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구이린 시가 '나의 예루살렘'을 말한다-팡우워이[房 伟]

내가 시인 왕구이린을 알게 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하지만 교제는 많지 않다. 내가 막 큰 학교 문을 나섰을 때 즈음, 그의 시집을 배독했는데, 당시에 그의 신비롭고 풍요로운 시가 심상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수년 후 뚱잉(东营)을 떠나 제남으로 일하러 갔다가 제남을 떠나 쑤저우(苏州)대학교로 오게 되었다. 비록 황하 어귀를 멀리 벗어났지만 마음은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우연한 기회에 계림의 시 신작을 읽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어느덧 왕구이린은 '중년변법(变法)'으로 두둑한 머리를 하고 시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시인으로 성장해 많은 상을 수상하며 많은 작품을 냈기 때문이다. 그의 조시 나의 예루살렘도 그의 최신 시적 성취를 집중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왕구이린은 '내적 격정'과 포용의 미를 갖고 있으며 아주 큰 시적  '야심'을 갖고 있는 시인이다.
신세계 시단은 많은 시인들이 지식인들의 글쓰기와 구어(口语)시의 대립 속에서 결연한 자세로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심미적 성향의 이면에는 패러독스의 위기가 내포되어 있다. 즉 지식인들이 철학적인 사고와 시적 발상의 호소 속에 글을 쓰고 사회 개입과 구체적 현실을 포기하는 간극이 있고 구어시의 급진적인 형식과 격론의 위기도 있다. 서양문학의 영향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초조함과 중국 시인에 속하는 독립된 시어를 창조하느냐가 당대 시단의 핵심 논쟁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한 가지 해결 경로는 "안으로의 전환", 전통 기호를 거슬러 올라가 하나의 중국 이미지를 찾는 현대 시학적 재건이다. 오양강하(欧阳江河)의 '황산골의 표범', 왕창정의 '시경노트' 시리즈는 이런 경향의 대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중국 시인의 눈을 밖으로 돌려 중국에서 세계를 내다보면서 더 큰 시공배경하에 인류의 운명과 인간성을 더 크게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시적 철리에 대한 사고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인간에 대한 관심과 종종 이러한 강력한 외적 주장에 융합된다. 왕계림의 시는 기본적으로 두 번째의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시가에는 아미해(阿米亥)와 같은 비판적 격정이 있고 보르헤스식 기묘한 철학적인 사고도 있다. 시인은 종종 시가형식과 용조일로(熔铸一炉), 즉 스타일이 각기 다르면서도 뚜렷한 '왕계림이라는 낙인'이 있는 시가형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 조시 '밀실'에는 지식인의 글짓기 냄새가 강하게 배어 있고, 글과 공간,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되새기고 있다. '나의 예루살렘'은 중국 경험을 넘어 좀 더 넓은 시야로 인간성과 인간의 미래에 대한 중국 시인의 사고를 보여준다.
조시 '나의 예루살렘'은 시집 '움직이는 문턱'에 수록돼 있다.  솔직히 방금 이 제목을 보고 나는 왕구이린을 위해 손에 땀을 쥐었다.
이 선정된 과제는 정말 쓰기가 쉽지 않다. 일본 학자 이토오토라마루의 말처럼 다른 문명 간 평화는 쉬운데 이해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예루살렘’은 매우 강한 종교, 정치, 그리고 문화의 기호인 비유지성을 가지고 있다. 그 내용은 풍부하고 복잡한데, 종교적 신념 전통이 결여된 당대의 중국인들에게는 예루살렘을 만지고 이해하며 넓은 시학의 길을 찾으려는 야심이 있고, 또한 위험으로 충만하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거짓과 변명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몇 년 동안 왕구이린은 세계와 황허커우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자신만의 시학적 왕국을 만들었는데 예루살렘은 그의 시가 판도의 중요한 정신좌표임에 틀림없다. 그는 예루살렘 대표의 "신앙"의 힘에 다가가려고 시도했다. 이 연작시는 15수의 짧은 시를 포함한다.
왕구이린은 단시의 표현문체를 택하여 열다섯 개의 "점"을 선택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생각을 폭발시켰다. 이것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다소 다르다. 일반적으로 이런 제재는 장시의 체량에 적합하며, 더 복잡한 사상을 수용한다.
왕구이린의 무거운 것을 가볍게 만들고, 무거운 물건을 가벼운 물건 들 듯하며 협소한 시학공간에서 보여주는 것은 중국 전통의 시가를 번잡함을 간소화하고 추상적인 것에서 순수함을 찾아내는 전통은이 연작시의 표현의 난이도를 높였다. 첫 번째 <예루살렘>은 전체적 인상을 다루며, "신앙 사이의 충돌"을 부각시켰다. "죽은 그들은 여전히 원한을 품고 있다/ 언덕에 다른 신앙을 묻고 있다/이러한 몇 단어가 그들을 갈라놓는다. // 하나님, 예수, 모하메드/ 모두 신의 아들인데 따로 부르고 있다/그리스도, 유태, 이슬람/ 그들은 하늘의 깊은 곳에서 입맞춤하고 있다/ 얼굴 한 가득 무고한 표정을 짓고 있다/벽에는 여전히 신선한 탄공이 남아있다."마치 영화 장면처럼 시는 마지막에 "탄공"에 초점을 맞추고, 뒤의 관련된 전쟁, 살육과 인간성의 구원에 관한 복잡한 사고를 전개한다. <기도>는 "수수께끼를 수수께끼로 해석"해 종교적인 말에 대한 현혹을 드러낸다. "서슬"과 "지중해의 햇빛"은 각각 예수의 종교적인 이야기의 두 순간을 꼽으며, 서슬, 태양, 바다, 까마귀 등의 심상으로 구원의 과정을 상징한다. "나는"은 시 전체의 클라이맥스로, 시인은 예수가 대중 앞에서 신분을 인정하고, 태연하게 죽음의 세부 사항을 앞에 두고, 열정을 내뿜으며 나타난다. 그러나 "십자가는 내가 짊어져야 한다/예루살렘은 영원히 슬피 울어서는 안 된다/나는 뜨거운 피를 흘리면서 높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 높은 곳의 죽음/-나는/" 한 구절의 "나는"은 마치 주문(咒语)과도 같고 또 마치 황종대려(黄钟大吕)와 같이 구원의 용기를 나타낸다. "이스라엘"은 추상적인 이스라엘을 구원의 구체적인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산에 앉아", "하늘을 향해", "호수는 깨끗하게 씻어지지 않는다", "사해에 잠겨도 죽지 않는다", 더욱이 "세계의 목구멍에 박힌 다이아몬드", "아랍 갈비뼈에 박힌 못"등 일련의 형상은 매우 선명하게 구원의 신앙의 힘을 지목하으며 또한 매우 정묘하게 이스라엘이 세계문화가운데서의 지위를 나타냈다. 마지막 "헌시"는 "풀씨 한 알의 슬픔"으로 구원자에 대한 숭경의 마음을 드러냈다. 시인은 연작시 후기에서 "나는 심지어 가이드가 예수를 체포하라는 로마군의 말을 듣고 "네가 나사렛 사람 예수냐"고 물었을 때 예수는 "그렇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하자 참을 수 없이 울음을 터뜨리며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새와 짐승과 물고기와는 무리지어 태어나서 흐리멍텅하게 사라지며, 아무 생각 없이 시들어 죽어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요, 선을 알고 악을 알며, 사랑이 있고 한이 있으며, 전생을 탐문하고, 내생을 추궁한다. 신앙이 없으면 우리를 비추는 신등 하나 없는 우리가 어떻게 이 망망한 속세에 발을 들여놓고, 무엇으로 정신적 고통을 치유하고 마음의 슬픔을 달래며, 또 어떻게 하면 심신이 편안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을까?" 현대사회에서 신앙의 부재는 중국인들이 마음의 정토를 되찾을 수 있는 선택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이 시에서는 중국 시가가 진정으로 세계 속에 녹아드는 열정과 상상력을 보여준다.
루이가디는 ‘문화와 시간’에서 중국인들의 시공관념을 살펴봤으며, 중국인의 문화시공은 일종의 중국식 "천하내관법(天下内观法)"으로 유럽의 "일국일사(一国一史)"의 관념과 다르다고 극찬한 바 있다. 현대민족국가 개념이 시작된 이후 레빈슨등과 같은 학자들이 볼 때 중국 문화는 서구의 현대적 발달에 비해 뒤처졌고, 바로 시공관념상 "천하관(天下观)"은 "중국관(中国观)"에 밀렸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서 우리는 나라의 정치 경제의 부상과 함께 중국 문화의 발전도 새로운 "내관법"의 열정을 보여주며 중국인들이 좀더 넓은 중국의 시야에서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충돌, 충격과 융합, 그리고 이해의 동정과 재건의 지혜가 담겨 있다. 시인 왕구이린의 연작시 <나의 예루살렘>은 중국인들이 예루살렘을 어떻게 "상상"하고, 세계를 어떻게 상상하는지를 보여준다. 시인의 격정적인 시풍과 냉엄한 반성, 그리고 세속을 뛰어넘는 기개는 우리들로 하여금 기대를 갖게 한다.

2019년 5월 20일 쑤저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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