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특약기자


빈사의 사자상(濒死狮子像)
  4시 40분에 루체른시에 내려와서 루체른의 호프교회 북쪽의 작은 공원 안에 가서 빈사의 조각상을 구경하였다. 빈사의 사자상은 덴마크의 조각가인 베르텔 토르발센(1770~1844)이 설계하고 1821년 독일 출신인 카스아호른이 조각했다. 이 조각상은 세계에서 이름난 기념비조각상가운데의 하나이라고 한다.  
빈사의 사자상

스위스는 중립국으로서 전쟁에 대해 중립적인 립장을 지켜 왔지만 과거 생활고에 시달리던 시절에는 높은 임금 때문에 용병으로 지원하는 국민이 많았다. 이 사자상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1792년 8월 10일 프랑스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玛丽·安托瓦内特)가 머물고 있던 궁전을 지키다가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스위스 용병들을 상징하는 사자가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사자의 발 아래에는 부르봉 왕가의 문장인 흰 백합의 방패와 스위스를 상징하는 방패가 조각되어 있다. 미국의 작가인 마크 트웨인은 이 사자기념비를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바위"라고 묘사하였다. 자연석인 거대한 바위 중간을 쪼아서 사자를 조각한 모습에 관광객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숙연한 분위기가 흐른다.

  카펠교와 수탑(廊桥水塔)   빈사의 사자상에서의 유람을 끝내고 우리는 카펠교 부근에 있는 시계상점에 들어가 들어갔다. 래일 이보다 큰 시계상점으로 간다기에 나는 상점을 한번 둘러 본다음 상점부근에 있는 카펠교 구경을 나갔다.
  루체른시는 루체른 호수에서 로이스강(罗伊斯河)이 흘러나오는 량쪽 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여러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그중 카펠교는 1333년에 로이스강에 놓인 다리로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나무다리로서 길이가 204m에 달하며 원래는 호수로 잠입하는 적들을 감시하기 위한 시설의 일부로 14세기에 지어졌으며 13세기에 건설된 요새화된 팔각형 수상 탑 앞을 지나가는데 눈에 잘 들어오는 우아한 형태로 루체른의 상징으로 되는 명물이다.
  카펠교는 오지기와로 경사진 지붕이 기둥에 지지되어 다리를 완전히 덮고 있는 복도모양으로 되었다하여 한어로는 廊桥라고 한다. 다리는 부유한 시민들의 후원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다리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붕의 들보에는 루체른의 역사를 나타내는 스위스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나 루체른 수호성인의 생애를 표현한 112점의 삼각형 판화 그림이 걸려 있는데 이 중에는 17세기 하인리히 베그만의 작품도 10여 점 있다.
카펠교와 수탑(廊桥水塔)

그림은 루체른 시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돈이 많이 들어 1726년에는 도시의 젊은이들이 작품을 파괴하는 일을 막기 위해 경비원을 세워야 했고 1741년 홍수가 난 이후에는 다리가 부분적으로 무너져 소실된 그림들을 다시 채워넣어야 했다.

1993년 8월 화재가 발생하여 다리는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재건축은 몇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으며 오늘날의 다리는 예전과 완벽히 똑같은 복제품이다. 그림 또한 3분의 2가 파괴되여 화가들이 사진을 참조로 다시 그려야 했기 때문에 그림 교체 작업은 훨씬 더 오래 걸렸다고 한다.   다리옆의 수중에 있는 높이 34m의 팔각형 석조의 ‘물의 탑’은 등대를 겸한 루체른 방위 탑으로 위급할 때에는 시민에게 경종을 울려 알리는 종각으로18세기에는 감시탑, 감옥, 고문실, 금고실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였는데 지금은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있다. 밤이 되면 다리 주변에 조명이 들어와 경관이 아름답다.   기차여행
18일 오전 7시반 우리는 루체룬에서 인터라켄(因特拉肯)을 향해 떠났는데 버스를 타고 8시반에 루체룬기차역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9시에 이 역으로부터 기차를 타고 기차여행을 하면서 인터라켄이란 작은 도시로 가게 되었다. 기차를 타려고 대합실로 들어 가 걸상에 앉았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희귀한 일도 있었다. 아니 글쎄 참새들이 집안에서 날아 다니다가도 우리가 앉은 걸상밑으로도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왔가갔다 하며 뛰어다니지 않겠는가? 모양새는 우리 지방의 참새와 하나도 다른점이 없었지만 사람들과의 경계심은 우리 지방의 참새들과 완전히 달랐다. 우리 지방의 참새들이 지금은 어디에 둥지를 틀고 사는지는 몰라도 예전에 농촌에 모두 초가집일 때에는 처마밑에 둥지를 틀고 살았지만 그래도 사람과의 경계심은 대단했다.   1957년도에 우리 나라에서는 참새전멸운동까지 벌렸으니 말이까. 그러나 이곳의 참새들이 사람과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집비둘기처럼 사람의 주위를 뱅뱅 돈다는 것은 사람들의 동물보호의식에 따른 결과라고 밖에 볼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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