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이야기>

 



미국 로스앤젤스 차이나타운 중심 공원에는 손문의 기념 초상비가  우뚝 서있다.
아마 손문의 영향력은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듯하다.
1905년 손문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들이 일본에서 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중국의 봉건아성인 청정부 타도에 들어갔다. 드디어 1911년 10월 11일 무창에서 군사 봉기에 성공하여 그 이듬해 드디어 남경에 중화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민주주의 첫 포를 쏜 신해혁명이다. 손문이 임시대통령에 오르면서 260여년에 걸친 청조의 통치는 끝나고 중국에서 2천년동안의 황제통치가 막을 내리였고 공화제를 기반으로 한 중화민국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중국의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대군벌 원세계가 힘의 세력을 업고 총통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개인야심이 가득한 원세개는 대통령 자리에 오르자 다시 나라를 봉건 황제 체제로 복고시키고 만다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황제자리에 올라 역사의 수례바퀴를 되 돌림으로써 중국의 반봉건 민주화의 물길을 되틀어 원점으로 돌아가게한다.
이처럼 한사람의 발길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실 예들이 허다하다.

한국도 비슷한 예가 있다.  
한말의 문신 민영익(1860~1914)은  고종 14년 (1877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군무변정기연사당상(軍務邊情譏沿司堂上)·협판통리아문사무(協辨統理衙門事務)등 권력을 틀어쥐고 행사했다.
(갑신정변 때 민영익은 개화당 세력들에 의해 상처를 입지만 그 때 조선 최초의 양의사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 알렌에 의해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된다.)
1882년 임오군란 후 나라를 대표하여 사죄사절(謝罪使節)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1883년 전권대신으로 미국에 다녀온다.

그는 당시 누구보다도 먼저 선진국을 방문하는 좋은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서구 문명을 보지 못한다. 아니, 아예 보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여행 중 일부러 공자 왈, 맹자 왈 책만 들여다보면서 "문화란 그래도 중국의 것이, 그리고 조선의 것이 더 앞서 있다."는 식의 꽉 막힌 태도로 일관하였다. 그리고는 그후 계속하여 혁신파들을 숙청하기에 이른다.

열린 마음이 시대의 물줄기를 바꾼다.
앞서가는 한 사람 리더의 발길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고 많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앞서가는 그 한 사람이 어리석거나 시대의 흐름, 내일에 대한 꿈, 깊은 혜안,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하면 그가 속한 나라와 국민들은 오랫동안 뒤쳐져 고생하게 된다는 여운을 던져준다.  

중국현대사의 대문호 로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각자는 언제나 동시대인의 박해를 받는다. 큰 인물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사람들의 존경, 칭찬을 얻는 것은 반드시 죽은 다음이거나 침묵하고 있거나 눈 앞에 없을 때이다"
이면에서 중국의 “작은 거인” 등소평이 긍정적인 교훈을 준다. 그는 동시대 사람들의 비방, 중상, 철직, 침몰 이 반복 되는 어려움 속에서 오뚜기처럼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 설수 있는 "철인"이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는 끝내 중국을 힘찬 개혁 개방으로 이끌어 “동아의 병부”로 몰리던 큰 나라의 잠을 깨워서 일떠 세우는  긍정적인 실예를 세상에 남겨주었다.
동북아뉴스/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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