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서가인

[서울=동북아시문]식탁 위에는 예쁜 유리그릇에 담은 김치 한 접시와 달걀을 풀어 넣어서 만든 국수 두 그릇이 놓여 있다. 저녁 식사다. 나는 거실로 나갔다. ”할머니 할아버지 진지 드세요.” 가지런히 앉아서 텔레비를 보고 있던 두 늙은이는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다가갔다.   “국수 맛있게 끓였구나.” 할머니는 몇 젓가락 들더니 부엌 문 옆에 서있는 나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천천히 드세요. 또 있어요.” 나는 두 손을 아랫배에 겹쳐놓고 서 있다가 공손히 대답했다. 두 분이 식사를 끝내자 나는 그릇을 치우고 두 분이 소파로 자리를 옮기자 시원한 수정 차를 가져다 소파 앞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빨리 가서 저녁 먹어라” 할아버지는 찻잔을 내려놓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무슨 일 있으면 부르세요.” 나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대답했다.

부엌에 들어가 국수를 푸려고 하니 이미 불어서 엉켜 붙었다. 서울 사람들은 저녁 식사를 간단히 한다고 한다.특히 승일범 할아버지 집은 더욱 간단하다. 한국에 와서 가정부로 들어온 지 반년이 되였다.

나는 중국 지린성 공주령이라는 현성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장춘 대학교에서 고어를 가르쳤고 엄마는 현 병원의 수간호사였다. 아버지는 장춘에서 공주령을 출퇴근 했다. 엄마가 야근을 많이 하다 보니 나와 남동생 보인은 아버지와 같이 책을 읽으며 허다한 저녁 시간을 보내였다. 나와 보인은 학교에서 이름 때문에 놀림을 당할 때가 있었다. 나의 이름은 송나라 저명한 완약 사파의 사인인(李清照)의 이름 중간자를 따고 그의 시구절 중 ‘해당화는 여전하네’(海棠依旧)의’依’를 따서 아버지가 지어준 리청이(李清依)이다. 보인의 이름은 당대(唐代)의 저명한 현실주의 시인인 두보 이름자에다 (仁) 을 부쳐 만든 이름이다. 아버지가 이름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자 우리 둘은 마주 보며 웃었다.학교에서 가끔 누가 놀려도 그 후부터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우리 집에 날벼락이 떨어졌다.엄마가 어쩌다가 병원에서 감염되었는데 현대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한다. 엄마는 일주일 만에 장춘 제일 병원으로 옮겨 갔고 아버지는 집으로 오지 않았다. 이따금 와서 돈을 놓고 갔다. 나와 보인을 보면서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나와 보인이는 엄마를 만날 수 없었다. 몇 달 만에 장춘에 가서 한번 보았는데 철저한 보안 상태에서 두꺼운 유리 창문을 가운데 두고 만날 수 있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는 몰라보게 수척했다. 창문 밖에 나란히 서있는 우리는 엄마가 상심 할까 봐 활짝 웃었으나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우리의 생사를 갈라 놓은 마지막 만남이었다. 나와 보인이는 후에 또 온다고 엄마에게 손을 저으며 떠났다. 일주일 후 엄마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우리에게 고시를 가르쳐 주시고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가자 말없이 술만 마시고 술에 취하면 방에 들어가 꺼억꺼억 운다. 나는 보인에게 공부하라고 집안으로 들여보내고 거실에서 아버지방이 조용해질 때까지 애꿎은 손바닥만 비비며 서있군 했다. 이성에 눈이 뜨기 시작할 무렵 나는 남자는 정에 무척 약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가자 성격이 크게 변했다. 예전의 자애롭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술만 마시면 다른 사람으로 변하곤 하였다. 친하게 지내던 옆집 아저씨와 아줌마는 변해버린 아버지를 보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곤 하였다. 그때 나는 고3이고 보인은 고1이었다. 반년 후이면 대학 시험을 쳐야 하는데 나는 대학에 붙어도 갈수 없는 게 불 보듯 뻔했다. 아버지는 점점 더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엄마 병원에서 나오는 쥐꼬리만한 돈은 일상 비용에도 모자랐다. 며칠에 한 번씩 옆집 아줌마가 밑반찬에다 쌀까지 가져다주었다.옆집 아저씨 우덕순은 남들은 돈을 아무리 많이 써서 가려고 해도 못 가는 한국을, 승일범이라는 사람이 초청해서 두 번이나 갔다 왔다. 승일범은 청년 시기에 큰 기업을 하는 우덕순 아저씨 아버지인 우태삼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조선을 드나들며 무역업을 했다. 1949년에 조선으로 건너간 후 소식이 끊겼다. 해방 초기 계급투쟁 때 죽은 우태삼의 재산은 몰수되여 모두 국유화됐다. 아들 우덕순에게 겨우 집 한 채만 남겨졌다. 한중 수교가 된 이듬해인 1993년에 승일범은 한국 기업가 시찰단을 이끌고 지린성을 방문했다. 우덕순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두 번이나 한국을 방문했고 매번마다 석 달씩 있으면서 좋다는 곳은 다 다녀보았다고 한다. 돌아올 때는 생활에 보태 쓰라고 가방에 달러를 두툼하게 넣어 주었다고 아줌마가 자랑해서 알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못했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우덕순 부부가 걱정 말라고 하였지만 동생만큼은 내가 벌어서 공부시키려 했다. 갓 학교를 나온 나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집에서 10분 거리인 옷 가게에서 영업원으로 매일 다녔다. 휴식 일이 없는 직업이다. 나는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 다녔다. 월급이 한 달에 48원이었는데 아무리 안 쓰고 모아도 보인이의 대학 자금은 턱없이 모자랐다. 하루는 옆집 아줌마가 아침 일찍 찾아왔다.
“네가 우리 도움을 안 받겠다고 하니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겠는데 생각해 보려무나”
“무슨 일인데요?” “아저씨를 초청해주신 승일범 집에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는구나.” “저는 집안일이 서툴러서 안돼요 ” 나는 한칼에 잘라 말했다. 밥을 빌어먹어도 남의 집 부엌데기로는 가기 싫었다.
“그래, 처음엔 나도 너를 그곳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월급이 이곳 돈으로 환산하면 삼천 원이라고 하더구나, 일 년만 고생하면 보인의 대학 자금은 문제없고 너도 공부를 더할 수 있지 않겠니?”

  나는 하루 종일 멍 때린 사람처럼 서 있다가 가게 주인한테 몇 번이나 핀잔을 들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자 보인이를 불러 이야기했다. 옆집 이모가 잘 보살펴 줄 테니 일 년만 참고 가다리라고 했다. 나는 결국 한국행을 택했다. 우덕순 아저씨에게는 아버지를 부탁한다고 말하다가 엉엉 울어버렸다.   승일범집 할머니는 키기 작고 통통했는데 학교는 안 다녔지만 지혜로웠다. 할아버지가 서울의 멋쟁이 여자와 바람피워 딴 살림을 차리자 성장한 자식 다섯을 데리고 가서 남편을 데리고 왔다. 물론 돈깨나 썼다. 할머니는 한가한 오후에는 한잠 자고 일어나 압구정동 현대 백화점이 바라 보이는 11층 창가에 앉아 인삼차를 마신다. 나는 할머니의 말동무가 돼요 주곤 했다. 할머니의 약점은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무명지에 낀 보석 반지를 보여주면서 이 반지의 값이 지금 살고 있는 집과 맞먹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법이 없어도 살수 있는 착한 인덕을 가진 분이시다.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보았다. 좀 부풀려 말하면 할머니 집의 거실은 운동장 같다. 방이 여섯 개였는데 문방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운전기사가 있으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내방은 부엌을 지나 다용도실 다음 안쪽에 있었다. 별로 크지는 않았지만 방바닥이 따뜻하고 깨끗해서 좋았다. 중국에서 석탄불을 피워 밥하고 구들을 덮이던 것을 생각하면 여기는 천당이다. 보인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월급을 타면 한 푼도 쓰지 않고 장롱에 꼭꼭 숨겨 두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일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몹시 흡족해하시었다. 불편한 것은 운전기사였다. 첫날 공항에 마중 나온 운전기사는 내가 선생님이라고 부르자 흠칫하더니 내 짐을 하나만 받아줘도 좋겠는데 그저 빈손으로 앞장서 가는 것이다. 이곳에 오면 모든 것이 비싸다는 말을 들은 나는 될수록 사계절의 옷을 녹색 범포 여행 가방에 꾹꾹 눌러 담아 가지고 왔다. 낡고 큰가방을 두손으로 안고 두개는메고 가는 나를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처럼 모두들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 보았다. 기사 아저씨를 따라가느라고 초봄인데도 땀을 뻘뻘 흘렸다. 주차장까지 가고 나니 진이 다 빠져 한 발자국도 더 걷기 싫었다. 돌아오는 길에 뒤 자석에 앉은 나는 바깥 구경에 신이 났다. 좀 전에 힘든 것은 금방 잊었다. 운전기사가 앞쪽에 달린 거울로 나를 흘금흘금 보는 것이 느껴졌다.   기사 아저씨는 내가 부엌에서 밥을 하는데 자주 들어왔다. 처음에는 배가 고파서 그러는 줄 알았다. 어르신들이 진지 들기 전에는 먼저 밥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은 아는지 그냥 서있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어떤 때는 일을 하다가 돌아설 때 갑자기 뒤에 서있는 그와 몸을 부딨친적이 여러 번 있었다. 몹시 불쾌했지만 기사 아저씨도 놀랐기에 넘겨 버렸다.   어느 날 기사 아저씨는 또 들어왔다. “청이 오기 전에 아줌마는 나와 친했어” “그랬군요. 같은 곳에서 왔나요.” “아니, 순자는 절라도에서 왔어, 음식을 엄청 맛있게 했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나를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나는 묵묵히 무를 석석 썰었다. “청이가 오는 바람에 순자가 시골로 내려 갔어, 그런데 청이처럼 이쁘지는 않았어" “본의 아니게 내가 순자란 분한테 미안하게 됐네요." “내 뜻은 그런 게 아니고 청이도 나하고 잘 지내자고" “제가 어디 잘못 한 게 있는가요. 경솔한 행동을 보였다면 죄송해요” 나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너 뭐니, 정말 못 알아듣니 아니면 일부러 그러니?” 언성을 높이는 기사 아저씨를 쳐다보다가 깝작 놀랐다. 기사 아저씨는 얼굴이 벌개서 씩씩 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운전기사는 나를 끌어안았다. 내가 몸부림칠수록 더 조여 왔다. 말을 하려 해도 목이 콱 막히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운전기사는 나를 다용도 방 쪽으로 끌고 가려 안간힘을 쓴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이처럼 절망에 휩싸여 본 적은 처음이다. 끌려가면서 나는 조리대 우에 있는 무엇을 잡았다. 그때 할머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운전기사는 흠칫하더니 나를 놓아 주고는 다용도실로 숨어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칼을 쥐고 있었는데 날이 선 칼날을 쥐고 있었다. 칼을 조리대 우에 놓자 핏줄이 끈 겼는지 손바닥에서 피가 뿜어 나왔다. 옆에 있는 흰 수건을 잡아당겨 둘러 감았지만 수건은 걷잡을 수 없게 뻘겋게 물들었다. 정신이 혼미해 오면서 나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저 멀리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내가 깨여 났을 때는 병원이었다. 겨우 한 시간이 좀 넘었다고 하는데 나는 무척 오래 잔 것 같았다.

  “좀 어떠니?” 할머니가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묻는다.그 옆에는 얼굴이 사색이 된 운전기사가 서있었다. “저녁밥을 해야 하는데…” 나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밥이 문제냐, 깨여 났으면 됐다” 의사가 다가와 맞던 링거를 다 맞으면 돌아가도 된다고 하였다. 빨리 와서 다행이지 큰일 날뻔했다고 했다. 모두 여덟 바늘을 꿰맸지만 손바닥이니 괜찮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내가 링거를 다 맞을 동안을 기다렸다가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밤이 깊었는데도 할아버지는 초조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 동에 사는 큰딸도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너무 미안해서 그냥 허리를 굽히며 ‘죄송합니다.’를 외우듯 그냥 반복했다. 큰 딸이 데리고 온 아줌마가 끓여 놓았던 잣죽을 내왔다 처음으로 할머니와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었다.   안방 옆에 있는 방을 내주면서 침대에서 자라고 했다. 몇 번 사양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나는 처음으로 시몬스 침대에서 잤다. 석 달은 손을 움직 일수 없기에 가만있어야 했다. 다음날부터 큰 딸 집의 가정부가 며칠 오더니 사흘 만에 새 가정부가 들어왔다. 아직 좀 더 벌어야 하는데 짐승 같은 운전기사 때문에 계획을 망쳐 버렸다. 운전기사가 원쑤처럼 느껴졌다. 태어나서 이처럼 사람을 미워해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운전기사의 품성을 아는 것 같았다. 나는 일을 찾아 하려 하였으나 할 일도 없었고 시키지도 않았다. 하루는 큰 딸이 찾아와 회사에 중국에서 손님이 오는데 통역 좀 해주면 안 되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된다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매일 읽던 책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화되여 나의 피와 살이 되였다. 통역할 때 성어에 역사 이야기를 섞어가며 하니 모두 재미있어하였다. 할아버지의 회사에 몇 번 가서 북쪽에서 온 실향민인 할아버지의 친구들에게 조선과 중국의 형세에 대해서 아는 만큼 이야기해 드렸다. 나는 대환영을 받았다. 부천에서 체육관을 짓고 있는 강 할아버지는 나를 자기 회사에 입사 시키겠다고 제의했다. 남쪽에 내려와 성공한 사업가들인 할아버지의 친구들은 서로 데려가겠다고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야, 이놈들아 좀 조용히 해” 위 좌석에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회사에 입사시키려면 우리 회사에 벌써 입사시켰지, 청이는 외국인이어서 지금은 안돼, 그러니 강의 들으려면 용돈이나 많이 줘”
  승일범 할아버지는 인천에 공장이 몇 개나 있는 그룹 회사다. 할아버지를 따라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한 나무로 합판을 만드는 공장, 자동차 타이어를 만드는 공장 등을 가보았다. 다른 할아버지들의 공장들도 그 부근에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들을 따라다니며 먼 훗날에 인생에 큰 도움이 될 많은 경험을 쌓게 되였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그들이 안정한 생활을 할 수 있게 제공한 그들이 우러러 보였다.   갓 한국에 왔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텔레비를 보는데 노동자들이 데모하는 뉴스가 나왔다. “노조가 문제야, 노동자들을 선동해서 데모하면 사회가 더 복잡해지는 걸 모르나…” 할아버지는 몹시 언짢아 하셨다.
“사장과 같은 월급을 받고 사장과 같은 차를 타겠다니 말이 되나,” “그러게요” 할머니가 맞장구쳤다. “저들은 하루 일하고 집에 돌아가면 식구들과 따뜻한 밥 먹고 여편네 끌어안고 자고 다음날 또 일하려 가면 되지만, 나 같은 사람은 밤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회사가 망하면 여기 11층 창문으로 뛰어내려야 하는데, 그들은 뭘 좀 알고 저러는지 에잇” 할머니는 얼른 채널을 돌렸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한마디 더했다. “회사가 망하면 나는 죽어야 하는데 저들은 다른 회사로 옮겨 가면 그만이지…” 할아버지는 흥분해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때 나는 속으로 월급 좀 올려 주면 될 것 가지고 그런다고 생각했다. 먼 훗날에 기업을 하면서 밤잠을 자지 못하고 회사일 때문에 노심 초사할 때 할아버지가 하시던 말씀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해 보지 않으면 함부로 말하면 안 되고 남의 말을 무턱대고 믿어서도 안된다.   나는 할아버지들의 도움으로 서울대 경제경영학과에 가서 방청할 수 있게 되였다.승일범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아버지도 한국에 왔다. 처음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친구들에게 중국어강의를 하다가 후에는 할아버지의 개인 비서로 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갈 때까지 옆에 계셨다. 나는 그 후로 아버지가 술 마시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보인이는 미국에 유학 같다가 뉴욕에서 살고 있고 우덕순 아저씨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 돌려받았다고 한다. 두분은 지금 서울 근교의 전원주택에서 만년을 보내고 계신다.   2020년 1월 2일 상해에서
서가인 약력 : 재한 동포문인협회 회원, 기업가. 소설, 수필 다수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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