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빈

‘어,진짜 나왔네? 여기!흐흐’
공항을 빠져나오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갑자기 반색을 했다.소장의 눈길이 닿는 곳에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늘씬한 아가씨 한명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오라면서?’
남자를 발견한 여자가 웃으며 눈을 흘겼다.
‘진짜 나올줄 몰랐지.’
남자의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갔다.
‘그럼 바로 호텔로 가?’
‘어,지금 7시 좀 지났으니까 아직 퇴근 안하셨을겁니다.늦었지만 잠깐이라도 먼저 회사식구들한테 얼굴 도장 찍는게 어떻겠습니까?.’
소장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내 의견을 물어왔다.
‘그렇게 합시다.’

하띤시로 가는 길 양옆에는 끝간데 없이 푸른 벌판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풀뜯는 소들만 간간이 보일뿐 인가나 사람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안 그래도 차멀미가 심한 나는 코를 찌르는 소똥냄새와  숨이 턱턱 막히는 습한 날씨때문에 당장이라도 토할것만 같았다.
‘근데 미스 리가 김과장님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네요.별건 아니구 그저 그렇다구요.’
조수석에 앉은 소장이 뒤쪽으로 몸을 틀더니 뜬금없이 한마디 하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네..’
(나 원,딴에는 대단한 칭찬인줄 아나부지?)

소장이 얘기한 김과장은 직접 구인광고를 낸 같은 고향출신의 아주머니이다.빈에서 출발하기전 하띤시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세면도구와 슬리퍼 같은 일상용품들을 미리 사두라고 일러준 사람이기도 하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하띤성은 베트남에서도 빈곤지역으로 손꼽히는 오지중의 오지였다.
‘그래도 김과장님이 계셔서 미스 리한테는 많이 의지가 될겁니다.’
‘네.’

사실 내가 여기 오기로 결심한데 그녀도 한몫했다.아는 사람 한명 없는 외국에서 같은 고향 출신의 사람이 가까이에 있다는것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별다를 대화를 하지 않았다.식곤증때문인지 자꾸만 눈이 스르르 감겼다.
‘자, 다 왔습니다.내리시죠.”

나는 그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장시간의 려정이 고되긴 고됐나 보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곳은 동남아에서 제일 큰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포모사(台塑)의 인프라 건설현장이다.내가 소속될 곳은 포모사의 제1하청업체인 한국의 포스코건설,하지만 명성에 비해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상황은 심히 당황스러웠다.이른바 사무실이란 곳은 컨테이너 여러개를 붙여서 만든 림시공간이였고 사람이 거주할수 있는 숙소 같은것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분명 공고에 ‘숙식제공’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된거지?)
나는 피여오르는 의문을 잠시 뒤로한채 잠자코 이 사람들이 하는대로 따르기로 했다.

실내는 그래도 에어컨 덕에 시원하기는 했다.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책상라인의 맨 끝에 한무리의 사람들이 서있는것이 보였다.직감적으로  앞으로 내가 함께 일하게 될 사람들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자,인사 드리세요.여긴 전에 말씀드렸던 미스 리 입니다.’
무리들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소장이 나한테 한사람씩 순서대로 소개시켜주었다.
‘안녕하세요.’
‘이분은 김차장님이십니다.미스 리가 앞으로 주로 담당할 분이십니다.’
‘어서와.’
김차장은 50대 중반쯤 돼보이는 중년의 남성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첫판부터 반말이냐?기분 나쁘게)
김차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한테 반말로 일관했다.
‘그리고 이분은 손차장님,아 손차장님은 가끔씩만 도와드리면 됩니다.’
‘안녕하십니꺼? 예,저는 괘안심니더.주로 김차장님만 통역해드리면 됩니다.’
손차장이 손을 내밀었다.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중년남자였다.사투리가 갖고있는 선입견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딱딱하게 느껴졌다.김차장 손차장 모두 키가 180센치는 넘어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들이였다.
‘그리고 이분은 김과장님,아까 통화하셨죠?’
‘네,안녕하세요.’
‘어서와요.’
여자는 10년지기 친구를 만난듯 생글생글 웃었다.150이 될까말까한 비쩍 마른 몸의 중년여성이였다.
‘자,그리고 여기는 김대리님,본사직원이세요.잠간 파견 나왔는데 미스 리랑 같은 교포세요.’
‘안녕하세요.’
‘힘드실텐데…’
남자가 악수를 청했다.
‘어우,이 사람은 예쁜 아가씨가 왔는데 할말이 그게 다야?’
김과장은 남자를 밀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럼 잘해보자구,미스 리 앞으로 잘 부탁해.’
김차장이 작별인사조로 손을 내밀었다.
‘네,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짧은 신고식을 마치고 나는 소장을 따라 사무실에서 나왔다.
‘먼저 숙소부터 봅시다.한번 보시고 숙소에 묵을지 호텔에 묵을지 결정합시다.’
숙소로 가는 차창밖으로 나는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당분간 내가 살게 될 곳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밤이여서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하틴의 도시풍경은 야자수 사이사이로 주택으로 보이는 나무집들과 열대과일같은 것들을 파는 잡화점들이 무질서하게 교차돼 있어 얼핏 보기에도 어수선한 분위기를 풍겼다.내가 상상했던 열대원시자연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  30분쯤  달렸을까?우리가 탄 차는 마당이 딸린 한 단독주택 앞에 멈춰섰다.
‘한번 둘러보세요.후옌이 안내해줘요.’
나는 공항에 마중나왔던 여자애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주방에서는 열댓명쯤 되는 베트남 직원들이 한창 저녁식사중이였다.후옌이라는 통역여자애를 빼면 여자는 밥해주는 아주머니가 전부였다.

후옌을 따라 숙소를 한바퀴 둘러본 나는 하마터면 기함할뻔 했다.
나중에 알게 된거지만 현장근처의 규모가 작은 하청업체들의 숙소는 대부분 이런식이였다.채용공고에서 말한 이른바 ‘별장식숙소’의 실체는 사실 사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남녀구분 없이 모두 한집에 몰아넣는 남녀혼숙식주택이였다.후옌의 방은 소장의 침실과 마주보고 있었다.오래된 집이라 통역애의 방문은 쥐가 갉아먹은것 마냥 군데군데 뜯겨져 있었고 잠금창치도 변변치 않았다.경첩은 나사가 빠져서 문을 여닫을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고 문을 똑바로 고정시킬수도 없었다.성인 남성 한명이 작정하면 힘 하나 안들이고 부술수 있을것 같았다.게다가 도배를 한지도 오래돼서 벽면 전체가 누리끼리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여기서 쭉 지냈어요?’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여자애한테 따지듯 물었다.
‘네.어쩔수 없잖아요?우리 집은 여기서 아주 멀어요.집에서 다닐수 없어요.이젠 괜찮아요,습관돼서’
여자애는  아무렇지 않다는듯 웃으며 얘기했다.
‘후옌씨 한달에 얼마 받아요?’
첫만남에 이런 질문이 실례인줄은 알지만 나는 너무나 기가 막혔다.
‘지금은 1500불,처음에 700불 받았어요.’
베트남 사무직 평균월급이 300불정도라고 하니 베트남에서 이 정도면 엄청난 금액인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그래도….)
‘어떠세요?’
한창 얘기하고 있는데 소장이 불쑥 들어왔다.
‘호텔에 묵겠습니다.’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럼 오늘은 호텔에서 묵으시고 숙소는 차차 결정합시다.기사한테 얘기 해둘게요.휴옌이 같이 가서 입실수속을 도와줘요.내일 아침 6시에 기사가 데리러 갈겁니다.그럼..’
‘네.’

그렇게 베트남에서의 첫날은 그럭저럭 무사히 지나갔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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