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서가인

[서울=동북아신문] 어제는 무슨 일이 있어서 보전로의 카페에서 누구를 만나기로 하였다. 그곳으로 가던도중 동방로를 지나다가 낱익은 글을 발견했다. 오래전의 기억이 순식간에 주마등처럼 다가왔다.

20년 전 혈혈단신으로 상해에 왔다. 남경로  화해로 등은 동북의 자그마한 도시에서 온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저녁이 되면 도로 양옆의 네온등에서 뿜는 강열한 불빛과 각양각색의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불빛이 지나가는 사람을 현혹 시킨다. 나는 가끔 아무 생각 없이 상점 앞에 멍하니 서서 총총히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밤이 되면 엄마에게 맡겨 놓고 온 딸이 그리워져 미칠 지경이다. 그때 딸은 겨우 일곱 살이다. 길을 걷다가도 딸 비슷한 여자애를 보면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바라보군 했다. 그러다 보니 나를 미친년 혹은 어린애 유괴범으로 오해받은 일이 종종 있군 했다.
돈을 벌어야 딸을 데려올 수 있다는 일념에 모든 것을 잊고 일에 매달렸으나 고향 음식 생각은 너무 간절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혹시 조선 음식점이 있지 않을까 열심히 창밖을 살피곤 하였다.북경에서 길을 가다 보면 조선 밥점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는데 상해는 온 지가 일 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한집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조선 음식에 대한 간절한 마음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12월의 어느 하루, 찌푸둥한 날씨는 비까지 부슬부슬 오고 있었다. 이날은 프랑스의 유명한 유통 업체 까르푸와 계약을 맺는 날이다. 일찍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면 옷이 꾸겨질 것 같아서  택시를 불렀다.

택시에 편이 앉아 착잡한 생각에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았다. 문득 운룡이라고 조선 글자를 쓴 간판이 휙 하고 지나갔다. 돌아 보았을 때는 저 멀리에 있었다. 까르푸와의 계약은 어렵지 않게 체결되었다. 열흘 후부터 납품을 할 수가 있게 되였다. 까르푸를 계기로 일 년 후에 회사가 크게 발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 못 했다.
지방에 있는 공장에 전화를 하여 완성품을 부치라고 지시하고는 마음도 가벼운 김에 운룡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가 대충 짐작해서 내렸다. 

굽 높은 구두를 신은 게 불편해서 찾지 못하고 헤매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오늘은 신이 내린 날인가 보다. 그렇게 힘들다던 까르푸 계약도 한 시간 내에 체결하였는데 오매에도 찾던 조선 음식점도 바로  눈앞에 있었다.
상해의 날씨는 변덕이 많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찌부둥헀던 날씨는 언제 그랬던가 쉽게 둥둥 뜬 흰 구름 사이로 따뜻한 햇살이 내리비친다.

식당은 동방로와 보전로 교차로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동방로와 보전로의 양쪽 두 곳에 간판이 걸려 있었다. 동방로 쪽의 간판은 그 밑에 잡지와 신문을 파는 하우스가 있어서 지나치기가 쉽다. 유리 문을 열고 들어서니 식당 안이 한눈에 안겨 왔다. 상이 여섯 개쯤 될까 보였는데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때는 오후 네시 좌우이니 손님이 없을 만도 했다.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이 대문과 대문 양옆의 창문으로 흘러 들어와 식당 구석구석을 골고루 비쳐 주고 있었다.
"니 호우" 딱딱한 중국어가 들리며 안쪽에서 50대의 중후한 남자가 다가왔다. 조선족으로 느껴졌다. 
갑자기 눈에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오랜만에 만난 오라버니처럼 반가웠다. 해를 등지고 서있었기에 가게 주인은 내 얼굴의 변화를 읽지 못했다.

“냉면 한 그릇 될까요."나는 조심스레 조선어로 물었다.”그럼요” 주인은 약간 놀란듯하더니 금세 표준적인 미소를 짓는다. 냉면 한 그릇에 25원이다. 그때는 누구나 사 먹는 가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격보다 그때의 맛을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 조선족을 볼수없는 상해에서 모국어를 하는 사람이 들어 왔으니 좀더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나 제나름으로 생각해 보았다. 한그릇의 냉면이 나에게는 낯설고 물설은 상해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 준것 같았다.
그 후 우후죽순처럼 일어선 조선 밥집에 수없이 갔지만 맛은 거기서 거기였다. 오직 운룡의 맛은 여전했다.

운룡의 간판 글씨는 그때 그대로 변함이 없다. 동방로 쪽으로 인도에 세워져 있던  하우스는 없어졌다. 원래는 벽에 창문이 있었는데 그동안은 하우스에 가려져 있었다. 창문으로 가게 안이 환이 들여다 보였다. 한 가지 음식만 고집하면서 몇십 년을 견지한다는 게 보통 쉬운 일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그때 그중 후한 남자는 아직 있을까...... 궁금해졌다.

내일은 가족들과 같이 식사하려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서가인 /서울 상해 거주/ 재한 동포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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