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 소설가

요즘 세간의 모든 이목은 무한에 쏠려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병독(武汉新型冠状病毒)이 휩쓸어 사상 초유 도시봉쇄의 비극을 맞이한 무한, 병마와 간거한 고전을 치르고 있는 무한의 시민들과 의무일군들에 대한 주목과 성원의 손길들로 무한이 세상의 중심에 섰다.  

사실 중국의 고도(古都) 무한에는 지난 세기 30년대 우리의 겨레들의 반일의 자취가 력력히 서려 있다.

 

필자가 수년전에 발표, 출간했던 “한락연 평전”에는 무한의 풍광과 무한에서 중국인민과 손잡고 항일의 함성을 커다랗게 울렸던 겨레 반일지사들의 활약상이 세세히 그려져 있다.

그중 일부를 발췌해 본다. 아울러 무한의 원상복구와 무양함을 빌어 본다.
무한 보위전
한수강과 양자강의 합수목에 자리한 중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
무한은 한구, 한양, 무창 등 린접 된 3개 도시가 합쳐져 이루어진 대도시이다.
무한은 중국 력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삼국연의”에 나오는 적벽(赤壁), 형주(荊州) 등 력사 현장의 대부분이 무한 주위에 모여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서구열강의 조계지가 무한에 설치되고, 내륙진출을 위한 거점 내륙항으로 대외에 개방된다. 그 결과 무한은 장강 수운의 리점을 활용해 발전을 구가하며 한때 상해에 버금가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 곳은 또 중국현대사의 주무대로 되여 두드러진 역할을 해왔다.
 
30년대 무한의 모습

중국민주혁명의 발상지로서, 신해혁명의 기폭제가 된 무창봉기도 이 지역에서 시작되였다. 그 연장선에서 중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실패하기를 반복하던 와중에 1911년 10월 10일, 무창에서 거둔 혁명군의 첫번째 성공은 불과 1개월 만에 중국 전토로 확산되며 청조의 멸망을 불러왔다.

중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로동투쟁이였던 1923년의 총파업에서는 한구의 로동자들이 선두에 섰다.
모택동 주석은 무창에서 농민운동강습소를 운영했다. 그곳이 바로 1927년 중국공산당 제5회 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된 곳이다.
또한 바로 이 곳에서 한민족의 반일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단체- 조선의용대가 1938년 10월10일 결성되기도 했다.   에스빠냐의 수도의 이름을 따서 “동방의 마드리드”로 불리고있는 무한은 당시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의 중심부에 놓여있었다. 1937년 초겨울, 한락연은 10여년 만에 귀국하여 프랑스로부터 중국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학교를 꾸렸던 봉천도, 사진관을 차렸던 할빈도, 자신의 작품이 정자로 일떠서있는 치치하르도, 태줄을 묻은 고향 룡정도 아니였다. 그의 발걸음은 곧바로 중국내륙의 중심 호북성 무한으로 향했다.

 
무한에서의 한락연

당시 외국 류학을 다녀온 미술가들은 대부분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것이 상례였다. 상해미술전문학교 같은 쟁쟁한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프랑스 류학까지 다녀온 한락연의 경력으로 볼때 마음만 먹었다면 대학가에서 교수 자리 하나를 구하는 것쯤은 어려운 일은 아니였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이 우심화되는 상황에서 구국의 일념으로 불탔던 한락연은 일신과 가족의 안위를 돌볼 사이가 없이 전운이 감도는 무한으로 성큼 발걸음을 내딛었다. 무한에서의 한락연   누른 빛의 장강과 푸른 빛의 한수가 만나는 이 곳에서 한락연은 동북구망총회(东北抗日救亡总会)를 찾아갔다.
“동북구망총회”는 공산당의 령도아래 결성된 항일민족통일전선 조직이였다. 전국인민들의 항일의 호성이 드높은 가운데 주은래의 직접적인 령도 아래 설립되였다. “동북구망총회”는 시종 민족통일전선정책을 관철하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동북의 광복을 위한 투쟁을 벌려 나갔는바, 중화민족의 독립과 해방사업을 위해 중요한 력사적 기여를 한 단체이다.
조직은 중공중앙장강국에 속했는데 주은래의 직접적인 령도하에 있었다.
서기직을 맡고있었던 류란파(刘澜波)가 주은래에게 한락연이라는 인물에 대해 소개했고 주은래의 동의를 거쳐 “동북구망총회”사업에 참가하게 하였다.
  한락연은 “동북구망총회”의 선전과 련락사업을 담당하게 되였다.
“동북구망총회는 중국 관내 동북민들을 항일의 대렬에 동참시키기 위한 선전간행물로 “반공(反攻)”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있었다.
한달에 두기씩 나오는 반월간잡지였다. 공산당의 항일정책을 선전하며 일제침략을 규탄하는 보도를 해왔던 잡지는 장학량 장군의 동북군 각 부대 산동, 화북에 이르기까지 최고 3000부를 발행하여 배포했다.
군사장령들과 백성에 이르기까지 위상이 높고 발행부수도 높았던 이 잡지의 표지에는 한락연의 그림이 자주 등장했다.
 
한락연의 그림이 걸렸던 한구 세관청사의 옛 모습
이외에도 한락연은 포만된 열정으로 항일선전대가 만든 연극 “채찍을 버려라”의 무대배경도 그렸고 “장고봉의 어제와 오늘”등의 론평을 발표하여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그가 창작한 “노예살이를 원치 않은 인민들은 일떠나 일본제국주의를 소멸하자!”라는 거폭의 유화가 한구(汉口)의 표지성 건물인 세관청사에 걸렸고 “전민항전” 이라는 유화는 황학루(黃鹤楼)에 높이 걸렸다.

황학루. 강서성 남창의 등왕각(滕王阁), 호남성 악양의 악양루(岳阳楼)와 함께 “강남 3대 루각”으로 꼽히는 루각이다. 루각을 세운 시기는 저 유명한 삼국 시대로 거슬어 오른다. 이 루각은 오나라 왕 손권이 촉나라 류비와의 전쟁을 대비해서 세운 망루이다.
지금도 황학루 가장 높은 곳에는 당시 손권의 강한 의지가 남아 있어 “촉천극목(楚天极目)”이라고 적힌 편액이 루각의 처마에 걸려 있다. 초나라의 하늘을 끝까지 보겠다는 뜻의 성구이다.

  황학루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쟁과 화재의 세레 속에 7차례나 소실되고 중건되기를 반복하면서 군사들이 망을 보던 장소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관망하는 루각으로 거듭났다. 당대와 송대에는 내로라하는 문사들이 황학루에 대해 례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 중 당나라 시인 최호(崔颢)가 쓴 시 “황학루”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昔人已乘黄鹤去,此地空余黄鹤楼。
黄鹤一去不复返,白云千载空悠悠。
晴川历历汉阳树,芳草萋萋鹦鹉洲。
日暮乡关何处是?烟波江上使人愁。
  옛날의 선인은 황학을 타고 가 버리고,
이곳 황학루만 텅 빈 채 남아있네.
황학은 한번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고,
흰 구름은 천년 동안 부질없이 떠도네
한양 청천각의 푸른 나무는 력력하고
앵무주의 향기로운 풀은 무성하네
날이 저무는데 고향은 어드메뇨
안개 자욱한 강은
보는 사람을 근심에 잠기게 하네
  시성 리백도 그의 작품을 보고 황학루에 대해서는 이보다 더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며 붓을 내려 놓았다는 일화가 있다. 황학루 초입에서 만나는 각필정(搁笔亭)이 바로 리백이 붓을 내려 놓았다하여 이름 지어진 곳이다.  

짓기를 즐겼던 모택동 주석도 역시 황학루를 두고 지은 률시가 있다.

  菩萨蛮•黄鹤楼

黄鹤知何去?
剩有游人处。
把酒酹滔滔
心潮逐浪高
  여기 있던 황학은 어디 갔느뇨
옛사람 노닐던 곳만 아직 남았네
술잔 들어 흐르는 강물에 잔을 씻으니
내 마음도 강 물결 따라 넘실대누나
  菩萨蛮·黄鹤楼
施鸿鄂 - 毛泽东诗词-蝶恋花 演唱版

지금의 황학루는 1884년 청나라 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85년에 재건한 것이다. 높이가 55.47메터로 겉에서 보면 5층이지만 막상 오르고 보면 내부는 9층으로 이뤄져 있다.
  루각에 오르면 무한 3진(武汉三镇)이 한눈에 들어 온다.
4층에는 리백, 백거이, 악비, 최호 등 력대명인들이 황학루에 대해 쓴 작품이 전시돼 있다.
  황학루에는 자자한 명성만큼 재미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황학루 터에 주막이 있었는데 주인장은 어느 날 찾아와 공짜 술을 퍼마시는 도사를 싫어하는 기색없이 환대해 주었다.
거나하게 한잔 걸치고 길을 떠나게 된 도사가 밀린 술값이라며 주막벽에 누른 빛갈의 학 한 마리를 그려 줬다.
"손님이 올 때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시오. 그러면 황학이 나와서 춤을 추며 주흥을 돋울 거요." 도사는 이런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후로 주막의 주인장이 손뼉을 치고 노래를 할 때마다 학이 나와 춤을 추었는데, 이것이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면서 주막이 크게 번성하였다고 한다.
10년 뒤 도사가 돌아와서는 피리를 불어 학을 불러내더니 그 학을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후 부자가 된 주인이 도사와 학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주막을 헐고 “황학루”라는 이름의 루각을 세웠다는 전설이다.

이 루각에 대해 필을 크게 할애 해 적는 것은 리백(李白), 백거이(白居易), 최호(崔顥), 륙유(陸遊), 장거정(张居正) 등이 황학루를 읊었으며 황학루에 자신의 작품을 거는것으로 그 인끔을 뽐냈고 그들의 자취가 서린 그 곳에 한락연의 그림도 걸렸다는 바로 것이다. 한락연의 예술적 성취의 높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황학루, 그 고풍어린 유명 건물에 높이 걸린 한락연의 그림들은 민중들의 항일의지를 크게 격려했다. 전란 속에 그 그림들은 사라지고 지금 찾을길 없다. 하지만 당년의 무한사람들은 모두가 황학루에 높이 걸렸던 그 그림에 대해 기억이 생생하다.

 

1938년에 화북, 화동대지에 까지 일본군의 마수가 뻗쳐들었다.

일제는 상해 남경을 거쳐 화중의 중심지 무한을 겁박(劫迫)하려 들었다.
그에 따라 항전의 수도— 무한은 위험에 처하게 되였다.
일본천황은 륙군성에 지령을 내려 중국전장인 한구를 진공하여 가을이 다가올 때까지 싸움을 끝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일본침략자들은 1938년 6월, 25개사의 대병력을 수륙 다섯갈래로 풀어 무한에 대한 전면진공을 개시하였다. 국민당의 남북 두 전선은 패배의 운명에 떨어지고 장강의 요새들이 련이어 붕괴되였다.
“항전의 수도 무한을 보위하자”
절체절명의 순간 무한군민들의 함성이 터져올랐고 무한 삼진이 산악같이 일떠섰다.

잡지 “반공(反攻)”에 심심찮게 등장한 한락연의 그림들은 이 시기 항전에 나선 전사들의 의지를 직관적으로 잘 보여준다.
(중략)
 
무한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 창립사진

8월, 전면항일1주년기념 홰불시위가 전 무한을 무대로 펼쳐졌다.

중, 조 애국청년들을 이끌고 류란파, 우의부와 한락연이 시위에 참가했다.
10여만이 떨쳐 일어난 시위에서 “중공호북성위”, “중화민족선봉대총대부”, “동북항일구망총회”의 기발이 펄럭이였다.
시위행렬에는 주은래, 동필무, 엽검영 등 령도동지들이 선두 지휘하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홰불빛은 도도한 양자강을 물들였고 사람들의 격앙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중에서 한락연은 “조선민족전선련맹”기발도 보았다. 무한에 집결한 우리 조선민족동포들도 중국인민들과 함께 공동의 적에 항거하고 있었던것이다

그 무렵 무한지역에서 피끓는 조선인 젊은이들도 일제에 맞서 궐기해 나서고 있었다. 1938년 10월10일 무한시 무창(武昌)구 자양로(紫阳路) 234호 대공중학교 강당에는 120여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군청색 군복을 입고 비장하게 서 있었다. "우리는 식민지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는 수천 수백만 동포를 일깨워 조선의용대의 기발 아래 결집시키고, 파시즘 군벌의 압박하에 전 민중과 련합하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여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를 이루려 한다.
조선의용대의 기발을 높이 들고 용감한 중국 형제들과 손을 맞잡아 필승의 신념으로 정의의 항일 전선으로 용감히 전진하자."
주먹을 불끈 쥐고 비장하게 선서하는 대원들은 모두가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졸업생들이였다.
강단에는 기라성같은 인사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창립식에 특별히 주은래와 곽말약이 중공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조선민족혁명당 대표 김원봉, 조선민족해방동맹 김성숙, 조선청년전위동맹 김학무, 무정부주의자 류자명,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장 진성(陳誠), 주은래, 곽말약등이 대원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창립식에서 주은래는 동방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에 대해 호소하는 연설을 했고, 곽말약은 문호답게 축시로 조선의용대의 무운장구를 기원했다.
창립식이 열리는 동안 밖에서 가끔 포성이 들려왔다. 포성 속에 젊은이들은 구호를 제창했다.
"하나, 중국에 있는 조선혁명력량을 총동원하여 중국항전에 참가한다. 하나, 일본의 광대한 군대가 동북의 약소민족을 침략한 것에 공동으로 일본군벌을 타도한다. 하나, 조선혁명운동을 태동하여 조선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한다."
창립식이 끝난 뒤 경축행사도 열렸다. “아리랑” 합창과 “두만강변”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약산 김원봉이 경축무대에 섰다. "과거 중국의 혁명 때마다 조선인민은 참가하였고, 특히 동북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다. 조선은 분명한 태도로 항전에 참가하고 있다. 우리가 적다고 여기지 말라, 삼천만 민중 모두가 우리의 력량이다."  
의용대 대장 김원봉

조선의용대의 창립지와 창립기념년회가 열렸던 곳은 지금의 호북성 총공회 자리로 추정된다.

조선의용대의 주요 활동은 일본군에 대한 정보수집, 일본군 포로 취조 및 교육, 대일본군 선전공작, 후방교란, 중국군 및 조선, 중국민중에 대한 선전활동이였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포탄이 터지고 초연이 자오록이 피여오르는 무한 시내로 투입됐다.
국민당 고위인사들이 슬그머니 무한을 빠져나갔지만, 의용대 대원들은 무한 중심가에서 반일 선전전을 벌렸다. 그들은 사다리를 메고 다니며 담벽과 길바닥에 콜타르로 선전구호를 쓰기 시작했다.
“일본 형제들이여, 착취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말라”
“총구를 상관에게 돌려라”
“병사들은 전선에서 피를 흘리고, 고위장령은 후방에서 향락을 누린다”
 
항일표어를 쓰고있는 의용군 전사들

이 광경이 곽말약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의용대원들은 네댓명 씩 한조가 돼 콜타르나 페인트로 거리나 벽에 대적 표어를 쓰고 다녔다. 모두 조선의용대뿐이였다. 무한함락 직전 대적표어를 쓰고있는 것은 조선의 벗들뿐이였다"
당시 남경 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을 책임지고 있었던 곽말약이 저서 “홍파곡(洪波曲. 1979년 발간)”에서 묘술한 무한 함락시의 조선의용대에 관한 생동한 묘사의 한 구절이다.

곽말약은 회고록 "홍파곡"에서
무한에서의 조선의용군의 활약상을 회고했다.

무한에 있는 동안 한락연은 조선동지들을 잊지 않고 그들을 혁명의 길로 이끌었다. 사업의 편리를 리용하여 그들을 연안에 소개하여 수송하기도 했다. 이들중 적지않은 이들은 연안 항일군정대학에서 학습한 후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파견되여 조선의용대와 조선독립동맹의 요원으로 되었다.
(중략)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조선족문단의 거목김학철은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항일력정을 세세히 기록해 후세에 남겼다.

1938년 10월말 “동북구망총회”는 동필무의 지시로 새로운 당조를 세웠는데 한락연은 그중 일원이였다. 이들은 사업가운데 나타난 문제들을 경상적으로 주은래, 동필무, 등영초등 남방국 지도자들에게 회보하고 지시를 받으면서 항일운동과 통일선전 사업에 중요한 결책의 역할을 하였다.

번중한 사업에 몸을 혹사하면서도 한락연은 화가의 본분을 잊지않고 9월에 중경에서 개인 그림전을 가지기도 했다.

양자강 량안을 넘나들며 무한삼진에서의 한락연의 활동은 눈부셨다.

- 김혁 장편인물전 “실크로드에 서다- 한락연 평전” 제4부 “무한 보위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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