석을 해보고 싶은 충동이 생겨서 『동북아신문』에 실린 시 7수를 해설해보려고 한다.

우선 그의 시 「숲 속의 비」를 보기로 하자.


하얀 어둠이 두 눈알을 까맣게 파먹었다
고로 난 눈이 멀었다

허공에 내던져진 손
손끝의 혈관은 살갗을 뚫고 징그러운 촉수가 되었다
하얗지만 까만 어둠을
휘젓고 더듬고 또 기다린다

빳빳한 셔츠 깃을 펴서 세우고
인적 없는 정거장에서 투명색 우산을 펼쳐든 채
올 것만 같은 버스를 기다리다
이내 또 우산을 접었다
크레용으로 그려진 하늘이기에
빛깔은 선연하지만
이 퍽퍽한 질감과 친절하지 못한 냄새
비릿하고 눅눅한 후각의 암세포는 미각으로 이전됐고
나는 이미 여러 암말기적 증상을 보였다

머물고 있는 모든 것의
경계가 사라질 때 즈음하여
어둠의 빛깔도 서서히 잊혀졌다

―「숲 속의 비」의 전문


제목부터 의문이 생긴다.‘비’라는 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인데 ‘내린다’라는 동사가 없이 ‘숲속’에 비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시인은 「숲 속의 비」라는 기호를 쓰고 있는데 그럼 이 기표의 기의는 무엇인가. 그것을 알려면 먼저 시를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하얀 어둠이 두 눈알을 까맣게 파먹었다/ 고로 난 눈이 멀었다”. 이 첫 구절에서부터 같은 모순을 볼 수 있다. ‘어둠’은 원래 까만색이다. 그런데 ‘하얀’이란 기표를 쓰고 있다. 그러면 왜 ‘하얀 어둠’인가? 그렇게 추리해 가면 ‘하얀’이란 기표로부터 우리는 ‘낮’이라는 기의를 읽어낼 수 있다. 사물이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낮’이다.

그리고 ‘정거장’ ‘버스’ 이런 기표로부터 ‘도시’라는 이미지를 얻는다. 그러면 이곳은 어디인가? 시인이 살고 있는 곳 ‘서울’까지 이미지를 확장해보자. 그렇게 연상해 보면 ‘하얀 어둠’에서 미세먼지로 대기가 오염된 서울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눈이 멀었다’라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염이 심함을 나타내고 있다.

“허공에 내던져진 손”에서는 그런 혼탁한 대기를 손으로 휘젓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사람은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는 자연히 손을 내밀어 앞을 더듬게 된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어야 할 ‘허공’에 뭔가 손에 닿는 것이 있다. 원래는 만질 수 없는 대기 속에서 작은 알갱이들이 손끝을 스친다. 그 느낌을 시인은 “손끝의 혈관은 살갗을 뚫고 징그러운 촉수가 되었다”라고 역으로 표현하였다. 정상수치를 넘어선 대기 오염도를 감각적으로 보여주었다.

“우산을 접었다”는 것은 비가 그쳤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크레용으로 그려진 하늘이기에” 비가 내릴 리가 없다. ‘크레용’이란 기표는 우선 색깔이 투명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화학용품이란 이미지가 떠오르게 한다. 이로부터 수많은 현대기업이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오염을, 그런 대기 오염 속의 흐릿한 서울의 하늘을 떠오르게 된다.

“빛깔은 선연하지만/ 이 퍽퍽한 질감과 친절하지 못한 냄새/ 비릿하고 눅눅한 후각의 암세포는 미각으로 이전됐고/ 나는 이미 여러 암말기적 증상을 보였다”. ‘후각’으로만 감지되어야 할 대기는 ‘친절하지 못한 냄새’를 넘어서 이제는 ‘미각’으로까지 느낄 수 있다. 먼지와 모래가 입안에서 씹히는 감각이 느껴진다. 이곳은 이제 더 나빠질 수 없는 ‘암말기적’인 곳으로 되었고 그 속에서 사는 인간인 ‘나’ 도 암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머물고 있는 모든 것의/ 경계가 사라질 때 즈음하여/ 어둠의 빛깔도 서서히 잊혀졌다”에서 ‘경계’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낮과 밤의 경계, 자연과 현대문명의 경계, 친환경과 환경오염의 경계, 어쩌면 현대사회에서 이런 경계들이 모호해지고 인간은 그런 환경에 습관이 되어가며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여기까지 분석하고 다시 제목을 해석해보면 ‘숲’이라는 기표는 도시의 콘크리트 빌딩 숲을 의미하며 ‘비’는 미세먼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읽으면 「숲 속의 비」라는 문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은 표현이 기실은 아주 형상적이고 적합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빌딩이 늘어선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날리는 미세먼지, 그것은 서울이라는 이 거대한 「숲 속의 비」였다.


약점이 된 리모컨이 내 손에 쥐어있다
마주한 TV의 눈엔 파랗게 겁기가 찼다

수백 번의 연습 끝에 찻잔에게 한계가 학습됐다
금생은 이렇듯 그 한계를 품고 산다

깊은 한 모금에 허무의 잿빛이 실린다.
담배에게 있어 시한부 인생은 숙명처럼 지독하다

TV 보면서, 차를 마시며, 담배 빠는데
세 점은 어느새 삼각형 고리로 닫겨져, 차차로 내 목을 옥죄어 온다

―「불안의 고리」 전문


‘텔레비전’ ‘차’ ‘담배’는 현대인의 생활에서 제일 밀접한 존재이다.

누구든 집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텔레비전을 켜는 일일 것이다. 나에게 별 필요가 없어도 딱 지금 그 프로그램을 보아야 하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켜며 마음대로 채널을 바꾼다. 그런 면에서 ‘텔레비전’이라는 기표는 고독한 현대인이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부하’란 기의를 가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반대로 ‘텔레비전’에게 있어서 ‘나’는 그의 ‘약점’을 틀어쥔 ‘보스’일 것이다. 인간이 밖에서는 약자일지 모르나 텔레비전 앞에서는 ‘보스’이고 그래서 리모컨은 인간에게 잡힌 “약점”같은 것이 되고 만다. 그 리모컨 때문에 텔레비전은 인간의 의지에 따를 수밖에 없고 수요 하는 것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시적 주인공은 인간인 ‘나’가 아니라 ‘텔레비전’일 것이다. 보스의 무리한 요구를 별수 없이 들어주어야 하는 현대 직장인의 비극적인 모습이다.

‘찻잔’은 그릇 중에서도 작은 그릇에 속한다. 우리 말에서 ‘그릇’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말한다. “그릇이 크다”라는 말은 큰일을 할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어쩌면 시인은 꿈과 현실의 한계를 느끼고 있는 듯하다. ‘찻잔’이라는 기표에 꿈을 속박하는 현실 환경이란 이미지를 담고 있다.

‘담배’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나 제일 문학적인 표현은 마음이 답답한 사람이 담배 연기로 그 괴로움을 날려 보낸다는 이미지일 것이다. 위의 이미지하고 연결해 보아도 현실의 암담함에 괴로워하는 현대인의 심리가 잘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깊은 한 모금에 허무의 잿빛이 실린다”. 잠깐 사이에 다 타버려 재가 되고 마는 ‘담배’같이 사람은 누구나 ‘시한부’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지독한 ‘숙명’이기도 하다.

“TV 보면서, 차를 마시며, 담배 빠는데/ 세 점은 어느새 삼각형 고리로 닫겨져, 차차로 내 목을 옥죄어 온다”. 사회에 나가서는 보스의 시달림 속에서 억눌리며 살아야 하고 마음속에는 펼칠 수 없는 꿈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어서 괴로움에 시달리고 그러한 현실과 꿈의 괴리 속에서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고민이 이 시에 잘 그려지었다. 병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전형적인 자화상이다.


참다 못해
따르릉!
구름 뒤에 숨은 반고의 목소리 터져나왔다

하늘 아래 혼돈하고 어지러운 세상
반고의 힘에 또 한번 젖은 곳과 마른 곳으로 갈린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른 곳으로 도망갔고
마구 꺾이고 버려진 꽃들의 신음소리는 파란 피 되어
반고의 눈물에 씻겨 내린다.

사람들은 지붕 밑에서 빨간 눈 부릅뜨고
비 끊기만을 기다린다.

―「비」의 전문


‘반고’는 천지를 창조한 신이다. 하늘을 받치고 섰던 그가 죽으면서 “그의 머리와 팔다리는 오악(五岳)으로 변했고, 피와 눈물은 강과 하천이 되었으며, 눈은 해와 달이 되었고, 털은 풀과 나무로 변했다. 그의 입김은 비바람으로 변했고, 음성은 천둥이 되었다. 눈빛은 번개와 벼락이 되었다. 눈을 뜨고 있으면 낮이었고, 눈을 감으면 밤이 되었다. 입을 열면 봄, 여름이 되었고, 입을 다물면 가을, 겨울이었다. 기분이 좋으면 날이 맑았고, 화를 내면 날이 흐렸다.”([네이버 지식백과] 반고 [盤古, pán gǔ] 중국인물사전)

그런 반고가 화를 냈다. 선악이 혼돈되고 자기가 목숨으로 만들어준 자연이 무참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다시 혼돈으로 돌아가 버린 세상이 “반고의 힘에 또 한번 젖은 곳과 마른 곳으로 ” 갈라지었는데 “사람들은 저마다 마른 곳으로 도망갔고/ 마구 꺾이고 버려진 꽃들의 신음소리는 파란 피 되어/ 반고의 눈물에 씻겨 내린다.” 반고의 눈물에 자기의 죄와 무지를 씻어버려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지붕 밑에서 빨간 눈 부릅뜨고/ 비 끊기만을 기다린다.”

시인은 이 세상을 더럽히고도 그 잘못은 뉘우치지 못하고 방관하면서 편해지기만을 기다리는 현대인들의 무심함을 비판하고 있다. 시인은 비를 창조의 신인 ‘반고의 눈물’이라고 하였다. 때문에 ‘비’는 비록 꽃과 나무를 꺾어버려서 ‘파란 피’가 흐르게 하였으나 생명수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제목을 「비」로 하였다는 것은 그래도 인간들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주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길을 밟자
길은 꿈틀거린다
은뱀은 발 아래서 깨어났다

뜨겁게 달궈진 발을
은뱀 등에 힘껏 달근질했다
깊숙히 찍힌 발자국과 함께 은뱀의 비명은 하늘 찢는다

찢어진 하늘 틈새로
남쪽 갔던 파랑새들 그제야 언 나뭇가지에 날아와 앉는다
새들 부리엔 남쪽 갔던 빗물도 곧 찾아온다는 쪽지가 물려있다

난 이토록 잔인한 방식으로
겨울을 쫓고 봄을 찾았다

―「봄」의 전문


이 시의 ‘은뱀’이라는 기표를 ‘길’과 같이 생각해보면 눈이 내린 길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만약 이것이 한겨울의 길이라면 ‘은뱀’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길은 꿈틀거린다/ 은뱀은 발 아래서 깨어났다”고 느끼고 있다. 이는 이 눈길이 이미 녹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뜨겁게 달궈진 발을/ 은뱀 등에 힘껏 달근질했다/ 깊숙히 찍힌 발자국과 함께 은뱀의 비명은 하늘 찢는다”. 아마 눈 녹은 물 때문에 시인의 신발은 젖었을 것이고 그래서 발은 더 시려 났을 것이다. 하지만 시림이 극에 이르면 오히려 뜨거운 느낌을 받게 된다. 그래서 “뜨겁게 달궈진 발”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며 그 기표로부터 길을 다시 ‘은뱀’의 이미지에 겹쳐서 느낄 때 ‘은뱀’이 뜨거움에 ‘비명’을 지르는 이미지가 생긴다.
이 모든 것은 시인이 ‘봄’이라는 이미지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이다. ‘은뱀’이 뜨거움에 녹아버리면 자연히 그 ‘녹는다’는 이미지로부터 얼음과 눈이 녹아내리는 ‘봄’으로 이미지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찢어진 하늘 틈새로/ 남쪽 갔던 파랑새들 그제야 언 나뭇가지에 날아와 앉는다/ 새들 부리엔 남쪽 갔던 빗물도 곧 찾아온다는 쪽지가 물려있다”. 이는 구름 사이로 햇볕이 스며내려 나뭇가지를 비추는 정경을 말하고 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찢어진 하늘’ ‘파랑새’ 그 부리에 물린 ‘쪽지’ , 이런 비현실적인 묘사를 통해서 아직은 겨울이 남아있는 현실이 진하게 비치는 대신 봄에 대한 동경이 더 절실하게 안겨 올 수 있었다.
시인은 뜨거운 발로 ‘은뱀’을 짓밟음으로써 그 비명이 하늘을 찢게 하였고 그 찢긴 틈새로 파랑새를 불러들이는 “잔인한 방식으로/ 겨울을 쫓고 봄을 찾았다”.

일반적인 봄의 시는 따뜻하고 아늑하고 예쁘게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신문봉의 「봄」은 처절하고 극한적이고 강렬하다. 그래서 오히려 시인의 봄에 대한 갈망이 더 절실히 다가오는 것 같다.

「사물의 語法」은 위에서 해설한 시들과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른 한편의 사랑스러운 戀情(연정)의 시라 볼 수 있다.


책은 주어가 되고
오른 켠의 필은 술어가 돼

창켠을 바라보는 걸상은 명사가 되고
몰래 그를 훔쳐보는 책상, 그의 침묵은 동사가 돼

두 점이 이어지는 직선 위에
하나의 완전한 문구가 피어난다

삐걱
걸상의 시선은 책상에 돌려지고
얼굴 붉어진 책상과 걸상 사이에, 언어는 또 새롭게 피어난다

―「사물의 語法」의 전문


이 시에는 사람이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책’ ‘필’ ‘책상’ ‘걸상’ 들이 語法(어법)에 의해서 이어지고 있는데 이런 사물을 나타내는 기표들은 학교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거기에다가 시인이 학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장소가 학교의 교실이거나 도서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책상’ 너머의 여학생을 마주해서 걸상에 앉은 남학생이 있다. “책은 주어가 되고/ 오른 켠의 필은 술어가 돼” 있다는 것은 남학생이 만년필을 쥐고 책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고 “창켠을 바라보는 걸상은 명사가 되고/ 몰래 그를 훔쳐보는 책상, 그의 침묵은 동사가 돼”라는 것은 남학생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그 내용에 집중하지 않고 남학생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는”, 그래서 대답을 못 하는 여학생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그렇게 남학생이 ‘명사’인 주체가 되고 여학생이 ‘동사’가 되어 마음이 먼저 움직임으로써 “두 점이 이어지는 직선 위에/ 하나의 완전한 문구가 피어난다” ‘사랑해’라는 아름다운 문구가 소리가 나는 말이 아니라 무음의 문장이 되어 달콤한 분위기를 만든다.
그런 미묘한 분위기를 ‘삐걱’하는 걸상 소리가 깨버리는데 그 바람에 얼굴이 붉어진 여학생과 남학생은 다시 공부를 이어간다.

참 풋풋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사물의 語法」이란 제목같이 ‘주어’ ‘술어’ ‘명사’ ‘동사’ 같은 語法(어법) 기표로 그 장면의 분위기와 두 인물을 이미지 한 것은 기발한 수법이고 신선한 발상이다.


책은 컵
그 속엔 곤히 잠든 물이 담겨 있다

갑자기 뛰어든
고양이 바람에
컵은 번져진다

팔락
팔락
팔락
팔락

1쪽에서 26쪽까지의 물이 흘러나왔다

― 「번져진 책장」의 전문

 

「번져진 책장」은 한편의 풍경화 같다. 특이한 것은 두 개의 장면을 하나의 장면으로 겹쳐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하나는 책상 위에 책이 펼쳐져 있고 그 옆에 컵이 놓여있고 그 근처 어디에 고양이가 있는 그림이다. 다른 하나는 책상 위의 책을 베고 학생이 잠들어 있는 내면에 숨겨진 그림이다. 이 고요한 풍경을 고양이가 뛰어들면서 파괴해 버린다. 바람에 컵이 번져지며 물이 책에 쏟아진다. 벌떡 일어난 ‘나’는 황급히 책의 물을 털어낸다. 시인은 그 모습을 직접 그리지 않고 “팔락 팔락 팔락 팔락”이라는 소리를 나타내는 기표만 썼을 뿐이다. 이 기표로부터 독자들은 책을 흔들어 터는 이미지를 유출해내게 된다.

“1쪽에서 26쪽까지의 물이 흘러나왔다”.는 책의 26쪽이 펼쳐져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학교의 평범한 일상이 아름답게 그려지었다.


세수하던 난 섬뜩했다
물이 눈을 떴다

요란한 휘저음에
짐자는 그를 깨웠다

동그랗게 부릅뜬 눈
한참 나를 쏘아본다

“톡”

눈을 감고
다시 잠들었다

방바닥에 벌렁 누워서
드러렁 코구는 아버지

돌아누우며 엉덩이 긁적긁적

― 「거품」


이 시를 읽은 다음의 첫 느낌은 재미있다였다. 누구나 매일 하는 비늘 세수, 누가 거기에 시가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런데 신문봉 시인은 그런 일상에서 반짝하는 時感(시감)을 포착하였다.

“세수하던 난 섬뜩했다/ 물이 눈을 떴다”, 세수하려고 비누 거품을 내는데 동그랗고 투명한 거품이 생겼다. 아무 느낌 없이 보면 그저 그런 거품인데 시인은 아마 아버지의 잠을 깨울까 걱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동그란 거품이 아버지의 부릅뜬 눈 같아 보이고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요란한 휘저음에/ 잠자는 그를 깨웠다/ 동그랗게 부릅뜬 눈/ 한참 나를 쏘아본다”. 시인의 머릿속에는 이같이 잠을 설쳐 화를 내는 아버지의 모습이 잠재해 있기에 거품 방울도 자신을 “쏘아본다”고 느낀 것이다.
“‘톡’/ 눈을 감고/ 다시 잠들었다”.

이 구절에서 비누 거품이 스러지는 모습과 아버지가 다시 잠드는 모습이 겹쳐진다. 독자들도 따라서 후- 하고 한숨 놓는다.
“방바닥에 벌렁 누워서/ 드러렁 코구는 아버지/ 돌아누우며 엉덩이 긁적긁적”, 이 마지막 구절은 신의 한 수이다. 아무리 ‘동그란 거품’에서 ‘동그란 눈’ 같다는 時感(시감)을 떠올렸다고 해도 만약 잠든 아버지에 대한 묘사가 없었다면 별 의미가 없는 시가 되었을 것이다. “물이 눈을 떴다”라는 은유 속에 잠든 아버지의 이미지를 겹쳤기 때문에 시적 주인공의 심리상태가 거품을 통해서 섬세하게 그려질 수 있었다.

잔잔한 일상에서 시적 발견을 하는 시인의 재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이 신문봉 시인의 7수의 시를 분석하면서 신문봉의 시는 쉬운 시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어휘 하나 구절 하나 곰곰이 곱씹으며 음미해보는 것도 참 오래간만의 일이다.

소쉬르에 의하면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기호 속에 표상되어있는 외부 현실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오히려 자의적이고 관습적인 것이다. 신문봉 시인이 생각한 ‘나무’와 내가 이해한 ‘나무’의 이미지가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설사 시인이 기한 기표의 기의와 내가 상상한 기의가 다르다 하더라도 이해하기 바란다. 열 사람이 읽으면 열 사람이 다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시이니 내 나름대로 한 분석이 독자들의 이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변명은 이쯤하고 이제 신문봉 시인의 창작 특징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신문봉의 시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현실 비판적인 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처절하고 극한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이었다. 「숲 속의 비」 「불안의 고리」「비」「봄」 이런 시들에서는 일반적인 묘사나 서사 상상을 초월하는 강렬한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하얀 어둠이 두 눈알을 까맣게 파먹었다”

“손끝의 혈관은 살갗을 뚫고 징그러운 촉수가 되었다”

“내 목을 옥죄어 온다”

“따르릉! 구름 뒤에 숨은 반고의 목소리 터져나왔다”

“은뱀의 비명은 하늘 찢는다”


읽어만 보아도 숨이 막히고 살이 떨리는 표현들이다. 하지만 이런 표현을 했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강렬한 부정과 이러한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변혁의 절박감을 느낄 수 있었고 새로운 ‘봄’이 와야 한다는, 그것을 위해서는 ‘잔인한 방식’으로라도 봄을 찾아야 한다는, 그런 절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와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시들도 있는데 「사물의 語法」「번져진 책장」「거품」 같은 시들이다. 잔잔한 일상에서 얻은 시상을 재치있고 능란한 필치로 위트 있게 구사하고 있는데 이는 신문봉의 또 다른 재능이다.
그는 여러 가지 기표로 하나의 기의를 만들거나 하나의 기표에 여러 가지 기의를 겹쳐서 표현하는 방법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책’ ‘필’ ‘책상’ ‘걸상’을 語法(어법)으로 엮어서 사랑의 분위기를 그린다든가 ‘책’과 ‘컵’의 기의를 겹쳐서 그려낸다든가 비누 거품과 아버지의 낮잠 자는 모습을 ‘눈’이라는 기표로 겹쳐서 보여주는 이런 다양한 이미지 확장은 시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독자들의 연상을 연달아 불러일으킴으로써 예술적 향수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쉬운 시대에 쉽지 않게 시를 쓰는 신문봉 시인, 음미할수록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는 시를 써서,고루하지 않고 신선한 느낌을 주는 시를 써서, 우리 시단의 샛별이 될 것 같다.

 

엄정자 : 수필가. 평론가. 재한동포문인협회 해외이사, 본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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