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련 칼럼니스트

정련 약력: 흑룡강성 상지시 조선족중학교. 2002년 흑룡강성 문과 수석. 북경대학 경제학원 국제경제무역학과 02학번, 학부 졸업. 동북아신문 칼럼니스트. [업무경력] 2006년 9월~2010년 9월 우리에프앤아이(우리금융그룹 자회사, 현재 대신에프앤아이), 투자팀. 2010년 10월 ~ 2014년 6월 동양증권(현재 유안타증권) IB부문 기업금융업무. 2014년 6월 ~ 현재 유안타증권 기획팀, 비서팀 팀장.

[서울=동북아신문]]첫째 딸 사윤이가 유관순, 안중근 같은 영웅이 없었다면, 우리는 독립할 수 없었고 일본의 노예로 살고 있겠지? 하고 질문한다. “독립”은 한반도의 독립, 한민족이 살고 있는 나라의 독립 만을 뜻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독립하지 못했다면, 한민족은 언어도 문화도 그 정체성도 사라졌을까.

민족의 정체성은 영토와 국가를 전제로 하는가.

중국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하여, 정서적으로 미숙한 학생 시절에 많이 이야기했다고 생각했다. 그 핵심은 중국인 vs 조선족을 늘 벗어나지 못하였고, 무엇으로 사는 것이 유리한지 라는 실용적인 생각에 미치지도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의 정체성이 아니라, 내가 소속되어 있는 민족 또는 국가에 대한 정체성 인식의 가장 큰 배경은 공동체 의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가치관의 교육을 받으며 어떤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지가 지극히 물리적인 공동체의 개념이라면, 과거와 미래를 어떻게 인지하고 세대에 이은 비전을 어떻게 설정하며 “무엇”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의미가 보다 범주가 넓은 공동체 의식이 아닐까 싶다.

학생시절 “정체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나는, 중국인은 어떤 사람들이고 세계 “한(韓)”민족이 표방하는 문화의 중심인 한국은 어떤 동네인 지에 대하여, 어떤 비전을 가지고 어떻게 사는 사람들인 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다. 단지, 지금 우리가 “소속”을 중국, 한국 어느 쪽으로 생각해야 할까 라는 어설픈 생각에 그치지 않았나 싶다.

다시 돌아와서, 민족의 정체성은 영토와 국가를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인가.

길지 않은 10수년간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한국의 가치관과, 한국의 헌법, 그리고 한국의 예산 편성과 사용, 독려하는 미래의 모습 등을 바라볼 때, 한국이 이야기하는 정체성과 비전은 지극히 “한국”이라는 국가적 개념에 국한된 것이고 “한(韓)”민족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다시 돌아와 지극히 단순한 중국인 vs 조선족에 있어서, 조선족이라는 쪽을 한국이라는 국가적 정체성으로 귀속하거나 유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 민족의 미래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민족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고 그들의 잣대와 혐오와 비판에 그리 연연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다.

“나”라는 정체성의 바탕은 가치관과 철학이여야 할 것이다.

공동체라는 것이, 나와 같은 속성을 가진 사람이 굶주려 있을 때 밥 한 그릇 나누어 줄 수 있는 마음의 연결고리가 아니라, 사기치기 쉬운 대화가 잘 되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는 더이상 공동체라는 이름을 표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런 선택을 했다면, 이라는 가정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고 그때의 그 선택에 의하여 살아온 시간들 또한 무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생인 내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면, 순수 수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여 “생산성”이나 “경제가치”와 아무 관계 없는 계산에 매달렸을 것 같다.

2018년 세계 대표 과학지인 네이처에서 전세계 국가 중 새로운 연구 논문 발표의 양으로 미국에 이어 중국이 2위이고, 그 품질은 미국을 넘어섰다고 했다. 개별 연구기관의 논문의 양과 질로 볼 때 중국과학연구원이 하버드를 뛰어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만약 수학을 선택했을 나”였다면, 2002년 당시에는 중국과학원이 아닌 나사에 가서 연구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과학의 영역에서 사람들은 인도도 중국도 무시하지 않고, 미국에 대한 애정 여부와 관계 없이 나사를 동경한다. 내가 금융인으로서, 통역사로서, 변호사로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조선족”이 나의 승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지언정, 나의 일에 그 어떤 기준도 정체성도 주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북경대학은 나의 정체성이 아니라, 북경대학에서의 생활과 생각, 관계설정과 자료 수집, 논리 구성의 습관 등이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나와 같은 속성을 가졌다고 하여 더 믿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믿고 의심하는 것이 현실의 내가 일에 생활에 노력해야 할 유일한 카테고리이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나태하게 대하지 않는다.

단일민족국가지만, 다른 곳에 살고 있는 동일 “민족”이 있다면, 국가의 정체성과 “민족”의 정체성에 대하여 엄격한 구분은 짓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비전”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정도의 고민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런 특정한 “민족성”을 가지고 그 “국가성”에 귀속되지 않기로 했다. 어떤 전문분야에서의 나는 그 분야의 나로 의미 있고, 아무 것도 아닌 것에만 “정체성”에 의한 평가를 받는다면, 아무럼 어떨까.

나는 중국조선족으로 한국에서 살기로 했다. 그런 바탕에는 오롯이 가치관 적이고 오롯이 철학적인 것들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철학이라는 두루뭉술해 보이는 것을 나는 꽤나 선호한다. 철학은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주고 비전을 양산한다. 한국의 헌법에서는 경제성장을 위한 과학연구에 대하여 정의하고 있고, 중국은 실용 과학과 실용적이지 않더라도 순수 탐구를 위한 과학을 의도적으로 비중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나사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그리고 알지 못한 것을 위한 탐구를 그 목적으로 두고 있다고 썼다. 이는 구체적인 차이를 양산한다. 한국처럼 생산성에 연관되지 않은 교수들의 연구비로 쉽게 예산이 배정되지 않는 것, 이에 반에 중국같은 경우 해외에서 과학자들을 유입하여 거액의 상금을 순수과학 성과에 부여하면서 미래를 위한 과학을 연구하는 긴 호흡과 인내심을 만드는 것 정도의 현격한 차이를 만든다. 비전이 표방하는 바가 의도적이고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다음 세대를 위한 과학을 할 시간과 호흡을 허용할 것 인지, 라는 어마어마한 현실적인 차이를 만든다.

어릴 적 우리 엄마는 정말 엄하고 무서운 엄마였다. 후배 워킹맘들에게 내가 늘 하던 이야기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엄마였고 엄마는 언니를 숙녀로 키우기 위하여 무섭고 엄하게 가르쳤지만, 언니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 성향은 숨김없이 타고난 그 아이로 돌아갔다. 부모는 아이를 “정의”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교육관이다. 다만, 최근에 언니를 만나 각자 일에서 겪고 있는 현황을 이야기하면서 참 묘한 것을 느꼈다.

나도 두 딸아이를 키우지만 성향이 정말 많이 다르다. 나랑 언니 또한 그렇게 다르다. 나는 시 계열로 계획을 하지는 않지만,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먼저 해 놓고 “딴 짓”을 마음껏 하는 편이나, 언니는 해야 할 일을 닥치는 대로 마구 이겨내는 편이다. 나는 언니는 “천재”고 나는 “노력형”이라고 늘 이야기한다. 내가 사는 기숙사나 집은 내가 필요한 것이1초 내에 지정된 자리에서 찾아져야 하고 옷은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하며 먼지와 이불 등은 주기적으로 청소 되어야 했지만, 언니는 역시나 없으면 말고, 아니면 말고 주의다. 지금 우리 집 두 꼬마를 보면 비슷한 느낌이다. 어쩌면 같은 부모가 같은 애정과 가정 환경 속에서 낳아서 키웠는데 달라도 이리 다를까.

하지만 최근에 언니를 만나 이야기하면서 참말로 묘한 것을 느꼈다.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고 “일”을 대하며 “어려움”을 대할 때의 태도가 묘하게도 똑같다. 우리는 중장기적인 계획과 목표가 있고, 이를 위해서는 단기적인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넘길 줄 안다. 우리는 이익이 되는 것, 고마운 것 등 1차원적인 이로운 것들을 잘 알아보지만, 인간적인 나의 근본을 지키기 위하여 흔쾌히 나쁜 역할도 하고 이익을 포기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가끔은 이게 잘 하는 것인지 헷갈릴 때에도 쓸데 없는 생각들을 자르고 무식하게 밀고 나간다. 우리는 손해보는 것에 쿨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며 가끔 지나치게 고지식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생각해보면, 우리 부모님이 그렇다.
부모가 아이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점은 가치관과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 웃고 인사하고 누구에게 친절하고 누구에게 화를 내며, 일상적인 사소한 계산과 판단을 어떻게 하고 어떤 것을 행복과 즐거움으로 느끼는지, 이런 것들을 몸으로 보여주고 아이들은 몸으로 배운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을 나만 하지 않을 때, 남들이 다 갖고 있는 것을 나는 갖고 있지 않을 때, 나와 다른 생각을 할 때, 나는 관심이 없지만 나의 집, 차, 가족을 가지고 꼬치꼬치 캐물을 때,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부모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욕심과 배려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게 된다. 나는 나로서 그리고 부모로서 이런 시선과 이런 생각에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사윤이는 중국인은 똑똑하고 친절하고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스스로 똑똑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영향이 절대적이다. 물론 이미 엄마가 중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특정 선생님의 차별을 경험해 봤으나, 사윤이는 저런 생각은 옳지 않은 것 같지만, 자기가 실수 한 것 때문에 혼나는 사실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인들의 여러가지 모습과 주변사람들의 평가, 조선족에 대한 한국에서의 혐오적인 시선 등에 점점 더 많이 노출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홀로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에 있어서, 이런 것 따위가 정말 나를 힘들게 하는 중요한 일들인가.

“나”를 의도적으로 싫어하는 것들에 대한 태도와 마음에 어떻게 응대할 것인지는 고민과 연습이 필요한 부분임에 틀림 없다. 사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굳이 우리가 한국에서 중국인 또는 조선족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하기에는 유일한 중요한 포인트라고 전혀 할 수 없을 것 같다. 최소한 그런 것을 이유 또는 핑계로 좋은 것을 인식하고 좋아할 수 있는 눈과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한 철학은 책과 사람에 대한 공감 등으로 다져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중국인, 조선족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악플도 괜찮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무플보다 악플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관종이 아니고 무관심 속의 평화 또한 나에게 아주 소중한 가치다.

“조선족”인 나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요즘처럼 핫한 시기에 더운 위험한 이야기겠지만, 나는 82년생 김지영을 동정하지도 공감하지도 않는다. 정체성을 운운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나와 같은 카테고리(민족, 국적, 성별, 나이, 학벌 등)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좋은 것을 좋다고 인정 받고 나쁘다고 하는 것을 이겨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른 말로, 나와 같은 카테고리를 가진 사람들의 행동 때문에 내가 비난 받는다면, 이는 변명해야 할 바가 아니라 이겨내야 할 바라고 생각한다. 아직 많은 한국의 여자사람이 회사를 그만둘 마음을 수시로 가지고 직장을 다니고 있다는 점 때문에 여자 직장인에게 중요한 업무를 맡기기 꺼려하는 것은, 수많은 선입견이 잘못되었다고 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고, 까막득히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기꺼이 “조선족” 토막살인사건이라고 이름 붙여서 이야기하는 사건 때문에 누군가가 나 또한 무서워했다면 이런 현실의 색안경은 마치 미세먼지처럼, 서서히 줄여가는 노력을 할지 언정, 인정하고 이겨내는 노력 또한 나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앞뒤 안 가린 무조건적인 혐오 발언과 악플을 정당화하거나 인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어설픈 말장난과 의도적인 “악의”에 에너지를 쏟기 보다는, 그런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잘 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더 노력할 것이고 “공정”하지 못한 현실 속에서 나의 전문성을 위한 방향으로 적당히 눈과 귀를 막는 쪽을 선택하고 싶다.

한국에서 생활하는 시간 동안, 나는 늘 조선족이었고 늘 여자였으며 심지어 애기 엄마였고 며느리였다. 결코 나에게 친화적인 동네가 아니었고 수월한 커리어도 아니었으며 엄마와 며느리로서 더더욱 철학과 노력이 필요한 동네였다. 그리고 “나”를 잘 모르는 그들은 여전히 수많은 이유로 혐오하고 있다. 나를 중심으로 하는 이 길지 않고 작은 시트콤 속에서 각자의 시트콤의 주인공으로 살기 바쁜 “그들”은 얼마만큼 열심히 나를 미워할 수 있을까.

내 아이에게, 나 스스로에게 “사람들이 너를 싫어해도 괜찮아”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렇게 말할 수도 없다. 안 괜찮으니까. 하지만, “모든 사람이 너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당연히 이야기 한다. 그리고, 최소한 “아까운 시간과 감정을 누군가를 싫어하는데 쓰지 않는 것이 좋아”라고도 이야기 한다. 누군가를 이유없이 혐오하지 않고, 누군가 나에게 하면 내가 아플 만한 말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
어쨋든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한국에서 이렇게 중국인, 그리고 조선족으로 살아가기로 한다.

중국이라는 중국조선족의 또 하나의 정체성이 있다.
중국조선족의 또 하나의 정체성이 있다면 국적과 여권을 준 국가라는 정체성이다. “조국”이 뜻하는 바가 점점 많아지는 요즘이지만, “국가”라는 헌법 적이고 국방 적인 존재는 또 하나의 컬처와 공동체를 만든다.

“지정 생존자”라는 미국드라마를 보면서, 미국이라는 철학을 이상적으로 표현하면 저런 것이구나 새삼 느끼면서 미국이라는 국가적 색깔에 동경을 가지는 점을 몇개 발견했다.

트럼프가 부각되면서 유난히 이민을 배척하는 나라이다고 미국이 보여지지만, 미국은 오롯이 이민의 나라이고, 또 오롯이 이민의 나라를 유지해 왔다. 그래서 이민이 더 무서울 수 있는 것 또한 그들이다. 말이 이상하게 꼬이는 것 같지만, 한국처럼 한국인, 외국인, 귀화 한국인으로 규정짓고, 정확한 주소와 가족관계 등을 공기관에 오롯이 등록하고 사는 나라에, 외국인이 여러 명 들어온다면 아주 부각될 것이고 이들이 범죄를 저지를 기회, 즉 치안에 악영향을 끼칠 기회 또한 크지 않을 것이다. 다만 미국은 이민의 나라를 오롯이 지켜오면서 사람들의 주민번호나 가족관계증명서나 주소 등으로 그들을 구속하지 않았다. 옆집에 누가 이사오면 어느 나라의 뭐 하는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과거의 이민들은 즉 “옆집같은 우리집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미국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미국인의 주소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기관은 대체적으로 우체국 뿐이라고 한다. 스스로 우편물을 받기 위하여 우체국에 주소를 변경신청 하는 것 외에 대부분의 법에서는 그 어디에도 주소를 등록하고 관리를 받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미국은 자기 국민이 공격을 당할 때 무력으로 공격할 준비를 항상 한다. 또한 이민의 국가임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강한 유대 관계이고 그들의 정체성의 근본이다. 내 나라 사람이 공격 받고 있을 때 보호하지 않는 것은 국가로서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바탕을, 긴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어차피 나에게 어떻게 하더라도 뿌리를 버리지 못하고 죽어서도 돌아와서 묻혀야 하는 다른 동네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 일 수밖에 없다.

이민으로 가득 차 서로의 우열을 가리며 차별을 일삼는 미국이지만, 정서적으로 평등과 존중을 의도적인 철학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그리고 이는 꽤 오래 전부터의 뿌리 깊은 이야기이다. 한동안 후배들이 아이를 낳으면 “앵무새 죽이기”라는 하퍼리의 소설을 선물하군 했다. 7살(오래 되어서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초등학생이다) 아이의 시각으로 일상을 서술하는 이야기인데, 아빠가 백인 변호사이고,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자로 내몰린 사람을 변호하는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그 아빠는, 미국인들이 멀지만 철학으로 가지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을 아이들에게 순수하고 쉽게 보여주면서 이야기한다. 자신의 가치관을 가르침이 아니라 스스로 겪으면서 아이들을 이해시키고 마음을 나눈다.

이렇듯 민족을 뛰어 넘는, 또는 민족과는 아주 다른 또 다른 정체성을 만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들은 뒤쳐지지 않고 그들은 안주하지 않고 그들 또한 비전을 만들고 미래지향 적으로 살아간다.

요즘은 순수 과학을 연구하고 싶거나, 천문학을 연구하고 싶거나 하는 똑똑한 과학도들은 중국으로 가라고 한다.

중국의 “시장”을 노리고 중국으로 몰려 들어가는 사람들을 봐온 것은 오늘내일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들은 중국의 “돈”을 바라보는 사람과 중국의 “컬처”를 바라보고 뿌리를 내리는 사람과 엄연히 갈린다. 이런 점에서는 오히려 가까운 일본이나 한국보다는 전혀 철학과 뿌리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유럽이나 미주의 사람들의 생각이 좀 더 지갑을 여는 사람들에게 친화적이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요즘은 미래를 바라보기 위한 소프트웨어의 텃밭으로, 그리고 더 먼 미래를 바라보기 위한 과학의 텃밭으로 중국을 바라보라고 한다.

큰 생각과 긴 호흡은, 먹고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언제 꿈을 이루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꿈으로 가지고 어디서 어떻게 이루느냐의 문제에 더 가깝고, 원하는 것에 멀고 먼 꿈이라도 꿔도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람들이 나에게 중국 국적을 유지하는 이유는 나중에 아이들과 함께 중국에 돌아가기 위한 계획이 있어서인지 물어본다. 나는 어디서든지 내가 그리고 아이들이 원하는 일이 있다면 살 수 있다. 한국도 중국도 아니어도. 다만, 조선족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뭔가를 하고 싶은 만큼, 중국인으로서 도약하는 중국,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깊은 역사와 철학으로 나를 공감하게 한 그 국가 또한 더 나은 미래를 가질 수 있도록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하고 싶다. 정체성이란 이런 것 같다. 여러 내가 가지고 있는 카테고리 중에서 유난히 정이 가고 유난히 책임감이 생기고 함께 자랑스럽고 함께 수치스러운 그런 것.

정체성을 고민하는 이유가, 애정을 가진 그 무엇과 함께 발전하는 꿈과 비전과 길을 만들어가는 데 있었으면 좋겠고, 나의 세대에 그치지 않고 나의 다음 세대 그리고 또 다음 세대에 이어 함께 만들어가고 싶은 그 무엇에 인내심을 가지기 위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현실을 살기 위한 그리고 나에게 편한 방식으로 생각하기 위한, 소속에서 오는 많은 것을 위한 그런 고민은, 함부로 “정체성”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쓰지 않기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 위험한 요즘의 생각은, 사람 하나하나의 생각이 모여서 컬처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 수많은 이벤트와 사람,정서와 기억들로 만들어진 컬처가, 당장 삶이 나아지는데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역으로 하나하나의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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