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화의 중국조선족 이주사>zhuandtaining@hanmail.net

1) 이주민상황
명나라 때는 조선인이 중국 요동일대에 자유로이 난입하는 고봉시기(어떤 발생한 일이나 비율이 다른 시기보다 높은 시기)였다. 명나라는 동북에 대한 통치를 완강하게 했으며, 동북 개발에서 조선인의 난입에 대해 보호 조치를 강구하였고 그들의 정착을 허용하였다. 이 때 건국 초기였던 조선은 토지제도의 문란, 세금의 무질서와 가혹한 징수, 관리의 폭정 등의 정치적 불안으로 백성의 기본 생활 기반이 흔들리어 백성의 ‘유실’이 더 촉진되었다. 자연 보물고인 만주는 그대로 조선 변민이 월경하는 첫 선택지가 된 것이다. 명나라 홍무(洪武), 영락(永樂)년간에 요동의 동녕(東寧), 광녕(廣寧), 삼만(三萬), 철령(鐵嶺), 자재(自在) 등 위(衛), 소(所)에 조선인이 집거 해 있었다. 그 중 동녕위는 주로 조선인을 모집하기 위해 설립된 행정구역이다. 조선에서 멀지 않은 동녕위는 조선인이 압록강을 건넌 후의 첫 낙착점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太宗實錄)에는 최초의 월경개간 기록이 적혀 있다. “一四零九年 九月,正月,義州至江界之臨江居民,對岸朝往夕東之,許耕種”. 동상서, 태종실록,卷17 이런 현상은 세조실록(卷四十五) 세조 14년(1468년) 3월 기사로 “건주, 모 위 등의 지역에 포로 또는 도망한 한족과 조선인들이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 사이 공간에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고 있었다.”, “동녕위의 고려인은 홍무연간(1368-1398)에는 3만 명, 영락연간(1403-1424년)에는 4만여 명 이었다. 요동인구 중 고려인이 30%를 차지하였으며 서쪽은 요양, 동쪽은 개주, 남은 해주, 개주에 집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 시기 조선에 대한 명나라의 공녀(貢女)요구는 여전하였으며 명나라 영종이 즉위하여(1463년) 부녀 52명을 명나라에 보냄으로써 이 악례는 폐지되었다. 이 여자들 중에는 비빈(妃嬪)이 된 자도 수명이 있으며 명태조의 한비(韓妃)는 함산(含山)공주를 낳았고 또 명태종(영락제)를 낳은 이도 조선 여성이었다.

조선은 일본과 여진에 대해 교인(交邻)외교정책을 썼다. 하지만 최초의 파탄은 일본의 침략에서 비롯됐다.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丰臣秀吉)가 등장하여 전국(戰國)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내의 통일을 완성하자 대륙침략을 구실로 조선침략을 시작했다. 1592년 4월, 15만 8000여 명의 일본 침략군이 부산에 상륙하였다(임진왜란). 1597년에는 재차 군대를 보내어 침략전쟁을 심화 시켰다(정유재란).이에 대한 이순신 장군을 대표로 하는 조선의 항쟁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천시 받던 기생 논개(論介)도 적장을 죽이고 순국하여 이름을 떨쳤다. 임진왜란으로 명나라는 1592년 6월 15일 제1차 원병 1000명을 압록강을 건너보냈으며 그 후 요진(遼鎭)의 5000명이 평양성에 주둔하였고 그 해 12월에는 이여송(李如松)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명나라 제2차 원병 4만 3000여 명이 당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명나라의 원병은 20만에 달하였다. 이 시기 명군 종속 하에 종군한 조선인이 많았으며 전란의 수습으로 명나라의 군대는 귀국하게 되었는데 당시 명군에 종속하였던 조선인이 명군과 함께 만주나 중국 내륙으로 건너간 숫자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는 남만주에 떨어져 부락을 이루고 고려촌을 세운 자도 있고 본토인의 노릇을 한 자도 적지 않다.

『한국사』 근세전기편 제이편(韓國史 近世前期篇 第二篇) 또 명나라 원병의 주둔이 장기화되어 조선의 여자와 결혼한 자도 많았다. 그들 중 명군이 귀국 시 함께 중국으로 건너간 이도 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7년간 지속된 일본의 침략은 조선에 커다란 전쟁피해를 끼쳤다. 농토가 황폐되고 국가의 재정이 파탄되었으며 인명 손실 역시 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의 침략은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뒤바꾸어 놓았다. 조선에 원병을 보낸 명나라는 국력이 한결 쇠퇴해졌고 만주지방의 여진족이 중국대륙의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일본에서도 도요토미의 정권이 몰락하고 도꾸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성립되었다.

16세기 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전까지 여진족은 그 세력을 떨치지 못하였다. 명나라의 오랜 분할통치의 희생양으로 민주지방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보냄으로써 여진족에 대한 통치가 약화되었으며 여진족은 점차 명나라의 통치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분산된 여진족은 통일을 이루었고, 강대한 세력을 형성한 누르하치는 1616년에 요녕 신빈에서 나라를 세워 후금(后金)이라 일렀다. 후금이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 궐기하자 명나라와 조선의 친선관계는 금이 갔다. 후금은 명나라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며 관내진출을 노리는 동시에 많은 인구와 재물 약탈을 일으켰다. 1618년  봄, 누르하치는 ‘7대 한(恨)’을 이유로 명나라 요동지방의 중요한 무역 도시인 무순관을 공락하였다. 명나라는 새로 일어선 후금이 명나라의 만주통치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느껴 후금에 반격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20만 대군을 동원하는 동시에 조선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에 ‘사대정책’을 표방해오던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강홍입(姜弘立)을 사령관으로 1만 3000여 명의 원병을 만주지방에 보내었다. 명은 조선병과 연합하여 ‘분진합격(分進合擊)’의 전술로 흥경을 포위하고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전쟁은 명나라에 불리했다. 후금이 명나라의 주력부대를 대파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사르허(薩爾滸)전투이다. 1만 3000여 명의 조선군은 살해되고 굶어죽고 달아난 사람을 제외하고 적어도 절반이 포로가 되어 전리품으로 왕공 귀족과 전공(戰功)을 세운 장병들에게 분배되어 그들의 가노(家奴)나 농노가 되었다. 박창욱,『조선인의 천입 및 역사기점문제를 론함』 강홍립은 수하 전군을 이끌고 후금에 자진 항복하였다.

 이것은 형세를 관망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는 광해군(光海君)의 밀명에 따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 뒤에 후금의 군사적 침략은 일어나지 않았다. 광해군의 양면(중립) 외교가 효과를 본 것이다. 후금에 투항한 5000명 조선군대의 전쟁 후 처리에 대해 부동한 역사기록이 있는데 포로송환은 극히 어려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조선에는 정변이 일어났다. 서인(西人)일파가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仁祖)를 새 왕으로 추대하였다(1623년). 당시 집권자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만 강조하고 후금에 대해서는 적대정책을 취하였다. 후금과의 일체 관계를 단절하였으며 1621년 조선 가도(枷島)로 도주하여 한족난민을 모아 항금(抗金)의 기치를 내든 명장 모문용(毛文龍)부대에 보호정책을 취하였다. 

사르허 전투는 후금의 발전에 있어서 관건적인 전투이다. 명나라는 이때부터 군사상에서 전략방어에 넘어갔으며 후금은 진공단계에 들어섰다. 명나라와의 작전 시 뒤쪽의 근심을 없애고 명나라와 조선의 외교관계를 끊기 위해 조선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였다. 1627년 정월 13일 후금은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통수 아민(阿敏)이 3만 군대를 거느리고 돌발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범하여 왕경(王京)까지 번개같이 쳐들어갔다(정묘호란). 3월 3일 조선과 후금은 ‘강도사맹(江都誓盟)’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인즉, 후금 군이 조선에서 철수할 것, 두 나라는 압록강,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각기 국경을 지키고 앙심을 품지 말며 영원히 화목하게 지낼 것, 두 나라는 무역을 할 것 등이다. 조약에는 또 명나라와 후금이 교전할 때 중립을 엄수할 것을 조선에 요구하였다. 후금의 군대는 철수할 때, 이르는 곳마다 사람을 죽이고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는데 평양, 엄각, 강동, 삼등, 순안, 함종 여섯 곳에서만 해도 4986명의 조선인을 납치하였으며 청천강 이북에서 납치한 인구는 조사해낼 수도 없었다. 『광해군일기』

그 뒤 후금은 계속 국력을 떨쳤으며 1636년에는 국호를 청(淸)으로 고쳤다. 청은 실질적으로 대륙의 새 지배자가 되었다. 이와 함께 청나라를 대국으로 섬기라고 조선에 외교압력을 가하였다. 조선은 물론 반대하였다. 청태종은 조선이 ‘맹약’을 어겼다는 구실로 1636년 12월에 12만 대군을 휘몰아 재차 조선에로 쳐들어갔다. 1637년 1월 남한산성까지 달아난 인조는 성에서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는 치욕의 역사를 연출하였다. 청의 신하가 될 것을 수용하였으며 ‘인질을 보내고 세공을 바치며 명나라와의 일체 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를 도와 명나라를 공격해야 한다’등의 요구를 받아 들였다.

청나라는 ‘조약’에 근거하여 두 왕자와 척화파(斥和派), 그리고 대신의 가솔 그리고 수만 명의 포로를 데리고 요동으로 철거하였다. 청나라 군대는 또 조선에서 징병하였는데 한번에 1만 2500여 명을 모았다. 『심양상계』(沈陽狀啓) 『요동문현정략』에는 “만주 8기 중 고려백성 42개 성씨가 있었는데 선조는 모두 조선의 역주, 평양 등 지역의 사람으로서 청나라초기에 포로가 되어 내무부의 포의(包衣, 만족어로서 심부름꾼)로 있다.”고 적혀있다.
  
2) 조선인 포로 속환
후금의 산해관 진출 전 여진은 봉건사회로 넘어가고 있었지만 노예제 성격이 뚜렷하였다. 노예는 노예주의 사유 재산으로서 도살과 매매가 자유로웠다. 여진족이 강대해짐에 따라 특히 17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노예의 수량이 급속이 늘어나 대폭적인 인구매매가 나왔다. 출전한 병사는 사람을 많이 붙잡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 하였다. 여진족의 노예는 약탈한 중국인과 조선인인데 그 중 조선인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 시기 인구 매매의 특징은 조선에서 납치하여 온 조선인을 다시금 조선에 팔아 폭리를 얻은 것이다. 『강도사맹』에서 후금은 포로를 속환하려는 조선의 마음을 간파하고 호시(互市)를 제시하였다. “포로들의 정형을 봐서 우리에게 호시를 열라한 듯 하고, 재물을 주고 되찾아가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이조실록』 1628년 2월에 중강개시(中江互市)에 협의를 보았고 속환활동도 시작되었다.

중강은 납치해 간 조선인을 파는 시장이 되었다. 『이조실록』을 통해 그 규모를 보면 “속환되어야 할 400-500명이 시장에 나왔는데, 그 중에 부모, 형제가 없는 자가 많아서 사갈 사람이 없는지라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보기 처참한 것은 물론, 이로부터 되찾을 길이 끊어져서 개시는 또 본의를 잃게 되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번은 후금 측에서 200명을 데리고 시장에 나왔는데 팔려간 사람은 1/3도 안 되었다. 가격 문제를 놓고 다시 협상하여 낮춘 끝에 한 사람의 값을 천 65필로 정했다. 이 값에 따라 남녀 30명을 남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국경을 바라보며 통곡하면서 되돌아가야 했다.

『명실록』 신종 卷3 조선은 정부의 차원에서도 포로 속환활동을 펼쳤다. 이는 민심을 다소나마 안정시키려는 것이다. 1628년에 “3000석 알곡을 내어 그 중 2000석은 팔고 1000석은 한(汗) 에게 보내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책 1643년에는 또 나라의 재물을 내어 속환하려 하였다. 하지만 후금이 거절을 하여, 조선은 후금 노예주와 협상하여 그들 수중의 조선인을 되찾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절을 심양에 파견하는 기회를 얻어 조선인을 되찾는 길도 있었다. 1628년 정충신 등 사절일행이 22명을 데려왔고 1637년 사은사 최명길의 수행들이 780명을 사서 데리고 왔다. 또 후금의 인질로 요동에 거주하는 왕세자를 통하여 되찾은 것이 수백 명에 달하였다. 속환령은 개인적 속환활동을 가능케 하였다. 『沈陽狀啓』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값이 높아도 너무 할 정도였다. 사기(士旗)나 부모, 처자의 값은 수백, 수천에 달해 되찾기는 힘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희망을 잃고 우는 소리가 길을 덮었다. 그 중에 홀로 사는, 친척이 없는 사람들은 조만간에 나라에서 되찾아 주기를 바라며 날마다 밖에서 울어 공소하는 것이 차마 보기 구차하다.”

명나라 숭덕5년(1640년)戶部參政의 자료에 따르면 ‘…爲大朝軍兵擄去今已五十年之久 其中雖有若干贖還之人 亦不能百分之一’라 하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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