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연변대학교 교수

연변의 여름은 한국 손님들에게 도적을 맞히는 법이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한국 손님들을 배동하다 보면 귀한 여름방학을 하루도 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태근교수와 같은 손님은 그야말로 벗이 먼 곳에서 오니 이 아니 기쁠소냐 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며칠 전 지승스님과 강교수가 할빈과 밀산을 에돌아 연길에 왔다. 누가 주선했는지 모르겠으나 연변병원 앞에 있는 영등포려관이라는 자그마한 모텔에 자리를 잡았다. 워낙 방이 토끼장처럼 비좁은데다가 랭방장치가 전혀 되여 있지 않아 떡시루처럼 찌물쿠었다. 지승스님은 워낙 격이 없이 털털한 사람이고 연길에 자주 오는 사람이지만 강교수는 연길에 처음 오는 양반이라 보기에 좀 민망했다. 허지만 이미 예약금을 지불했는지라 부득부득 다른 호텔로 자리를 옮길 수도 없었다. 나로서는 요리도 깔끔하거니와 더더욱 콩국수가 일품인 코스모식당으로 모시는 것으로 예의를 차리고 성의를 다할 수밖에 없었다.

2003년, 나는 한국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교에 가서 1년간 교환교수로 있었다. 그 때 여러 번 강교수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었다. 강교수는 어느 대학교 교수로 있을 때 민주화운동에 참가했는데 당시 독재정권의 눈치를 보던 재단에서 무단적으로 그를 제명해 버렸다. 그래서 그는 10여 년간 배재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강의하면서 복직을 하기 위해 소송을 걸어놓고 있었다. 강교수는 영어를 잘해 서방의 문학리론에 해박했고 소설가로서도 꽤나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겸임교수는 시간강사와 마찬가지로 정규직이 아니다. 우리 중국말로 “무쇠밥통”이 아니라서 대학사회에서는 찬밥에 도토리 신세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강교수는 반드시 승소(勝訴)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학생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했으며 자기가 맡은 강의에 열과 성을 다했다. 강교수는 종강(終講)을 하는 날이면 전체 학급 학생들을 데리고 대전을 가로지르는 류등천에 나가 삼겹살을 굽어 대접했다. 그는 외롭게 혼자 있는 사람이라고 나를 꼭 불러서 끼워주었다. 안주라야 삼겹살에 김치나 깍두기가 전부였지만 강교수의 껄껄껄 웃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학생들과 나누는 술맛이 일품이였다. 강교수는 우리 식구가 왔을 때도 사모님과 함께 근사한 횟집에서 대접해 주었다.
  한 번은 지승스님이 주지로 있는 충북 가산사(佳山寺)에서 단군제(檀君祭)를 지내는데 강교수의 승용차를 타고 가서 귀한 삼합 안주에 동동주를 실컷 마셨다. 신흥사의 주지스님은 지승스님과 절친한 친구라 귀한 삼합을 비닐박스에 서너 개나 담아가지고 왔는데 초저녁에 현지에 도착한 우리는 자정에 열리는 무당들의 굿을 보기 위해서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삼합은 삭힌 홍어와 삶은 돼지고기 삼겹살을 김치에 싸먹는 안주인데 그야말로 별미였다. 그 날 300여 명의 인파가 몰려왔지만 대체로 얌전한 신도들이라 식사만 하고 자리를 냈다. 결국에는 신흥사 주지스님과 강교수, 그리고 나까지 셋이서 허리띠를 풀어놓고 삼합 안주에 날이 밤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신흥사 주지스님이 마침내 강교수의 주량을 당하지 못해서 “술에는 장사가 없고 술에는 량이 있는 법이거든요. 옛날부터 일배불가(一杯不可)라 했으니 술 한 잔은 아예 말도 아니 되는 법이고 삼배소(三杯小)라 했으니 석 잔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법이며, 오배의(五杯宜)라 했으니 다섯 잔이면 맞춤하다는 말이 되겠고 칠배가(七杯可)라 했으니 일곱 잔이면 충분하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허지만 구배불가(九杯不可)라 했습니다. 벌써 아홉 잔이 아니라 열아홉 잔은 마신 것 같습니다그려. 실례지만 저는 좀 먼저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하고 슬쩍 일어나고자 하는데 강교수가 신흥사 주지스님의 손목을 덥석 잡아 앉히며
“아니, 중국 배갈이라면 몰라도 이 샛노란 동동주도 술입니까? 그럼 저도 좀 문자를 써봅시다. 옛날부터 술군은 오불고(五不顧)라고 했어요. 첫째로 청탁불고(淸濁不顧)라 했으니 청주든 탁주든, 배갈이든 양주든 가리지 않는 법이지요. 둘째로 원근불고(遠近不顧)라 했으니 술만 생긴다면 십리 길이든지 백 리 길이든지, 가깝고 먼데를 마다하지 않는 법이거든요. 셋째로는 “염치불고(廉恥不顧)”요, 넷째로는“처자불고(妻子不顧)” 라고 했구만요…”
하고 동동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삼합 한 점을 김치에 싸서 넙죽 입안에 넣는데 신흥사 주지가 저도 몰래 귀가 솔깃해서
“그럼 다섯째는 뭐지요?”
하고 채근하자 강교수는
“생사불고(生死不顧)지 뭐겠소! 주지스님, 술친구가 오래 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혼자 훌쩍 떠나면 인사가 되우? 나와 김교수만 이 가산사 깊은 골에서 술독에 빠져 죽어라 그 말씀이시우?”
하고 짐짓 화를 냈다. 신흥사 주지스님은 하는 수 없이 주저앉아 술잔을 잡고 말았다.

  기실 나도 여러 번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뜨려고 하였지만 번마다 강교수가 그 우악스러운 손으로 내 팔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그야말로 그 날은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셨다.
  또 한번은 강교수가 국문과 학과정으로 일하는 정문권교수와 나를 조용히 불러놓고 귀한 소곡주를 구해 왔으니 퇴근하는 길로 자기네 집에 오라고 했다.
  그 무렵 강교수는 류등천기슭에 있는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집은 낡은 기와집인데 파란 잔디를 입힌 앞뜰이 꽤나 넓고 운치가 있었다. 정교수의 자가용을 타고 강교수네 자택 앞에 이른즉 불현듯 개 짖는 소리가 온 동네를 들썽하게 만들었다. 두 놈인 것 같았다. 한 놈은 철책(鐵柵) 안에 갇힌 사자나 범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방불케 했고 한 놈은 앙칼진 암캐의 소리가 분명했다. 우리는 감히 벨을 울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고개만 빼들고 담장 안을 주억거리는데 집안에서 거쿨진 체격의 강교수가 큰소리로 개를 물리치고 대문을 열었다.
  강교수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대문 안에 수위(守衛)처럼 진돗개 두 마리가 량쪽으로 갈라서는데 두 놈 다 두 귀가 뾰족하고 털빛이 새하얀 진돗개였다. 왼편에 있는 암컷에 비해 오른 편에 있는 놈이 껑충 더 큰 수컷이었다. 수컷은 시답지 않다는 눈길로 나와 정교수를 흘끔흘끔 쏘아보면서 컹컹 짓다가
“이 놈 수돌아, 좀 가만있지 못할가!”
하고 소리를 치는 강교수의 매서운 눈길에 기가 죽어 꼬리를 끼고 굴속으로 들어 가버렸다.

  우리 셋은 잔디밭에 술상을 놓고 둘러앉았다. 강교수는 며칠 전 우연히 한산에 갔던 김에 소곡주 두 통을 사왔다고 하면서 나를 보고
"우리나라에도 안동소주요, 문배주요, 소곡주요 하는 전통주가 많거든요. 그 중에서 나는 한산소곡주를 제일로 치거든요. 천오백년 전 백제왕실에서 즐겨 마셨다고 하는데 이 소곡주 맛을 들이면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른다고 해서 일명 '앉은뱅이술"이라고도 하지요."
하고 내내 싱글벙글거렸다.

  과연 구수하면서도 톡 쏘는 맛이 있어서 술맛이 일품이었다. 나는 술잔을 받아 마시면서도 진돗개 쪽으로 자꾸 눈길이 가게 되였다. 나는 강교수의 허락을 받아가지고 돼지갈비뼈 두개를 집어 들고 일어나 하나는 암컷에게 던져주니 그 놈은 덥석 받아 물고 꼬리를 살랑살랑 저었다. 그런데 갈비뼈 하나를 수컷에게 던져주려고 하자 그 놈이 와락 사슬을 채며 달려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바삐 갈비뼈를 던져주고 술상에 돌아와 앉았다.
“저 놈이 왜 저렇게 사납지요?”
강교수는 허리를 잡고 껄껄껄 웃다 말고
“김교수도 개를 좋아할 줄은 몰랐구려. 우리 집에서는 저 암컷을 참돌이라 하고 저 수컷을 수돌이라 하지요. 두 놈 다 2년 전 친구네 집에서 강아지 때 데려왔는데 내게는 천하에 둘도 없는 친구지요. 헌데 저 수돌이란 녀석이 워낙 성질이 사나워서 대문밖에 조금만 동정이 있어도 무섭게 짖어서 동네 어른들 보기가 좀 민망하지요. 우리 다섯 식구들에 대해서도 유독 나만을 왕으로 모신단 말씀이요. 먹이는 우리 어머니와 마누라가 주는 건데 걸핏하면 으르렁거리면서 대들지를 않겠어요. 우리 마누라는 두 번이나 물릴 번했거든요. 하지만 난 찬밥 한 덩이 던져준 적 없지만 나만 보면 꼬리를 흔들면 반기거든요. 가장(家長)을 알아주니 명견이 아니겠소. …

  헌데 저 수돌이란 녀석이 사달을 친건 지난 봄이지요. 글쎄 먹이를 주는 우리 로모에게까지 달려들지 않았겠어요. 내가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 보니 온 집안 식구들의 얼굴에 전혀 화색이 없더라구요. 내가 식사를 끝내고 밥상을 물리자 우리 마누라와 어머니, 두 아들놈까지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내 앞에 와서 마주 앉지 않겠어요. 서로들 눈치를 보더니 우리 마누라가 마침내 말을 꺼내더라구요. 수돌이란 녀석이 오늘은 먹이를 주는 어머님까지 물어놓았으니 다른 집에 주든지, 처분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였어요. 황차 너무 짖어서 이웃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는 것이였어요. 그 때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시우?
  이 염량세태(炎凉世態)에 강태근이를 알아주는 사람이 세상에 없는데 저 수돌이 녀석만이 알아준단 말이다. 그래도 저 수돌이 녀석을 남에게 주겠느냐? 이 한 마디 말에 모두들 잠자코 있는데 우리 로모가 앉아 있다가 ‘난 별로 다친 데도 없어. 너희들 애비 말이 맞아. 망할 놈의 세상이지. 요즘 세상에 너희들 애비의 인금을 알아주는 게 저 수돌이 녀석밖에 더 있더냐?’ 라고 말씀해 주셔서 수돌이 녀석을 그냥 우리 집에 두게 되였지요.”
  정교수와 나는 한바탕 웃었다. 하지만 뒤끝은 그 어떤 이름 못할 련민이 밀물처럼 가슴에 번졌다. 저 타고난 천부와 문학적 재간을 가진 분이 교수직에서 제명되고 그 동안 이 랭혹한 세상에서 얼마나 큰 상실감과 소외감을 느끼면서 살아왔을가? 그야말로 오불고(五不顧)라 할가, 술고래라 할가, 밤낮 술로 스트레스를 풀며 살아오는 강교수의 슬픔과 고충을 우리 모두 다는 알지 못한다. 한 마리 개에게서나마 빼앗긴 자신의 인간적인 자존과 믿음을 찾고자 했던 강교수가 아닌가.
  사실 한국에 가보면 명문대를 나온 박사들이 불혹(不惑) 지어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도록 시간강사로 떠돌아다니는 애처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대학가에서 머슴처럼 혹사를 당하고 착취를 당하지만 어디에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는 시간강사들, 쥐꼬리만한 강의료를 들고 오는 그네들은 가정에서도 남편 되고 애비 된 자의 존엄과 권위를 세울 수 없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강교수는 그래도 인간적인 자존과 권위를 알아주는 수돌이가 있다. 또 수돌이의 일장풍파를 통해 날개 꺾인 가장의 존엄과 권위를 다시 인정하고 따르게 된 가족이 있다.
  그 날 코스모식당에 좌정하자 나는 술 한 잔 권하고 나서 수돌이는 잘 있는가고 물었다. 강교수의 대답이 걸작이다.
“우리 집 수돌이를 기억해 주어 고마우이. 그 놈이 나를 믿어주고 인정해 준 덕분에 내가 복직을 한 게 아니겠어요. 이젠 그 놈도 할배가 되였어요. 이제 나와 함께 천당에 갈 것일세.”

  아무튼 강교수와 만남을 통해 인간은 신뢰와 존엄을 먹고 사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였다.   
김호웅 약력 : 1953년 연길 출생,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교, 한국 한양대학교, 배재대학교, 한국국제교류재단 객원교수 역임. 현재 연변대학교 교수, 박사생지도교수,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중국 4대 국가문학상의 하나인 “준마상”(2012)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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