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련

정련 약력: 흑룡강성 상지시 조선족중학교. 2002년 흑룡강성 문과 수석. 북경대학 경제학원 국제경제무역학과 02학번, 학부 졸업. 동북아신문 칼럼니스트. [업무경력] 2006년 9월~2010년 9월 우리에프앤아이(우리금융그룹 자회사, 현재 대신에프앤아이), 투자팀. 2010년 10월 ~ 2014년 6월 동양증권(현재 유안타증권) IB부문 기업금융업무. 2014년 6월 ~ 현재 유안타증권 기획팀, 비서팀 팀장

[서울=동북아신문]나는 이번 학기에 정말 좋은 교수님들을 만나서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강의가 재미 있고 유익해서, 집중도 잘 했고 토론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 “이 판례와 관련하여 이런 점을 생각해 보셨나요?“라고 하시는 질문에, 늘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성의 있게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 나는 과학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어서, 틈만 나면 양자물리, 상대성이론, 끈이론 이런 책들을 읽고 방송을 듣는다. 책이 어려우면, 노트북으로 검색하여 나만의 그 책을 읽기 위한 단어장을 만들고, 늘 그 외의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없었는지 의심하고 찾아보고 한다.

문뜩, 당연히 다른 입장과 다른 Case에 대하여 생각해보지 않으며 수업을 들은 나는 “경청”도 아니었고 성의 있게 수업 한 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들에게 성의 있게 수업에 참여하는 자세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순수한 그들의 대화다.
사윤(언니, 3학년): 등을 펴고 다리를 꼬지 말고 반듯한 자세로, 미리 수업 준비를 하고 선생님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친구가 툭툭 치고 딴 짓을 시켜도 한눈 팔지 않는… 아주 길게 이야기 한다.

엄마: 이 와중에서 엄마가 궁금한 거 하나만 물어봐도 돼?
엄마: 너는 그렇게 하니?
사윤: 아니.
사율(동생, 어린이집): 우리는 그렇지 않아, 우리는 선생님께서 먼저 설명을 하시고, 준비물 챙기라고 말씀 하셔야 빨리 가서 준비물을 챙겨.
엄마: 친구들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준비물 바로 챙겨?
사율: 아니, 안 그러는 친구들 많아. 나는 집중해서 듣고 바로 챙겨.

기존에 내가 생각하던 성의 있는 자세는 딱 이 정도였다.
하지만, 들으면서 이해하는 것에 더불어, 의문을 품고 그렇지 않을 경우 또는 그렇게 됐을 때 옳지 않게 될 경우들을 제기하고 함께 탐색해 가는 것이 진정 궁금함을 해소하고 지식을 습득하게 하는 “성의 있는” 공부의 자세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미리 관련 자료와 논문을 읽고 수업에 임하지는 못하더라도, 필요한 책과 자료 등을 준비하여 수업에 “성의 있게” 몰입 해야겠다는 생각은 한다.

나도 정말 수다가 많은 여자지만, 여자의 수다가 원하는 바는 들어주는 것과 공감해 주는 것이다. 그것이 “듣는” 것에 대한 성의다. 물론, 나의 머리 속에는 들은 것들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들이 끊임 없이 솟아 나와 말을 하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잘 듣고 공감하고, 흐름 속에서 솟아 나온 머리 속의 일부를 털어 놓으면, 참사가 벌어진다. 두 여자의 수다는 저녁에 시작해서 동이 터야 끝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경험을 해봤다.

나도 사람인지라, 모든 부류의 이야기에 “성의 있게” 경청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다. “수다”에는 어떤 부류의 에너지가 흐르고, 그런 에너지를 느끼고 공유하고 서로 주고 받으면서, 말을 하고 듣는 아무 것도 아닌 그런 것들로부터 치유를 느낀다. 굳이 나마저 “나쁜(내 기준에서)” 에너지에 시달리고 싶지는 않다.

성의 없게 듣는 사람의 대표적인 예가 대부분 남편일 것이다. 마누라가 한 얘기를 또 하는 “잔소리”쟁이가 되는 이유는 한 얘기를 늘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님이 연세가 지극하시지만 참 곱고 현명하신 여인이신데, 말씀을 은근히 독하게 하신다. 여느 어르신들 처럼. 처음 몇 년 조용히 살펴 봤는데, “엄마는 또 쓸데 없는 소리 하고 그래…”라는 무심한 무시들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 같다. 엄마는 아흔이 다 되셔도 파마를 하시고 속옷을 손빨래 하실 만큼, 여자인데, 아들들은 “엄마는 괜찮아”하고 잘 못 알고 있다. 남편을 꼬드겨서, “엄마 머리 했네, 예쁘네… “라는 이야기를 몇 번 시켰는데, 세상 고운 표정으로 행복해 하신다. 경청은 사람을 천사로 만들고, 무시는 사람을 관심 받고 싶게 한다. 다행인 건, 그래도 여자고 그래도 사랑 받아야 하는 사람임을 내가 수다와 잔소리로 풀 때, 우리 남편은 경청한다. 그 경청에 대한 믿음은, 3년 뒤 어느 날, 내가 전에 무심코 했던 말을 기억하고 하는 행동때문에 생겼고, 그런 경우는 흔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 또한 우리 관계에 굉장히 긍정적인 요소다.

나는 요즘 내가 예전에는 공격적이고 급진적인 성향이었으나 지금은 상당히 유해졌다고 늘 이야기 한다. 물론, 친구들의 태클은 늘 있는 일이지만, 유한 나는 이해한다. 그럼에도 내가 원칙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가 회의 석상일지라도 나오게 된다면, 나는 정말 침착하고 차분하게 낮은 톤으로 천천히 말을 끝맺는다. 어설프게 흥분하다가, 누군가가 “잠시만요, 제 말 끝까지 들어보세요!” 라고 하면 바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러려고 노력한다.
 “센 언니”들이 다 모였다고 소문난 조직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나는 거기에서 참 유하고 중재도 가능한 성향임을 느끼며 그 실체를 공감했지만, “센 언니”와 “못된 언니”의 차이를 너무 명확하게 보게 되었다.
 “시조새”라고 불릴 정도의 불같은 성격의 센 언니 앞에서, “그런데요, “하면서 끝까지 소신 있게 이야기 하는 아이를 봤고,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그럴 수 있네. “라고 하는 사람을 봤다.

경청이란, 수긍이 아니라, 나를 불편하게 하고 흥분한 나를 더 흥분하게 만들지 언정, 뭘 말하는 지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고, 나의 지난 흥분한 1분을 차분하게 만드는 자세다. 그게 “성의”를 다 하는 동료의 자세이고, 대부분 동료가 그렇지 못하더라도, 나만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떤 동료가 나에게 “막말”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라고, 느낀다.
 성의 있는 자세가 동료를 만들고 조직을 만든다.

성의 있는 가족, 그 것으로 행복한 가족이다. “가족”이라는 것에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우리”라는 것으로 단순화하는 것을 싫어하는 나지만, 공통적인 “가족”이라는 개념에서 많은 공감과 애정과 보호와 헌신의 “기대”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어쩌면 건강하지 못한 의무적인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관계로 “우리”가 부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7살 아들, 4살 딸이 있는 후배(여자사람, 잘나가는 여자사람)를 만났는데, 늘 바쁘기에 좋은 엄마라고 자신하지는 않지만, 틈만 나면 아이들과 놀고 시간을 보내는 엄마가 되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가끔, 진정 내가 원하는게 뭔지 헷갈리고 심지어 엄마로서 노력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진정 아이들에게 도움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든다고 한다.
 원하는 것이 뭔지, 잘하는 것인지, 그런 것을 알고 싶은 그건 욕심이야, 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4살, 7살 아이의 “워킹맘”에게는 자아가 있을 수 없어. 그리고 그래서 나도 첫째가 초등학교 적응한 3학년, 둘째가 거의 인간이 된 7살이 되서야, 그렇게 하고 싶은 대학원을 시작했어“라고 했다. 그러니까, 둘째가 학교 갈 때 쯤, 정말 니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미리 잘 생각해 뒀다가 그때 하라고.

그리고 그냥, 너나 나같은 여자를 기로 말로 이길 수 있는 아이라면, 우리가 뭘 하든 안하든 그 아이는 정말 세상 다 이기면서 잘 살 거야, 그러면 됬지. 라고 했다.

나는 좋은 엄마인 적 없다. 뱃속에 아기가 있을 때에도 거의 매일 야근을 했고, 아이를 낳고 90일(법정 출산휴가일)까지 쉬고 바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다시 야근을 시작했고, 남편이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가고 먹이고 씻기고 재웠다. 아이가 뭘 알고 뭘 모르고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어떤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지 순간순간 정신줄을 놓지 않고 관심을 가졌고, 아이와 같은 지능과 감정으로 같이 놀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으로서 서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고 해줘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육아휴직도 다 쓰고 일 하다가도 뛰쳐나가면서 직장에서 차별과 무시를 이겨내는 후배가 엄마랑 떨어져 있는 아이가 너무 불쌍하고 안쓰럽다고 울어서, 내가 그랬다. 24시간 숨도 안 쉬고 아이를 위해 살아도, 안 미안한 엄마는 없는 거라고. 어디까지가 좋은 엄마이고 어디까지가 최선을 다 한 엄마일까. 세상에 그런 엄마가 있기는 한 걸까.

가족으로서 성의를 다 하는 것은 어디까지 인가라는 것을 고민할 때 남편이 나에게 멋진 답을 줬다. 내가 야근 끝나고 아이들을 챙기며 사법고시 공부를 눈을 뜯으며 하고 있을 때, 남편이 “아이들이 울고 문을 박박 긁어도 나오지 말고 공부해, 내가 알아서 할께“라고 한다. 결혼했다고 해서, 예전보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하며 살게 하지 않을 꺼야 라고 약속한 남편이고, 아기 두 명에게 책을 읽어주고 놀아주고 온 시간을 함께 하며 나를 응원했다.

내가 뭘 하고 싶어하는지를 한번 고민 해주는 가족이기에, 결혼 만 10년이지났지만 여전히 나의 가장 예쁘고 밝은 모습만 모아서 보여주는 노력을 하고 있고 세 부녀가 함께 하루 생활의 흔적을 집 구석구석 빠짐 없이 흘리고 다녀도 매일 치우고 씻고 닦고 빨래하고 해 줄만 하다. 성의 있는 가족은, 내 가족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를 그냥 알고 그냥 알아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많은 가족들이 이런 점을 다 놓치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고 내가 뭘 원하는지를 왜 몰라, 라고 바라고만 있지 않을까 라는 사소한 우려도 해보지만, 좋은 친구를 만나고 싶으면 내가 좋은 친구가 되야 한다는 것 정도는 다 알 것이다. 가족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여야 하고, 우리는 친구에게 내가 입이 터졌는데 입에 쌈을 넣으려고 한다고 화내지 않는다.

 “성의” 표시로 뇌물을 요구하고 원샷을 강요하는 이야기를 하면 옛날 사람으로 몰릴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악용할 수 있을 만큼, 정말 진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좋았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해주고 내가 느끼는 싫은 것은 다른 누구에게 하지 않는 일상적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놓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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