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정 가수

세계일본조선족문화절에서 박리정 가수가 흑룡강 녕안시 '향수촌 노래'를 불렀다. (편집자 주)

해남도에서

나는 해남도에서 이미 6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있다.
해남도는 우리 나라에서 대만 버금으로가는 섬이고 또한 중국의 하와이라 불리고있다.
해남도는 중국 남방의 열대지역으로서 "천연 대온실" 이라는 미칭을 갖고있기도 하다.
건강을 목적으로 지역을 택한것이 바로 해남도이다. 처음엔 집에서 건강음식, 영양료리로 식단을 꾸미며 노래연습도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여  건강상태가 많이 좋아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수 있었다.
해남도는 여름이 길고 겨울이 없다. 사계절 꽃이 만발하고 초목이 푸르싱싱하다. 특히 해남도 중부에 자리잡고 있는 오지산(五指山) 사계절의 평균온도는 영상 25도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좋은 기후이고 공기 또한 맑은 곳이다.
 
사계절이 분명한 민들레고향에서 태여나 민들레꽃을 사랑하고 민들레향기를 맡으며 민들레노래를 부르며 자라난 나로서 집안에도 화초요 밖에도 화초이니 그런  자연의 정취에 자못 취해버렸다. 우선 기후가 맘에 들었다. 때론 태풍이 불고 우량이 많긴 해도 연변에서 영하 20~30도 기온에 " 아 춥다. 추워" 하면서 이를 덜덜 쫏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떨려난다. 나는 체질상 워낙 더운건 견딜수가 있지만 추운건 정말 견디기 어려워 한다.이런 나에게 있어서 해남도 날씨는 나의 체질에 맞는 날씨인것 같다.

이 글의 주제는 일본 축하공연의 감수를 쓰는 것인데 해남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나 내가 해남도에서 일본으로 세계문화절에 참가하러 갔고 또 장기적으로 해남에 거주하게 되므로 해남도를 언급하게 된다.

해남도는 원래 광동성에 속해 있었는데 1988년 4월 제7 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 차회의서 "해남성을 성립할데 관한 결정" 을 반포했다. 지금 해남성은 중국경제특별구역이고 자유무역시험구이다. 해남경제특별구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큰 유일한 성급경제특별구역이다.

내가 처음으로 해남에 거처를 정할 때는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허지만 연분이란 아무때든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는 법인가 본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오지산시음악가협회 양귀란 주석을 알게 되였다. 그를 만난 덕에 내 인생에 새로운 한 페지를 열게 되였다. 내가 가수라는 걸 안후부터 가끔 행사에 나를 초청했다. 이로부터 오지산시에 조선족가수가  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하여 현재 나는 해남성해양학원 성악교수로 초빙되였다.

물론 해양학원에 정식 초빙 되기 까지 그리 쉬운일이 아니였다. 우선 무대에서  화려한 의상을 곱게 차려입고 노래만 잘 부르면 되는 그런 일이 아니였다. 음악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다 잘 알아야 할뿐만 아니라 피아노로 노래 반주쯤은 할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더 안타깝고 속이 탔던 건 중문으로 교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유치원부터 예술학원에 이르기까지 조선족학교를 다녔고 사업에 참가해서도 한족이 한사람도 없는 연길시조선족예술단, 연변가무단에 근무한 나로서는 한어수준이 높을리 없었다. 이것은 이미 불혹의 나이가 된 나에게 있어서 큰 도전이  아닐수 없었다. 처음에는 고민도 많이 하고 주춤하기도 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예술에 대한 애착과 간절함이 컸기때문에...... 

그때로부터 나는 위챗으로 중문으로 된 문장 혹은 중문으로 된 위챗 성악수업 동영상들을 많이 보았고 공부도 많이 했다. 그리고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리론과 고 최광준 교수님의 아들이자 학교시절 나의 동창인 최상범씨가 운영하는 학운피아노학원에 찾아가서 피아노 반주 수업도 받았다.그리고 사범학교 성악 강의도 여러번 가서 참관하고 또 거기에서 전국 사범학교 성악 교재들을 얻어서 많이 읽고 또다시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성악에 대한 기본 명칭들은 반복적으로 발음해 보면서 거울을 보면서 연습도 많이 해 보았다. 무대에서의 경력이 큰 힘이 되여서인지  처음으로 교단에 올라도 떨리지는 않았다. 마침내 학원령도들의 인정을 받게 되였고 학생들의 좋은 평판을 받게 되였다.  학교 교학 시간외에는 시문련에 출근하면서 주로 피아노 연습과 오지산시 대중들의 예술수준 제고를 위해 정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예술인재를 발굴하고 양성시키는 면에서 한 몫을 담당하고자 노력하고있다.

우연의 일치

우연의 일치란 인물의 행동이나 사건이 인과성이나 필연성없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말한다. 내가 이번에 일본에서 개최된 세계조선족문화절에 초청가수로 뽑힌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닌가 싶다.

지난 3월 초순의 어느날 나는 위챗을 두루 살펴보다가 우연히 세계조선족문화절이 일본 도꾜에서 펼쳐지며 축하공연에는 세계조선족예술인중 우수한 예술인을 먼저 선정하고 무궁한 힘을 갖고있는 위챗투표로 최종 참가자를 선정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나의 가슴은 대뜸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도그럴 것이 한 조선족 가수로서 어찌 이 좋은 무대에 오르고 싶지 않으랴?

투표기한은 3월 15일부터 29일 이였다  연변도 아닌 중국 뢰주( 雷州)반도 남쪽, 남중국해에 위치한 한족, 이족, 묘족이 밀집한 해남도에서 투표 한장 얻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래도 나는 발벗고 나섰다.우선 우리가족 친척,친구, 학생, 여러 민간단체, 지어 보험회사까지 동원하고 찾아가서 노래를 불러주면서 투표를 간청했다. 물론 해남도에서 얼만큼의 투표를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큰 힘이 되였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이전부터 내 노래 즐기는 팬들의 열찬 응원에 힘입어 가수행렬중 두번 째로 당당하게 세계문화절 초청가수로 선정되였다.

8월에 나는 문화절집행위원회 금산장호( 일본명으로 가나야마 하리토라) 위원장 명함으로 된 초청장을 받게 되였다.당시 기뻤던 심정은 이루다 형언할수 없다.

그후 문화절예술무대를 책임진 김권철 부장이 비자부터 시작해서 노래선택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경을 써주었다. 수없이 위챗이 오가면서 서로 교류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최종 " 반갑습니다" 와 " 향수촌의 노래"로 결정했다.

내가 " 반갑습니다" 를 선택한것은 세계 각지에서 오는 조선족이나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이 만남의 장을 이룬다면 그 어떤 리유도 필요없이 하냥 반가울 것이며 또한 이 노래는 세계 어디에 살든 조선족이면 누구도 다 부를수 있는 대중성 노래이기 때문이였다.

" 향수촌의 노래"를 선택한 건 우선 작사,작곡이 내맘에 들었고 조선족문화절행사의 취지에 알맞는 노래라고 생각해서였다. 지혜롭고 근로용감한 우리 선조들이 두손으로 부지런히 터전을 가꾸고 고향을 건설하여 예나 지금이나 브랜드 상표를 자랑하는 향수입쌀이 세계에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진짜 자랑할만한 노래였고 우선 나 자신이 이 노래를 꼭 잘 부를수 있다는 신심으로 충만되여 있었다.

노래 작사는 연변대학 전임 교장 김병민선생이 격정을 살려 자기 고향을 노래한것이다. 

내 고향 향수촌은 전설의 고장
선조들의 옛노래 목단강에 흐르네
아, 내 고향 아름다운 향수촌
흰옷입은 사람들은 화목하게 살아가네.

김병민선생님은 자기의 고향 향수촌을 천혜의 고장이라 칭찬했고 만천하에 이름높은 향수표 유기농 입쌀이 자기 고향의 인품처럼 구수하고 향기롭다고 자랑했다.

작곡가는 "교정의 종소리" "오빠의 편지" 등 노래들을  작곡하여 뭇사람들의 사랑과 애대를 한몸에 받은 김경애 선생이다. 그는 작사자가 개천에서 룡이 나듯이 시골에서 태여나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했고 또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연변대학 교장까지 하신  분이기에 곡도 품위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또 가사자체가 향수촌이라는 시골을 노래하였기에 될수록 소박한 선률에 모를 박고 품위 있으면서도 소박한 서정가요로 만들었다.

이렇게 창작된 노래였고 한수의 명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명품이였기에 나는 노력에 게을리 할수 없었다. 나는 열심히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남들이 다 퇴근하기를 기다려 연습하기도 했고 남들이 쉬는 휴식날에도 연습을 하군 하였다.  매일 이렇게 연습하다보니 그게 일상이 되였고 연습 못한 날은 불안하기 까지 했다. 

이렇게 바삐  보내다보니 어느새 일본으로 갈 시간이 다가왔다.

11일 4일 오후에 열린 문화축제 공연 한마당 (편집자)

사쿠라나라로

11월 2일 아침이다. 
나는 일찌기 기상하여 카텐을 헤치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시원하고 청신한 공기가 나의 가슴을 후련하게 적신다.

11월3일 저녁에 환영만찬부터 시작하여 4일 오후 2시반 공연이기에 적어도 3일 오후까지는 지정된 호텔에 투숙해야 한다. 해남도와 일본은 멀리 떨어져서 나는 2일 아침 8시에 집을 나섰다. 먼저 자가용으로 약 2시간 남짓한 산길을 혼자 운전해서 싼야에 도착해서는 택시를 바꿔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마침내 오후 1시 반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여 3시에 홍콩에 도착했다. 이튿날 (3일) 새벽 1시 55 분 이륙하는 비행기이므로 10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화려한 도시 홍콩은 자유려행하기 더없이 좋은 도시이지만 문화절 축하공연을 념두에 두고 있는 나한테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특히 성악은 목소리를 아껴야하기에 성대가 피로하면 노래효과가 달라진다. 나는 충분한 휴식을 위해 와인을 시켜 마시고 발맛사지도 했다. 하지만  점점 정신이 올똘해 졌다. 그렇게 눈 한번 붙이지 못하고 새벽 1시 55분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행 비행기에 탑승해서야 무거운 짐을 부린듯 어슴프레 잠이 몰려왔다.

꿈결에 나는 언녕 일본에 와 있었다.
일본, 섬나라 사쿠라나라.  더우기 일본의 무대에서 장끼 껏 노래 부른다는것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지 모른다 .

세계지도를 펼쳐보면 일본은 동아세아에 위치해 있고 "일출지국"이라 불리는 나라이다. 이전부터 일본인하면 일벌레와 통했고 국민소질이 높고 례의가 바른 민족이라 널리 알려져 있다. 
일본의 교육이 엄격하기로 유명하다고 들었다. 일본은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절대 타인한테 페를 끼치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했다. 그 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피해되는것을 원하지 않으며 또한 피해를 받고 싶어도 하지않는 주고받고가 십분 명철한 민족이다.

친구한테서 들은 얘기다. 일본인은 보통 길을 묻는 사람한테 끝까지 따라오면서 알려준다고 했다. 면목을 전혀 몰라도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해도 방문할 때는 꼭 사전에 예약해야 하고 만약 이유 없이 시간어기면 바로 신용이 떨어진  유효기간이 지난 사람으로 지목받게 된다고 했다...... 

자며말며  어느덧 일본현지시간으로 아침 7시에 도꾜 나리타에 착륙했다. 내가 일찌기 도착하는 바람에 나를 마중한 분들이 잠을 설치였다.

짐을 찾고 출입구로 나오니 "2019세계조선족문화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고 쓴 프랑카트를  든 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얼굴도 못 본 사이지만 생소한 감이 전혀 없고 너무 친절하고 반갑게 맞아주어 마치 오랜 친구지간에 서로 만나는 기분이였다.

우리는 5성급 호텔 찐짠소(椿山荘)에 주숙을 잡았다. 호텔은 조용하고 아늑하고 깨끗하면서도 포근한 기분을 안겨주었으며 서비스 또한 너무 좋은 호텔이였다.저녁 환영만찬까지 끝내니 거의 30시간을 려로에서 헤맨셈이였다.

침대에 편하게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아마 래일 오후에 축하공연때문일것이리라.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어느결에 잠깐이나마 꿈나라로 날아갔다.

축하공연무대에서

11월 4일 드디여 공연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공연 의상을 포함한 공연에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챙기고 아침 식사하러 내려갔다. 서양 음식과 일식이 준비되여 있었는데 우리는 일본에 왔으니 일식을 먹기로 했다. 먹기 아까울 정도로 아기자기하게 이쁘게 만든 음식을 기분좋게 먹고나서 현지 시간 9시에 공연장소로 이동했다. 

이번에 성대한 규모를 갖춘 세계조선족문화절은 "중국조선족글로벌미래지향과 꿈과 단합을 위한다"는 취지를 선명히 했다.

이번 문화절에 100여명에 달하는 조선족경제계, 문화예술계의 인사들이 초청으로 참가했다.

조선족음악계를 대표한 임향숙,박경숙,구련옥,박은화,변강,한려나,나 그리고 일본 한국에서 활동하는 조병철,류춘찐, 김경자, 현성애 등 가수와 웃음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소품배우 원용란, 수이러(水肉)리옥희,"마반산"김동현  등 연극진이 참가했다.

우리 일행은 극장에 도착하여 간단히 회의를 끝내고 분장실에 써붙인 이름순서대로 분장실에서 조용히 대기하는 한편 무대에서는  리허설(彩排)이 진행되였고 무대 뒤에서는 모셔온 분장사 두분이 익숙한 솜씨로 연예인들에게 분장을 열심히 해주고 계셨다.

공연순서에 따라 무대뒤에서 말없이 묵묵히 착실히 일하는 "무명영웅" 들 덕분에 모든일이 순조롭게 진척되였다.

나의 리허설차례가 되였다.
첫노래 "반갑습니다"는 그런대로 순리롭게 되였다. 두번 째 "향수촌의 노래"가 엉망이였고 우선 내맘에 들지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보기 민망할 정도로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참으로 내 자신이 많이 미웠다. 이 순간을 위하여 공을 얼마나 갈고 닦고했는데 이렇게 무너지다니. 참 억울하고 당황했다. 내가 너무너무 열심히 연습했던 노래 인데..... 웬일일가? 

나는 애써 랭정을 찾았다. 첫째,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로함. 둘째,충분히 (발성)소리를 못내본 원인.셋째, 이번에 무조건 잘하겠다는 욕심으로 오는 무언의 압력. 원인을 찾은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면서 자신 ㅡ박리정을 찾았고 자신의 원상태로 돌아갔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평소 연습한대로 무대뒤  사람들이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반주를 켜놓고 "향수촌의 노래"를 연거퍼 8번이나 불러보았다.

나의 차례가 왔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긴장되면서 심장이 요란스레 가슴벽을 두드렸다.

착잡한 생각, 복잡한 감정이 서로 엉키는 순간 내 노래 전주가 시작되였다.
전주가 울려퍼지는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를 웨치며 무대로 걸어나갔다. 

경쾌한 반주와 명랑한 나의 노래가 장내를 꽉 메우자 요란한 박수갈채와 더불어 관중들이 나랑 함께 열창으로 넘어갔다. 첫노래는 당당하게 원 모습대로 넘어가니 두번째 노래도 실력이 나타나는것 같았다.

"선조들의 옛노래 목단강에 흐르네...흰옷입은 사람들 화목하게 살아가네" 이 가사를 넘기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으며 나는 저도모르게 완전히 격정에 젖어들어 노래를 불렀다.이렇게 나의 정신과 혼신이 합쳐서 두곡을 완성하였다.

내가 무대에서 퇴장할 때 김권철 부회장과 안연감독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맞아주며 " 잘 불렀다"고 치하하면서 엄지손가락을 보여주었다. 바로 이 시각을 위하여 그렇게 최선을 다해 노력한 내가 아니였던가! 내 생각에도 최선을 다했기에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고 짐작이 갔다.

기자의 취재를 받고 나서

공연의 거의 막바지까지 이르렀을 때 나는 조용히 앉아 아직 남아있는 여성3인창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예술인들도 공연의 성공을 위하여 각자 본인이 맡은바 역할을 착실히 해가고 있었다. 성공은 이미 눈앞에 와 있었다. 아마 그것이 이번 공연에 참가한 모든  예술인들의 공통한 념원이였으리라...

이런 그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눈물이 났다. 때 마침 이번 공연감독을 맡은 안연씨도 눈물을 훔치며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한가지 한가지 감정들을 다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여러가지 감정들이 겹치면서 눈물을 흘렸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이런 감정에 빠져 있을 때 임향숙가수가  "이제 도라지를 흥겹게 불러야 하는데 눈물 흘리면 어떡하냐"는 원망 아닌 원망에 나는 정신을 차리게 되였다.후에 들은 얘기지만 그날 공연보면서 특히 소품을 보면서 관객들 대부분 눈물흘리면서 관람했다고들 들었다.  왜 아니겠는가 고향의 토장국 냄새 그리운 이국땅에서 토장국과 같은 우리 민족의 예술을 감상하노라니 그럴만도 했으리라......

3인창 "도라지"

임향숙, 박은화 나까지 셋이서 열창한 "도라지"가 장내를 열광의 도가니로 이끌어 갔다. 끝으로 김정권 작가가 작사하고 최영철 선생이 작곡한 이번행사의 주제가 "우리는 하나다" 로 막을 내렸다.

그날 극장은 1300좌석인데 외빈 100여명을 제외하고 전부 일본에 거주하는 분들인지라 자연히 고향생각, 친지생각에 눈물바다가 되였다고 한다.

공연뒤에 이어진 "문화의 밤"행사도 자못 굉장하였다. 
행사에 참가한 기업인, 예술인과 중,일,한 각 분야 대표들 그리고 초대래빈 160여명이 뷰페, 레스토랑에서 파티를 열었다.

"문화의 밤"행사를 통해 한층 더 마음을 열고 활발한 교류가 진행되면서 시종 뜨거운 분위기로 끓어넘쳤다.

행사에서 나는 반갑게도 연변1중 동창생 조춘길 회장(일본에 거주)을 만나게 되였고 국내 혹은 세계 각지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훌륭한 기업가들을 많이 만나게 되였다. 나로서 너무 수확이 주렁주렁한 잊을 수 없는 "문화의 밤"이였다.

문화체험  

11월 5일 9시부터 래빈과 참가자들이 일본의 인기관광명소를 찾아 이국의 문화와 자연경관을 견문하는 려행코스이다.

우리는 세계서 제일 큰 화산의 하나인 후지산(富士山)을 둘러보면서 일본문화의 체험을 더 깊이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후지산은 일본을 대표하는 미의 상징이다. 해발 3.776메터 높이로서 일본 최고봉으로 홀로 우뚝 솟아있어 그 풍광이 가관이다. 기실 몇백년을 내려오며 후지산의 우아한 자태는 예술인들의 손끝에서 되살아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08년에 마지막 화산폭발로 인해 후지산표면에는 세월이 씻기고 깎인 분석이 많았다. 혹독한 기후와 분석 때문에 고산식물조차 자라지 못하는 실태이다. 반면 아래쪽 비탈에 혼합림이 울창했다. 여름철 저녁이면 이 숲에서 서식하는 뻐꾸기는 4종류에 달하며 붉은 여우와 너구리도 이 지역에서 서식한다고 했다. 

후지산기슭에 펼쳐진 광활한 자연속에서 여유롭게 생활하는 동물들이 70여종, 900여마리에 달한다고 했다. 

후지산을 배경으로

후지산관광 내내 주최측 안내자들과 초청받은 래빈과 예술인들의 자연스럽고 정다운 화합으로 후지산관광은 그 의미를 더 진지하게 했고 너무나 잊을수 없는 추억을 남겼다. 우리는  후지산의 한 식당에서 점심식사 마치고 관광뻐스로 온천으로 이동하였다. 거이 백프로 여성들이 다 온천을 좋아 하듯이 나도 너무 온천을 좋아한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깨끗한 온천물을 후지산에 그냥 두고 온것이 못내 아쉽다. 

온천 발코니에서(뒤배경 후지산은 구름과 어둠에 깔려 보이지 않는다)

주최측의 살뜰한 배려하에서 저녁 식사는  온천내의 레스토랑에서 하게 되였는데 나는 난생처음 그렇게 영양만점  이쁨 만점인 식탁을 봤다.참으로 입도 호강, 눈도 호강인 저녁 만찬이였다.  그렇게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귀로에 올랐다. 지금 생각해봐도 역시 그 따뜻했던 정이 모든  감각으로 깊이 느껴진다.이번 문화절의 나의 목적은 축하무대였기에 관광 얘기는 여기서 그친다.

반가운 얼굴들

6일은 일찍 일본에 오기전부터 약속된 연변1중 학우들과의 즐거운 상봉이다. 모이고 보니 19명이나 되였다. 그날 모임은 현재 연변1중 일본 학우회 고문이며 연변1중 때 나랑 문과반에서 함께 공부하던 조춘길 회장이 마련한 파티였다. 그날 모인 학우들외 공연에 참가했던 가수들도 몇명 모시고  참가했다. 그날 참가한 일본에 있는 학우들  모두 일본이라는 낯선 고장에서 한몫 크게 담당하는 인재들이다. 일부 학우들은 부부동반으로 참석하여 동창만회 분위기를 더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들한테 맛있는 음식도 구전히 차려주고도 모자라 선물까지 준비해서 내가 모시고 간 가수들한테 일일이 나누어 주었다. 참으로 기분 좋은 파티였고 또한 너무 많이 받기만 해서 미안하기도 한 파티였다.

연변1중학우들과 함께

그리고 나는 그들의 말 한마디 얼굴표정 하나하나에서 고향을 그리는 절절한 심정이 고스란히 스며있다는 것도 보았다 . 부모형제와 떨어져 이국땅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그들, 조선족의 의미지를 가꾸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뛰고뛰는 그들이야말로 현시대 걸출한 대장부들이고 녀중호걸들이라는것도 보아냈다. 그들은 일본이라는 이국 타향에서 끝없는 도전을 거듭하며 튼튼한 생활기반을 닦아놓았다. 나는 그들 앞에서 자연히 머리가 숙여지며 그들이 더없이 돋보이였다.

서로 오가는 말이 끝이 어딘지 모를 지경이다. 하냥 웃고 떠들며...그냥 무조건 반갑고 즐겁고 행복했다.

아무튼 연변1중 그 시절이 많이 그리웠다. 1차에서 서로 헤여지기 아쉬워 2차 노래방 파티가 이어졌다. 그렇게 달리다가 새벽 2시가 거의 되여 파티 막이 내렸다.

그 이튿날은 나의 인생에 남을 친구를 만나게 되였다. 리옥이라고 역시 일본에 도착하기전부터 위챗으로 약속했던 것이다. 내가 아끼는 한 췬에서 만난 미녀였다.그는 원래 연변스포츠신문사에 근무하다가 일본에 온지 15년이 넘는다고 했는데 성격이 대범하고 활달하였다.

리옥씨

리옥 여사는 내가 문화절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관람표를 사고 어머님과 언니를 모시고 분장실까지 찾아와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에게 응원의 메시지도 전달하고 힘찬 박수로 나한테 힘과 용기를 주었다. 비록 얼굴을 서로 못본 사이지만 한 췬에 함께 있고  또 한 고향에서 온 가수라는 이유로 부디 꼭 모셔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본에 있는 동안 나랑 한방에 같이 있었던 연변가무단 박경숙 가수도 함께 모시고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우에노에서 쇼핑하고 식사 대접까지 마련했다. 한췬이라해서 모두 이렇게 할수 있을가?

아무리 세상이 변해 인정이 박해졌다 하지만 리옥이처럼 착하고 인정 많은 분들이 있구나 하는걸 가슴깊이 느낄수 있었다. 참으로 내 인생에서 잊을수없는 한 사람으로서 후에 연변에서 만나든 해남에서 만나든 꼭 "원쑤" 를  갚으리라 다짐한다. 

그날 저녁은 일본에 계시는 허영수회장님과 금산장호회장님, 박춘화부회장께서 자리를 베푸는 환송연회자리였다.연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저마다 이번 행사의 원만한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했으며 이번 행사를 위해 모든일과 시간을 저쳐놓고 물심량면으로 헌신한 회장단에 고마움을 표하면서 축배의 술잔을 비웠다. 

이 분들은 이번 행사를 위해 너무나도 고생했고 상상도 못할 엄청난  큰일을 해냈다. 1월에 시작된 글짓기 응모, 3월 초대연예인 투표, 4월 초대연예인 선정, 5월 문화협회 회가 응모, 6월 문화인,기업인 초대명단 작성, 7월 적합한 호텔 확정, 8월 응모글 마감과 심사위원 선정, 중국 여러 매체홍보, 초대연예인 인터뷰...
행사기획부터 대회안내, 도꾜포럼, 공동선언, 디자인, 협찬업체 연락. 아무튼 그들은 문화절을 위해 팽이처럼 돌아쳤다. 문화절의 성공은 그들 노력의 결실이다. 그중에서도 박춘화 부회장등 실무진들이 제일 수고했다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박부회장은 실상 내가 연변에서 볼 때보다 많이 축해졌었다.아마 눈으로만 짐작해도 몇킬로는 살이 빠진것 같았다.  오죽하면 귀국하면서 한 여성협회 회장님은 박춘화 부회장님을 끌어안고 "니가 왜 여기서 이런 모진 고생을 하느냐?" 하면서 소리내 울기까지 했겠는가?!
그들이야말로 가장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며 이번 세계조선족문화절을 성공에로 이끈 거인들이다.

귀국행

11월 8일 새벽 5시, 5박 6 일 일본에서의 일체 행사를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대회측에서는 쌀쌀한 새벽날씨임에도 마다하고 우리에게 공항까지 배웅하는 배려를 베풀었다.
이 며칠동안은 정말 친인들과 함께 제집처럼 아무런 부담없이 편안히 보냈다.

"일출지국" 의 동방하늘을 불태우며 솟아오르는 붉은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친인들의 얼굴이 나의 눈앞에 선히 떠오르며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생각할수록 마음 한구석에 뭔가 울컥울컥 올리미는 느낌 , 아, 그것은 정녕 고마움의 감동이리라. 스케줄이 가야금줄처럼 팽팽한 며칠이였고 피곤하면서도 바쁜 걸음이였지만 생각만해도 벅차오르고 얻은 것이 너무나 풍성했다.

이번 세계조선족문화절을 통해 우리 조선민족이 더없이 우수하고 대단한 민족임을 또 한번 뼈속으로 느끼게 되였다. 아무리 험악하고 삭막한 인간사회일지라도 우리 민족은 마치 바위틈에 피여난 진달래마냥 민족의 향기를 만방에 뿌리고 있으며 강한 생존의식과 강한 생명력을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만주의 허허벌판을 문전옥답으로 개간하여 중국 농업의 력사에 하나의 리정비를 세운건 우리 백의동포들이 아니였던가? 그 어디에 모여살든 우리 모두는 한형제, 한민족, 한동포, 한겨레이다. 우리 피줄에선 동족의 같은 피가 흐르고있다.
한마디로 이번 세계조선족문화절은 융합의 에너지를 창조하는 만남의 장으로 거듭났다.
기내에서 아래를 굽어보니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가 마치 한폭의 수채화를 방불케 한다.
나는 다짐한다. 두번, 세번 더 오리라고.
나는 속으로 웨치고 있다.
일본에 사는 우리 형제자매들이여, 잘 있으라.
다시 만나자, 일본 도꾜여.....

2019년11월21일
해남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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