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철

[서울=동북아신문]주말의 미즈모토(水元)공원은 언제나 한적한 기분이다. 공원에 놀러 온 사람들이 적은 것은 아닌데 워낙 공원이 크다 보니 언제나 여유롭고 한적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공원 안의 길을 따라 쭉 가다 보면 중앙광장이 나타난다. 커다란 중앙광장은 크기가 축구장 세 개만 한데 중앙에 있는 푸른 잔디밭을 에돌아 길이 나 있다. 길 다른 한 켠에는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이 보기 좋게 줄지어 서 있다. 넓고 시원하게 트인 잔디밭은 마치 드넓은 초원을 방불케 하였고 주변의 무성한 나무들은 열대우림을 상상하게 한다. 그것이 좋아서 매번 공원에 오게 되면 나는 꼭 이 길을 걸어보게 된다.

지난 주말도 공원에 갔다가 또 그 길을 걸었다. 문득 재잘거리는 새소리를 따라 쳐다보니 잔디밭 쪽 길가에 자란 나무위에 몸집이 자그마한 새 몇 마리가 나무가지 사이에서 퐁퐁 뛰어놀고 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나뭇가지를 뛰어넘는 다람쥐의 모습과 흡사해서 저도 몰래 “귀엽네” 하며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 오기전에 상해에서 다람쥐를 만났던 적이 있다.

상해 장녕구(长宁区)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일 보러 시내에 갔다가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데 버스가 훙메이루(虹梅路)입구 붉은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섰다. 문뜩 차창 밖으로 한 젊은 여성이 인행도로에 서서 나무 위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나뭇잎 사이를 보니 다람쥐 한 마리가 나뭇가지 사이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 어떻게 상해시내의 가로수에 다람쥐가 보이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아도 분명 다람쥐였다.

다람쥐의 커다란 꼬리는 마치도 부풀어오른 자그마한 낙하산과도 같았다. 털 색은 갈색이었고 몸집도 좀 컸다. 그 놈은 세 미터쯤 되는 나무줄기를 따라 위로 기여 오르더니 옆에 있는 굵다란 전선줄을 따라 기어갔다. 그러더니 곧 바로 다른 나무의 잎사귀속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오랜만에 보는 다람쥐였다.

연변의 산 들에서 보는 다람쥐는 상해의 다람쥐에 비해 훨씬 더 예쁘고 귀엽다. 그래서 누구라도 보기만 하여도 귀여워서 가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난 고향은 두만강을 끼고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시가지이다. 두만강을 따라 하류로 쭉 내려가면 가끔 끝없이 펼쳐지는 두만강평원이 있다. 그래서 하류의 두만강지역 농촌에서는 벼농사를 많이 한다.

어릴 적에 농촌에 있는 외가집에 가면 입쌀밥이 너무 맛있었다. 남방에 나와서도 오랫동안 입맛을 돋우는 입쌀 밥맛을 잊지 못했다. 남방의 입쌀은 밥을 지어 놓으면 풀기가 없고 텁텁하지만 두만강 논밭에서 나온 입쌀은 그렇지 않다. 벌써 밥을 지을 때부터 구수한 향기가 온 집안을 돌아 군침이 돈다. 다 익은 입쌀밥을 사발에 담아 놓으면 좀 투명하고 반짝반짝 빛이 난다.  구슬처럼 옥처럼 매끄럽고 알차다.

어릴 땐 아무 생각도 없이 보아온 정경이지만 지금까지도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선하다. 그래서 옛이야기들을 보면 백옥같이 하얀 입쌀밥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거기엔 그럴 만한 영문이 있는 것이다. 어른들의 말을 들으면 옛날엔 중국황제도 여기 쌀을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다른 조선족들이 벼농사를 하는 곳에 가보니 그곳의 입쌀 맛도 좋아서 황제가 먹었다 한다. 아마도 우리 조선족들의 벼농사기술이 좋아서 어디를 가나 맛 좋은 입쌀을 생산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고향집 문을 나서면 곧 저 멀리 산이 보이는데 산기슭까지 3리도 안 된다. 지금은 산에 가도 야생동물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지만 아버지 어머니가 어렸을 때는 뒤산에서 범이 내려와 소를 물어 가기도 했다 한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땐 친구들과 줄곧 산속을 헤매고 다니어도 산토끼 한 마리도 본적이 없었다. 있다고 하면 그저 다람쥐 뿐이었다.

대학 일학년 여름방학때의 일이다. 시골에 있는 친척집에 놀러 갔다가 집 근처 과수원에서 다람쥐가 뛰어다니는 걸 보고 다람쥐를 키우고 싶다 하여 아버지한테 졸라서 다람쥐 초롱(새장)을 만든 적이 있다. 아버지는 손재간이 좋아서 뭐든지 다 만들 수 있었다. 아버지가 다람쥐 초롱을 만들어준 그날로 나는 쥐를 잡는 산속의 풀밭 속에 덫을 놓아 두었다. 이튿날 가보니 귀여운 다람쥐 한 마리가 들어있었다. 그날부터 다람쥐는 우리 집 뜨락 초롱속에서 살게 되였다. 어릴 때부터 어린이동화 속에서 많이 보아온 총명하고 귀여운 주인공을 이제야 자기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람쥐는 털 색갈이 연한 갈색을 띠고 털은 기름기가 찰찰 돌았다. 그리고 등엔 머리로부터 몸 전체에 몇 줄기 길다란 검은색 띠가 있었다. 꼬리는 제 몸길이만큼 길고 꼬리에 난 털은 매우 길어 꼬리둘레가 몸 둘레만 되고 보송보송하였다. 머리를 보면 집쥐의 생김새와 꼭 닮았지만 집쥐와는 달리 많이 귀여웠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갔다가 겨울방학이 되여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 대신 다람쥐를 돌보고 있었다. 반년이나 함께 있어서 부모님들도 다람쥐와 정이 많이 들어있었다.

그러던 어느 눈보라가 쌩쌩 휘몰아치고 추위에 땅도 쩍쩍 갈라 터지는 밤이었다. 난 어쩐지 복도의 초롱안에 놓여있는 다람쥐가 추워하는 것 같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초롱을 객실안의 증기난방관(暖气管)옆에 가져다 놓았다. 후끈후끈하고 열기가 세서 다람쥐가 추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제야 시름을 놓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초롱 안의 다람쥐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하고 물으니 글쎄 다람쥐가 죽었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미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왜 객실에 들여 놓았냐 하며 날 원망하셨다.

더위에 죽은 것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귀여웠는데 하루 밤 사이에 이렇게 덜컥 죽다니. 내가 죽인 것이다. 자책감이 들고 가슴이 미여지는 듯 아팠다.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영리하고 귀여웠던 다람쥐는 영영 나의 곁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다람쥐는 겨울에도 동면하지 않고 눈 위를 뛰어다니며 사는 추위에 익숙한 동물이었다. 우리에겐 겨울 밤의 후끈후끈한 잠자리가 제일이지만 다람쥐에겐 목숨마저 빼앗아가는 위협이었던 것이다.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가끔 그 다람쥐를 생각하면 애석한 기분을 금할 수 없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결과는 참혹하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인류는 몇 천년을 내려오면서 자연, 생물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인류가 지금까지 생존해 올 수 있은 것은 자연과 중화를 이루기 위해서 중용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명의 발전은 무리한 개발을 부추기었고 자연은 파괴되었고 지구의 온난화가 일어나서 이상기후가 생기었다. 올해만 해도 일본에서는 태풍 홍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거리에 나앉게 되었고 전기 가스가 끊어지고 물이 안 나와서 극심한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앞의 편리나 이익만 추구하고 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행위가 다람쥐의 생명을 빼앗아갔던 것처럼 인류가 계속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나간다면 그 재앙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올 지도 모른다.

오래간만에 다람쥐와의 옛일을 떠올리면서 다람쥐들에게서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보금자리를 빼앗지 말기를 기원해본다.

2019년 11월 25일 수정
도쿄에서

김철 약력
1971년 길림성 룡정 개산툰진 출생.
1989년 룡정고중 졸업.
1993년 대경석유학원 공과 졸업.
1993년~2006년 남방 일본기업 근무.
2007년부터 일본 IT업계 근무.
현재 일본 동경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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