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연변대학교 교수

 
김호웅 약력 : 1953년 연길 출생,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교, 한국 한양대학교, 배재대학교, 한국국제교류재단 객원교수 역임. 현재 연변대학교 교수, 박사생지도교수,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중국 4대 국가문학상의 하나인 “준마상”(2012) 등 다수 수상.

저는 속된 말로 하면 글쟁이요, 점잖은 말로 하면 일개 문학자일 뿐입니다. 가끔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면 예전에는 철필이나 볼펜으로 몇 글자 적었고 요즘에는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밤낮 다루는 게 빛깔도 냄새도 맛도 없는 문자기호입니다. 문학도 언어예술이라고 하니 저도 예술인으로 자처해도 무방하겠지만 미묘한 오선보를 그리고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다루는 음악가들, 특히 동양화나 서양화를 그리는 화가들을 보면 기가 죽습니다. 사실 저의 음악수준이라야 고작 간보(簡譜)를 보고 행진곡이나 시창할 수 있는 수준이고 저의 미술수준이라야 고작 코흘리개들을 달랠 수 있는 병아리나 강아지를 그리는 수준 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술인들을 마음속으로부터 경모해서 연변의 원로 가야금 연주가인 김진 선생네 자제분들과 각별히 친하게 지낸 적 있고 1970년대 초반 전쟁준비로 동희철 작곡가와 함께 연길공원 뒷산에서 방공호(防空壕)를 판 적 있는데 어설픈 가사를 써가지고 곡을 붙여달라고 졸라댄 적도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 예술인들 중 두 화가와 상종하게 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데 이분들에게 찬미가 될지 루가 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웃동네에 사는 문외한이 예술인들을 믿고 짓거리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용서해 주기 바랍니다.

제가 화가들과 상종하게 된 것은 좀 불순한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80년대 말, 저는 30대 중반에 연변대학의 추천을 받고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마땅한 선물을 마련할 수가 없어 큰 걱정이었습니다. 모태주, 오량액과 같은 귀한 술이나 인삼, 녹용 같은 약재는 마련할 수 없는, 고작 100여원의 월급을 받는 알량한 강사가 아닙니까. 저를 초청해준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윤동주 연구가)와 저에게 장학금을 제공할 동훈 선생(한국 통일부 전 차관, 연변대학교 고문)께는 아무래도 값진 선물을 마련해야 하였습니다. 고육지계로 연변 화가들의 그림 두어 폭을 갖고 가기로 하였습니다.
  연변인민출판사에 근무하던 큰형님의 주선으로 장홍을 화백에게서 수묵화 한 폭을 얻었습니다. 구름 덮인 백두산을 그린 작품이었는데, 흰 구름에 휘감긴 백두산이 한결 더 웅장하고 신비하게 안겨와 좋았습니다. 저와 집사람이 토끼장만한 전셋집에 불고기를 해놓고 조촐한 술상을 마련했더니 장홍을 화백은 저의 큰형님과 더불어 장밤 대작(對酌)을 하면서 동서고금의 문학과 예술을 논하는데 문학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문학의 백과사전으로 자부하는 저의 큰형님에게 조금도 꿇리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장홍을 선생은 연변의 문학지에 세계적인 화가들과 명화(名畵)들을 소개하는 글을 발표하고 있었는데, 그 미끈한 문체도 좋았지만 명쾌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분석이 일품이었습니다. 특히 저는 1980년 초반 장홍을 화백이 그린 《아, 두만강이 풀린다》라는 그림을 좋아합니다. 이 그림은 지금 한국 청화대에 걸려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화폭 저쪽의 먼 산발들이 여전히 흰 눈을 떠이고 있는데, 새봄을 맞은 두만강이 산더미 같은 성엣장들을 싣고 소리를 치며 바다로 흘러들고 있지요. 오늘 다시 이 그림을 보면 두만강지역의 역사적인 해동(解凍)과 화해, 합작과 번영의 내일을 예감하고 그것을 장쾌한 화폭에 담은 장홍을 화백의 선경지명과 예술혼에 새삼스럽게 매료됩니다.
  하도 술을 좋아해 너무 일찍 하늘나라에 간 장홍을 화백, 조선예술영화 《금희와 은희의 운명》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어글어글한 눈빛에 시원한 이마, 마르크스처럼 뒤로 길게 넘긴 머리, 연변인민방송국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인형처럼 예쁘게 생긴 부인과 함께 손 잡고 연길 광명거리를 거니는 장홍을 화백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 모두의 가슴을 쓸쓸하게 합니까?   아무튼 장홍을 화백이 그린 백두산을 보고 역시 화가였던 오무라 마스오 교수의 부인 아키코 여사가 국보급 보물이나 얻은 듯 “아링아도우 고자이마스!”를 연발하던 정경이 지금도 눈앞에 보는 것 같습니다그려.
  그림 한 폭은 연변대학교 예술학원 정동수 교수에게서 구했습니다. 현재 연변인민출판사 미술편심으로 일하는 남용철씨와 저는 총각시절의 친구요, 편집시절의 동료였는데 그가 바로 정동수 교수의 제자였습니다. 남용철씨는 저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정동수 교수에게 호랑이 한 마리를 그려달라고 어려운 부탁을 드렸습니다. 저는 이름이 호랑이 호(虎)자에다가 수컷 웅(雄)자인지라 호랑이 한 마리를 그려서 장학금을 제공해줄 동훈 선생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연변 화가들 중에 정동수 화백이 호랑이를 잘 그린다는 말을 들었고 그래서 남룡철씨를 통해 정동수 교수에게 청을 드린 겁니다.
  십여 일 만에 그림이 다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용철씨를 앞세워가지고 찾아갔는데 그 무렵 정동수 화백은 예술학원 남쪽 담장 너머에 있는 아파트 2층에 살고 있었습니다. 정동수 화백은 멋쟁이 장홍을 화백과는 달리 평상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깎은 점잖은 선비였습니다.
  정동수 화백은 벽에 비스듬히 세워놓은 호랑이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화폭 속의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우리의 머리 위로 훌쩍 날아올 것만 같았습니다. 드센 바람에 밀려 고삭은 잡목들이 뒤쪽으로 쏠렸는데 그 속에서 싯누런 호랑이 한 마리가 내달아오는 것입니다. 뒤쪽으로 불어오는 바람과 앞으로 질주하는 호랑이가 어울려 그야말로 동감(動感)이 넘쳤습니다. 임금 왕(王)자가 찍힌 머리를 번쩍 쳐들고 두 앞발은 천근같은 무게로 엇걸었는데 줄무늬가 선명한 유연한 허리에서 우러나는 의젓함이 굵고 긴 꼬리로 이어지면서 천지를 휘두를 듯한 기개가 넘쳤습니다.
“마음에 드시오?”
정동수 교수가 어줍게 웃으며 남용철씨와 저를 번갈아보는데 남용철씨가 먼저 이리저리 그림을 다시 뜯어보더니
“산중지왕 호랑이의 위세가 잘 살아난 것 같습니다.”
라고 했고 저도
“참 마음에 듭니다. 호랑이가 바람을 맞받아 달려오니까 더더욱 동감이 넘치고 호랑의의 육중한 양감(量感)도 더더욱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하고 유식한 체를 했더니 정동수 교수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 그림이 주인을 제대로 만난 것 같구만. 용철씨가 떼를 쓰는 바람에 강의를 하고 돌아와 짬짬이 그렸는데 나도 모르게 그림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더라구요. 김선생과 약속한 그림이 아니라면 내 집에 그냥 두고 싶소. 이왕 약속한 일이니 일본의 명문 와세다대학에 가서 좋은 공부를 하기 바라고 이 그림을 선물로 내놓겠소. 헌데 연길에는 표구(表具)를 잘 하는 가게가 없으니까 북경이나 장춘에 가서 표구를 하면 좋을 거요.”
하고 장춘의 길림예술학원 근처에 있는 표구가게를 소상히 알려주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정동수 교수를 모시고 거리에 나가 술 한 잔 대접하고자 했지만 한사코 사양하는지라 거듭 절을 하고 귀한 그림을 받아 안고 도망치듯 나와 버렸습니다. 후일 저는 남용철씨가 귀띔해 주는 대로 선지(宣紙, 서화에 쓰이는 중국종이) 한 묶음을 사서 보낸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면 꼭 한 번 모시리라 다짐했지만 여태껏 한 번 찾아뵙지도 못했습니다. 이처럼 요사스러운 게 세상인심인가 봅니다.

  그 뒤 장춘에 가는 길에 호랑이 그림을 반듯하게 표구해왔음은 물론인데 이 진품에 사족(蛇足)을 달았음은 일본 동경에 가서 동훈 선생 앞에 내놓았을 때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엎지른 물이요, 그야말로 후회막급이었습니다. 동훈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정비서관(司正秘書官)으로 일했기에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사절들이 들고 온 선물들을 많이 보아왔는지라 미술작품을 보는 남다른 안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동훈 선생은
“이거 호랑이가 호랑이를 가지고 왔구만요”
하고 농담을 하고 나서 그림을 보더니
“참 잘 그린 그림입니다. 호랑이의 형태는 물론 그 생명력까지 고스란히 화폭에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 김홍도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를 호랑이 그림의 백미로 칩니다. 김홍도는 바늘처럼 가늘고 빳빳한 붓으로 터럭 한올 한올을 무려 수천 번 반복해서 세밀하게 그려냈는데, 그런 극사실(極事實) 묘법으로 고양이과 동물 특유의 민첩하고 유연한 생태까지 실감나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큰 붓질로 여백의 미를 보여주면서 호랑이의 혼과 위용만을 두드러지게 드러냈습니다. 이게 중국화의 묘미가 아니겠습니까?”
한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선물을 받을 분도 마음에 든다고 하니 한결 신바람이 나서 정동수 교수는 중앙민족대학 예술학과에서 중국화를 전공한 분이라고 횡설수설 말씀을 드리기에 바빴는데, 홀연 다시 그림을 보던 동훈 선생의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연했습니다. 동훈 선생은 그림의 좌편 상단을 가리켰습니다.
“이런 좋은 작품에다가 누가 누구에게 드린다는 걸 쓰지 않는 법이라네. 이 좋은 그림을 나 동훈 한 사람만 보아서야 되겠습니까?”

  실은 장춘에 가서 표구를 할 때 표구사(表具師)에게 일부러 부탁을 해서 “존경하는 동훈 선생님께, 제자 호웅 삼가 드림”이라는 글귀를 적어 넣었던 것인데, 이게 사족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동훈 선생이 아쉬워하는 표정을 보면 값어치가 반감이 된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을 해도 정동수 화백에게 얼마나 죄송한지 모르겠습니다.
  두 화백의 소중한 그림을 받은 지도 어언 20년이 넘었습니다. 강산이 두 번 변했으니 요즘 세월에 이름난 화가를 찾아가 “그림 한 장 주십시오.” 하고 비위 좋게 달려들 놈도 없겠지만 화가 제씨들도 그림을 쉽게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시장경제시대요, 물물교환의 시대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장사속이 있으니까요. 이젠 호랑이 담배 피울 때 일이 되었지만 공부하러 해외로 나가는 후배를 위해 흔쾌히 그림을 내놓고 열흘 품을 팔아 호랑이를 그려주던 두 원로 화백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시울이 젖어듭니다.
  청정바다처럼 순수했던 두 화백의 그 아름다운 내면 풍경, 그들의 예술혼이 담겨있는 그림 한 폭은 일본 동경 근교에 살고 있는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 댁에, 또 한 폭은 한국 서울 강남에 살고 있는 동훈 선생네 자택에 정히 걸려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일본이나 한국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이 두 폭의 그림을 사진이라도 찍어가지고 돌아와 예술인 여러분과 더불어 감상하고 사진판이라도 저의 서재에 걸어놓고 싶습니다. 후배에 대한 두 화백의 사랑과 믿음이 깃들어 있고 그림 또한 다시 구할 수 없는 걸작이기 때문입니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