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의 교묘한 통치술·국제정세 통찰=

[경향신문]2003-12-29

‘열하일기’(1783)는 연암 박지원이 1780년 중국을 여행한 후에 쓴 책이다. 새로운 문물을 경험한 한 지식인의 패기만만한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청의 침략을 막기 위해 그들의 학문과 기술을 배워 부국강병을 이룩하자는 북학론, 양반의 허위의식을 풍자한 ‘호질’, 북벌론의 한계를 질타한 ‘허생전’ 등이 바로 그런 예이다. 하지만 ‘열하일기’는 이처럼 이용후생으로 요약되는 박지원의 혁신적 사상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당시 국제정세를 예리하게 분석한 심세서(審勢書)이기도 하다.

박지원은 우선 청나라를 대하는 조선인의 잘못된 선입견을 지적한다. 청이 오랑캐라고 해서 그 풍속과 문물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관리를 불손하게 대하는 일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청나라인들이 각 분야에서 지닌 폭넓은 지식과 대국인다운 포용력, 법과 제도에 대한 존중, 직업에 대한 충실성들을 높이 평가했다.

박지원은 청 황제의 열하 피서와 서번(西番·티베트지역으로 추정)의 법사 반선(班禪)에 대한 우대책을 국제 역학에 비춰 분석하고 있다. 몽고와 서번이라는 강국을 주변에 두고 있는 청으로서는 동쪽의 몽고가 요동을 점령하거나 서쪽의 서번이 황하 일대를 차지할 경우 버티기 힘들게 된다. 따라서 청 황제는 몽고의 목줄을 누르는 전초기지인 열하의 피서산장을 매년 의도적으로 방문함으로써 몽고를 견제하고, 반대로 서번의 경우에는 많은 비용을 들여 그들의 법사를 우대함으로써 위무책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청이 조선의 예법을 칭찬하고 경제적 혜택을 주는 일 역시 조선을 안심시키기 위한 조치이며, 또한 조선인에게 변발을 강요하지 않은 것도 어쩌면 그 문약함을 유지하게 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고 말한다.

박지원은 청의 국내정치에서의 교묘한 통치술도 지적한다. 강희제와 건륭제의 강남 방문은 학술이 발달하고 반청운동이 가장 활발한 강남 지역의 지식인을 제압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당시 청 조정은 전국의 학자를 모으고 서적을 수집하여 ‘고금도서집성’ ‘사고전서’를 편찬하는 사업을 벌였다. 이는 청이 문화국가임을 부각시키고, 교정작업이라는 명분으로 뛰어난 학자들을 붙들어놓으며, 불온문서를 일거에 수거·폐기할 수 있는 다목적 사업이었다.

근래 중국측이 내세우는 ‘동북공정’이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고구려가 집안의 국내성에 도읍을 정한 시기는 물론이고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의 역사까지도 중국사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중국 내에 있는 55개 소수민족을 통제하고 한반도의 통일이후를 대비하려는 그들의 장기적 정책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미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요동지방이 고조선의 영토이며 청의 본거지였던 영고탑과 후춘지역도 옛 고구려의 영토라고 파악하고 있는 바, 중국의 주장은 사실상 억지인 것이다.

박지원은 청의 정세를 탐색하기 위해 공식 사절단은 물론이고 무역 상인까지도 정보원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열하일기’에는 중국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하고 이를 전략적 관점에서 파악했던 박지원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총 26편으로 구성된 이 책은 나오자마자 여러 사람들이 돌려가며 애독하였고, 지금까지도 여러 종의 필사본이 전해진다. 그러나 ‘열하일기’는 ‘오랑캐의 연호를 사용한 원고’라는 비난을 받았고, 정조대에 문체반정(文體反正)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열하일기’가 활자로 간행된 것은 1911년이었다. 시대를 앞서갔던 한 선각자의 견해가 공인되기까지 10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김문식/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경향신문·규장각·장서각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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