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03-12-12

썰렁한 세밑
엘지그룹 이아무개(48) 부장은 요즘 연말이 연말 같지 않다고 한다. 마당발로 소문난 그는, 해마다 이맘 때면 송년회 일정만으로 모자라 신년회까지 40여개의 약속을 수첩에 빼곡히 적어놓곤 했다. 올해 잡아놓은 약속은 한손으로 꼽을 정도다.

이 부장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대기업 직원들은 “송년회 하자”는 말 자체가 쑥 들어갔다고 입을 모은다. 흔히 생각하는 장기불황 탓만은 아니다. 검찰의 정치자금 수사까지 겹치면서 공식적 송년회는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됐다.

검찰 수사가 가장 먼저 시작된 에스케이그룹의 경우, 예년과 달리 아예 그룹 차원의 송년행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 홍보실 관계자는 “비자금 수사를 비롯해 회사 차원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잇따라 터져 송년회를 비롯한 연말 공식 일정을 잡을 겨를이 없다”며 “직원들이 부서나 팀별로 조촐하게 저녁식사를 하는 정도”라고 전했다.

엘지카드는 지난해까지 우수지점 관계자와 우수사원을 모아 시상과 함께 대규모 송년회를 열었지만, 올해는 유동성 위기까지 겹쳐 송년회 계획을 아예 잡지 않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그룹 총수가 언제 검찰에 소환될지 모르는 상황이고 경영사정도 어려워 송년회는 말도 꺼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송년회 계획을 잡은 대기업들도 대부분 티 안나게 치르고 있다. 삼성그룹은 각 계열사별로 송년회에서 2차 없이 끝내라는 내용의 지침을 각사 인사팀에 내려보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지난 5월 전사 차원에서 ‘2차’를 자제하기로 원칙을 세워 송년회도 간소화하고 있다”며 “비자금 수사에 부담을 느껴 더 조용하게 연말을 보내려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나름대로 돈 덜 들고 의미있는 행사로 송년회를 대신하는 대기업도 있다. 에스케이텔레콤은 가난한 노인들 점심식사를 만들어 주는 등의 송년 자원봉사 행사를 마련했다. 삼성에스디에스도 오는 18일 사옥에서 자선 주점을 열기로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기업 송년회 이벤트로 연말 재미를 보던 이벤트 업체와 호텔들도 울상을 짓고 있다. 명 이벤트그룹 최재용(36) 팀장은 “지난해까지는 대기업 계열사들의 송년회를 주로 맡아왔는데 올해는 중소기업 쪽에서만 의뢰가 들어와 지난해의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쉐라톤 워커힐 판매팀 관계자는 “대기업 송년회가 연회 매출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지난해는 10% 정도였으나, 올해는 3% 수준”이라고 말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훈훈한 세밑
외국인노동자·탈북자 껴안는 행사 눈길
나라별 민속춤·노래 경연
장기수 노인 식사 대접도
한해의 마무리를 이웃들과 함께하는 따뜻한 송년회가 여러곳에서 열린다.

경기 성남 외국인노동의 집/중국동포의 집(대표 김해성 목사)은 25일 오후 2~5시 성남시민회관에서 송년회를 겸한 ‘2003년 성탄절 연합예배와 민속예술 경연대회’를 열어 올해를 마감한다. 1200여명의 외국인노동자가 참여하는 이날 행사에는 미얀마·몽골·스리랑카·베트남·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각 나라의 민속춤을 선보이고, 노래자랑을 한다.

이상린 성남외국인노동자의 집 소장은 “불법체류자에 대한 강력한 단속 때문에 송년회 참여 인원이 예상보다 크게 줄어들 수도 있고 행사 장소를 옮겨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며 송년회마저 맘놓고 할 수 없는 외국인노동자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경기 부천 외국인노동자의집도 28일 부천근로자종합복지회관 대강당에서 지역 외국인노동자 300명을 초청해 송년회를 열고 불법체류자 단속 등으로 마음 졸이고 있는 외국인노동자들을 위로한다.

한편, 민주화운동에 뜻을 함께해 온 인사들의 모임인 광주 ‘70동지회’(상임대표 최철)는 한국에 정착한 북한동포(탈북자)들을 초청해 26일 송년회를 연다. 최 대표는 “지금까지는 연말이면 회원들이 모여 산행이나 저녁식사 등을 했으나, 올 송년회는 나보다 남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자는 데 공감해 탈북자들과 함께하기로 했다”며 “탈북자들에게도 이웃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광주·전남지역에 사는 장기수 14명은 29일 광주기독교연합회(NCC) 인권위원회 초청으로 송년회 자리에 함께 모인다. 엔시시 회원 30여명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올해도 별도의 송년모임을 열지 않고, 장기수 노인들과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이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마련해 주기로 했다.

‘광주고룡정보산업학교 관악단’(단장 남영일)은 26일 오후 3시 광주시립정신병원과 치매병원 환자들의 송년회에 자원봉사를 나간다. 형사처벌 대신 보호처분을 받은 청소년 교육생으로 구성된 관악단원 25명은 이날 〈소양강 처녀〉 〈아리랑 목동〉 등 흥겨운 곡을 연주해 송년 분위기를 돋운다. 남 단장은 “축하 연주가 끝난 뒤, 따로 조촐한 송년 다과회를 열고 단원들과 함께 한해를 되돌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천주교광주대교구청 호남동천주교회는 25일 오후 2시 필리핀 노동자, 한국인과 결혼한 필리핀 여성 200여명을 초청해 영어 미사를 올리고, 필리핀 음식을 마련해 나눠 먹는 ‘성탄잔치 겸 송년회’를 연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오후 서울의 한 특급호텔 연회장에서 호텔 직원이 이날 저녁에 예약된 한 대학의 사은회를 준비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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