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화의 중국조선족 이주사>zhuandtaining@hanmail.net

3) 철령 이씨 가족
명나라 시기 여러 원인으로 중국에 이주한 자 중 뚜렷한 세력을 형성한 예도 있다. 철령 이씨는 중국에서의 500년간의 긴 세월을 거쳐 지금에 와서는 수만 명의 후손이 중국의 요녕, 산동, 베이징, 길림 등 성(시)와 조선반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서 살고 있다. ‘철령이씨’에 대해서는 전문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여기서는 조선인 중국이주의 특수한 예로써 간단히 서술한다. 저명한 ‘철령 이씨’가족연구 전문가인 이택면(李澤棉)의 견해에 따르면 그 가족의 본적지는 조선 성산(星山) 벽진군, 즉 오늘의 경상북도 성주군 암명수촌이며 원래는 ‘벽진 이씨’였다. 『명사』 이성량(李成梁)전에는 “高祖英(李英)은 조선에서 의거해 온…”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영이 조선에서 이주 해 왔다는 것은 분명한 것이며 떠난 지점은 조선북부 압록강 연안의 자강도였다. 철령 이씨의 시조인 이영은 성주 이씨의 후대이다. 성주 이씨의 시조 이순유 (李純由)와 이돈유(李敦由)는 신라 말년의 재상이었다. 신라가 망한 후 경산부(京山府, 성주(星州)의 옛 이름)로 이사하였다. 고려 고종 때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은 덕망이 높았고 이때부터 가업을 새로 일으켜 세웠으며 그도 자연히 이 가족의 중흥시조(中興始祖)가 되었다. 이영은 성주 이씨 가족의 15세손으로서 중흥시조 이장경의 증손이고 이승경(李承慶)의 아들이다.

1361년에 고려는 독로강(禿魯江, 압록강의 지류)에 ‘만호(萬戶)’를 설립하였으며 1369년에는 강계(江界)로 고치고 4개 군을 설치하였는데 이영이 강계의 천호(千戶)로 임명되었다. 『韓國人의 족보(族譜)』, 韓國人의 族譜編纂委員會 편 후에 ‘죄’를 범했기에 징벌을 피하여 요동으로 이주하여 철령에 정착하였다. 철령에서 군호(軍戶)에 편입되었으며 군공을 세워 철령위지휘첨사(鐵嶺衛指揮 僉事)의 세습직을 수여 받았다. 『철령현지10』(鐵嶺縣志) 이영과 그의 후예는 요동에서 지위가 당당한 권문(權門)을 이루었다. 제6대손 이성량 때에는 그 가세가 전성기에 달하였다. 이성량(1526-1618년)은 ‘임철령위 지휘 첨사,성량영의효건,유대장재,만력초누관료동좌도독(任鐵嶺衛 指揮 僉事,成梁英毅驍健,有大將才,萬曆初累官遼東左都督)’이었으며, 『중국인명대사전』, 상무인서관(中國人名大辭典, 商務印書館) 신종(神宗)황제의 총애를 받아온 장수로서 명나라로부터 ‘녕원백(寧遠伯)’이란 작위까지 수여 받았다. 요녕성 북진현성(北鎭縣城)의 이성량패방(李成梁牌坊)에는 ‘진수료동총병관 겸태자태보녕원백리성량(鎭守遼東總兵官 兼太子太保寧遠伯李成梁)’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의 다섯 아들 중 여송(如松), 여정(如楨), 여백(如柏), 여매(如梅)는 모두 요동총병관으로 임명되었다. 조선 임진왜란 때 이여송은 정동군대장(征东军大将)에 임명돼 조선에 출병하여 큰 공을 세웠다. 후금의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명나라 세력이 요동에서 쇠퇴해져 철령 이씨 가족은 쇠약의 길에 들어섰다. 1618년, 후금에 귀순한 이사충(李思忠)은 후금의 세력에 의거하여 가족의 부흥을 찾았다. 후에 그는 섬서제도(陜西提都)로 임명되었으며 ‘일등남(一等男)’의 작위를 받았다. 청나라초기 이사충을 위수로 하는 철령 이씨 가족은 다시금 통치층에 들어섰고 명망 높은 대가족이 되었다. 청나라 초기, 철령 이씨 가족은 한족과 통혼하는 일이 보편화 되었다.

후에 청나라에 대해 친근한 태도를 취하여 또 만족과의 통혼이 지속되었다. 이성량은 건주 여진의 누르하치를 부추겨 건주 여진의 수령이 되게 하였고 여진과의 관계를 완화하기 위해 여진과의 통혼의 길을 택했다. 이여백의 첩이 바로 누르하치의 동생 수르하치의 딸이었다. 후금에 귀순한 철령 이씨 가족은 통치계층에 진입한 후 많은 이들이 기제(旗制)에 편입되었으며 만족 이름을 가졌다.

4) 이주조선민의 후예
① 요녕 개현(蓋縣) 진툰향(陳屯鄕) 박씨촌
박씨촌은 개현 웅악진(熊岳鎭) 동쪽 10리, 진툰향 북쪽 10여 리 되는 곳에 위치, 사면은 산에 둘러 싸여 있다. 1982년 제3차 전국인구전면조사 당시 촌 인구 1478명, 그 중 박씨가 276명으로서 총 인구의 18.7%를 점한다. 이들은 주로 농업, 부업 및 과수재배와 채석업에 종사하였다. 어떤 원인으로 1982년 한국으로 되었던 민족 족적은 조선인으로 고칠 것을 신청하였으며 해당문건에 좇아 법률상에서 조선인으로 승인 받았다.

박씨 촌에 대한 많은 연구와 답사를 거쳐 이미 한족으로 동화된 고려인의 후예라는 점이 공인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의 이주 연대는 역사적 기록이 없으나 전설, 비석, 족보 등으로 미루어 보아 원나라 전에 이주 된 것으로 보이며 의, 식, 주와 혼상풍속, 예절 등 많은 면에서 조선인의 고유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언어와 문자는 중국화(化)가 된지 오래다.

하지만 조선민족의 어떤 풍속습관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예로 ‘노인들에게 밥상을 따로 차려 드린다.’, ‘동성동본은 결혼하지 않는다.’ 등이다. 이들은 또 거의 모두가 조상이 쓰던 삿갓을 대대로 물려왔고 족보와 비석을 보존하고 있으며 세대주는 임종 시에 ‘우리는 조선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아래 세대에 꼭 부탁을 하곤 했다. 이들의 발견으로 하여 중국조선인역사학계에는 조선인 이주의 상한(上限)토론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이는 따로 서술할 내용이다.

② 요녕 본계현(本溪縣) 산성자향(山城子鄕) 박씨촌
중국민족사무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1986년 본계현 총인구는 31만 6천여 명, 그 중 조선인이 2818명, 16개 향(진)에 분포 되어 있는데 산성자향에 1223명으로서 가장 많다. 민족을 고치기 전, 전현의 조선인 인구는 310명 뿐 이었다. 현 정부에서는(1984) 10호 문건을 반포하여 박씨 촌의 거주민들이 민족을 고치는 것을 동의하였으나 적지 않은 박씨 거주민은 민족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놓았다. 그 예로 편령향(偏嶺鄕)의 박씨 50여 호, 200여 명은 그대로 만족으로 되어 있다.

현재 이들이 보존하고 있는 족보, 요녕성당안관 자료, 영녕사 비석 등에 대한 분석에 따르면 박씨가 본계 지역에 유입하여 이미 15대에 이르렀으니,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의 청나라 초기로 미루어 볼 수 있다. 당시는 ‘포의(包衣)’의 신분으로 생계를 유지한 것으로 민국 8년 『京都私碩謹親王奉恩鎭國公全公府地冊』,광서 28년 10월 『敬謹 親王府丁卷,佃戶花名冊地畝冊』에 적혀있다. 박씨 마을 사람들은 이전에는 자신들이 조선인임을 몰랐으며 처음에는 만족으로, 해방 후(1949년)에는 한족으로 되어 있었다.

풍속도 만족을 따랐으며 후에는 한족과의 공동생활 속에서 점차 민족성을 잃은 지방 풍속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민족의 자존심과 자아의식이 없으며 음식, 예절에서도 우리 민족의 특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 한 예로  이들은 김치를 먹어보지 못하였으며 개고기는 먹으나(만족도 개고기를 먹는다) 껍질을 버리며 보신탕도 하지 않는다. 박씨 마을 사람들이 동화된 주요 원인은 타민족과의 통혼이었다. 

③ 하북성 청용, 평천, 승덕현의 박씨가족
청용(靑龍)현은 하북성 동북부에 위치, 장성북쪽에 있다. 1987년에 만족 자치현으로 되었으며 당시 인구는 46만 7000여 명, 만족이 51%를 점하고 조선인은 340여 명이다. 이들 조선인은 주로 팔도하향 타구촌과 대영자향 맹가와포촌, 위당구 등의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타구촌에는 촌민 573호, 2000여 명의 인구가 있는데 조선인이 107명으로서 비교적 집중되어 있다. 박만은(朴萬銀) 노인의 말에 따르면 선조는 심양일대에서 만주 8기에 가입하여, 후에는 청나라 군대를 따라 입관하였으며 베이징에 진입하였다. 후에 궁정정변이 일어나 고조부는 탑구촌에 정착하였다. 그 때부터 박씨가족은 7대를 이어왔으며 150-160년을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1887년 탑구촌에 홍수가 터져 고조부(박자유)의 손자 박태, 박복이 위당구로 이주하였다. 지금 위당구와 맹가와포에 박씨가족 89명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박태, 박복의 후대이다. 청용현의 조선인은 대체로 두 부류로 나눈다. 한 부류는 박씨 성 조선인이고 다른 한 부류는 박씨 가족의 여자가 만족 또는 한족과 결혼한 후 그 자식들이 해당 정책에 따라 조선인으로 된 것이다.

 전 촌 260명 조선인 중 박씨 조선인이 64명이고 어머니 또는 할머니의 민족성분을 따라 조선인이 된 이가 193명이다. 박씨 조선인은 조선 언어와 문자를 이미 잊고 하북 방언을 사용하고 있으며 조선인복장은 영화나 ‘민족화보’에서만 보았다고 한다. 그들의 민족의식은 몽롱하고 단순하였다. 평천(平泉)현과 승덕(承德)현에도 1100여 명 박씨 가족이 있는데 이들은 평천현 당감향(黨坎鄕), 박가원(朴家院), 칠구향 박장자(七溝鄕 朴杖子) 두 곳의 박씨가족의 지계로서 이들의 상황도 청용향의 탑구촌 박씨 가족과 비슷하다.

④ 요녕 봉성현 문, 서씨 족보
요녕성 봉성현 소재지 교구 북산 1대의 문경길 노인은 『문가씨보서(文佳氏谱书)』 즉 족보를 보존하고 있다. 그 족보에는 280여 년간 문씨‘시조’ 문서(文瑞)가 조선 평안북도에서 봉황성으로 이주한 후 11대를 내려온 직계와 지맥 후손들이 기재되어 있다. 문씨 가문에 원래 족보가 있었는데 건융년간 수남촌에서 홍수에 분실 되어 1925년 다시 편찬되었다.

후손들로 하여금 ‘장유유서(長幼有序)’하게 하기 위하여 머리말의 끝에 20자를 이름자로 선택했고 성명의 가운데 자로 했다. 선정된 20자는 ‘건수사리태, 림복이함항, 부익취승정, 진손점제풍(乾需師履泰,臨復咸恒,孚益萃升鼎,震巽  漸濟丰)’이다. 문씨‘시조’ 문서의 후손들은 봉황성의 직계 외 홍화령, 당가구, 봉청, 이대자, 베이징 등 지역의 지맥을 이루었다. 문서로부터 그의 9대 후손에 이르기까지 예부 및 지방관청에서 6품 내지 8품 조선통역관으로 있던 사람이 15명이나 되는바 이는 문씨네 가족 중에서 벼슬한 자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 문서가 조선에서 중국에 이주하여 기적(旗籍)에 들어 200여 년이 흘렀으나 본 민족의 언어를 여전히 보존 해 왔음을 설명한다.

봉성현 서가보(徐家堡)에는 만족 37호가 살고 있는데 그 중 서씨 가문 12호는 몇 백 년 전에 이주 해 온 조선인 후예이다. 『봉성현지』에는 “서씨는 대대로 성남쪽 봉황산 밑에서 지금까지 200여 년을 살아온 봉성의 명문거족이다.”의 기록이 있다. ‘인물지·향환’에 첫 사람으로 기재 된 서씨 선조 서상융(徐上戎)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상융은 서씨이고 경도양백기에 입적하여 봉황산록에 살면서 예부의 사역통관(四譯通官)직을 이어 받았는데 청나라를 따라 관내로 들어갈 때 공이 있어 경영총병(京營總兵)으로 승직했다.

그 후 역적 장씨를 평정하고 돌아와 병부좌시랑직을 맡고 1등 자작(子爵)과 광록대부로 책봉되었다.” 서상융의 아들 서정상은 부친의 작위를 상속하여 종군하였는데 사후에도 호를 책봉 받고 사당을 짓는 등 그의 명성은 부친을 초과하였다.

명말, 청초에 요녕에 이주한 조선인은 대부분이 만족기적에 편입돼 만족의 한 지맥이 되어 번영을 이룩하였으나 본 민족의 감정, 언어와 풍속, 습관을 대대로 전해왔다. 지금도 본 민족의 일부 특징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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