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화의 역사이야기>

  1902년, 러시아가 훈춘을 강점했을 때 조선과 러시아에서 적지 않은 조선인 들이 훈춘으로 천입했다. 하달문, 삼가자, 마천자 등 지방의 조선인은 이 시기에 많이 들어왔다. 1907년 3월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당시 훈춘경내의 조선개간민 중 10분의 2는 러시아 시비리아에서 천입하였던 것이다.

    금전판은 훈춘의 조선이주민에게는 색다른 각색이다. 여진인은 훈춘을 포함한 장백산일대에 금이 많이 난다고 국호를 《금》이라 하였다는 일설도 있다. 《동북길림성 경제사정》에는 《광서 16, 17년경 조선사람이 처음으로 훈춘 태평구에서 사금광을 발견한 후 이 일대에 채금자가 많았다.》고 적혀있다. 한족, 조선인 금점군 300명을 모집하여 금광을 꾸리고 금을 캤다. 금전군은 땅뙈기를 떼여 굴을 파고 그 주변에 버럭을 무져놓고는 그우에 붉은기를 꽂아 놓았다. 이것으로 자기가 임자임을 표시하였다. 하여 한때 훈춘강기슭에는 도처에 붉은기가 나붓기였다. 훈춘강을 《홍기하》라고도 부르는데 이에 연유 된 것이다.

      흑정자에 소속된 방천은 중국, 조선, 러시아 3국과 국경선을 같이하고 있다. 그 지명을 살펴보면 《토자비》를 세울 때 방천을 《허무지》라 불렀는데 만족어로 메귀리라는 뜻이다. 방천땅에 메귀라가 유별나게 많아 얻은 지명이였다. 1860년경 방천에는 10여 세대의 조선인마을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두만강변에 버들숲이 우거진 이 고장을 《버들방천마을》이라 불르게 되었으며 차츰 《방천》으로 이름이 굳어졌다. 《동3성정략》에는 방천항(防川?)이라 적혀있는데 《항》은 《목덜미》란 뜻으로 조선말 지명에 중국말 색채를 붙힌 것이나 경신일대의 사람들은 여전히 《방천》이라고 불러왔다.

     용정  용정은  조선개간민이 간도를 개착하는 시발점이며 간도의 교육, 문화 중심지이다. 한족 빈민들은 지금 용정에서 회령으로 나가는 육도구의 산골에 처음으로 정착하였기에 그들은 용정을 육도구(六道?)라고 불렀다. 1900년부터 관청에서는 육도구와 용정촌 이 두 지명을 함께 써오다가 만주사변 후에는 정식으로 《용정촌》을 사용하였다. 19세기 60년대, 조선이주민은 두만강을 건너 용정에 들어섰다. 사료에 의하면 당시 조선이주민은 아내나 자식을 만족지주에게 넘겨주고 쌀을 얻어 겨우 연명해 나갔으며 어떤 이들은 자식을 팔아 이듬해 종자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용정 지명에 대해서는 이런 일설이 있다.
 
  1881년 봉금령이 페지된 후 삼합에서 살던 조선이주민 장인석, 박윤언, 김언삼 등 10여 호가 륙도하에 들어왔으며 후엔 우물을 발견하였고 길손들의 편리를 위하여 우물에 《용드레》를 만들어놓았다. 이리하여 이곳을 《용드레촌》이라고 불렀고 한자로 《용정촌》(?井村)이라 쓰고 그후에는 그대로 용정이라 불렀다.  
  
 용정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가지 전설이 있다. 조선농민 김만석의 딸과 동해 용왕 태자의 사랑이야기가 그 일종이다. 이런 신화적 전설들은 아름다운 생활을 갈망하는 소박한 마음을 반영하였다.
  
 용정은 조선에서 간도로 넘어오는 길목이여서 주막집이 서고 잡화점, 음식점도 서게 되였으며 1907년에는 100여 호나 되는 마을로 되었다. 1910년 일본이 용정에 영사관을 설치함에 따라 용정은 일제가 간도를 통치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1909년 7월, 용정 총인구는 1188명, 그중 일본인은 군경 외에 273명 이였다.(《조선인역사연구》고영일)
 

도문  도문강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어원을 보면 여진어의 투먼써친 (??色禽)에서 나온 것이다. 《투먼》이란 여진어 《만(万)》이란 뜻이고 《써친》이란 강의 원류란 뜻이다. 만물의 근원 혹은 만수의 회합으로 전이되여 불리 워진 명칭이다. 도문을 또 회막동(灰幕洞) 또는 하전자(下旬子)라 했다. 도문벌을 《어우벌》이라고도 했는데 두마강 건너 조선측의 첫 동네가 바로 《어우》였다. 조선개간민들이 고향땅 이름을 따라 부른 것이다.

    1881년경 도문지방에 정착한 개척자들은 姜仁?,?德源,崔斗?,姜成宇 등을 들 수 있으며 제일 먼저 개간된 곳은 지금의 남석 (현 월청향 걸만동) 땅이 였다. 최화명 (崔化明), 최두흥, 강성우 등이 1910년경 회막골을 개척하였다.

     조선이주민은 패를 무어 건너와 그들 중 유능한 자를 입적시키고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삼았다. 《호주인(?主人)》이라고 불렀다. 적지않은 호주인은 지주, 관리, 경찰이 되었다. 이주 정황을 보면 1910년경 도문부근의 조선인호수는 동경동에 20호, 새밭굽에 10호, 남북가는골에 20호, 다라즈와 옌지덴(?子店)에 10여 호, 북봉오골에 20-30호, 남봉오골과 신선동에 10여였다. 도문(회막골)에 속하는 동네로는 어우벌, 남북새밭굽, 남북가는골, 박달봉인데 그곳 호수는 50여호였다.

    안도  안도는 1909년 12월에 설치되였다. 동북3성 후임총독 석량(?良)은 《두만강상류, 홍기하서쪽으로 성변계를 따르고 남으로 석을수에 이르고 가운데 부르후리를 두고있는 지역에 한 개 현을 설치하고 안도현이라 부르며 현소재지는 홍기하 서남기슭에 앉히려합니다》는 상주문을 올렸다. 안도는 역시 만족어 지명으로서 《산의 양지쪽 (山之?)》이란 뜻이다. 제1임 설치위원은 류건봉(?建封)이다. 류건봉은 백두산을 답사한 뒤 저명한 《장백산강강지약(?白山江?志略)》,《장백산지겸간분봉길계선서(?白?治兼勘分奉吉界??)》
, 《장백기맥(白山??)》 등 책을 써냈고 또 《장백산영기전영(?白山?迹全影)》을 섭제하였으며 장백산강강전도를 그려 후세에 진귀한 사료를 남겼다.

    청나라전설중 룡의 발상지가 바로 안도현 경내의 부르후리(원지)에 있었다. 여기에 만족의 시조 부쿠리융쑨(布?里雍?)에 대한 전설이 있다.

    장백산에 부쿠리라는 산이 있었다. 산아래에 부르후리(布?湖里)라는 맑은 늪이 있는데 천지라고도 불렀다. 이 늪은 선녀들이 미역감는 곳이였다. 세 선녀가 늘 늪에 내려와 미역을 감았는데 맏이는 언구륜(恩古?), 둘째는 정구룬(正古?), 세째는 퍼구룬 (佛古?)이였다. 하루는 셋이 늪에서 노니는데 까치 한마리가 날아오더니 입에 물었던 주과(朱果)를 퍼구룬의 옷에 떨구어놓고 날아갔다. 퍼구룬이 늪에서 나와 그 주과를 입에 물었는데 옷도 입기 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과를 삼켜버렸다. 퍼구룬은 잉태하였고 열달만에 아들을 낳아다. 아이는 태여나오자 말할줄 알았고 예의범절도 밝았다. 퍼구룬은 《너는 내가 금싸락같은 주과를 먹고 낳았기에 성은 아이신죠로( 만어에서 《아이신》은 금이란 뜻이고 《죠로》는 성씨라는 뜻) 라 하고 이름은 부쿠리융쑨이라 지었다》고 알려주고는 오색구름을 타고 삽시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부쿠이용쑨은 쪽배에 앉아 강물 따라 내려오다가 어느 한 곳에 이르러 버들가지와 갈을 꺾어 방석을 틀어 깔고 앉았다. 그곳에서 서로  다투던 세 부족이 그의 용모에 놀라움과 감탄을 못이겨 그를 부락의 임금으로 모셨고 부쿠리융쑨은 내란을 평정한 뒤 장백산동쪽의 어둬리성(鄂多里城)에 정착하여 살면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만주라 하였다. 《요녕안도현지》에도 안도는 여진인의 옛고향이라고 기재되였다. 지금도 여진제대 (祭台), 기선동(?仙洞), 냥냥쿠(娘娘?), 보마성(??城),삼왕총(三王?), 로오동(?敖洞) 등 여진인의 유적이 남아있다.

    《안도현 개황》에 따르면 1868년 함경북도 무산군의 6, 7세대 이재민들이 내두산촌과 두도백하촌에 정착하였다. 처음엔 수렵생활을 하다가 후에 점차 황무지를 일구어 농사를 하였다.》 또 조선이재민이 안도현에 이주한 것은 1874년경으로서 정착한 자는 5, 6세대 밖에 안된다는 기재도 있다. 함경북도 길주군의 정명숙 일가, 부령군의 유백윤 일가, 무산군의 이용필 일가, 단천군의 최석영 일가, 북청군의 이회성 일가, 평안북도 강계군의 김창진 일가 등은 1890년 선후에 안도현으로 이주해 왔다.

    《요녕 안도현지》에는 《전 현에 한족이 제일 많고 만족이 버금가고 한교(??)가 또 그 버금가고 회민(回民)이 제일 적다》고 적혀있다. 1903년 통계에 따르면 한요구와 냥냥쿠(현 송강진), 대사하, 고동하 유역에 정착한 이주민이 도합 528세대에 2655명인데 그중 조선이주민이 103세대에 518명이였다. 조선이주민이 집결된 곳은 고동하유역의 선도방자(현 신합량소재지 동남쪽), 한충구(현 신합향 한충구), 소사하, 위자구 등 지역이다. 이들 대부분은 조선 갑산과 혜산군에서 출발하여 백두산동쪽기슭을 에돌아 내두산을 거쳐 한요구 등 지역에 정착하였고 다른 일부는 무산에서 출발하여 홍기하령을 넘어 냥냥쿠에 이르러 정착하였으며 다른 일부분은 먼저 화룡일대에 이르렀다가 후에 워지령을 넘어 고동하유역으로 이주하였다.

    1892년 안도의 조선인은 506호, 2994명이며 32개 부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상세한 상황은 참고표 1-03-2을 살펴보자.

    화룡    1884년 5월, 길림과 조선의 통상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화룡욕에 통상국을 설치했고 1902년에는 화룡욕에 분방경력 (分防??)을 설치하였다. 1909년 화룡욕 분방경력을 현으로 고치였는데 화룡욕에 위치하였기에 화룡현으로 불렀다. 화룡은 만족어에서 《산곡(山谷))의 뜻으로 나타난다. 화룡현에 있어서 조선개간민의 이주는 봉금시대부터 지속되였다. 1877년에 국자가에 초간국이 설치되면서부터 이주자가 본격적으로 늘어났으며 1883년 조선 어윤중이 월강개간을 장려하였기에 해란강유역을 중심으로 조선인부락이  형성되였다. 그중 저명한 것이 삼도구, 자덩, 대랍자, 청림동 등이 있다. 1907년 연길현, 화룡현의 조선인분포는 표1-03-3에 남겨둔다. 당기 이 지역 중국인은 2800호, 1만 8000명이지만 조선인은 1만 4700호, 7만 2500명으로서 절대적 우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왕청현   왕청현은 왕청하로 인해 그 이름을 갖게 되였다. 왕청은 만족어에서 《보루》란 뜻이다. 음으로는 《旺?》으로 되었으나 후에 《汪?》으로 변하였다. 일찍 1873년경 로진권(???)씨가 목단천에 내왕하며 개간을 하였으나 귀화인으로서 풍속습관도 중국인을 따랐다. 순수한 조선인으로는 장광행(??行)씨가 1897년에 온성에서 배초구에 내왕하였다. 그후 1902년경 여러 방면의 박해로 하여 조선인이 거의 없는 상태였으나 1906년 장수향(?洙香)씨가 재차 온성에서 배초구에 이주하였다. 그후 이주자가 다수였다.  1910년말 일본측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왕청지방에 조선인 1660호, 9890명이 있었으며 그 지역을 나누어 보면 배초구 및 목단천 지방에 270호 1350명, 왕청지방에 330호 1800명, 양수천자지방에 730호 4940명, 하마탕지방에 70호 450명이다.

    간도의 많은 지명은 조선이주민의 개간사와 연계되여 있다. 아래에 몇 개를 살펴보면서 당시의 정형을 다소 가늠해 보자.

    로과(芦果)    화룡진에서 동남쪽으로 백여 리 되는 두만강반에 로과라는 마을이 있는데 지금은 로과진 소재지이다. 로과라고 부르게 된 것은 《갈과일》이 난다해서가 아니라 조선말 《늪골》에서 온 것이다. 청나라는 봉금령이 해제된 후 지명과 호적을 등기하였다. 그때 당지 백성들이 부르는 대로 그곳 지명들을 등록하였으므로 이 마을이름이 늪골이라하여 가장 근사한 발음을 한문자로 쓴다는 것이 《로과》로 적었다. 이로부터 《로과》는 관청에서 인가한 지명으로 되었다.

   장목더기   1894년, 청나라는 따라즈에 월간국을 설치하고 아래에 4개 보를 두었는데 안원보의 소재지 장목더기는 지금의 남평을 《잔언더기》라 부르던 것이  변해 지명등록 때 한자로 《章木德基》로 기재됐다.

    길지   남평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길지란 곳이 있다. 개척 초기, 이곳이 장터로 되어 5일에 한번씩 장을 벌렸는데 땅이 진흙이여 비가 오면 몹시 질었다. 하여 사람들은 《질땅》 (진땅)이라고 불러 그곳이 지명으로 되었다. 그뒤 지명등록 때 《질》은 음에 따라 《吉》자로, 《땅》은 그 뜻에 따라 《地》자로 기재되여 《길지》라는 지명을 지니게 되었다.

    대우동, 소우동   오랑캐령을 넘어 강가슭으로 두만강을 거슬러 오르면 대소과수농장이 있다. 19세기 상반엽에 함경북도 6진의 농민이 이곳에 정착하였다. 생활이 좀 나아지자  소를 치기 시작하였는데 큰 소를 방목하는 곳은 《큰 소골》, 작은 소를 방목하는 곳은 《작은 소골》이라 불러 점차 지명이 되었다. 지방관청에서 호구와 지명을 등록할 때 조선말 뜻대로 《대우동(大牛洞)》, 《소우동(小牛洞)》으로 기록되였다.

    중국사령(中???)    조선인은 옛적부터 산마루 길목이나 큰 길옆 고목밑에 국사당(성황당)을 쌓고 신령에게 복을 비는 미신풍습이 있다. 조선개간민들은 제동에서 덕신방면, 후동에서 석정, 월청에서 화련리로 넘는 흑산산맥의 령마루에 국사당을 쌓았다. 그후 지명등록하면서 《국사당》의 《국사》 두자를 한자《국사(??)》두자로 쓰고 《당》대신에 《령》자로 고개를 나타내였고 《국사》앞에 《상, 중, 하》를 붙혀 세 곳의 지리위치를 표하였다. 하여 제동에서 덕신으로 가는 령마루를 《상국사령》, 후동에서 석정으로 넘는 고개마루를 《중국사령》, 월청에서 화련리로 넘는 고개를 《하국사령》이라고 불렀다.

    자동, 제동    개산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동》, 《제동》이란 곳이 있다. 이 동네사람들이 아들만 낳고 딸을 매우 적게 낳는다하여  《자동(子洞)》이라 불렀다. 《제동》은 자동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다. 조선풍속에 따라 차자들은 장가들면 세간나기 마련인데 자동에서 가까운 곳에 많이 살았다. 그리하여 형수가 시동생네 집에 다니면서 《애기골에 다녀옴메!》라고 하여 《애기골》이 지명으로 되고 한문자로는 자연히 《제동》으로 적혔다.

    천평, 천수평, 천수동, 청천, 약수동  간도에는 이러한 지명이 많다. 조선개간민은 천입초기 수토병으로 시달림 받았다. 물 좋은 고장을 찾아 곳 이름을 샘 《천》자를 머리자로 쓰되 버덕이면 《평》자를 붙이고 골안이면 《동》자를 달아 상술한 지명이 나타났다.

    합수, 합수평   지금의 곡수를 가르킨다. 해란강과 가야하가 서로 합수하는 고장이라 하여 처음엔 《모두미》로 부르다가 1900년부터 《합수》 또는 《합수평》으로 불렀으며 1932년 돈화--도문 철도가 부설되고 합수평에 정거장을 앉히자 《곡수(曲水)》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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