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대학 언론정보과 박사과정 주성화>

 

 

차례

 

제1장 만주의 일반 정황

1. 자연환경

2. 연혁 및 행정 구역의 변화

3. 타 민족의 만주 진출


제2장 청나라 이전의 조선 이주민

1. 당, 송 시기

2. 요, 원 시기

3. 명나라, 청나라 시기


제3장 한일합병 이전 조선 이주민

1. 1644-1840년 

2. 1840-1910년

 

 

   제4장 일제 강점기 하의 조선 이주민 (1910-1931년) 

1. 원인과 동기

2. 이주상황


제5장 일제 강점기 하의 조선 이주민 (1931-1945년) 

1. 일본의 개척정책과 개척민

2. 이주상황

3. 조선인 집단부락


제6장 조선 이주민들의 생활과 교육

1. 산업 활동과 금융

2. 일제 강점기 교육

3. 연중행사와 전통 놀이


제7장 조선 이주민들의 종교와 문화, 예술, 의료, 위생 및 체육 

1. 종교 각 파의 분포와 상황

2. 문화 예술과 장르별 현황

3. 의료, 위생 및 체육 활동


제8장 조선 이주민들의 항일투쟁과 사회단체

1. 반제, 반봉건 투쟁과 반일

2. 민족반일단체의 통일운동

3. 친일, 민족, 사회주의 단체

 

 


제1장 만주의 일반 정황


1. 자연환경

1) 개황
만주(滿洲)는 아시아 대륙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서부는 외몽고와 접하고 북부 및 동부는 흑룡강, 우수리강을 넘어 시베리아와 접하고 있으며 동남부는 황해, 발해를 경계선으로, 서남부는 만리장성을 사이 두고 하북성과 접한다. 동쪽은 동경 135°20′, 서쪽은 동경 115°20′, 남쪽은 북위 38°40′, 북쪽은 북위 53°50′이며 전체 길이는 7890km, 그 중 해안선은 불과 20분의 1밖에 안 된다. 만주의 총면적은 130만 3143.3km², 인구밀도는 34명/km²(1942년도)이며 행정구역은 19개 성, 1개 특별시(1945년도)가 있다. 거주민은 대부분이 한족(汉族)으로서 일반적으로 만주족(满洲族)이라 불린다.

2) 지세
만주 지세의 형태는 동서남북을 네 개 정점으로 하는 사변형으로서 네 변은 산맥 또는 해만에 포위되어 있으며 그 내부는 광활한 대평원이다. 동북에서 남서로 뻗은 산맥이 위주이고 서북에서 남동으로 뻗은 산맥이 그 다음으로 많다. 전자에 속하는 것은 대흥안령 산맥과 장백산맥이며 후자에 속하는 것은 소흥안령 산맥과 송령, 연산의 두 산맥이다. 장백산맥의 중심부는 백두산이다. 백두산은 해발 2744m에 달하며 대체로 2000m 정도의 고원 상태의 지모를 나타내고 있는 곳이 많다. 장백산맥의 북부에는 완달산맥, 노령산지가 있고, 남부는 천산산맥으로 이어져 요동반도의 등허리로 서 있다. 대체로 산지의 모양은 실북형으로서 길이는 약 1400km, 중앙부는 가장 폭이 넓어 약 500km에 달한다. 주요한 암석은 동부에는 편마암석이 많고 서부에는 화강암이 많다. 남부에는 석회암이 많다.

 

3) 하천
흑, 요 분수령은 남만과 북만의 주요 하천을 두 개로 나눈다. 북만의 각 하천은 흑룡강의 지류로 되고 남만의 각 하천은 요하의 지류로 되고 있다. 흑룡강은 대흥안령의 고원에서 발원하여 동강(同江)부근에서 서남에서 흘러오는 송화강과 합류한다. 또 남에서 흘러오는 우수리강과 합쳐 나중엔 간궁(間宮) 해협의 북부에 흘러든다. 총 길이는 약 4300km, 유량이 풍부하여 수상운수에 편리하며 기선은 약 3000km 운행이 가능하다. 겨울은 결빙기가 길어 4, 5월 후에야 수상운수가 가능하다. 흑룡강의 지류인 송화강은 백두산에서 발원되어 길림을 지나 북으로 흘러 하얼빈을 통과하여 흑룡강과 합류한다. 눈강(嫩江)은 소흥안 산맥의 북부에서 시작하여 치치하얼을 경유하여 부여 부근에서 송화강과 합류한다. 요하(遼河)는 압록강 대흥안령 산맥의 남부에 원점을 두고 동으로 흘러 정가툰 부근에서 서남으로 방향을 바꾸어 영구(營口)에서 발해로 흘러든다.

호수와 늪은 극히 적은데, 그 중 저명한 것은 흥개호, 경박호와 호룬토례(呼倫湖), 베얼호(貝爾湖) 등이 있다. 흥개호는 구 소련의 시베리아와 만주의 국경에 위치, 신개호(新開湖)라고도 불린다. 북쪽에 소흥개호가 있어 이에 대비해 대흥개호라고도 부른다. 그 형태는 남북이 긴 타원형으로서 동서 50km, 남북 90km, 둘레 길이는 250km, 면적은 4500km², 물깊이가 4m 좌우인 곳이 많다. 소흥개호는 동서 40km, 남북 최대 길이가 12km, 좁은 곳은 4km 이다. 둘레 길이는 약 120km이며 중앙부의 깊은 곳은 2m 좌우 되는 곳이 많다. 목단강 상류에 위치한 경박호(鏡泊湖)는 남북 약 40km의 가늘고 긴 형태를 나타내며 가장 넓은 곳은 80km에 달한다. 대흥안령 산지의 중, 서쪽의 반건조 지역에는 크고 작은 호수와 늪이 많으나 주요한 것은 외몽고부근에 있는 호룬토레호와 베얼호이다. 북쪽에 있는 호룬토레호는 몽고어로는 ‘다라이노루’, 길이 20km, 너비 10km, 면적은 약 300-400km²이나 강우량에 따라 호수면의 크기가 달라진다. 우얼순(烏爾順)하와 게루렌(克魯倫)하가 남쪽에서 흘러들어 북쪽으로 빠져나가 동에서 흘러오는 하이얼하와 합류 해 아루단(額爾古納)하가 되어 만주와 구 소련의 서부국경을 흘러서 흑룡강 상류를 이루고 있다. 베얼호는 몽고어로 ‘보이루노루’, 외몽고남부 국경에 위치, 하루하(哈爾哈)하의 영향으로 수량이 풍부하다. 호수바닥은 깊어 10-45m에 달하며 동서 길이는 약 7km, 남북은 30km이다. 요동반도는 만주의 바다를 동서로 나누었는데 동쪽은 황해이고 서쪽은 발해의 일부인 요동만이다. 황해는 옅은 바다이며 황하의 영향으로 바닷물이 누렇게 흐리었다. 발해도 황해와 같은 성질을 갖고 있으나 더 옅어 물깊이가 30m 정도에 불과하다.

4) 토양
농가의 토양분류법으로 나누면 남만주는 홍, 황토가 많고 북만주에는 흑, 남색토가 많다. 만주 토양의 결점은 유기물 및 질소함량이 적은 것과 알칼리염이 많은 것이다. 겨울철 찬 기후는 동결로 토양의 풍화를 촉진하여 공기 중의 질소를 흡수하고 있다. 지질은 산지와 고원의 원시대 및 고생대 고기의 암층이 있고, 송화강, 요하 등 유역의 평원은 신생대의 제4기층이며 그 중간의 중생대층의 발달은 비교적 적다. 북만주의 하천 연안에 노출된 부분은 제3기층이 많으며 특징은 해성층의 새로운 부분이 상부 석탄기의 것으로 이후 육성층이 되었고 주로 늪과 기타 담수의 침적층으로 이루어졌다.

5) 기후
만주의 기후는 온대의 북부에 해당하나 대륙성기후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즉 여름과 겨울의 기온 차이가 심하며 낮과 밤의 기온 차이도 극히 크다. 동북에서 서남으로 흐르는 동부 산지는 상당한 고산성을 갖고 있어 동남에 있는 바다의 영향은 이곳에 의해 끊어진다. 북쪽 및 서쪽으로 멀리 닿은 시베리아, 몽고 대륙은 만주 땅에 영향을 끼쳐 만주의 기온은 온도차가 크다. 만주라 하면 우선 혹한을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만주의 어느 곳도 시베리아처럼 추운 곳은 없다. 바람은 대체로 강하지 않으며 겨울철이라 해도 ‘삼한사온(三寒四溫)’의 현상이 지속된다. 연평균 기온은 남만주는 약 10℃, 북만주는 0℃정도, 신경(현 장춘)은 5℃ 좌우이다. 만주의 최저기온은 1922년 1월 15일, 해라얼 지방관측대에 의해 영하 49.3℃으로 기록됐고 그 다음으로는 1915년 1월 21일 만주리가 영하 46.9℃의 저온으로 내려갔다. 최고기온은 1919년 7월 23일 흥안령 지방의 부투하치가 42.6℃, 그 다음으로는 1937년 8월 12일 쏠렌이 40.8℃ 였다. 하이랄 지방도 높은 온도를 기록하기도 했다. 하이랄에 있어서 최고 온도와 최저 온도는 90℃의 차이를 두고 있다.

6) 강우량
만주 각지의 연평균 강우량을 보면 500mm 좌우 지방이 비교적 많다. 바다와 가까운 남만주는 기온이 높아 강우량이 많고 바다와 멀리 떨어진 북만주는 기온이 낮아 강우량이 적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남만에 있어서 우기는 연평균 70일, 즉 일 년의 1/5이고 그것도 6, 7, 8 월에 연강우량의 3/4을, 나머지 아홉 달에 1/4을 내리게 된다. 우기는 북으로 갈수록 짧아진다. 수분하는 118일, 하얼빈은 108일, 치치하얼은 95일, 만주리는 71일이다. 아시아 계절풍의 영향으로 여름철 압록강유역의 연평균 강우량은 900mm로 만주에서 비가 가장 많이 내리는 지역이며, 만주와 몽고의 변경지대는 연평균 100mm로 비가 가장 적게 내리는 지역이다. 일 년 중,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아 봄이나 가을 같은 양호한 계절이 극히 드물다. 다시 풀어 말하면 겨울에서 갑자기 여름이 되고 다시 긴 겨울로 돌아간다. 그 예로 첫 서리는 9월 하순 또는 10월 상순에, 마지막 서리는 4월 중순 또는 5월 중순까지 지속된다. 무상기는  6, 7, 8월  3개월에 불과하다.

 

2. 연혁 및 행정 구역의 변화


1) 연혁
만주에는 옛적부터 허다한 민족의 성쇠가 있었지만 중국의 춘추시대에 요동의 존재를 알게 된 조선은 그 중에서 가장 저명한 자이며 이밖에 숙신(肅愼)이라는 부족이 있어 흑룡강하류에서 활동하였다. 숙신과 조선은 동어의 이역이라는 견해도 있다.

 

 

중국 전국시대에 와서는 현 베이징에 도읍(都邑)하였던 연국의 장군 진개(秦開)가 요하하류의 평지를 연국의 영토로 넓혀 요동과 요서의 두 군이 설치되었으며, 진나라 진시황은 흉노를 막기 위해 장성을 구축하였는데 동쪽은 요동에 접했고 나아가 압록강까지 이르렀다. 이때쯤 3개 종족이 이 지방을 차지하였다. 하나는 서쪽으로 사막을 끼고 사는 목축민인 동호(東胡) 또는 흉노족이며 하나는 동쪽으로 산악지대에 널려 사는 수렵민인 읍루(挹婁), 후의 무길(勿吉), 말갈(靺喝)족이며 다른 하나는 양자의 가운데서 송화강, 요하 유역에 퍼져 사는 농업민인 부여(扶餘)족이다. 부여족은 일명 맥(貊)이라고도 하는데 만주지방의 가장 오랜 문명인으로서 고조선도 종족으로는 부여족에 속한다고 한다. 한(漢)나라에 있는 부여의 본부는 장춘, 농안 사이에 있었는데 발전하여 나간 일부가 동해의 가까이에 동부여를 만들고 졸본의 골(압록강 상류)에서 졸본(卒本)부여를 만들고 멀리 반도로 내려가서는 남부여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최초의 부여는 북부여라 일컫는다. 졸본부여는 국도를 집안현 통구(通沟)에 두고 국호를 고구려라 불렀으며 기원전 37년에 건국 되었다. 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겨갔다.

후한말기 위진(魏晋) 대에 고구려는 점차 대국으로 성장하였으며 동진(東晋) 때 광개토왕(廣開土王)에 이르러 국세는 절정에 달했다. 이어 고구려는 요하하류의 평지를 차지하고 평양을 수도로 하여 남만주와 조선을 연결하는 대국을 이룩했다. 수나라는 고구려의 강세를 제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후 4차례에 걸친 원정을 펼쳤으나 실패하였으며, 이후 644년 당태종이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 침략의 길에 나섰으나 역시 패전하여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두 차례나 고구려 침략을 일으켰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당고종의 침략군도 쉽사리 물리쳤으나(655-659년) 내부 다툼으로 국력이 쇠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의 공격으로 668년, 9백년의 고국이 마침내 모래 위의 탑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고구려가 강성할 때 그 통치 하에는 송화강 유역에서 사는 말갈족(읍루의 유종)이 있었는데 고구려가 망하자 당나라는 고구려의 유민 수 십 만을 영주(營州)로 옮겨 살게 하였다. 696년 거란의 추장 이진충이 당나라 반대운동을 일으킨 틈에 영주에 있던 고구려 유장 대조영(大祚榮)은 그 유민을 이끌고 돈화(敦化)부근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震)이라 했다. 때는 698년이다. 그 후 세력을 확장하여 대조영은 당현종(唐玄宗)으로부터 발해군 왕에 책봉되었으며 또 발해국 왕으로 추봉되었다. 국명은 발해(渤海, 713년)로 고쳤으며, 도읍은 국가의 발전에 따라 남하하여 8세기 중엽에는 목단강 연안에 있는 녕고탑 부근의 동경성에 세웠고, 8세기 말에는 길림 훈춘 부근으로 옮겼다. 발해국이 강성한 때의 영역은 북은 흑룡강, 동은 동해에 임하고 남은 함경북도에서 장백산을 포함하여 압록강 유역에 달하고 서쪽은 장춘지방에서 심양지방까지 이르렀으며 당시 요하 이남은 당나라의 영토였다.

당나라말기에서 송나라초기 사이에 요하 상류에 계단(契丹)족이 대국을 흥기하였으며 926년 발해국도 계단에 의해 망하고 동단이라고 개칭됐다. 계단(후에 요(遼))의 세력은 남만주를 지배하였으나 북만주까지는 미치지 못하였고 특히 흑룡강하류지방에 있었던 숙진족의 후예인 여진족의 남진을 막지 못하였다. 결국 1125년 여진족에 의해 멸망되었다. 간도지방에서 차차 하얼빈 부근인 아성(阿城)으로 옮겨간 여진의 완연(完顔)부가 후에 강성하여 1115년에 금(金)을 세웠으며 마침내 중원으로 진출하여 송나라의 징종(征宗), 흠종(欽宗)을 잡아 북으로 돌아와서 송나라를 남도하게 하고 양자강 북쪽의 땅을 거둬들여 대제국을 일으켰다. 금나라는 국토의 확장과 함께 국도를 베이징, 개봉으로 옮겼지만 북에서 차츰 몽고족이 강대해짐에 따라 금나라는 배후에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1234년 몽고족은 처음 북만에서 일어나서 외몽고지방에서 성장하여, 동으로 금나라와 송나라를 멸하고 만주와 중원을 통일하고 다시 서쪽으로 동아, 동유럽의 땅을 정복하여 동서 양안에 걸친 사상 최대의 대제국을 건설하고 국호를 원이라 했다. 원나라는 1376년에 명나라에게 멸망되었다. 명나라 영락제왕 때에는 멀리 흑룡강지방에까지 손을 뻗쳐 위력을 떨치었으나 그 후 명나라는 만주 통치에 있어 주로 개원 이남에 중점을 두었으며 요양은 만주 통치의 중심지였다. 만주에 널리 산재한 여진족은 건주(建州), 해서(海西), 야인(野人) 3대 부분으로 나누어졌으며 건주여진은 목단강 유역으로부터 조선 북쪽변경에 걸쳐 거주하고 해서여진은 송화강유역, 야인여진은 우수리강 내지 흑룡강하류일대에 거주하였다. 건주여진의 일부는 압록강을 거쳐 혼하(渾河) 상류인 소자하(蘇子河) 유역으로 옮겨가다가 차차 인근의 동족을 합병하고 동몽고 각 부락과 손잡아 세력이 강해져 1616년에 흥경성을 중심으로 대금(大金)을 세우고 국도를 요양 또는 심양에 두고 1636년에 국호를 청(淸)이라 하였으며 누르하치(奴爾哈赤)가 태조가 되었다. 청나라를 건설한 부족이 만주족이기에 만주가 민족명, 지명에 여러 가지로 쓰이게 되었다. 순치(順治)대에 와서는 이자성의 봉기가 일어나는 혼란한 틈을 타서 국도를 베이징에 옮기는데 성공 하였으며 강희(康熙)대에 와서는 완전히 중국을 통일하였다.

청나라는 만주를 종족의 발원지로 존중하고 또 그 경제내원을 확보하고 일단 유사시 중국에서의 퇴로를 고려하여 처음엔 타민족 즉 한족, 조선인, 몽고인의 유입을 방지하는 봉금정책을 취하였으나 만주인 특히 이들 귀족들의 생활이 어려워짐에 따라 한족을 이용하는 개간의 필요성을 느끼었다. 그래서 릉묘, 삼산(參山), 수렵장 등 특수구역 외 많은 지역에서, 특히 요동반도에서의 빈곤한 한족인의 유입은 중단되지 않았고 그 양이 많아짐에 따라 도리어 민정의 시설이 늘어나게 되었다. 청나라 초에는 만주의 범위가 봉천(현 심양), 길림 2개 성 뿐이었으나 17세기 말 러시아인의 침입으로 인해 흑룡강일대의 영토 소유권을 분명히 하고자 이에 만주 전역을 봉천, 길림, 흑룡강 3개 성으로 나누어 장군으로 수뇌를 삼았다. 이후, 1907년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 내정과 같은 정치 조직을 실시하여 성동(盛東)장군을 동삼성 총독으로 세우고 봉천, 길림, 흑룡강 3성에 각각 순무(巡撫)를 두었다.

러시아는 19세기 중엽 영국, 프랑스 연합군사변 등의 틈을 타서 1858년에 흑룡강이북을, 2년 후에는 우수리강 이동 즉 연해주를 차지하였으며 1898년 3월에 여순, 대련의 조계권에 이어 1899년 9월에는 관동주를 설정하는 등 남진의 세력을 확충하였다. 1900년 의화단의 봉기를 기회로 드디어 대병으로 만주를 점령하였다. 이때 신흥국 일본은 청일 전쟁을 계기로 권력보장에 혈안이 되었다. 이리하여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그 결과 일본은 러시아를 누르고 1906년 만주 진출의 교도보인 관동주에 대한 권력을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았으며 동시에 중동 철도의 일부를 양도 받았다. 일본의 대륙침입은 중요한 일보 전진을 보았다.
한편 1912년 삼민주의를 창도하는 국민당의 혁명이 성공되어 중화민국이 탄생되었다. 중국의 국민정부는 중국내륙을 통일하는 동시에 각 성에 독군(督軍)을 두어 본토에 완전히 귀속시키는 한편 외국세력의 구축에 분망했다. 이 시기 장작림(張作霖)의 동북정권이 출현되어 종종의 파문이 일어났고 ‘21개 조약’체결 후 장씨 정권의 반일정서가 깊어 갔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에 대한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일본은 만주사변을 조작하였고 무력으로 봉천, 치치하얼을 강점하는 동시에 상하이를 공격하였다. 그 후 만주는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었다. 1932년 3월 9일, 괴뢰 만주국이 세워졌으며 장춘을 신경으로 개칭하고 국도로 정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전패와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1946년 2월 국민당이 접수했으며 1947년 요심전역을 계기로 중국공산당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2) 행정구역의 변화
청나라 이전, 만주는 국토 개념보다는 부속지의 색채가 짙으며 행정요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청나라 이후, 만주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져 청나라 조정에서는 봉천에 성경장군을 최고 관리로 두었고 1907년에 이르러서는 중국내지와 같은 정치 조직을 실시하여 동삼성 총독(제1임은 서세창(徐世昌))을 설치, 성(省)제를 선택하여 봉천성, 길림성, 흑룡강성 3개 성으로 나누었다.


1929년 봉천성이 요녕성으로 개칭되었으며 1930년에는 동북정무위원회를 최고행정기구로 하고 열하성(熱河省)을 포함한 4개 성을 통관하였으며 현(縣)제와 구촌(區村)제를 실시하는 행정조직을 세웠다. 9.18 사변 후 일본은 원유의 만주행정 통치제도를 전면 개혁하여 중간행정단위로서의 성을 축소하고 중앙집권제에 의한 지방 행정제도를 실시하였다. 1934년 12월, 4성을 폐하고 새로 길림, 룡강, 흑하, 삼강, 빈강, 간도, 안동, 봉천, 금주, 열하 등 10개 성으로 하고 흥안 동서남북 4개 성을 합하여 14성 행정구역의 확립을 얻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938년에는 통화, 목단강 2개 성을 새로 세우고, 1939년에는 동안과 북안 2개 성을 증설했으며 1941년 7월에는 사평성을 신설하여 총 19개 성에 달하였다. 그 성들을 상세히 소개하면 봉천성, 사평성, 길림성, 빈강성, 룡강성, 금주성, 열하성, 안동성, 간도성, 삼강성, 목단성, 동안성, 북안성, 흑하성, 흥안동성, 흥안서성, 흥안남성, 흥안북성이며 이외에 신경특별시가 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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