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리 혜선>

                                          딴 단
 
  전화벨이 자지러지게 울린다.
  윤정은 벌떡 일어나 전화기로 달려간다. 손은 이미 송수화기를 잡았으나 곧 멈춰선다.
  딸애의 전화가 아니다.   
  벌써 전화가 끊긴지 사흘째 되는 딸애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대답이나 하듯 딸애의 목소리가 귀에서 왱 하고 들린다.
  《엄만 한국서 10년간 아무 일도 없었슴까? 정말 그렇게 살았단 말임까?》
  그리고는 문을 탕 소리나게 열고 나가던 딸애의 뒤모습.
  《10년간…》
  윤정의 머리속에서 10년간이 맴을 돈다. 그리고 딸애의 뒤모습도.
  10년간 10년간 10년간…
  진눈까비가 내리는 소리, 3월인데 바람이 부는지 창문이 드으응 울린다.
 
  십년만의 만남이였지만 딸애가 엄마 품속에 뛰여들며 엉엉 우는 등 윤정이가 비행기에서 많이 상상했던 감동적인 장면은 없었다.
  이날 윤정은 연길공항에 내리자마자 남편이 몰고 온 자가용에 앉아 기차역으로 달렸었다. 길림대학 예술학과에 시험을 보러 떠나는 딸애는 비슷한 시간대에 플랫폼에서 장춘향발의 기차를 기다리고있었다. 간신히 지하도를 넘어 플랫폼에 들어섰을 때 차는 막 역에 도착해 사람들이 벌떼처럼 오르고있었다. 기차가 떠날 때까지 차에 오르지 못하는 일은 없으련만 언제보나 똑 같은 풍경이다. 사람들 틈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며 딸애는 다급히 말했다.
   《엄마, 아부지는 오늘 점심에 뉘네 잔치집에 가기 때문에 시간이 없담다…. 엄마갉 딴단이를 봐주쇼, 오늘은 떠날 준비때문에 영 정신이 없었슴다. 딴단이한테 공부를 시키다가 그만 딴단이를 밖에 놔두고 왔슴다… 그냥 놔두면 위험함다. 지금쯤 엄마엄마 하면서 울고있을겜다…》
  《딴단이라니? 공부를 시키다니? 엄마라니?》
  윤정은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다.
  딸애는 비명을 질렀다. 아마도 발이 밟힌 모양이였다.
  《아, 아가가!…발 좀 치우쇼…아가갉 아, 짜증 난다… 엄마, 딴단이는 벌써 네시간이나 밥을 못 먹었슴다. 꼭 가자마자 밥을 먹여주쇼, 안 먹이문 굶어죽슴다…아, 이 팔 좀 치우쇼, 팔 좀… 아가갉아, 참… 그리구 엄마, 딴단이가 건강이 안 좋던데 병에 걸림 큰일임다. 목욕 좀 시켜주쇼. 어떻게 시키는지 아부지한테 물어보쇼, 시간이 있으면 유희도 같이 놀아주구, 그래문 마마(엄마), 마마 하면서 영 좋아함다. 나 하나만 믿고 사는 아인데…》
  순간 윤정은 뒤통수가 뗑해났다. 얘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있는건가? 엄마라니! 저 애가 엄마…? 그럴리는 없다. 그럴리는 없다.
  그래도 속이 철렁하다. 딸애는 트렁크가 사람들에게 걸려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간신히 차에 오르고있었다. 괜히 십대에 아기를 낳은 미혼모가 떠올랐다.
  《저 애가 무슨 소리를 하는거예요?》
  윤정은 서울말로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사람들 틈에 끼이지 않고 멀찌감치 서서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있었다.
  윤정은 남편이 낯설다는 생각을 두번째로 했다. 첫번은 공항에서 남편을 처음 만난 순간이였다. 십년의 리별이니 낯설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만났지만 그 느낌은 상상외로 강했다. 뭔가 해소할수 없는 낯설음이 어딘가에 불포화지방처럼 응고돼 있었다. 남편도 내가 그렇게 생각될가?
  문제는 딸애다. 딸애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윤정은 뒤통수가 뻣뻣해났다.
  장춘행 렬차가 떠나려고 씩씩거렸다. 딸애는 겨우 자리를 찾고 짐을 올린후 창문에 대고 뭐라고 안타깝게 소리를 질렀다. 윤정이가 알아듣지 못하자 출구쪽으로 달려왔다.
  《엄마, 딴단이를 꼭 잘 관리해주쇼, 방법은 아버지에게 잘 물어보면 됨다, 엄마, 꼭 잘 봐주쇼예. 딴단이한테…》
  차는 떠나기 시작했지만 딸애는 뭐라고 계속 엄마에게 당부했다.
  홍수처럼 지하도를 향해 몰려가는 사람들 틈에서 윤정은 앞서가는 남편을 겨우 잡았다. 남편은 누구의 잔치집에 가는 일이 왜 그렇게도 조급한지 부랴부랴 걸었다.
  《딴단이라니, 여보세요, 딴단이가 누구예요? 엄마는 또 누구예요?》
  《누구겠소, 당신 딸이지. 애가 해달라는대로 해주면 될거 아니오!》
  남편이 또 울리는 핸드폰을 귀로 가져가며 대꾸했다.
  윤정은 머리가 뗑하다.
  저 애의 아이라니, 뭔가 잘못 들었다. 저 애가 딴단이의 엄마라니! 내가 잘못 들은게야… 딴단이는 누구지? 왜 한족이름을 가진 아기인갉
  다행히 남편은 몇분동안에 통화를 끝냈다. 인간홍수가 넘실대는듯한 지하도에서 남편이 설명했다.
  《그애가 큐큐에서 기르는 충우(寵物)요.》
  그제야 윤정은 잠시 구겨졌던 마음을 편다. 잠간사이였지만 머리속에 미혼모 등 불길한 단어가 벌레처럼 오갔다. 
  《큐큐라니요?》
  《인터넷에 올라보면 그런데가 있소.》
  《충우라하면 애완견이예요?》
  《아니요.》
  《고양이예요?》
  남편이 뭐라고 대답을 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떠들어서 잘 들리지 않는다.
  《토끼예요?》
  《거북이예요?》
  《물고기예요?》
  《새예요?》
  다 아니란다.
  다 옳더라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왠지 불안하다. 딸애의 말을 금방 알아듣지 못해서인가?
  딸애는 장춘에서 돌아와서도 엄마 품에 뛰여들거나 울거나 하지 않았다. 집에 들어서자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우리 딴단이는, 딴단이를 잘 해줬지 예? 병에 걸리지 않았지예?》
  《딴단이라니?》
  윤정은 생각해보았다. 딴단이가 누구더라?
  딴단이가 고작 딸애가 인터넷에서 노는 애완물이라는것을 아는 순간부터 윤정은 벌써 딴단이를 잊어버렸다. 딸애가 신신당부를 했지만 윤정은 딴단이에게 밥도 먹이지 않았고 공부는커녕, 목욕은커녕, 유희는커녕 그 존재자체가 머리에서 존재한적이 없었다. 윤정은 그 말이 아무런 실감도 나지 않았다. 휴면상태로 된 컴퓨터는 이튿날 인터넷바둑을 두는 남편에 의해 꺼졌다.
  윤정은 십년만에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것이 낯설었다. 윤정이가 한국에 있는 동안 보내준 돈으로 남편은 160평방메터가 되는 아빠트를 구입했다. 집은 화려했지만 낯설은 느낌이 홍수처럼 몰려들었다. 한동안 윤정은 집안의 모든것을 자기의 의지대로 재배치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느낌을 십년전에로 돌리고싶었다. 하지만 뭔가 자기 의지대로 할수 없는것이 있었다. 인테리어는 그런대로 유능한 인터리어가를 불러다가 한것이라 치고 카텐, 침대보, 이불, 베개, 손잡이, 스위치의 소품, 꽃병과 화분, 객실의 카펫, 밥상이나 랭장고에 세트로 편 장식보, 커피잔, 커피숟가락 등 모든것이 너무 잘 어울려서 그것 전부를 한 남자의 느낌으로 했다고는 보아줄수 없었다. 이런 이질적인 느낌은 남편에게서도 나타났다. 윤정은 그 정체를 잡으려고 안달을 떨었다. 
  《딴단이라니?》
  윤정이의 말에 딸애의 낯색이 확 변했다. 신을 벗기 바쁘게 서재로 뛰여들어갔다.
  윤정은 딸애가 고까웠다. 십년만에 만나는 엄마에게 아무리 철이 없어도 이럴수가 있을가? 엄마보다 인터넷에서 키우는 아무 생명없는 펭귄이 더 중요하다는건가? 딸애가 들어설 시간에 맞춰 딸애가 제일 좋아하는 김밥과 탕수육을 만들어놓고 기다린 엄마를 이렇게 대하다니.
  서재에서 쿨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윤정은 깜짝 놀랐다.
  《웬 일이냐? 시험 잘못 봤어? 왜 우는데? 왜 우는데?》
  딸애는 얼굴을 막고 쪼크리고 앉아 소리내여 울었다.
  《괜찮아, 명년에 다시 시험 보면 되잖아. 괜찮아. 아이고, 우리 딸네미야, 울지 마, 괜찮아…》
  윤정은 딸애를 안아주려고 했다. 그런데 딸애가 발딱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에 머리를 박을번 했다.
  《엄마, 엄마는 연변말을 하쇼, 서울말이 듣기 불편함다. 너무 낯섬다.》
  《얘는 왜 괜한 트집을…》
  《딴단이가 죽었슴다! 엄마, 어쩜까? 딴단이가 죽었슴다, 이보쇼, 얼마나 불쌍함까, 얼마나 엄마를 원망했겠슴까…》
  딸애는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컴퓨터화면에 펭귄이 죽어있었다. 목에는 분홍목도리를 두르고 머리에는 분홍리본을 단 펭귄이였다. 컴퓨터화면이지만 좀 자극적인데가 있었다. 펭귄이 싸늘하게 눈을 감고있고 그 위에 십자가가 놓여있었다. 곁에는 또 유언장이 있었다.
 
  난 엄마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얼마나 기다렸는데, 지긋지긋해요, 엄마, 날 어서 하늘나라로 데려다 줘요, 엄마, 난 하느님을 만나러 갈거야….

 《엄마, 딴단이가 죽었슴다, 딴단이가, 엄마를, 나를 얼마나 원망했겠슴까, 불쌍한 딴단아…》
  《충우(寵物) 하나에 값이 얼만데? 또 하나 사면 되지, 그게 뭘 대단하다구 그래?》
  윤정은 화가 나서 말했다.
  《엄마는 돈이면 뭐나 다 되는줄 암까? 그러니까 10년이 지나도 나 안보고싶었지. 난 딴단이를 잘 키우려고 했슴다. 엄마는 아버지도 딸도 몰라라 했지만 난 딴단이를 정말 잘 키우려고 했슴다. 시집갈 때까지 잘 키워서 좋은 집에 시집보내려고 했단말임다. 엄마는 정이란 어떤건지 모르잼까, 돈밖에는 모르잼까! 엄마는 내가 일곱살일 때 떠나서 이제야 돌아왔슴다. 엄마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외롭게 살았는지 암까? 얼마나 외로웠는지. 딴단이는 정말 좋은 아이였는데, 내가 우울할 때면 익살스런 말로 나를 기쁘게 해주구, 기운 빠져하면 매일 파이팅을 불러주구, 비오는 날에는 우산 가지고가라 그러구, 눈 오는 날에는 솜옷 입으라고 당부하구,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들어가서 자꾸 꺼지면 총명한 사람이 왜 이래, 이렇게 귀띔하구…》
  딸애는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윤정은 딸애가 엄마를 원망해 우는건지, 시험을 잘못 봐서 우는건지, 아니면 정말로 딴단이를 위해 우는건지 대체 어느 쪽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딸애는 마우스로 죽은 딴단이를 인터넷의 애완《도시>로 데리고 갔다. 《도시》에는 백화, 학교, 병원, 공원, 놀이터 등 인간의 도시에 있는 모든것이 있었고 뾰족한 탑이 있는 《교회당》도 있었다. 《교회당》에서 댕댕 종을 쳤다.
  《하느님의 품속에서 잘 자라 응.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다시는 나같은 엄마 만나지 말아, 미안하다 정말, 응, 정말 미안하다…》
  딸애는 눈물을 흘리며 딴단이를, 펭귄을 《교회당》에 묻었다. 그리고는 엄마와는 눈도 맞추기 싫다는 표정으로 샤와하러 들어갔다.
  그리고, 3일전 딸애는 가출해버렸다.

 


  tomato

  전화벨이 계속 울린다. 윤정은 전화를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딸애 외의 전화는 받을 생각이 없다. 그것이 가장 처절한 적이나 가장 친한 본가편, 친구의 전화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송수화기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어주며 어쩌고 저쩌고 할만한 여유가 없다. 열일곱살 딸애가 증발이 됐다. 친척집에도 친구에게도 가지 않았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딸애가 가출하기 전 오전에 윤정은 토마토의 실체를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갔었다.
  언어로가 아니라 느낌으로 사실을 알아버리는것이 녀자의 인식능력이다. 남편의 핸드폰이 한번도 울린적이 없지만 울린적이 없다고 믿을 윤정이가 아니였다. 남편의 핸드폰의 통화기록과 메시지기록에 온통 tomato가 만발했다.
  tomato
  tomato
  tomato
  처음에는 무슨 대단한 영어인줄로 알았는데 나중에 잘 맞춰 읽어보니 기껏 병음으로 맞춘 토마토였다.
  토마토는 절규했다.
  썅니(想), 썅니, 썅니, 썅니…
  토마토의 아이가 기숙하는 모아산기슭의 초중교문앞에 갔을 때 짐작한 시간에 남편이 차를 몰고 나타났다. 토마토는 내리지도 않고 13살쯤 돼보이는 녀자아이에게 푸른색의 작은 트렁크를 들려 기숙사에 들여보내며 빠이빠이를 불렀다. 녀자아이의 목에 두른 분홍색목도리가 눈에 익었다. 윤정이가 동대문시장에서 사서 직접 딸애에게 부쳐준것이다. 윤정이보다는 일여덟살 젊어보이는 30대 중반의 녀자가 승용차안에서 하얀 손을 내저을 때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윤정이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차는 뒤로 미끄럼쳐 내리막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남편은 승용차열쇠를 윤정이의 침대에 던졌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짐승처럼 노려보며 싸웠다. 그리고 윤정은 딸애와도 싸웠다.
  윤정은 딸애가 집에 들어서자 따졌다.
  《분홍목도리는 어디 갔어?》
  《남에게 줬슴다.》
  《누군데?》
  《아…지…미, 토마토…》
  《왜 줬어?》
  《아지미가 고마워서….》
  《고마워서 줬다?》
  대답이 궁했을 때 치미는 화는 정말이지 어떤 출구가 없다. 그래서 정수리까지 뻗쳐 맴을 돌다가 혈액속으로 확산되였다. 전신의 피줄이 팽창되고 혈압이 올라가 뒤통수가 뻣뻣했다. 그래서 힘껏 딸애의 귀뺨을 갈겼었다.
  《넌 내 딸이야. 어떻게 아빠의 녀자에 대해 엄마에게 아무 말도 안할수 있어? 어떻게 엄마에게 아무 일 없는듯 할수 있어? 어떻게 엄마는 빼고 아빠와만 공모할수 있는거야? 어떻게 엄마를 왕따시킬수 있는거야? 어떻게 토마토와 한편이 돼? 어떻게 그렇게 하고도 마음이 편할수 있는거냐? 어떻게… 같은 녀자끼리…녀자끼리 그렇게…할수갉있…냐구!》
  그때 딸애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렇게 말했다.
  《엄만 한국서 10년간 아무 일도 없었슴까? 정말 그렇게 살았슴까?》
  《뭐야?》
  《정말 그렇게 살았슴까? 그렇게 살았슴까? 아무 일 없이 살았슴까?》
  《아무 일? 아무 일이란 뭐냐?》 윤정은 딸애에게 묻지 않았다. 아니라고 할수 없다. 정말 아니라고 할수는 없다.
  못된것, 엄마에게 감히 그런 질문을 하다니!
  《십년임다, 엄마, 십년이나 엄마는 오지 않았슴다. 난 아버지가 외롭기보다… 한순간이라도 행복한게 좋습디다…아지미는 나한테도 정말, 정말로 잘해줬슴다…》
  그리고 딸애는 나가버렸다.
  이제 딸애는 더는 엄마의 완전소유가 아니다. 엄마가 더는 절대권위가 아니다. 한국으로 돈 벌러 간 10년간 딸애는 벌써 엄마를 떠났는지 모른다. 그 상실감이 남편의 녀자로 인한 분노이상으로 윤정이를 속상하게 만들었다.
  애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진눈까비는 계속 내리고, 바람은 창문을 계속 울리고, 전화벨도 계속 울리고…
  문뜩 윤정은 멍해진다. 전화벨은 정확히 다섯번 울리고는 끊어진다. 그러나 곧 다시 울린다. 다섯번 울리고 또 끊어졌다가 또 울리고 또 끊어졌다가 또 울리고…
  받을 때까지 울릴 작정이다. 전화벨은 그런 메시지를 보내온다.
  그녀, tomato구나!
  딸애의 가출때문에 그녀에 대한 신경이 느슨해졌던 모양이다. 진작 그녀 번호라는걸 알았을것이지만 그것이 윤정이의 어떤 열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것 같다.
  윤정은 반사적으로 남편의 방을 바라본다. 순간 서서히 격정이 불타오른다.
  남편이 전화를 받기라도 하면 가만있지 않을거라는, 가만 두지 않을거라는 눈으로 방문을 쏘아본다. 분명히 그런 뜻을 보여줘야지, 악에 받쳐 생각한다. 어깨에 긴장이 오른다. 어떤 기쁨이 인다. 그동안의 침묵이 곧 폭발할것이라는 희망때문이다. 침묵이 한달째에 접어든다. 폭발해야지, 폭발해야지, 폭발하지 않으면 미칠것 같다. 이제 폭발할것 같다. 좀만 더 지나면 시원히 폭발할것이다. 윤정은 기대감에 숨결이 빨라진다.
  하지만, 남편의 방은 조용하다. 남편이 어느새 공기같이 김같이 냄새같이 그 방에서 빠져나갔단 말인가?
  그에 대답하듯 남편의 방에서 울려오는 소리가 있다.
  당신은 이겼습니다. 축하합니다. 짠~짠~짠~… 꽃보라가 터지는 음악소리…
  남편은 인터넷바둑에 빠져있다. 적어도 그런듯이 보인다. 매일 존재하지 않는 적과 싸우며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지면서 혼자 낄낄거린다.
  꽃보라가 터지는 음악소리…당신은 이겼습니다. 축하합니다… .짠~짠~짠~…
  느낌이란것이 있다. 느낌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언어이다. 자기마당이다. 느낌이란 언어는 말한다. 저 전화벨은 당신을 향해 울리는것입니다.
  윤정은 어떤 깨달음이 생긴다. 다른 때 같으면 전화벨소리가 울리면 저도 몰래 불쑥 튕겨나왔을 남편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아무런 반응이 없지? 저 전화는 지금 감히, 감히 나를 향해 울리는게 아닌가!
  윤정은 털을 바짝 추켜세운 동물처럼 신경을 곤두세운다. 전화벨소리는 윤정이의 자존심을 박박 긁고있다. 윤정은 분노에 떨며 그에 대처할 일에 집중한다.
  남편은 핸드폰이 없다. 윤정이 몰수해버린지 꽤 오래 됐다. 없고난 뒤부터는 남편의 신경이 객실의 고정전화에 쭉 붙어있었었다. 전화소리가 울리는 순간 뛰쳐나오곤 했다. 샘터에 백년 묵은 범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아무리 목이 말라도 나타나지 말아야 할 일이다. 하지만 남편은 번마다 그 무모한 짓을 거듭 했었다. 자동으로 그리 되는 모양이였다. 그리고 자동으로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둘은 한바탕 싸우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남편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암묵이 있다는 사실에 윤정은 눈이 뾰족한 삼각눈이 된다.
  윤정은 남편에게 용돈도 주지 않았다. 남자는 돈이 많으면 나빠지고 녀자는 돈이 없으면 나빠진다더니, 한국에 있는 동안 너무 돈을 많이 보낸것이 탈인것 같다. 남편의 목과 손가락에 걸어준 금만 해도 6돈 반이 된다. 디지털카메라, 쏘나타차…그리고 또 있다.
  윤정이가 남편에게 경제제재를 가한것은 남자의 자존심에 일격을 가하자는것이다. 염낭에 한달 퇴직월급 300원을 넣은 모습으로 한 녀자에게 나타날 남편을 생각하면 마음이 다 후련했다. 남편의 회사는 점점 더 내리막길을 걸었다. 30년간 근무했는데 지금은 한달 퇴직월급이 고작 300원이다.
  그러고도 계속 련애를 할 셈임꺄?
  윤정은 득의양양해서 생각했다.
  염낭에 3천원을 넣은 남자와 300원을 넣은 남자는 다를것이다, 윤정은 그렇게 판단했다. 어깨도 표정도 목을 세운 각도도, 걸음걸이도, 앞모습은 말고 뒤모습만 봐도 다를것이다.
  윤정이에게는 그렇게 사람을 보는 습관이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벤츠에 태워보면 눈빛, 어깨선이 벌써 달라진다. 바꾸어 벤츠에 탄 사람에게 밀차를 밀게 하면 눈빛, 어깨선은 물론 오관의 위치, 주름의 위치가 벌써 달라진다. 이제 호주머니에 한달 용돈 300원을 넣은 남자가 쏘나타를 몰고 곁에 애인을 실은 모습이란 어떨것인가?  

  녀자에게 치명적인것은 자신의 가구를 다른 녀자가 만졌다는 사실이다. 윤정은 집안의 가구를 다 바꾸었다. 침대는 물론 쏘파까지 바꾸었지만 바꾸지 않은 부분은 시시각각 속살거렸다. 토마토토마토토마토… 인간의 상상능력이란 이럴 때는 정말이지 번거로움만 불러왔다. 싱크대앞에 서면 토마토의 허리를 그러안고 서있는 남편이 보였다. 마루를 보면 그 위에서 질펀하게 정사를 벌였을 남녀가 보였다. 환희에 차 비명을 질렀을 그 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창문으로 비단같이 스며드는 해빛에 떠있는 먼지마저 속닥거렸다. 토마토토마토토마토… 그 공간에 차넘치는 토마토의 체취와 웃음소리, 그리고.. 그녀의 젊은 라체와 호르몬의 냄새…
  더 치명적인것은 인간의 사유란 비교를 한다는것이다. 그래서 사유가 극단에로 치닫지 못하도록 자제시켜야 할것 같다. 토마토가 떠오를 때마다 떠오르는 제이, 그와의 모든것…
  윤정은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은 토마토와는 다르다고 생각하고싶었다. 따라서 제이도…
  윤정은 당당했다. 당당해지려고 했다. 제이와의 사이가 깨끗이 정리되였다는 리유때문인가? 윤정은 생각했다. 제이가 누구던가? 난 그에 대해 아는게 암것도 없잖아. 제이는 어떤 허상일뿐이야.


  제이
 
서울 시청앞 아세아나려행사앞에서 제이는 말했었다.
  《네가 먼저 가. 네가 혼자 남아 혼자 짐을 꾸려가지고 혼자 이고지고끌고 컴컴한 새벽에 혼자 쓸쓸히 중국으로 떠나는 모습을 상상하고싶지 않아.》
  윤정은 이날 인천-연길 티켓을 끊는것으로 한국 불법체류 10년의 력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난 네가 떠난 이튿날에 갈게. 티켓을 그렇게 끊었어. 남자니까.》
  그래서 윤정은 제이 먼저 떠났다. 
  날이 아직 어두운 아침 다섯시 반에 택시로 영등포 공항리무진 역에 내렸을 때였다.
  《제 정말 내 이름이 알구싶재이요?》
  제이가 불쑥 연변말로 물었다.
  윤정은 속이 철렁했다. 분명 연변말씨였다. 흉내 내는 말이 아니였다. 하지만 침착해야지, 침착해야지. 윤정은 변함없는 표정 변함없는 어조로 말했다.
  《알고…싶…지 않아.》
  《내 주소두?》
  《알고…싶…지 않아.》
  《내가 흑룡강사람인지 료녕사람인지 길림사람인지 연변사람인지 알기싶재이탄말이오? 제 정말 알기싶재이탄말이오?》
  《알…고…싶지 않아요.》
  《난… 알구…싶은데…》
  《난 안 알고싶어.》
  《독한것!》
  《안 알고싶어.》
  《당신 티켓이 인천-연길행이란거 난 그냥 알아버렸다이. 당신 티켓을 본건 아이(니)라이. 그동안 살아온 느낌이 그렇더구만. 당신이 연길녀자라는걸말이요. 그냥 알아집데. 당신을 보내자이까데, 이제 영영 당신을 못본다는 생각을 하이까데, 당신을 다른 남자에게 보낸다는 생각을 하이까데, 난 정말 당신이 알기싶소, 미칠듯이 알기싶단 말이요!》
  《난, 안, 알,고,싶,어,요.》
  윤정은 여전히 서울말로 또박또박 말했다.
  《독한…것! 독한것! 정말 이럴래기요? 양? 이럴래긴가, 말하라이, 말하라이…》
  제이는 윤정이를 잡아 흔들었다. 그리고 윤정이를 독한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리무진이 떠나자 곧 새벽어둠에 함몰됐다.
  알고싶었으면 첨부터 물었어야지! 알려줄거면 첨부터 알려줬어야지!
  이제 어쩌란 말이야? 어쩌잔 말이냐? 내가 남편과 아이에게 아무날 몇시에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다 할 때까지 뭘했어? 아무 생각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냐? 바꿔놓고 말해보면 자기는 어쩌겠다는 대책이 서기나 했어? 래일의 티켓을 끊어놓고 안해, 자식에게 간다는 말을 다 해놓고 어쩌겠다는거냐? 정말 내가 돌아서기를 바란거냐? 정말 내가 돌아선다면 자기 어떤 대책이 있기나 한거야? 나와 나의 상실된 가정을 다 책임질거냐구? 자기에 대한 나의 감정 알고있잖아? 내가 이제부터 남편하고 령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걸 알고있잖아? 알면서도 이렇게 했잖아? 자기, 자기는… 자기는 내가 안 돌아설걸 알고있잖아? 알면서도 나를 휘둘러놓고 가버렸잖아? 자기는, 자기는…
  윤정은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비줄기처럼 쏟아져내렸다.
 
  딸애는 말했다.
  《정말 아무 일 없었냐구? 아무 일도 없었어?》
  윤정은 딸애를 노려보았다.
  난 깨끗해, 깨끗하다구. 아무 일 없는거나 마찬가지야.
  윤정은 속으로 뇌까렸다.
  그래, 난 깨끗해. 제이는 내게 허상이나 다름이 없어. 그 동안의 생활이 꿈이였어, 라고 하면 아무도 꿈이 아니라고 할수 없어. 다만 내가 꿈이 아니란걸 알고있을뿐이야. 그러니 내가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게 문제일뿐이야.
 
  제이가 윤정이에게로 뛰여든 첫날 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었다. 제이가 윤정이의 두 팔을 벽에 붙이고 입으로 입을 막아버렸을 때 윤정은 멍해 있었다. 제이와는 한 퇴마루를 쓰는 전통한옥의 세집이라 문은 나무 미닫이였고 겨우 작은 걸개가 안으로 걸려있었다. 남자의 손이 문을 미는 순간 걸개는 아무 저항없이 나가버렸고 금방 세수한 얼굴에 로션따위를 바르던 윤정은 놀라서 엉거주춤 서버렸다. 제이가 윤정이의 입에 입을 포갰을 때 윤정은 깜박 정신을 잃을번 했다. 하지만 1분도 되지 않아 목마른 사람이 물을 기다렸듯이, 배고픈 사람이 빵을 기다렸듯이 그렇게 걸탐스레 일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한데 묶은 배추통같이 옆으로 쿵 쓰러졌고 쓰러져서도 떨어지지 못하고 악을 썼다. 윤정이의 속옷단추가 나가떨어지고 남자의 짜른 바지는 한쪽 다리에 걸려있었다. 
  모든것이 순식간이였다. 두 사람은 땀에 흠뻑 젖어버렸다. 작은 세방은 팽팽해진 고무풍선같이 땀냄새와 숨소리로 터질듯이 차버렸다.
  순식간이였다. 두 사람 모두 너무 급했다. 아무 자제력이 없었다. 즐긴다는것이 아니라 목숨을 살리는 차원의 일처럼 치러졌다. 두 사람 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천정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였다. 한숨이 아니였다. 무거운 짐에 짓눌려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그 짐을 부렸을 때 내는 숨소리였다. 숨이 고르로워질 때까지 그렇게 천정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윤정은 5년만에 녀자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형용할수 없이 크고 소중한것이였다. 전신이 개운했다.
  제이의 팔을 베고 윤정이 물었었다.
  《이름…이 뭐예요?》
  《제이.》
  《제이?》
  《응.》
  《아,아-, 아~스치는~ 바람에~ 그대~모습~ 그리며~~, 그 제이?》
  《응. 난~ 오늘도~ 조용히~~ 그대를~ 그리워~하~네~, 그 제이!》
  순간 그의 표준적인 한국말이 그렇게 편할수가 없었다. 연변말씨였더라면 어찌할번 했는가. 너무 당혹했을것이다. 마치 남편의 이웃집에서 나쁜 짓을 하는것처럼 부담스러웠을것이다. 한국말, 연변에서 아주 멀고 낯설은 곳에 사는 사람이 하는 말인것 같다. 그래서 편안했다. 나의 한국말도 이 남자에게 그렇게 편하게 느껴졌을가? 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여름날이~ 멀리~ 사라졌다 해도~ 제이~ 난~ 너를~ 사랑해~ 아직도~ 변함~ 없는데~…그 제이?》
  《제이~ 난~ 너를~ 사랑해~, 제이~ 난~ 너를~ 사랑해~, 그 제이!》
  《제이~, 지난밤~ 꿈속에~, 제이~ 만났던~ 모습이~, 난~ 오늘도~ 조용히~… 그 제이?》
  《그래, 그 제이!》
  이때 윤정은 기쁨이 반으로 쑥 줄었다. 대신 슬픔이 반으로 늘어났다. 
  《좋은 이름이네, 제이.》
  그가 물었다.
  《자기 이름은?》
  윤정은 쌀쌀해서 대답했다.
  《지마.》
  《지마? 지마라니? 티벳, 서장이름이 아냐? 자기 장족이냐?》
  《성은 묻.》
  《뭐? 묻씨라고? 묻…지마? 묻지마?》
  《지금 자기는 묻지 마잖아요? 성은 제, 이름은 이라며? 이름 안 대주고싶어하잖아요! 글쎄, 반드시 당신 이름을 알아야 한다는 권리를 주장할 처지는 아니지만.》
  《피차에 편할거야.》
  《편하다구요?》
  《그래, 자기도 그러길 원할거야. 이 좋은 날 밤에 왜 이런걸 가지고 흥분해?》
  《나도 원할거라고요?》
  윤정은 심각하게 생각해보았다. 뭔가 거부할수 없는것이 있었다. 그래, 정말로 편한것이 있었다. 흥분하지 말자, 이 남자의 말이 맞을수도 있어.
  《묻, 지, 마는 안 돼.》
  《그럼… 자옥이라 하든가.》
  《안 돼.》
  《왜 안 돼요?》
  《작사자가 잃어버린 애완견을 떠올리며 지은 노래가 자옥이래. 그러니까 안돼.》
  《그럼… 옥경이야.》
  《옥경?》
  《그래, 옥경이야.》
  《옥경이도 안돼, 선술집 어쩌고 저쩌고 그러잖아.》
  《그럼, 그럼 안니라고 하지뭐.》
  《아, 안~니, 워~ 부넝~ 왕지~니~(안니, 난 당신을 잊을수 없어.), 그 안니?》
  《맞아요, 맞아요, 당신 나 잊으면 안돼요.》
  그렇게 그는 제이, 윤정은 안니가 되였다. 제이의 말이 맞았다. 그게 편했다. 현실이 그것이였다.
  퇴근시간이면 제이는 안니야 라고 하며 윤정이를 안아주었다. 윤정이도 제이 자기 왔어? 라고 하며 안겼다. 그렇게 그들은 한집에서 살림을 차리고 부부로 살았다.
  그리고 그들은 헤여졌다. 각자 자기가 번 돈을 트렁크에 넣고 각자 비행기를 타고 각자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갔다.
  윤정은 그들이 안니와 제이일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다른 한쌍의 남녀를 바라보듯이 안니와 제이를 바라보았다. 애초부터 서로를 얽을만한 단서를 남기지 않았다. 이름도 익명, 각자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 이름, 그 도시는 익명이였다. 제이와의 정이 깊어질 때마다 가만히 그의 려권을 뒤져보고싶었다. 그렇게 하는것으로 제이를 소유하고싶었다. 뒤질만한 시간과 조건이 있었다. 갑작스런 하혈때문에 한밤중에 제이에게 업혀 병원으로 떠났을 때, 비에 젖은 그의 벗겨진 머리와 잔등 너머로 간절히 묻고싶었다. 당신 이름이 뭐임까? 어디 사는 사람임까? 하지만 끝내는 묻지 않았다. 남편때문만이 아니였다. 딸애때문만이 아니였다. 제이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안니와 제이에게는 익명을 떠난것들만이 진실이였다. 
  그래서, 익명이여서 당당한건가??
 
  경제적인 제재로도 남편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은 컴퓨터가 있는 서재에서 자고 먹었다. 엄마에게 항의하는 아이처럼 속상해하는 윤정이를 무시한채 인터넷바둑에만 열을 올렸다. 윤정은 매일 음식을 만들고 빨래를 하고 방을 청소했다. 남편은 매일 음식찌꺼기를 만들고 빨래를 만들고 컴퓨터게임을 했다.
  핸드폰이 없어진 후 남편은 한동안 집의 전화에 온통 신경이 쏠렸었다. 전화벨소리가 울리면 자동으로 툭 튕겨나오곤 했다. 그 눈에서 번뜩이던 강한 빛, 윤정에게는 너무 오래만에 보는 남편의 남자의 눈빛이다. 윤정의 앞에서는 아이인 남편이 이 순간에는 남자로 변하는것이다. 아득히 먼 세월, 시골에 있는 윤정의 집에 첫 인사를 다녀올 때 처음 봤던 눈빛이다. 윤정이를 업고 금방 작은 내를 건너고 나자 갑자기 미친듯이 버들방천으로 달리며 말했었다. 나 정말 참을 수 없어. 나 아파, 전신의 혈관이 다 터져버릴것만 같아… 하늘을 덮은 나무잎사귀 사이로 눈부신 해빛이 무수한 금쪼각으로 빛났었다. 남편의 눈도 금쪼각처럼 예리하게 빛났었다. 숲속에 동댕이쳐진 윤정에게로 덮쳐올 때 번뜩이던 그 눈빛은 남자가 녀자를 간절히 원할 때 불타는 빛이다. 그날 윤정은 하얀 원피스를 피범벅으로 만들었었다.
  동물이라도 마찬가지일것이다. 웅성동물이 자성동물을 간절히 원할 때의 그 눈…  그… 눈빛은… 아름답다. 아름다운…것이다. 동물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아름다운…것이다. 윤정은 제이를 생각했다. 자신에게 덮쳐올 때의 그 눈빛, 아, 이제야 살것 같군, 전신이 다 편안해지는군, 정말 오래동안 실면했었는데말이야 라고 중얼거리던 그 말…
  아, 이제야 당신을 얻었구나, 나 당신 정말로 오래동안 사랑했어 라는 말 대신, 그런 말을 기다렸었는데, 한마루를 같이 쓰는 같은 세집 다른 방에서 1년여 같이 살면서, 서로 다른 화장실에서 목욕하는 물소리를 들으며, 밤 늦도록 그의 귀가를 확인하고서야 자리에 들고, 자리에 들고서도 그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뒤척거리며, 그 때마다 그런 말을 그처럼 기다렸었는데…그런데 그 말대신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아, 이제야 살것 같군, 전신이 다 편안해지는군, 정말 오래동안 실면했었는데말이야… 마치 불편해서, 어서 잠들고싶어서 그녀에게로 덮쳐왔던듯이. 격렬한 섹스끝에 그 눈빛이 모닥불이 사그러지듯 사라지고 그리고 바로 잠들어버리는 그를 바라보며 윤정은 식어가는 화로를 련상했었다. 그 때 머리속을 온통 차지해버린 사람은 누구였던가? 남편이였다. 남편앞에 무릎을 꿇고있는 상상을 수없이 하며 얼마나 마음이 착잡했던가? 2년을 한국입국수속빚을 갚고 2년을 집을 사기 위해 버티고 또 1년은 딸애 대학공부비용때문에 버티고, 그러고나니 이제는 자가용을 사고싶어지는데 인내심과 힘은 점점 바닥이 나고 딸애와 남편과 편안한 집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데, 이제는 더는 안되겠어 라고 하며 하루에도 집에 가고싶은 생각을 백번씩 하는데, 그렇게 5년동안 돌솥밥집에서 어깨가 부어올라 밤잠을 자지 못하며, 무거운 돌솥을 가시고 나르며 버텨왔는데, 그런데 오늘 그만 남편 몰래 다른 남자랑 같이 자버리다니, 나도 이런 녀자로 될수가 있다니… 그런 서러움에 젖어 혼자 울고싶었다. 하지만 왜 웃어지는거지? 슬픈데도 왜 저절로 자꾸 웃어지는거지? 제이가 이불을 열고 윤정이의 언 몸을 따뜻한 이불속에 아기처럼 집어넣고 꼭 품어주었을 때, 아, 행복으로 차넘치던 그 날 밤, 정말 5년만에 처음 한 사람에게 따뜻하게 안기고, 한 남자에 의해 환희에 찬 녀자가 돼보고, 처음으로 외롭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튿날에도, 그 후에도 수많은 나날을 그 남자와 도란도란 한밥상에 앉아 아침을 먹고, 그 남자와 함께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밤을 보내는 사이에 하루하루가 빨리도 지났다. 그렇게 5년을 더 벌어 10년을 채우고 돌아와 개발지에 땅을 사고 차를 샀다. 이제는 서서히 땅값이 오르기를 기다리며 무슨 일인가 해서 생활비를 벌면서 살아야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제이도 땅을 사고 차를 샀을가?
  제이의 목소리가 정말 그립다. 제이의 집 번호를 알아둘걸.
  끊어졌던 전화벨이 또 한번 울리자 윤정은 벌떡 일어나 창문에로 다가간다.
  진눈까비가 내리는 하늘아래 연길역의 불빛이 령롱하다. 기차가 금방 왔나보다. 사람들이 와르르 쓸어나온다. 그만큼한 사람들이 기차에 올라탔겠지. 어디론가 가겠지. 대답이나 하듯이 뿡-, 경적이 울리며 기차가 요란스레 떠난다. 기차는 떠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역사로 몰려든다. 또 어떤 사람들이 또 어떤 렬차를 기다리며 또 어떤 목적지로 떠나가겠지.
   윤정의 눈빛은 큰길을 훑는다. 가로등 불빛에 눈인지 비인지 모를것이 축축하게 흐른다. 길 건너편에 윤정의 집 창문을 향해 서있는 녀자, 토마토는 진눈까비를 맞으며 핸드폰을 귀에 대고있다. 다섯번 울리고 끊어질 때마다 핸드폰을 내려 누르고는 다시 귀에 가져다대는 토마토, 그녀도 윤정이를 바라보고있으리라. 토마토의 얼굴이 희미하다. 진눈까비에 가려있고 희부연 가로등 불빛에 가려있다. 그녀 역시 불밝은 창문에 검은 그림자로 선 윤정이를 똑똑이 볼수는 없을것이다. 하지만 두 녀자는 상대를 정확히 마주하고있다. 전화벨소리가 요란한데 두 녀자의 줄다리기는 계속된다. 전화 안 받을래? 안 받아! 정말 안 받아줄래? 정말 안 받아줄거야! 진짜 안 받아줄래?
  진짜지 가짜겠어! 윤정은 소리지르고싶은것을 간신히 참는다. 하지만 곧 쾌감을 느끼며 어깨를 풀고 팔짱을 낀다. 한쪽 다리를 풀어 다른 다리에 꼬고 여유있게 창문에 기대선다.
  안 받을테니까 언제까지라도 하시지요.
  그래요, 언제까지라도 해드리겠습니다.
  창밖의 녀자도 그런 모습이다.
  갑자기 땅에 주저앉는 녀자의 모습이 보인다. 어디가 아픈 모양인가? 동시에 전화가 멈춘다. 쪼크리고 앉은 녀자는 일어나지 못한다. 저러다가 얼어서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온 몸이 다 젖었을지도 몰라. 정말 어디가 아픈걸가?
  윤정은 전신의 기운이 빠져버린다. 남자를 향한 토마토의 무서운 의지에 대한 혐오보다는 남편에 대한 의문이 더 크다. 당신이 저 녀자의 사랑을 받을만한 남자였어? 토마토보다 남편이 더 밉다.
  윤정은 바람같이 객실을 지나 남편의 서재로 뛰여든다. 어느새 전등은 꺼져있고 컴퓨터만이 파랗게 켜져있다. 당신이 이겼습니다, 축하합니다, 인터넷창에서 끝없이 꽃보라가 터진다. 하얀 바둑씨가 잡혀나간 자리에 검은 바둑씨가 만리장성처럼 빈틈없이 성을 쌓았다. 오색령롱한 꽃보라가 소리없이, 소리없이 터지고, 음악볼륨은 어느새 낮추어져있어 꽃보라는 침묵속에서 끝없이 터진다. 횅 돌아버린 텅 빈 컴퓨터의자, 창문에 선 남자의 뒤모습이 진눈까비가 내리는 창문을 향해 사진필림처럼 비껴있다. 이 남자가 창문에 붙어있었구나, 토마토를 향해 있구나…윤정은 또 무너진다.
  소리없이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증오와 불만이기라도 한듯 농도 짙은 담배연기가 일시에 몰려들어 기침을 련발했다. 기침은 목을 시원히 벗어나지 못하고 목안에서 길을 잃은 짐승처럼 킁킁댄다. 머리는 점점 더 뗑해지는데 캄캄한 방의 푸른 컴퓨터창에서 꽃보라가 소리없이 터져내린다. 당신이 이겼습니다, 축하합니다… 피줄이 톡톡 터져 피로 된 꽃보라가 소리없이 터져내린다.
  윤정이의 설음이였다. 
  진눈까비는 점차 큰 눈송이가 되여 아침에는 아빠트 주변을 하얗게 만들었다…
   

3.8절과 듬선생

   3.8국제로동부녀절이 쉽게 생긴것이 아니였다는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어느 한번 따뜻해본적이 없는 3월 8일이다. 남자들의 리권에서 빼앗아낸 365일중의 하루가 남자들에게 있어 막대한 희생이기나 한듯이, 영 달갑지 않은 남자들의 표정처럼, 3.8절의 하늘표정이 늘 그렇다. 따뜻한 아량을 보인적이 없다. 이 동북의 하늘만 이런건가? 그래서 3.8절의 녀자들은 얼굴이 얼어서 푸르죽죽 분해 떠는 모습이다. 기야 하늘을 찌르건말건.
  내린 눈은 금방 녹아 내리지만 여우바람은 옷섶을 헤집고 겨드랑이의 오목한 곳까지 파고든다. 오싹하다. 그렇건말건 3.8절은 거리에 넘실댄다. 3.8절은 물결이다. 눈에 보이는 물결이다. 녀자들의 얼굴과 걸음걸이, 말소리에서 물결이 출렁인다. 물결은 녀자들의 정강이를 넘어섰다. 추워서 종걸음을 치긴 하지만 3.8절만은 겨우내 벼르고 별렀던 치마를 받쳐입은 녀성들이 많다. 물결은 가슴을 넘는다. 머풀러와 함께 출렁이는 녀자들의 높은 가슴에서는 맹목적인 긍지, 출처가 분명치 않은 욕정, 이름할수 없는 오기가 함께 설친다. 대낮부터 사우나에 녀자들이 넘치고 점심과 저녁은 식당, 노래방이 넘치고 장미꽃장사가 거리에 넘친다. 직장마다 녀성직원들에게 선물이나 훙보우(紅包, 돈봉투)를 주고 하루만큼은 온갖 좋은 말을 다 해준다. 며칠전부터 아침을 지었다는 둥,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갔다는둥, 안해를 마사지해줬다는둥 자랑에서부터 온갖 달콤한 말들을 늘인다.
  윤정이 뒤늦게 락원사우나에 들어섰을 때 그의 한국불법체류동기들인 세 아줌마친구들이 무슨 이야기인가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그 말들은 윤정은 귀를 거쳐 사우나물같이 도랑으로 흘러버린다. 자식이 뭔지? 못된 딸년은 여전히 전화가 없다. 밧데리코드를 두고 간 핸드폰이니 당연히 꺼져있는것이고 날고뛰는 재간이 있어도 당사자가 련락해오기 전에는 찾아낼수가 없다.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남편도 문제다. 여기 오는 사이에 토마토와 만나는거 아닐가? 아닐가 하는 내가 바보지. 당연히 만나겠지.
  윤정은 온몸에 비누칠을 하고 대줄기같이 쏟아지는 샤와에 몸을 맡긴다.
  하지만 3.8절이니까.
  윤정은 생각을 고친다.
  3.8절이니까.
  윤정은 3.8절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남편과 정전을 한다. 하루만큼은 쉬고싶다. 잊고싶다. 도망하고싶다. 백년묵은 범이 샘터를 지키는것처럼 전화를 지키는 일 따위 안 하고싶다. 딸애도 잊고싶다. 가족에게서 도망하고싶다. 자기의 감옥에서 탈출하고싶다.
  될대로 되라지. 3.8절이니까.
  그래, 3.8절이니까.
  윤정은 뜨거운 찜질방에 들어갔다. 먼저 들어온 세 친구들의 열띤 대화가 한곬으로 흐르고있었다. 서울불법체류 10년동기들이다보니 모두들 서울말을 썼다.
  《듬선생 말이야, 그 사람과 밤 열한시까지 대화했어.》
  《모르는 남자와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아?》
  《듬선생도 한국에 다녀왔대. 10년 벌었대. 한 사람의 인생에서 십년이 적은거냐? 그 10년을 함께 공유하는거지 뭐.》
  《돈 많이 벌었대?》
  《넌 돈밖엔 몰라. 돈 외에는 없어? 백만 벌었단다.》
  《백만? 영 구두쇠였구나. 백만이나 모은거 보면! 난 남은거 별로 없는데…》
  《그런데 너무 허무하다는거야. 그 말이 피부에 닿아와서 시간 가는줄 모르고 대화했어.》
  《그래, 허무하기야 하지. 200만, 300만 벌어봐, 허무하기는 마찬가지일걸.》
  《그런데 웃기는거 있지. 갑자기 컴퓨터창에서 나비가 나래를 팔락팔락 하는거야. 이거 무슨 일이냐 했는데, 글쎄 남자 얼굴이 나타나는거야. 내가 얼마나 기겁했겠어!》
  《네가 기겁을 해? 좋아했겠지.》
  《진짜로 기겁을 했어. 갑자기 낯선 남자가 나타나봐, 밤 열한시인데말이야. 한 남자를 혼자서 찬찬히 봐봐, 안 놀라겠어? 이 작은 연길시에서 언제 마주칠지도 모르는 일인데말이야…》
  《잘 생겼던?》
  《진짜 잘 생겼더라. 이마가 쭉 벗어져서 600촉이구, 40대 중반인데 모택동처럼 입가에 큰 기미가 있는거야. 진짜 인물이더라.》
  그 소리에 왜 윤정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것 같다.
  《집은 역전부근이란다.》
  《그럼 윤정아, 듬선생이 너의 집과 가깝구나. 너희 동네 사람이야, 하하하…》
  윤정은 진땀이 난다.
  《그 사람 이름이 뭔데? 정말 한국에 10년 있었대? 이마가 정말 600촉이던? 기미가 있다구? 왜 듬선생인데?》
  《최윤정, 너 바보 아니냐? 채팅하며 이름 알려주는 사람 봤어? 익명이여서 마음 편히 대화할수 있는거 몰라? 익명 아니라고 해봐, 어떻게 마음을 여냐? 그 사람 아이디가 듬직한 남자야. 난 별난 녀자구.》
  《최윤정, 너 정말 촌스럽다. 아이디가 없어? 난 오징어파티다.》
  《왜 오징어인데? 왜 파티인데?》
  《그냥. 재미있잖아. 난 오징어들이 대야에 모여 흐느적거리는 모습이 정말 재미있더라. 난 서울회집에서 일했잖아.》
  《난 고구마야.》
  《왜 고구마야?》
  《그냥. 맛있잖아. 난 고구마 엄청 좋아한다.》
  《그러니까 넌 몸매가 늘 그 모양, 고구마모양이지.》
  윤정은 별난 녀자, 오징어파티, 고구마를 차례로 돌아본다. 그 낯선 이름을 들으니 락원이 아니라 디즈니락원에 온것 같다. 문득 안절부절못한다. 제 정말 내 이름이 알구싶재이요? 제이의 연변말이 떠오른다. 알구싶재이요알구싶재이요알구싶재이요…
  별난 녀자, 고구마, 오징어파티는 계속 이야기파티를 했다.
  《백만이면 중국 와서 부자가 돼서 사는줄로 알았댄다. 그런데 와서 집값에 30만, 애 대학교 공부에 10만, 건강이 좀 안 좋아져서 약 먹고 치료하고나니 3만, 1년동안에 세식구 생활비에 5만, 저금통장의 돈이 물새듯 빠져가버리더란다.》
  《그래도 남은 돈이 몇십만은 있잖아.》
  《부인이 미국 가겠다고 수속비에 30만원을 넣었다잖아.》
  《듬선생 부인은 참 너무 욕심이 많아. 그 돈 잘 구을려서 잘 살것이지 왜 또 미국 간대? 인생에 10년이 몇번 있다고 10년 고생하고 돌아온 남편 떼두고 미국에 간다구? 투자가 많이 들어갔으니 10년내에는 못 돌아오지 않겠어?》
  《사람 욕심이 끝이 있냐?》
  《욕심때문만은 아니야. 그 사람 1년사이에 돈이 50만원으로 줄었다는데, 너라면 그 돈 50만원가지고 뭘 차릴수 있어? 영업집 20평방메터밖에는 못 사는데, 사고나면 인테리어할 돈도 없이 끝이 나는데 무슨 돈으로 투자하고 사업을 해서 벌어먹는다는거냐? 그냥 혼자 구두수리나 하면서 살면 모를가. 외국 갔다온 사람은 다 무직업자들이잖아, 그 돈 가지고 어림도 없어. 누군 가고싶어서 가겠어? 다 살자고 그러는거겠지.》
  《그 말도 일리가 있어. 공무원은 월급이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씨수이창류(細水長流)해서 먹고 살수는 있잖아. 무직업자는 돈 몇십만원이 있어 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니야. 사업체도 만들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사이에 생활비로 다 나가버리고 만다니까. 애가 공부만 하면 끝이 나? 취직하자면 돈, 성가하자면 돈, 집 사자면 돈… 그래서 또 나간다는거 아니냐.》
  《그럼 평생 가족 떠나서 나가 벌어서 산다는거냐?》
  《그러니까 허무하다는 말이잖아.》
  락원에는 이날따라 녀자들의 교성이 란무했다. 3.8절을 쇠느라 친구나 직장 직원들이 모두 무리를 지어 왔기때문이다. 뜨거운 옥돌에 누워 조용히 있는 녀자는 없었다.
  윤정이의 귀에는 별난 녀자의 말이 맴을 돈다. 한국다녀왔대… 10년벌었대… 이마가죽벗어져서600촉이랩모택동처럼입가에큰기미가있더라….
  오징어파티가 말했다.
  《얘들아, 우리 넘 심심하다. 3.8절인데 남자 하나 못 꼬셔오고 우리끼리 이게 뭐냐?》
  윤정이 불쑥 별난 녀자를 툭툭 친다.
  《얘, 듬직한 남자에게 전화나 해봐? 전화번호 안다면서?》
  《어머, 어떻게 그렇게…》
  《어머, 이 나이에 뭐가 어떻게 그렇게냐? 윤정의 말 맞아, 남자친구라고는 듬선생밖에는 없잖아. 윤정아, 차라리 전화는 네가 하렴. 너 끼가 있잖아. 3.8파티가 이게 뭐냐?》
  오징어파티가 북을 쳤다.
  《내가 뭔 끼가 있다고 그러냐? 평생을 남자 하나만 알고 살아온 사람인것을…》
  윤정이가 소리를 지른다.
  《얘, 남이 들으면 웃는다. 네가 바보냐? 한국에 혼자 사는 10년동안 남자 하나만 알았다니 말이 되냐?》
  《네가 그랬다는 소리겠지.》
  윤정은 낄낄거린다.
  《알았어알았어, 내숭을 떨기는. 아, 배가 고프구나.》
  오징어파티가 앞장서고 윤정이와 별난 녀자, 고구마는 함께 6층 음식점으로 올라갔다. 널다란 홀에 통나무를 깎아 만든 밥상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다. 구석구석은 마늘, 가지, 양파, 호박, 감자, 고추, 메주와 농기구들로 장식돼있다. 군데군데 종이초롱이 불을 밝혔다.
  녀자들끼리거나 녀자와 남자들이 합석해서 깔깔낄낄거리는 소리가 가득하다. 3.8절이라 혼자거나 둘이 오는 팀은 없었다. 모두가 무리들이다. 반드시 즐거워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있었다. 녀자들끼리 온 팀들도 있었지만 이런 팀들은 모두 남자들과 합석한 팀들에 부러운 눈길이다. 3.8절은 남자들이 녀자들을 녀왕처럼 즐겁게 해줘야 체면이 선다는 그런 가치관이 작용했다. 남자친구들이 없는 현실임에도 윤정이네는 즐거워해야 했다. 3.8절이기때문이다.
  넷은 막걸리를 마셨다. 달콤했다. 맥주를 마셨다. 시원했다. 배갈을 마셨다. 쨍- 했다. 기분이 붕 떴다. 기분이 좋아지는데는 그래도 배갈이다. 양주면 더 좋겠지만.
  기뻐야만 하는데 뭔가 부족하다. 남자가 없다.
  남자복무원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복무원, 안주 좀 팍팍 줘요. 넘 접시에 발라 주지 말구요.》
  《아저씨, 우리 남자들이 없거든요. 3.8절인데 술 좀 따라줄수 있겠어요?》
  《아저씨, 우리 한물 간 아줌마들이지만, 넘 무시하지 말아요. 우리 정말 멋쟁이들이거든요. 아직 단맛이 그대로 있거든요.》
  《아저씨, 이번엔 안주말고 남자 좀 주문하면 안될가요? 좀 멋진 남자들을 얻어주세요. 미치겠네요. 에이, 3.8절인데…》
  《총각, 야, 너 우릴 무슨 주책 떠는 할망군줄 아냐? 3.8절이니까 체통이니 뭐니 하는거 다 버릴 작정이다. 이모네들에게 써비스 잘 해애!》
  윤정이네는, 별난 녀자네는, 오징어파티네는, 고구마네는 이렇게들 소리를 질렀다. 남자복무원들은 히죽히죽 웃어주며 술을 따라주었다. 3.8절에는 모든 남자들이 너그럽다. 모든 녀자들의 행동에 주책없는것이란 있을수 없다. 모두가 애교다.
  《멋진 이모들, 즐거우십시오!》
  《멋진 엄마들 행복하쇼오!》
  남자복무원들은 이렇게 말하는것을 잊지 않았다.
  윤정이네는 목구멍에 올라온 말이면 있는대로 다 지껄여놓고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속에는 더러 헛바람이 있었다. 이 날의 녀자는 반드시 즐거워야 한다는, 즐겁지 않으면 바보라는 그런 론리가 작용했다.
  음식점에는 손님들이 많았고 취하고싶은 욕망으로 출렁거렸다. 여기저기에서 건배소리가 높고 과장된 폭소가 설날의 폭죽처럼 줄지어 터졌다.
  윤정은 벌써 취기가 도도했다. 증발된 딸애, 토마토의 전화, 남의 녀자에게 3.8절을 쇠여줄 남편… 제이가 보고싶어 미칠것 같다. 제이의 품속에 안겨 울고싶다. 이 십년이 뭐란 말인가. 개발구의 땅으로 행복해질수 있나? 차로 행복해질수 있어?
  《에이, 나 오늘 정말 미치겠다. 듬직한 남자 불러줘, 안 불르문 나 오늘 정말 미친다. 3.8절이 이게 뭐냐?》
  윤정은 별난 녀자에게 걸고들었다.
  오징어파티가 장구를 쳤다.
  《맞다, 맞아. 한국 가서 죽어라고 일만 했더니 벌써 이 나이가 돼갖고 일년에 한번뿐인 3.8절에 부를 남자친구도 없어졌잖아. 청춘은 벌써 뜨거운 여름을 지나 선들바람이 부는 가을을 향하는데, 가는~ 세월~ 그 누가~ 막을수는~ 없나요~, 윤정아, 너 전화 좀 넣어봐아, 나 정말 못살겠어…》
  고구마도 징을 울렸다.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따라라라~ 따라라라~ 내 맘~ 따라라라라~》
  《나 이렇게 살다가 갱년기가 오면 정말 목 달아맬거다. 분해서 어떻게 갱년기에 들어가냐? 젤 좋은 청춘에 10년씩 남편을 떠나 살았잖아. 틀림없이 갱년기가 일찍 올거야. 나 벌써 쩍하면 전신에 식은땀이 내돋고 가슴이 탁탁 막히고 화가 나는거야. 나아, 증말 미치고 환장하고 돌겄네.》
  별난 녀자가 말했다.
  《난 벌써 왔어!》
  《어머, 정말이냐?》
  《한국 가서 5년만에 오더라.》
  《그 때 네 나이 얼만데 왔다는거냐?》
  《서른 아홉. 에이씨! 그러니까 남편도 날 녀자로 안 보더라.》
  별난 녀자가 갑자기 상에 엎드려 울었다.
  《나 정말 죽고싶어.》
  《울지 마.》
  오징어파티가 말했다.
  《나도… 왔…어.》
  《너도?》
  별난 녀자가 울음을 그치고 물었다.
  《응. 난 너보다 한해 일찍, 서른 여덟에.》
  《그래?》
  별난 녀자가 큰 위안을 받은듯 눈물을 닦는다.
  《외국에 가 오래 따궁(일해 돈버는것.)한 녀자들의 평균 갱년기가 모두 5년내지 십년은 앞당겨졌대. 가족을 떠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남자와의 정상적인 섹스가 부족해 그렇단다. 우린 희생의 세대야. 우리가 고생하고나면 애들 세대부터는 잘 살수 있겠지. 힘을 내자!》
  오징어파티가 말하면서 주먹을 당기는 시늉을 했다.
  《파이팅!》
  별난 녀자, 고구마 그리고 윤정이도 함께 소리를 질렀다.
  《파이팅!》

  그리하여 듬선생에게 전화를 하는 문제가 다시 의사일정에 올랐다.
  별난 녀자가 말했다.
  《윤정아, 난 정말 전화는 못하겠다. 네가 해봐.》
  《네 친구잖아. 내가 하면 실례잖아. 해봐, 듬선생, 나도 정말 알고싶어. 여봐요, 총각, 여기 고량주 가져와요!》
  윤정은 고량주를 넉잔에 가득 따랐다. 
  그동안 남편은 윤정이의 침대로 오는 일이 드물었다. 오더라도 남녀가 하는 일은 시늉하는 정도로 간단히 끝내고 곧 화장실로 들어갔다. 철렁철렁 씻는 소리가 랭정하게 들려왔다. 부부가 한 침대를 쓰는것에 습관이 되지 않는다며 서재로 가버렸다. 토마토가 들통난 후부터는 그런 의무마저 당당하게 리행하지 않았다. 지금 속에서 울럭거리는것은 분노만이 아니다. 욕구불만도 있었다. 남편하고 한바탕 질펀하게 뒹굴고싶다. 그런 욕망이 강렬하다 못해 화약냄새를 풍겼다. 그것이 분노와 어우러져서 불이 댕기면 어떤 형태로 터져나올지 모를 일이다. 술을 마신 윤정이에게서 그것은 한결 위태롭게 불끈거린다. 3.8절이라서 더 그런지 모른다. 3.8절은 모든 녀성에게 관용을 베푼다. 모든 에너지를 방출할수 있는 대의명분을 내세워준다. 그래서 더 그런지 모른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위태로운 이 에네지를 방출해야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올것  같다.
  제이가 그립다.
  윤정은 눈물이 글썽해진다.
  제이, 자기 지금 뭘해? 안해에게 3.8절 쇠주고있어? 안니 생각 정말 안해? 자기 분명 안니생각 할거야. 내가 이렇게 자기 생각하는거 보면 당신도 틀림없이 날 생각하고있을거야….
  《술 마시고 우는거 제일 청승맞더라. 윤정, 너 왜 그래?》
  별난 녀자가 소리를 질렀다. 자기가 울 때는 언제고.
  윤정은 제이가 처음 뛰여든 그 밤의 숨막히는 키스를 생각했다. 숨막히는 섹스를 생각했다. 생각하는것만으로도 그 때 그 시간으로 돌아가있는듯 숨막히다.
  지금 제이는 어디에 있지? 연변말을 하는 제이는 어디에 있지? 연길에 있는가 화룡에 있는가 룡정에 있는가 안도에 있는가 도문에 있는가 돈화에 있는가 훈춘에 있는가, 아니면 왕청뻑빡골에 있는가? 흑룡강에 있는가 료녕에 있는가 청도나 북경, 상해, 심수, 광주, 해남도에 있는가?
  아니면 연길역전 우리 동네에 있는가?
  《여보세요? 듬선생이세요?》
  오징어파티가 끝내 전화를 한다. 윤정은 또 숨이 막힌다. 왜 듬선생이라면 이마가 벗어진, 입가에 기미가 있는, 서울말을 하는, 연변말을 하는 제이가 떠오르는건지.
  윤정은 숨을 죽인다. 별난 녀자와 고구마도 킥킥대기를 그만두고 귀를 기울인다.
  《듬선생님이 아니시라구요? 예, 댁의 아이디가 듬직한 남자잖아요. 그래서 듬선생이라고 불렀어요. 죄송합니다. 저희는 별난 녀사의 친구거든요. 별난 녀사를 모르시겠어요? 듬선생님의 채팅친구 별난 녀자말이에요. 별난 녀사가 개인정보루설을 했다고 듬선생님에게 사과의 말씀 드리라고 하는군요. 너무 긴장해마시고요, 용건은 잠시 뒤에 말씀 드리겠구요, 우선 듬선생님이라고 불러드리는거 괜찮지요?》
  고구마가 송수화기를 빼앗는다.
  《죄송합니다. 제 친구의 서문이 넘 길었네요. 카이먼짼산바, 라이퉁콰이댄바(開門見山, 來痛快点!)! 용건에 들어갈게요. 저희들은 별녀사의 펑유(친구)들이거든요. 오늘이 싼빠제(3.8절)잖아요. 별녀사는 내숭을 잘 떠는 편입니다. 듬선생님에게 하이쓔(부끄러워)해서 전화를 못 드리겠다고 해서 저희들이 따땐화(전화를 드린것)한겁니다. 저희들도 모두 한국에 가서 따궁(打工)하고 온 녀자들이라서요, 오늘 3.8절인데 난펑유(男朋友)가 없거든요. 그래서 듬선생님에게 구원을 요청한거랍니다.》
  오징어파티가 또 송수화기를 빼앗는다.
  《죄송해요, 먼저 사과를 드리고 용건에 들어갔어야 하는데요, 혹시 놀린다고 생각지는 마세요. 저희들도 모두 가정 꾸리고 남편 모시고 애들 학교 보내고 법도를 잘 지키며 잘 지내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냥 별 뜻은 없고요 3.8절날 재미있으려고 그러는겁니다. 이상한 녀자들이라고 오해하지는 마세요. 그리고요…》
  고구마가 또 송수화기를 빼앗는다.
  《하이쓰카이먼짼산바(還是開門見山!), 구체적인 용건에 들어갈게요. 저희들은 별녀사까지 모두 네명이거든요. 남자 네명이 오시면 안되겠어요?》
  《어머, 어머…》
  별난 녀자가 펄쩍 뛰면서 송수화기를 빼앗으려고 했다.
  《얘들아, 너희들 오늘 취했어. 거기까지 가면 안돼, 안돼…》
  오징어파티가 송수화기를 잡고 별난 녀자를 피하며 말했다.
  《경제적으로 부담을 끼칠가봐 걱정 마세요. 저희들은 모두 경제적인 여건이 돼있거든요. 그냥 즐겁자고 하는 일이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오세요.》
  갑자기 오징어파티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여기는 락원사우나 6층 음식점이거든요.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핸드폰이 딱 하고 닫히자 넷은 잠시 긴장한 분위기다. 화장을 말끔히 지운 녀자들이 바보처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처진 눈두덩이, 이마의 잔주름에 불법체류냄새, 타향살이 십년이 머물러있다. 잘라낸 눈섭은 꼬리를 그려넣지 않아 끊어진 공중다리처럼 절반만 떠있다. 분을 바르지 않은 볼에는 검은 기미가 어스름같이 깔려있다. 술김에 떠들기는 했지만 종래로 이렇게 눈도 코도 모르는 남자와 지껄여본적은 없다.
  도망치고싶은 사람은 윤정이다. 이마가 벗겨졌다, 입가에 기미가 있다, 눈이 큰 쌍겹눈이다, 한국에 가 십년 돈벌고 왔다, 백만원을 벌었다, 아들애가 대학공부를 한다… 이 모든 정보가 다 제이와 맞아떨어지는것 같다.
 《오늘 도망치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야.》
  오징어파티가 엄포를 놓았다.
 《자, 침착하자구, 침착하자구. 우리가 누구냐? 불법체류해 경찰을 피해가며 산전수전 다 겪은 녀자들이 아니더냐?》
  별난 녀자가 울상이 되였다.
 《난 듬선생을 놀리고싶은 생각 없었어. 그냥 그 선생님과 인터넷 대화를 하는게 마음이 편했는데. 너희들이 그렇게 놀려대니 이제는 대화같은거 못하게 됐잖아.》
 《쑤이왈타야(誰玩他   ?) 우리가 지금 듬선생을 놀리는거냐? 같이 즐기자는데 뭐가 잘못됐어? 타너거런아, 커넝(他那人,可能) 우리처럼 뉘펑유(女朋友)가 없을지도 몰라, 증말!》
  고구마가 톡 쏜다.
  고구마는 허리둘레가 굵은 고구마몸매를 흔들거리며 바로 아래층으로 뛰여갔다.
  고구마가 화장품주머니를 들고 들어오자 넷은 재빨리 화장을 했다.
  눈섭이 제 위치에 그려지고 입술에 루즈칠을 하자 모두들 자신을 회복했다. 다시 술을 마셨다. 다시 큰소리로 떠들었다. 그제야 별난 녀자가 물었다.
  《목소리가 어땠어?》
  《시원시원하고 남자답더라.》
  고구마가 대꾸했다.
  《좀, 좀 굵지 않아? 바위산에서 울리는것 같은 그런 울림이 있는 목소리…》
  윤정이 물었다. 제이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녀자가 마음이 든든해지게 하는 그런 목소리다.
  《목소리가 굵지 않은 남자 봤냐? 바위산에서 울리는것 같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마치도 네 애인을 말하는것 같잖아.》
   오징어파티가 깔깔 웃었다. 다들 따라 웃었다. 별로 윤정이를 의심해 웃는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로 같이 즐기자고 웃는 웃음이다.
  윤정은 제이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정말로 그립다는 생각을 한다. 
  《허허허, 하고 웃는 소리가 참 재미있더라. 너무 어이없어서 허허 웃더라. 큰아버지 같애.》
  오징어파티가 흉내를 내서 또 한바탕 웃었다.
  《마음이 못되지 않고 그냥 수월한 남자겠더라. 하오썅팅푸스스자이더이거런(好象            朴實實在的一人), 그런 남자니까 안해가 미국 가겠다니 보내주는거겠지.》
  고구마가 말했다.
  《10년 청춘이 벌써 지났는데 또 헤여지면 또 10년이 지나, 금방 할배, 할망구가 되겠는데 인생을 대체 뭘로 아는게야?》
   《혹시 듬선생의 부인이 애인 있잖아? 그러지 않고서야 금방 돌아온 남편을 또 혼자 남게 할수가 있겠어?》
  별난 녀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십년이나 한국에서 보냈는데 그런것쯤은 감수해야지.》
  고구마가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 해?》
  오징어파티가 물었다.
  별난 녀자가 갑자기 쿨쩍거렸다.
  《왜 이래? 자자자…》
  오징어파티가 술자리를 식히지 않으려고 건배를 제의했다. 모두들 잔을 짝 마주쳤지만 소리없이 마셨다.
  듬선생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넷은 그렇게 3.8절을 끝내줄수는 없었다. 노래방에 갔다. 윤정은 제이에게를 부르고 안니를 불렀다. 오징어파티는 남자는 녀자를 귀찮게 하네, 바꿔를 불렀다. 고구마는 사랑해서 미안해, 그대 그림자를, 별난 녀자는 천만송이장미, 사랑하게 될줄 알았어를 불렀다.
  별난 녀자는 자꾸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울었다. 왜 우는지 누구도 묻지 않았다.
  《별거 십년이면 뭔들 감수를 못하겠어?》
  다들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듯이 말했다.
  고구마가 듬선생에게 지꿎게도 전화를 걸었다.
  《저는 별녀사의 친구거든요. 여기 각설이네노래방이거든요, 거써리, 거써리 즈또우바?(格舍利知道?) 2층의 얼링쥬호우(209號)거든요. 3.8절을 이렇게 보내서는 안되잖아요…》
  넷은 또 홍두깨손칼면집으로 옮겨가 칼면에 맥주를 마셨다. 오징어파티가 전화를 했다.
  《듬선생님, 여기 홍두깨거든요… 저희는 별난 녀자 친구 오징어파티거든요… 여기… 또 고구마도 있거든요… 또 하나는 아직… 아이디가 없어요… 귀찮게 굴어 죄…송해요, 잘 받아주셔 감사…해요, 계속 받아주어야 해요…. 부담 갖지 마시구요, 괜찮아요, 저희들 날라리는 아니거든요, 바람둥이는 아니거든요, 깡…패는… 아니거든요, 그냥 재밌자고 그런…다니깐요, 잘 살려고… 그런다니깐요… 저희들도 남편있…고 자식있…는 좋은 안해, 좋은 엄마…들이…거…》
  핸드폰이 칼면에 툭 떨어져서 바라보니 오징어파티는 어느새 엎드려 잠들고있었다.
 

꽃보라는 누굴 향해 터지나?
 
  안 들어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이 너무 조용했다. 분노하고싶었는데 기운이 쏙 빠져서 심드렁하다. 분노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술을 너무 마셨더니 에너지가 많이 소모됐다. 가만히 누워있는다. 남아도는 에너지가 없으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욕정도 에너지를 따라 쏙 빠져버렸다. 전신이 나른하다. 현실이 전신을 지배해버린다. 딸애의 증발도 인정했다. 이미 어미둥지가 필요없는 딸애인데야. 서로가 시간이 필요하다…
  뿡-, 기차가 떠나는 소리, 또 어떤 사람들이 또 어디론가 떠나간다. 딸애도 기차를 타고 떠난건가?
  한동안 눈앞에 불꽃이 란무한다. 윤정은 일어나려다 말고 잠시 머리를 잡고 앉았다. 목이 마르다. 눈앞의 불꽃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겨우 일어나니 몸이 좌우로 비칠거린다. 한국에서 혼자 술을 마셨을 때 이런 적이 있다. 너무 힘들어서 혼자 울고 혼자 술을 마신 날이면 아침에 이렇게 비칠거렸다. 그래도 한번도 이불을 쓰고 드러누운적은 없다. 아침이면 반드시 돌솥밥집으로 갔다. 아침 일곱시면 출발해 마을뻐스를 타고 숙대입구에서 내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충무로에서 내려 봉이네 돌솥밥집에 가 일을 시작한다. 쉬는 시간이란 없다. 손님이 뜸하면 랭장고라도 청소하고 유리창이라도 닦는다. 손님이 없는 주인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서다. 한시도 손이 놀지를 못한다. 11시 마지막 마을뻐스를 겨우 잡아타고 세집으로 돌아온다.
  물을 두컵 들이켜고나서 창밖을 바라본다. 광장에 해빛이 눈부시다. 눈앞이 아찔하다. 수많은 제이가 광장에 모여있다. 아물아물거리며 말한다. 내가 흑룡강사람인지 료녕사람인지 길림사람인지 연변사람인지 알기싶재이탄말이오? 제 정말 알기싶재이탄말이오? …당신 티켓이 인천-연길행이란거 난 그냥 알아버렸다이. 당신 티켓을 본건 아이(니)라이. 그 동안 살아온 느낌이 그렇더구만. 그냥 알아집데. 당신 보내자이까데, 이제 영영 당신을 못본다는 생각을 하이까데, 난 정말 당신이 알기싶소, 미칠듯이 알기싶단말이요!
  윤정은 머리를 창문에 쑥 내밀고 광장과 아빠트주변을 살펴본다. 별난 녀자가 말한다. 집은 역전부근, 아, 윤정아, 듬선생이 너의 집과 가깝구나. 너희 동네 사람이야, 하하하… 오징어파티가 말한다. 집은 역전부근, 아, 윤정아, 제이가 너의 집과 가깝구나. 너희 동네 사람이야, 하하하… 고구마가 말한다. 집은 역전부근, 아, 윤정아, 제이가 너의 집과 가깝구나. 너희 동네 사람이야, 하하하…
  윤정은 와뜰 놀란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당신은 이겼습니다. 축하합니다…꽃보라가 터지는 음악소리…
  윤정은 재빨리 목을 움츠렸다. 창문을 닫았다. 곧 듬선생으로부터 제이로부터 멀어진다. 남편이 나타났다.

  남편은 종이 한 장을 내민다.
  윤정은 속이 철렁 한다.
  남편의 차림새와 표정과, 그리고 어떤 예언같은 꽃보라가 터지는 소리가 그런 느낌을 주었다.
  윤정은 말했다. 큰소리로 말했다. 《이게 뭔데? 뭔데요?》
  윤정은 얼굴색이 변한다. 《누구 맘대로, 내가 산 집인데 누구맘대로 대부금을 내요! 누구 맘대로요!》
   《기한은 15년이요. 리자는 다 갚을게. 보관은 당신이 하우. 이달 리자는 지불했소. 달마다 꼬박꼬박 지불할게.》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느 말부터 해야 할지, 어떤 말로써 다 표달이 될지… 윤정은 입을 ㅇ자로 벌린 채 떡 버티고 서서 노려보기만 한다. 그 다음 말이 무섭다. 무섭다. 무섭기 그지없다.
   《나 미국수속을 했소. 곧 출발해야 하오. 북경에 모여 비자가 내리면 바로 떠난다오. 비자가 순조롭게 내릴지 어떨지 모르겠소. 하지만 모험은 시작된거요. 나도 10년 걸릴거요.》
  《여보, 여보, 그러면 안돼요, 여보…》
  윤정은 푸르릉 주저앉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10년을 갔다왔는데 당신이 또 10년이라니, 안돼요, 안돼요…》
  《그건 당신의 10년이오. 그 10년에 당신은 돈을 벌어왔소. 하지만 내 남자의 자존심은, 자존심은, 하, 빈대떡이 됐소. 빈대떡! 당신 앞에서 난 남자가 아니오. 그래서 우린 지금은 부부가 될수 없는거요. 난 남자가 아니니까.》
  《미안해요, 여보, 핸드폰을 돌려드릴게요, 미안해요, 여보, 용돈도, 여보, 용돈도…》
  이제 자존심이고 뭐고 할것 없었다. 경제제재고 뭐고 할것도 없다. 윤정은 애원했다.
  《안돼요, 여보, 난 우리 집을 위해서, 당신과 딸애를 위해서, 여보, 난 정말 짐승처럼 벌었어요, 우리 집을 위해서, 당신과 딸애를 위해서, 여보…》 
  윤정은 컴퓨터에 마주앉아있다. 검은 씨가 바둑판을 전부 차지하고있다. 당신은 이겼습니다. 축하합니다 라는 메시지와 함께 꽃보라가 침묵속에서 끊임없이 터진다…. 
  핸드폰이 울린다. 윤정은 부시럭거리며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뿡-, 기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린다. 또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겠구나. 그 속에 앉은 남편의 모습이 떠오른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죄송합니다. 집에 좀 일이 있었거든요. 전쟁이 일어났었거든요. 정말 죄송합니다…》
  혀가 꼬부라든 한 남자가 서울말로 횡설수설한다.
  윤정은 핸드폰을 꺼버리려다가 그만 손이 얼어붙고만다.
  《듣고계시죠? 나 듬선생이예요…》
  윤정은 와뜰 놀란다. 그제야 오징어파티가 자기의 핸드폰으로 듬선생에게 전화를 했던 일이 떠오른다.
  《나 듬선생이거든요.》
  눈앞에 600촉의 이마, 입가의 기미가 떠오른다.
  제이가 떠오른다. 제이가 보고싶다.
  《정말 전쟁이 일어났슴다. 안해가 미국으로 간다고 해서… 또 10년간 벌겠다고 해서…이게 뭠까? 이게 대체 뭐란 말임까? 나 지금 락원에 있슴다. 사우나는 안 하구, 찜질두 안 하구 댁네가 술 마셨다는 락원 6층에서 술 마시고있슴다. 꼬량주를 마시구, 막걸리두 마시구, 참 좋슴다. 여보시오, 말 좀 하시오. 댁은 별난 녀잡니까? 오징어파팁니까? 고구마입니까?》
  나 안니예요.
  윤정은 그렇게 속으로 대답한다.
  《별씨입니까오씨입니까고씨입니까, 댁은? 말 좀 합소. 나 정말 쉽지 않았습꾸마. 타향살이 10년이 어디 쉬운 일임둥? 가족을 위해서 짐승처럼 벌었습꾸마, 무슨 일인들 못했겠슴둥, 오리잡이에서부터 사람시체를 파묻는 일까지, 무슨 일인들 못했겠슴둥. 난 듬직한 남자라서 머리숱이 특별히 듬직하게 많이 났댔습꾸마. 그런데 돌아올 때는 번대머리가 돼서 돌아왔습꾸마. 내 청춘두 그렇게 머리칼처럼 빠져버렸습꾸마… 오징어파티녀사님, 제발 말씀 좀 합소, 고구마님, 별난 녀자님, 정말루 청춘두 다 빠져버렸습꾸마, 정말로…》
  윤정은 컴퓨터테이블에 엎드린채 입을 막고 울었다.
  당신은 이겼습니다. 축하합니다… 침묵속에서 꽃보라가 끊임없이 터진다… 바둑판은 온통 검은 씨에 의해 만리장성을 쌓고…
  듬선생님, 꽃보라는 누굴 향해 터지나요? 제이, 꽃보라는 누굴 향해 터짐까?
  윤정은 그 한마디를 간절히 물어보고싶었다.
  핸드폰에서 삑-, 소리가 나더니 빨간 불이 반짝거린다. 메시지가 들어왔다.
  엄마, 나 대우주에 큐큐식구들인 미키랑 류망투랑 킹카랑 같이 있슴다. 걱정 안해도 됨다.
  대우주에미키랑류망투랑킹카랑같이있슴다…
  윤정은 그중에서 《있다》라는 말의 뜻 하나를 간신히 알아본다.
                    

                                    2006년 7월의 마지막 날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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