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춘옥 시인/ 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사무총장

본지는 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류춘옥 시인의 '도쿄 시리즈 시' 17수를 싣는다.

류춘옥 시인은 도쿄 시리즈 시 100수를 써서 중국 조선족문단을 노크하며 재일본조선족들의 삶과 생각과 감성을 잘 다듬어진 시적 언어로 핍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들은 이미 장백산, 도라지 등 문학지와 료녕조선문보, 연변일보 등 신문에 실려 점차 부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에는 스토리가 있고 시적인 사색, 또는 철리가 담겨져 있으며, 도쿄의 인문세태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게 특징이다.

-편집자-

류춘옥 약력 : 1978년 흑룡강성 녕안시 출생. 2000년부터 일본 거주. 현재 일본 옥룡상사주식회사 전무 이사,연변작가협회 회원. 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사무총장.시, 수필 다수 발표.'길림신문'  수기상,  '애심녀성컵' 생활수기상,  '청년생활' 계림문화상 등 다수 수상.
류춘옥 약력 : 1978년 흑룡강성 녕안시 출생. 2000년부터 일본 거주. 현재 일본 옥룡상사주식회사 전무 이사,연변작가협회 회원. 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사무총장.시, 수필 다수 발표.'길림신문' 수기상,  '애심녀성컵' 생활수기상,  '청년생활' 계림문화상 등 다수 수상.

도꾜의 마지막 골목(외 1수, 장백산문학지 2021-4-27 발표)

 

세계에서 제일 높은 타워인
634m 스카이트리도 있고
아사쿠사의 랜드마크인
센소지 카미나리몬의 빨간 제등도 있다
신사불각 같은 전통적인 구조물도 남아있고
기능미가 한결 돋보이는 현대건축의 신선함도 갖추어진
새롭기도 하지만 낡은 멋이 더 매력적인
도꾜의 골목들
그러나 아직도
생소하고 비밀스런 곳 하나 더 있다
바로 신주쿠역
여태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 곳
늘 한결같이 지지 않는 웃음 속에
서리꽃 같은 찬 기운이 감도는 곳
길이라도 물어보면
마지막까지 친절을 잔등에 꽁꽁 붙여주는 골목
앞뒤로 휘우청거리다가
간혹 잘 알지도 못하는
애니메이션 얘기라도 꺼내면
대뜸 제로가 되여지는 거리감
움직이는 건담도 좋고
날아오르는 흰 갈매기 “메붸”도 좋고
애니메이션 속에만 존재하던 것들이
실생활 속에 그대로 존재하는
놀라운 골목
도꾜의 마지막 골목
도꾜의 또 다른 숨은 얼굴


도꾜의 되박

 

겨울 찬비가 화살처럼 가슴에 꽂히는 날
알바 끝낸 총총걸음이
단골가게 문고리를 벌컥 열어젖힌다
삐걱거리는 카운터 걸상에 걸터앉으면
넉살좋게 반겨주는 마스터 오오노상
청주가 당기는 날이죠
아하 좋지요
낡은 주전자 속 청주
되박 질름거리도록 부어주는 오카미상
손금이 닳아 없어지도록
담았다간 비우고
비웠다간 또 담으면서
평생 그 작은 그릇 하나 채우지도 못한 채
되박처럼 살다 가신 울 아버지
겨울 찬비가 화살처럼 가슴에 꽂히는 날
단골집 되박에 넘치는 청주가
아버지를 그리는 통곡으로
도꾜의 뒤골목에 메아리친다

       *  *  * 

   
도쿄의 기도(외 2수, 도라지문학지 2021, 3호 발표) 
 

 
질퍽한 흙탕 속에
빠졌다가 나온 듯
진작에 볼모양 없는
손과 입과 마음 다 벗어
센소지(浅草寺) 용신상(龍神像) 분수로 헹군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상향로 연기로 목욕을 하고
머리를 숙이면
가슴 앞에 모은 두 손 공손하다
무병장수하라
내 고향 부모형제
만사형통하옵소서
이국살이 내 걸음걸음
멈춘 듯 흘러가는 세월 부둥켜안으면
엄마의 자장가처럼 가슴을 후비는
저저 염불소리
한 해의 마지막 날 기울고
영화 속 주인공인 듯 살아온 365일이
드디어 막을 내리는 순간
자정을 흔들어 깨우는
제야의 종소리 속에
밝아오는 첫날 아침
다시금 소스라치는 이 영혼
땀줄기는 강물처럼 흐르고
두 손 마주한 기도
사랑마저 사랑하리
 
 
도쿄의 가사도우미
 
 
쉰댓쯤부터였을까
기억이 펑크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렇다면 벌써 십 년도 훨씬 넘었다는 말이 되는데
전화 한 통에 동네 시루바센터에서 오신
시간제 가사도우미 야마자키상
친정엄마보다 년세가 더 드신 분
그것만 기억에 찍힌다
괜스레 불편한 마음 꽁꽁 감춰두고
애들 키우랴 거기에 회사를 나가랴
눈 꼭 감고 할 일 못할 일 다 부탁할 수밖에
야마자키상
오늘은 욕실과 화장실 주방을요
오늘은 유카 물걸레 그리고 왁스까지요
내일은 아이들 도시락 만드는 날이에요
날씨 좋으니 이불들 햇빛 쪼임요
계절이 바뀌니 옷장 정리도 좋겠네요
설전에 창문 한번 닦아야겠네요
베란다에 맥주병 좀 치워야 할 것 같아요
장마가 끝나니 저 정원에 잡초들 무성해졌네요
주말 홈파티에 쓸 그릇 소독해야 하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그날
설거지도 그렇고요
손님들 상차림도 도와주시면 좋을텐데
언제 한번 거절하는 법 없는 분
젊은 주인을 만난 게 죄는 아니지만
그 년세에 가사도우미라는 게 더욱 죄가 아니지만
홈파티에 온 젊은 손님들 앞에서조차
주인에게 두 무릎을 꿇고
백설이 내린 머리 타타미에 닿도록
큰절을 올리시며
늘 신세가 많습니다
이제부터 청소를 시작합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허리가 활처럼 휘도록
십수 년을 하루 같이
가사를 도우셨던 분
이제는 하루하루 갈수록 엉망인 청소
눈이 보이지 않으시는지
정말 먼지가 보이지 않으시는지
80이 당장인 가사도우미 가시면
다시 팔을 걷고 구석구석 쓸고 닦는다
세월 앞에 나이는 영원한 원수인데
원수도 사랑하게 만드는
퇴직을 모르는
도쿄의 가사도우미


 

도쿄의 바이올리니스트
 
 
오일림프마사지 아카스리 코스요
네 야나기 상 맞죠
침대에 천정 향해 누우세요
서툰 일어지만
신이 나게 대답을 해오는
동네 온천 아카스리 언니
온지 얼마 되지 않는 언니인지
이 동네 10여 년째 처음 보는 낯선 얼굴
먹칠한 듯 검게 찍은 눈섭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언니
뜨끔해나는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지
발등부터 시작하여 다리로 허리로
살살 싹싹 문지르는 아카스리 언니
손님 힘이 어때요
좀 부드럽게 할까요
아뇨 꼭 맞춤하네요
이태리 때밀이 장갑을 낀 두 손은
보석이라도 다루는 듯 조심스레 그러나
손가락 아닌 손바닥에 힘을 실어 날래게
바이올린 연주라도 하듯
쓰윽 밀었다 쏘옥 댕긴다
어디서 오셨어요
네 저 중국이요
거침없는 대답에 한 마디 더 얹는다
중국 어디요
길림이요
대화는 그 한 마디로 끊긴다
한창 연주 중이던 바이올린 현이 끊어지듯
손님 끝났습니다
또 오세요
고마워요
담엔 이름을 넣을 게요
끝까지 우린 서로의 신분을 덮어둔채
우리 특유한 발음대로
일본이라는 이 나라의 언어로 대화한다
진작에 땀으로 번들번들한 아카스리 언니
쫓기듯 부랴부랴 온천을 나서는데
때 이른 겨울비가 왜 그리
매섭게 잔등을 후려치는지
언니의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아리랑이
하늘 너머에서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         *          *

 

도쿄의 표정(외 4수, 료녕신문 2021년 4월 23일자 발표)


 
도쿄에서 20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제게조차 어눌한
저의 일본어 발음
저는 어김없는 이방인입니다
그걸 또 이 나라 사람들은
쪽집게로 짚어내네요
“거스름돈은 절대 틀리지 않아요
기계가 계산을 하니깐요…”
생글거리는 알바생은
어린 나이에 비해
알만한 건 다 안다는 표정입니다
제가 일본인이 아닌 것도 너무 잘 알겠지요
그렇구나
역시 일본답구나
근데 내가 태여난 우리 나라에서는
요즘 거스름돈 따위 필요없다는 걸
이 사람들은 알가요
카드도 아닌 휴대폰으로 모든 결제를 끝낼 수 있는
아 우리 나라
조국만세가 나오는 걸 참느라 애쓰는데
자꾸 저의 일본어발음을 꼬집네요
그래요
언젠가 당신과 나
내 나라 언어로 구수하게 얘기나눠봐요
당신도 내 나라 말은 무척 서툴테니깐요
그래도 저는 웃지 않을 거예요
지구촌에서 우리는 누구도
이방인이 아니란 말이예요


 
도쿄의 혼탕
 


남녀 혼탕이라 하네요
토치기현 나스군에 있다네요
오오마루 온천려관
도쿄에서 전철로 대충 둬시간
일본에 오는 외국인 려행객들은
누구나 궁금해 반드시 가보는 코스라길래
이 땅을 밟아서 20년만에
하물며 도쿄에 산다는 사람이
남편 몰래 한번 기어이 용기를 냈지요
아이 다섯을 둔 나이임에도
남녀 혼탕은 난생처음
가슴은 토끼를 안은 듯 풀떡거리네요
아!
바로 저기 눈앞에 보이는 저기가
생부지 남녀가 알몸으로 같이 들어가도 되는 곳이군요
물건 훔치러 온 도둑모양으로
발볌발볌 혼탕 혼탕 혼탕으로
혼미한 정신을 움직여가는데
창문으로 빼꼼 들여다보기도 하다가
마침내 결심하고 한발 슬며시 들이밀어요
아아!!
나 좀 살려줍시사
혼탕 가운데 남자인지 녀자인지
분간이 안가는 정체 모를 사람이
여유도 작작 웃도리 훌렁 드러낸채 앉아있네요
등지고 있어서 천만다행
혼비백산한 이 아줌마
좀 살려주소
혼탕에 혼겁한 아줌마가 불쑥 지르는
엄마야!!!
 


도쿄의 료고쿠(両国)국기관

 

바위 같은 남자들이
샅바 하나로 힘과 기술을 겨루는
일본의 국기 ㅡ 스모
 
아득한 옛날부터
신에게 스모를 봉납하고 있었던 일본
풍성한 결실을 기원하는 의식인 스모
 
소금을 눈처럼 뿌리며
부정을 씻어내리고
밀어도 밀리지 않는 몸을 만들기 위해
스모 선수들은 잔코나베 전골을 먹는다
잔코나베 전골을 먹으며
일반인들의 두배 세배 되는 우람한 몸을 만든다
 
기술이 들어와도 견뎌내기 위해
스모 선수들은 연습을 한다
마타와리라는 180도 다리 찢기
상대의 힘을 흘려버릴 수 있는 유연한 몸
 
도리코미라는 시합이 끝나면
온몸에서 흰김이 문문 피어오른다
그러면 그 몸을 투덕거려주며
사람들은 건투를 칭찬한다
 
국기관이 있는 료고쿠에는
에도 도쿄 박물관이 있고
그 옆에 경쟁하듯 늘어선 미니어처매점들에서는
작은 인형들이 신나게 살아간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남자들과
보통 사람보다 훨씬 작은 인형들이
싸우지도 않고 살아가는
에도의 거리는 그래서 늘 흥성흥성하다


 
도쿄의 회장님

 

아침 티비에서 귀에 익은 이름이 들려
볼름을 급히 높인다
 
일본에서는 거물급인 모모 이자카야
코로나 바이러스로 점포 수십 개를
동시에 휴업한다고 했다
상황설명과 동시에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다짐하며
서서히 무릎을 꿇는 회장님
 
이십 년 전 이 땅에 와서 첫 아르바이트
두 무릎을 바닥에 꿇고
손님들 주문을 받아야 한다며
몸소 시범을 보이시던 점장님
 
가진 게 없어도 기 죽진 말라던
고향 부모님의 가르침은
어느새 창백한 변명이 되고
무릎을 꿇은 수많은 도쿄의 밤들은
소리없이 슬프게 흘렀다
 
그날의 점장님은 회장님으로 되였고
그 하늘 같던 회장님이
그렇게
세상을 향해
량심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도쿄의 아사쿠사(淺草)

 

아사쿠사 관광의 시작은
가미나리몬
무려 1400년 전부터
거대한 빨간색 제등이 파손되면
기부를 받으면서
오늘날에 이른다고 한다
 
문에서 센소지 절 본당까지
계속되는 상점거리
그 거리를 흘끗흘끗 구경하며 걷고 있는 참배객들
돌아오는 사람들의 손에는 저마다 선물꾸러기
 
그리고 센소지 절
도쿄도 내에서 가장 오래된 절
온갖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곳
용신의 힘이 넘치는 곳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나의 앞날도 창창하기를
고향의 부모형제들도 무병장수하기를
 
도쿄가
에도였던 옛날부터
사람들이 소원을 빌던 곳
 
시나 한 줄 달라고 빌어볼까보다

*              *               *

 

 

도꾜의 알바생 (외 4수, 연변일보 2021-4-16자 발표) 

 

도꾜의 하마마츠죠(浜松町)역
이자카야 와타미
오후 네시
가게 밖의 담배꽁초를  주으며
전쟁은 드디여 시작됩니다
접시를 닦아 세팅하오후 다섯시 영업 개시
수많은 이자카야중에서
선택해준 손님들은
눈물나게 고마운 일
절대 기다리게 해선 안되지요
어서 오세요
죄송합니다
실례합니다
감사합니다
허리는 45도로 굽혀야 하고
얼굴은 생글생글
생글거려야 합니다
홀에서 주방으로
주방에서 도링크 바로
도링크 바에서 다시 홀로
료리는 십분 이내
마실 것은 3분 이내
손님 앞에 대령시켜야 하고
벽돌장처럼 무거운 생맥주는
한손에 세개
두 손에 여섯개
이튿날 새벽 다섯시까지
장장 13시간
그 사이 휴식은 감격의 30분
저녁은 제 돈 내고
가게 음식 사먹어야 하는
이 나라의 린색함에
눈물이 나려 합니다
손님들의 발끝 아래
두 무릎 꿇고서
염소처럼 온몸을 쥐여짜며
별만치 먼 꿈을 향해 손 내미는
젊음의 모지름.

 

 

도꾜의 우에노공원

 


일본 최초의 도심 속 공원이란다
문화의 숲으로 무성하며 유명한

공원출구를 나오면
바로 음악과 무대예술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문화회관이
터억 근엄한 표정으로 있고

그 오른쪽에는
로댕의 조각예술을 가슴 깊이 소장한
국립서양미술관이 자태로 름름하다

푸른 고래의 골격 표본과
D51 기관차가 전시되여있는
국립과학박물관도 있고

색상과 예술이 서로 그러안고
한폭의 그림인 체하고 있는
예대생들 꿈이 소리치며 피여난다는
도꾜예술대학도 숨결 푸르다

뭐니 뭐니 해도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의 력사의 증인인
캉캉이와 란란이의 숨소리가 쌔근대는
우에노동물원이 정답다

나는 우에노공원에 올 때마다
내 조국의 숨소리를 느껴보군 한다

 


도꾜의 오카자키상

 


나랑 나이가 비슷할가
은행행장이 왜 이리 젊지
에누리 하나 없이 깔끔한 업무능력과
시계바늘보다 더 정확한 소화능력과
신뢰도 높은 오카자키상

어느 날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은행 그만둔다고
인사차 왔다는 오카자키상

그럼 이제 뭐 하시게요?

남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은행행장 자리도 훌 팽개친
나는 그 속내가 더 궁금했다

이제부터 저 자신만의
자유와 시간을 벌 생각입니다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이 지천인데
시간의 멱살을 거머쥐고 달리는
은행행장이였던 오카자키상.

 

도꾜의 신량반전

 

책 대신 게임기 들고 밤 새워도
함부로 묻지 말아야 하고
소학생 주제에 얼굴에 분칠하는 꼴
보고도 못 본 체해야 한단다
숙제는 밀려도 수영교실은 빼먹을 수 없고
밀린 숙제 때문에 밤중까지 지켜주다가
먼저 설핏 잠이라도 들면
엄마 노릇 못한다고 야단 맞아야 한단다
아무리 화가 나도
눈을 흘겨서는 안되고
목소리 톤이라도 높으면 더더더 안되는 일
참고참고참고참고참고참고참고 또 참다가
인내심아 나 좀 살리렴아
회초리를 드는 날이면
글쎄 그게 문제란다
새끼는 내 배속에서 나왔어도
허락없이 때려서도 욕해서도 안된단다
아동학대라고 경찰이 동원되고
내 새끼를 나한테서 뺏아간단다
아니지 좋은 말로 데려간다지
자기들이 보호해주며
자기들이
옷도 사주고 밥도 먹여준단다
시대가 변해도 부모 사랑이야 변할리 없겠건만
자식은 도꾜에서 멀쩡한데
나는 자식을 잃고
도꾜를 미워한다
자식 향한 회초리에 죄를 씌우는
이놈의 도꾜가 정말이지 싫어진다.

 


도꾜의 울타리

 

반뼘도 안되는 방 하나 있었다
창 밖 바람 불면
방안에서 먼지가  일고
창 밖 눈비 내리면
방안에서 습기가 차오르고
오래동안 그렇게 비바람에 시달려
이제 곰팡이 냄새가 그 방의 냄새로 된
반뼘도 안되는 방 하나 있었다

오갈 데 없는 수많은 령혼들의
거친 숨소리가
시도때도 없이 튀여나와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까지 한 방

삼년 만인가
화장실 하나 달린
한뼘짜리 집으로 이사했을 때
초록바탕에 노랑나비 쉬염쉬염 날아가던
갓 산 잡지 가위처럼 빳빳한 새 커튼을 달던 날
그날은 왜 그리 눈물만 자꾸 나던지

그러다가
난생 처음 마련한
백평짜리 으리으리한 서양식 단독주택
도꾜사람으로 살다가 드디여 생겨난 내 울타리

그날은 눈물 억수로 쏟을 각오를 하고
수건까지 마련해서 기다렸는데
자꾸 웃음이 실실 나왔지
아아 자꾸 웃음이
쓸데없이 웃음이 뭉게뭉게 솟아나와서
울타리를 감돌겠지
적시겠지.

*       *       *

 

도쿄의 미소
 
 
도쿄는 하얗고 동그란 미소
아무도 그 미소 뒤의 이야기를 모른다
전철은 달리고
세상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그 미소
-곤니찌와
-오세와니나리마스
-아리가토우고자이마스
사쿠라 같은 그 미소
백목련 같은 그 미소
도쿄는 언제나 변함없는 하얀 미소이다
해바라기처럼 납죽하고
민들레처럼 반듯한

 


도쿄의 문
 

 
일본 많이 미워하잖소
당신들 력사책에 그렇게 씌여있지
중국은 아직 멀었어
밤나무에서 익은 밤알 툭툭 떨어지듯
무심코 던져지는 말들
아무리 밀고 당겨도
전혀 열릴 궁리도 하지 않는
그런 딱한 문이 있소
카부키는 참 훌륭해
넌짓한 칭찬에도
중국은 경극이 유명하지
한류드라마도 최고야
그래
좋은 건 좋은 거지
손벽 치며 까르르
손 슬쩍 대도
쉽게 열리는 문도 있긴 하오
굳이 애 쓸 필요는 없소
때가 되면 절로 열리겠지
명색이 문이 아니요
열리라고 만들어진
허허 나참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