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삶과 애환이 묻힌 곳, 정주간


직사각형 구조로 3등분된 구조를 띠는 조선족 가옥의 특징은 부엌과 안방이 붙어 있는 정주간이 있다는 것이다. 정주간은 주방과 거실, 침실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다용도 공간이다. 정주간에는 결혼, 출산, 잔치, 초상 등 한 가족의 크고 작은 가족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연변에 사는 우리 민족의 삶과 이야기가 정주간에 묻혀 있다.


초창기에는 4×5인치 카메라를 사용해 인물 표정 외에는 주변 이미지를 잘 전달할 수 없었다. 어떤 때는 하루에서 길게는 이틀 삼일간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많은 이야기들을 사진에 모두 담고 싶은 욕심이 생겨 파노라마 카메라를 선택했다. 정주간은 아주 작은 공간이고, 그 공간을 모두 보여주고 싶었다.



민족 차별이 심한 이민 초기의 낡은 사회에서 개척 농민이었던 연변 조선족의 주택은 대부분 맞배 지붕을 이은 초가집이었다. 초가집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흙으로 벽을 바르며 짚으로 지붕을 잇고 구들을 놓은 육간집이나 팔간집이 대부분이었다. 맞배 지붕을 이은 육간집은 함경도 농민의 주택 형태를 그대로 가져와 사용했으며, 부엌과 방이 붙어 있는 정주간(鼎廚間)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정주간은 함경도에서 흔히 보이며 부엌과 안방 사이에 벽이 없이 부뚜막과 방바닥이 한데 잇닿은 곳을 말한다.


한 맺힌 조선족 생활상 담는 사진가 , 차광범


연변 조선족은 겨울철이 길고 추운 기후 특성상 모든 일을 집안에서 할 수 있는 구조로 집을 지었고, 직사각형의 구조로 3등분된 구조로 주거공간을 만들었다. 그래서 집마다 부엌과 안방이 붙어 있는 정주간을 볼 수 있다.
문을 열고 정주간이나 부엌으로 들어가면, 3분의 1은 부엌이고, 3분의 1은 정주간이며 나머지 3분의 1은 방으로 구성된다. 또한 정주간 구들의 높이는 부뚜막 높이와 같아 추운 지방의 주택 형태를 띤다. 정주간은 주방의 역할과 거실의 역할 그리고 침실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다용도 개념의 공간이다. 평상시 정주간에서는 젊은 사람이 자고 나이 많은 어르신은 방에서 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밖에 일하러 나가야하는 사람들이 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주간에는 결혼, 출산, 잔치, 초상 등 한 가족의 크고 작은 가족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연변에 사는 우리 민족의 삶과 이야기가 정주간에 묻혀 있다.
연변 사진가 차광범은 2000년 초부터 이주한 조선족을 촬영하고 있으며, 처음에는 막연한 생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노인을 통해 이민의 역사를 들으면서 조선족의 고통과 한을 느끼고 이같은 노인들의 내면 모습을 표정에서 찾으려고 했고 이런 방향에서 촬영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생각과 느낌이 있을 뿐 지나치게 연출에 의존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감정에 치우치는 바람에 생각과 느낌의 일관성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는 동안 이주 노인들의 내면 모습을 여러 방법을 이용해 표현해보려 시도했다. 그 중에서 부모의 영정을 들고 찍은 사진이나, 하반신을 벗고 찍은 사진 등에서는 그가 표현하려는 사실적인 느낌과 감정이 전달되었다. 차광범은 이주해 온 노인들의 한과 이야기를 표정과 모습만으로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느껴 결국 주변 환경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집안의 구조, 부엌, 가마솥, 가재도구, 벽에 걸린 시계나 그림들 그리고 노인들이 입고 있는 의상 등을 통해 그들의 한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정주간에 있었다.




이현동 > 정주간을 찍은 이유는 무엇인가?
차광범 >
오래 전부터 조선족 이주 역사를 기록해온 이광평 선생에 비해 조선족에 대한 이해는 깊지 않지만, 우리 민족을 연구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촬영한 사진은 대부분 1935년 전후로 이주해 온 농민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희로애락이 묻어 있는 곳이 바로 정주간이었다. 정주간에는 우리 민족의 생활이 있었다. 피사체 중 인물도 있지만 사라져가는 조선족 생활의 느낌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사진마다 인물 외에   가구도 넣고, 가마솥도 넣었다. 이런 것들이 우리 민족역사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현동 > 언제부터 조선족을 촬영했나?
차광범 >
조선족 촬영은 1996년부터 시작했다. 당시는 다큐멘터리 시각보다는 예술적 개념으로 접근했던 것 같다. 우선 나 자신이 우리 민족에 관해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재만 조선족일 뿐이었지 사진은 예술사진(파인아트)에 가까웠다. 2000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이주 노인들을 찍기 시작했다.


이현동 > 다큐멘터리로 찍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무엇인가?
차광범 >
앞서 말한 대로 나는 나의 민족이면서, 전체 중국 민족 중 유일하게 이주해온 민족인 조선족에 관해 잘 알지 못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조선족학교가 아닌 한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역사를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뒤 기회가 돼 이주해온 조선족 노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참 많은 감동과 애환을 느낄 수 있었다. 이광평 선생을 따라 다니면서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많이 울고 웃고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민족이 겪은 수많은 고통과 한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고, 조선족이라는 민족이 어떻게 살아 왔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사진을 찍게 되었다.


이현동 > 촬영한 사진들은 연변에서만 촬영한 것인가?
차광범 >
연변에는 모두 8개의 현시가 있는데, 돈화만 빼고 모두 다녔다. 안도, 왕청, 화룡, 용정 위주로 촬영이 이뤄졌고, 안도와 왕청에서는 조선족이 사는 마을은 안 다녀 본 곳이 없다. 아마 지금까지 80여개의 마을을 다닌 것     같다.


이현동 > 인물보다는 주변 환경을 중심에 놓고 찍은 이유는 무엇인가?
차광범 >
처음에는 내 생각대로 연출을 해서 많이 찍었다. 얼마 후 연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순수하게 찍어 보자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래서 집안에서 노인들에게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앉아 있는 모습 그대로를 찍었다. 중국 내의 소수민족 중 조선족은 가장 생명력이 강하고, 자립심이 강한 민족이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의지로 조선 땅에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땅으로 이주해와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흔적은 노인들의 얼굴과 표정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노인들의 손길이 닿은 집안 내부와 물건들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영상으로 표현하는데서 인물이 주는 느낌도 중요하지만 주변 환경에서도 강렬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이현동 > 정주간의 대부분 사진 속에는 가마솥이 있다.
차광범 >
가마솥은 우리 조선민족 가정에서 부엌의 중요한 물건 중 하나다. 조선족 이주를 설명한 책이나 그림을 보면 우리 할아버지들은 지게에 이불과 가마솥을 지고 얼음이 얼은 두만강을 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정도로 가마솥은 생활필수품이며 아끼는 물건이었다. 일반적으로 연변의 가마솥은 구경이 80~90cm로 바깥면에 국화무늬가 둘려져 있다.


이현동 > 현재 조선족 농촌의 생활이 현대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를 보는 당신의 느낌은 어떤가?
차광범 >
커다란 변화는 없다. 2 , 3년전만해도 초가집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뒤 많은 초가집이 기와집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집안의 구조와 살림살이는 여전하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돈을 벌어와 집을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짓는 가정을 제외하곤 대부분 지붕 모양만 바뀔 뿐이다. 바깥에서 보면 기와집으로 바뀌어 생활이 좋아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부는 옛날 모습 그대로인 곳이 많다.


이현동 > 이주 노인들을 처음 찍을 때는 주로 바깥에서 촬영했는데  지금은 정주간을 와이드한 파노라마로 찍고 있다. 이유는 무엇인가?
차광범 >
초창기에는 4×5인치 카메라를 사용했다. 렌즈는 주로 망원 계통을 사용했는데 인물의 표정은 잘 표현됐지만 주변 이미지에 대한 정보는 제대로 전달할 수 없었다. 어떤 때는 하루에서 길게는 이틀 삼일간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사진에 모두 담고 싶다는 욕심에서 파노라마 카메라를 사용하게 되었다. 정주간은 아주 작은 공간이고, 그 공간을 모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현동 > 처음 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차광범 >
중학교 2학년때 학교 물리시간에 광학을 배웠다. 그때 처음 핀홀 카메라를 만들어 필름을 사서 찍어 보았다. 그때부터 사진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얼마 뒤 형과 함께 12원을 주고 카메라를 샀다. 그것이 내 사진의 시작 인 셈이다.


이현동 > 지금까지 찍어온 사진을 보면 같은 주제지만 세차례 정도 이미지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차광범 >
처음에는 다른 작가들처럼 풍경이나 예술사진을 찍었다. 그러던 중 한국 사진가인 강위원 교수를 통해 사진에 대한 나만의 느낌을 정립하게 되었다. 강교수는 자신이 조선족 사진을 찍었지만 그러면서 한편으로 ‘외부에 있는 사진가가 아닌 조선족 사진가가 직접 조선족 사진을 찍는 것이 훨씬 좋은 느낌의 사진이 나오겠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그때는 어떤 얘기인지 잘 몰랐고, 막연히 조선족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지,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 모르고 맹목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이주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한을 점차 알게 되면서 찍는 방법이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내면을 표정에서 찾으려 한 것이 두 번째 변화이다. 지금은 이주 노인의 삶을 그대로 순수하게 찍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노출이나 구도 등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어떤 카메라의 메커니즘보다는 이주 노인과 이야기하면서 받은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고 싶다. 이렇게 나의 생각이 정립되기까지 많은 분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현동 > 앞으로 촬영 계획은 어떤가?
차광범 >
대상은 여전히 조선족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강제 이주이든, 자유 이주이든 해방전 사람들의 생활상을 찍었다면, 이제는 두만강을 건너온 모든 조선족의 궁핍하고 안타까운 사연들을 담고 싶다. 이미 시작은 했지만 아직은 미약한 상태다.


이현동 > 사진을 찍으면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차광범 >
중국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학교도 한족학교를 다녀 우리 민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또한 우리말도 어눌하기 때문에 이주 노인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곤란한 점이 많다. 아주 좋은 일을 한다며 격려해 주는 분도 있지만, 이런 사진을 무엇에다 쓰느냐며 질책을 받을 때도 있다. 내 자신이 더욱 노력해야 하는 부분인 것 같다.


글 / 이현동(월간사진 2005년 11월호 게재) 




▷글쓴이 이현동은 중앙대학교 사진과를 졸업하고 상명대 대학원에서 포토저널리즘을 전공한 후 현재는 중국 연변대학교 예술대학 사진학과 부교수로 있다.
조선족 사진가 차광범은 현재 용정에서 스튜디오를 운영 중이며, 중국 촬영가협회 회원이며, 연변촬영가협회 부비서장을 맡고 있다.‘정주간’(중국 연길, 2005), ‘조선족 이주의 역사’(중국 연길, 2005) 등 전시경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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