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조선인이주사- 주성화>

1) 한(漢) 족

한족의 강성한 시기였던 한나라, 당나라, 명나라 때 만주 진출사가 있었다. 하지만 근근히 남만주에 국한되었으며 관리, 군벌들이 정치, 군사 등의 원인으로 심양에 주둔한 적은 있었으나 생활의 터전으로 대대손손 이어가지는 못했다. 명나라 말에 요동반도와 압록강 연안에 이주민을 보낸 것이 한족이 만주에 정착생활을 시작한 처음일 것이다. 그 후 만주인의 궐기와 청나라의 건국으로 인하여 한족의 생활범위는 요동반도에 국한되었으며 1653년 중국 본토 정복을 위한 만주인의 관내진출은 만주지역을 재차 인가가 드문 황폐지로 만들었다. 이에 대비해 청나라는 많은 한족 개간민을 만주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한족이 만주 땅을 점령할 것을 두려워 1658년 봉금령을 선포하여 요동에서의 북진을 엄금하였으며 1668년에는 초민개간을 폐지하였다. 하지만 한족의 만주진입은 흐르는 시냇물처럼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청나라는 순치 14년(1657년)부터 각종 범죄자를 동북에 보내어 복역시켰다. 길림성 돈화시의 황금약(퇴직간부)일가가 바로 그들의 후예이다. 황씨의 적관은 강서성 의춘현인데 원조 황문명이 죄로 인해 동북에 쫓겨 왔었다. 성경, 길림을 거쳐 얼참이란 돈화와 녕안 접경선에 낙착하였다. 그 후 14대를 거쳐 줄곧 그 곳에서 살아왔다. 현 연변 경내의 목단강유역 액목허숴란(額穆赫索羅) 곳에 관제묘(关帝廟)가 있었는데 1666년 주, 왕, 묘, 사 성씨를 가진 한족들이 모금하여 지은 것이다. 이밖에 청나라 때 길림 용영담산에서 녕고탑까지 가는 역참 도중 연변 구간에 3개의 역참(1736년경)이 있었는데 전부 한족들이 복역하고 있었다. 건륭연간(1736-1795년) 청나라는 경기(京旗)인의 만주이주를 조직하였다. 당시 관씨 가족이 돈화 관지일대에 이주하였는데 함께 따라 온 머슴, 장객(庄客) 200여 명은 모두 한족이었다. 가경연초(18세기 90년대) 산동 난민이 처음으로 금지구역에 유입하였으며 장백산구에서 수렵, 채벌, 인삼 캐기 등에 종사하였다.

1803년 청나라는 처자를 동반하지 않은 이민의 만주진출을 허가하였고 1867년에는 요하유역과 흑룡강성 호란(呼蘭) 평원을 개방하였으며 1878년에는 한족부녀의 만리장성 이북으로의 이주 금지령을 폐지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1895년, 청일전쟁 당시 만주 총인구 500만 명 중 한족이 200만 정도에 달하는 급증을 보였다. 1908년 러시아인의 60만 만주 이주계획에 대립해 청나라는 봉금령을 완전히 해제하였으며 한족의 만주진출은 이때부터 늘어나 5년 내 200만 명 개척민을 흑룡강 쪽에 소송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한족은 양적에서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문화의 우세로 만주 무대에서의 주요 각색을 담당하게 되었다.
중화민국 이후, 빈번한 내전과 관내의 인구과잉 및 지속되는 흉년으로 인해 안전지대를 찾아 온 한족은 만주에 무수히 밀려들었으며 이주자 대부분은 산동인이며 다음으로는 하북, 하남의 출신들이다.

한족의 만주진출은 총과 대포와 유혈과는 달리 대체로 평화롭게 진행되었으며 경제면이나 문화면에서 타민족에게 이득을 주면서 또 자신의 이익을 훌륭하게 보장 받으면서 완성되었다. 이주 경로를 보면 기차나 배편으로 안동을 거쳐 만주에 들어온 것이 대부분이고 노비를 마련 못한 가난한 이들은 철도 연선을 따라 수백 리를 도보한 자가 많았다. 1930년 남만주철도회사 조사과에서 3월 20일-4월 10일 대련으로, 4월 12일-23일 영구로 만주에 입주한 한족이민은 총 1만 968명으로 이들 중 28.2%가 농민이며 36.9%가 자유노동자, 상인은 12.4%에 지나지 않는다. 이훈구, 『만주와 만주인』,일어문,pp127 자유노동자에는 막벌이꾼이 포함돼 있다. 1895년 청일전쟁 당시, 재만 한족은 200만 명도 못 미쳤으나 1942년 말에만, 한족인구는 4042만 9971명에 치달아 올랐다. 경무총국, 『만주제국현주인구총계』,강덕 9년말 만주제국현주인구통계,pp7 약 6%를 점하는 만족 인구를 감하면 한족 인구는 3800만이란 놀라운 숫자를 보이고 있다. 한족이 만주인의 대명사로 쓰이게 될 정도였다.

2) 러시아인
16세기 시베리아는 러시아의 주요한 모피 공급지였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에서도 가장 후진 국가로서 모피와 사금으로 서유럽으로부터 필수물자를 구입하는 상황이었다. 시베리아는 기후 등 조건이 열악하여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또 교통이 불편하였기에 모피가 많은 삼림지대와 교통이 편리하고 저항이 적은 곳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이 바로 만주였다. 결국 흑룡강 유역을 따라 진행된 러시아인의 침략 확장은 청나라의 저격을 면치 못했으며 1689년 ‘네루친스크조약’의 체결로 러시아는 외흥안령 산맥을 경계선으로 남하가 금지되었으며 이는 이후 백년간 러시아의 야심을 묶어두었다. 중국의 아편전쟁, 태평천국 봉기 등 혼세를 타서 러시아는 1858년에 청나라를 강요하여 ‘애훈조약’을 맺어 흑룡강이북의 땅을 얻고 1860년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략했을 때 중재를 해 준 보수로 청나라와 ‘베이징조약’을 보아 우수리강이동의 땅을 얻었다.

1896년에는 중동 철도부설권을 얻었으며 1898년에는 5억 8800만 원 이상을 투자하면서 하얼빈과 여순, 대련을 연결하는 지선부설권을 얻었다. 최초의 러시아 이민은 이때에 나타났으며 1904-1905년 러일전쟁 때 현저한 증가를 보았다. 10월 사회주의혁명 시 만주에 진출한 러시아 이민의 일부는 농업에 종사하고 기타는 중동철도의 고용인과 상업 및 무역에 종사하였다. 1930년경 만주에 거주한 러시아인은 10만 명에 달하였다. 이훈구, 『만주와 만주인』

3) 일본인
일본인의 만주진출은 군인에 의해 실현되었다. 1592년 7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왜군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간도 국자가 부근까지 침입한 것이 첫 걸음이다. 청일전쟁 당시 역시 군인들이 봉천성 남부를 점령하였는데 이것이 두 번째의 만주진출이다. 요동반도에 대한 일본의 야심은 러시아, 독일, 프랑스 3국의 간섭으로 군사상, 정치상에서 큰 저애를 받은 반면에 경제적으로는 영구, 우장 등지를 중심으로 상업 활동을 활발히 벌여 왔다. 이러한 과정에 1904년, 마침내 러시아와의 전쟁을 맞이하여 2만 명의 피를 대가로 러시아에 승리했다. 그 결과 남만주 철도와 부속지대 및 관동주의 조계지를 넘겨받았으며 1906년에는 2억 원의 자금으로 남만주 철도주식회사를 설립, 관동도독부를 설치하여 만주는 진정으로 일본 이민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 1905년 3월 1-10일, 러시아군에게 포사격을 하는 일본군

1909년 9월 4일, 일본은 청나라와 ‘도문강중한변무협정’(간도협약)을 체결하고 간도의 영토주권을 청나라에 승인하였으며 그 대가로 간도에서의 영사재판권을 양도 받았고 안봉선과 영구철도의 개척, 무순탄광의 개발 등 권력을 얻었다. 나아가서 길회선철도의 부설권까지 얻었다. 1909년 11월, 일본은 간도 용정에 영사관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동양척식회사는 각 지역에 분사를 세웠다.

러일 전쟁 후 일본은 관동주와 만철연선에 일본인을 이주시키려 계획하였다. 이로서 만주를 영구식민지로 만들려 했다. 1914년 만철독립수비대의 퇴역군인들로 조직된 재향군인이민단이 처음으로 만철연선 남만에 정착하였고 잇달아 여러 명목의 이민단들이 관동주와 만철연선에 육속 들어왔다. 하지만 기후가 차고 언어 장애, 생활 습관차 등의 허다한 원인과 또 한족의 견결한 반대 때문에 만주에 오래 거주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일본인의 첫 이주 실패이다. 그 후 일본인의 만주이주는 간간히 진행되다가 9.18 사변과 위만주국의 설립을 계기로 본격적인 단계에 진입하였다.

1905년 3월 1-10일, 러시아군에게 포사격을 하는 일본군
일본은 이민 20년, 백만 호, 5백만 명 계획을 1937년에 제정, 실시하였다. 20년, 만주총인구 5천만의 10%에 해당하는 일본인의 만주 주도권을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5년씩 4개 단계로 나누었는데, 제1단계는 1937년에 6000호, 1938년에 1만 5000호, 1939년에 2만호, 1940년에 2만 8000호, 1941년에 3만호 모두 10만 호로 진행된다. 그 다음 제2단계는 20만호, 제3단계는 30만호, 제4단계는 40만호로 계획되었다. 일본은 원주민에 대한 강제적 이주를 감행하면서 일본의 집단 이주민을 도입하여 제1단계 계획을 완수하였고 제2단계 계획은 추진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일본인의 만주이주 과정에서 1938년 8월에 성립된 ‘만주척식회사’는 ‘이민만주개척’ 정책의 직접적인 집행기관으로서 점차적으로 ‘동척’을 대체하였다. 일본인의 만주이주를 숫자적으로 살펴보면 1910년 재만 일본인(조선인을 포함하지 않음. 이하 동) 7만 6천명으로서 만주총인구의 0.42%를 점하며 10년 후인 1920년에는 16만 명으로서 만주 총인구의 0.71%로 상승하였다. 9.18사변 직전인 1930년에는 이미 22만 9천명으로 늘어나 만주 총인구에 대한 비례가 0.77%로 안정성을 나타냈다. 위만주국의 설립과 일본의 실질적 통치 지위의 확립, 공고는 일본인 만주이주의 근본적인 동력이 되어 1940년에는 재만 일본인이 86.2만 명으로 10년 전 보다 2.76배 더 늘어났으며 만주 총인구에 점하는 비례도 2.07%로 큰 성장을 보였다. 1942년에는 109.7만 명으로서 이미 100만을 넘었으며 만주총인구 4446.2만 명의 2.47%로 계속 상승선을 긋고 있었다.

재만 일본인의 성(省)별 인구를 보면 신경과 하얼빈 두 특별시에 가장 많이 집중되었는데 각 2만 명을 넘는다. 이밖에 길림성, 용강성, 빈강성, 봉천성의 일본인이 1만 명을 초과(이상 1935년 숫자), 이상 4개 성과 2개 특별시의 일본인은 9만 3천명으로서 재만 일본인 총수의 72%를 점한다. 1942년에 이르러 재만 일본인은 100만 명을 넘는데 봉천성에 35만 명, 신경특별시에 13만 명으로 비교적 많고 길림성(6만), 삼강성(5만 7천), 목단강성(8만 2천), 빈강성(8만 4천), 금주성(5만 4천)이 모두 5만 명을 초과한다.

재만 일본인의 직업별인구(1935년)를 보면 24%가 무직업이다. 유업자 중 상인이 23%, 공무 및 자유인이 25%, 공업과 교통업, 광산업에 종사하는 이가 10% 좌우이다. 농, 목, 임업에 종사하는 일본인은 극히 적은바 3%를 웃돈다. 재만 일본인의 성비례는 높은 바, 1935년에는 139, 1942년에는 137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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