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2004-1-12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국에 온 고 김원섭(45·중국 흑룡강성 하천현)씨. 그는 밀입국 브로커들에게 1000만원이 넘는 돈을 주고도 선상에서 폭행을 당해야 했다. 건설현장에서 일한 그는 폭행 후유증에 의한 건강 악화와 임금체불로 인해 빚을 갚지 못한 채 힘겨운 고국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9일 새벽 종로구 혜화동 길거리에서 동사했다. 3시간 10분 동안 119에 한차례, 112에 열세차례나 구조요청을 했지만 끝내 외면당했다. 결국 그는 엄동설한보다 더 차디찬 고국 땅에서 중국에 있는 아내와 두 자녀를 남겨둔 채 홀로 얼어죽었다.

자녀의 교육비 마련을 위해 고국에 온 고 강태걸(46. 중국 요녕성 심양시)씨. 지난해 9월 12일 매형 한철동(49, 중국 요녕성 심양시)씨와 함께 입국한 그는 곧바로 일주일간 일했으나 허리를 다쳐 3개월 동안 쉬고 있었다. 매형 또한 손에 시멘트 독이 올라 일을 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산재보상은 커녕 실업자로 전락하는 그는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절망의 생활에 시달렸다. 지난해 12월 21일 라면으로 아침 끼니를 때우고 일자리를 구하러 나간 그는 달려오는 전동차에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중국에 있는 아내와 두 딸에게 거액의 빚과 슬픔을 남긴 채 홀로 먼길을 떠나고 말았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곁을 떠났던 두 남편은 차디차고 처참한 시신으로 영안실에 누워있었다. 남편을 냉동창고에서 만난 두 아내는 차마 울부짖지도 못했다. 고국의 무서운 냉대와 무관심, 그리고 남편이 남겨 둔 감당할 수 없는 빚….

이역만리 타국인들 이렇듯이 모질게 서럽게 했을까. 동포의 두 아내는 폭풍한설 보다 더 무서운 고국의 냉대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고 김원섭씨 부인 신금순(43)씨는 지난해 12월 31일 김해성 목사(44·외국인노동자의집·중국동포의집 대표)의 초청으로 아들 김천일(20)씨와 함께 입국했다. 남편을 얼어죽게 한 고국은 두 모자에게도 역시 냉담하기만 했다. 신씨는 구조를 애타게 요청한 남편의 통화 음성을 들려달라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경찰은 규정상 들려줄 수 없다는 답변에 그쳤다.

의지할 곳 없는 이들에게 유일한 피난처와 도움을 제공하고 있는 곳은 중국동포의 집. 두 모자는 이 곳에서 지내며 장례 절차와 임금체불 처리 등을 김 목사와 상의하고 있다. 11일 중국동포의 집에서 만난 신씨는 흐느끼면서 남편이 밀입국 브로커에게 당한 고통을 이렇게 털어놨다.

"중국에 있는 오빠와 사채업자에게 천만원을 넘게 빌려 2000년 7월 밀입국한 남편은 밀항선에서 깡패들에게 심하게 폭행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고 다리를 절 정도로 맞았다고 했어요. 한국에서 힘들게 일을 했지만 돈을 받지 못하고 빚도 갚지 못해 너무 힘들다고 했어요. 남편과 열심히 돈 벌어서 아이들을 잘 가르치려고 했는데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어요."

스무 살 아들과 열 여섯 짜리 딸을 두고 있는 신씨는 살아갈 길이 막막하기만 하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슬픔도 감당하기 힘들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남편이 남긴 빚이다. 식당종업원 벌이로는 남편의 빚 800만원과 5부 이자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달이 넘도록 영안실에 누워 있는 남편.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는 신씨는 남편을 죽게 한 고국을 향해 다음과 같이 눈물로 호소했다.

"남편처럼 억울하게 죽는 일이 없도록 애를 써 주십시오. 나라를 뺏겨 어쩔 수 없이 이국 땅에 와 산 죄밖에 없는 데 왜 이렇게 박대하십니까. 같은 동포로 여겼다면 그렇게 살려달라고 했는데 모른 채 해서 죽게 할 수 있습니까. 경찰들이 중국 동포를 사람 같지 않게 봤기 때문에 남편이 죽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해성 목사는 11일 "밀입국 당시에 폭행을 휘두른 브로커의 실체를 밝히는 일과 700만원 가량의 임금체불을 한 업자를 찾아내는 일, 그리고 구조요청을 외면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계획"이라며 "가난과 병에 지쳐 쓰러진 동포가 열세번이나 살려달라고 애원했는데도 외면한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인지 국민에게 묻고 싶다"고 한국의 인권 수준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고 강태걸씨의 아내 박희선(45)씨도 지난해 12월 26일 시누이와 함께 입국했다. 박씨는 남편이 죽기 전날인 12월 20일 통화했다고 한다. 박씨는 "공일(휴일)마다 전화가 왔는데 그날도 전화가 와 "명절을 쇠고 친척 초청으로 한국에 올 수 있으니 조급해하지 말라"고 했다"면서 ""일자리 찾기가 너무 힘들다"는 말을 했지만 설마 자살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눈물로 앞을 가렸다.

남편을 한국에 보낸 뒤 혼자 농사를 지으며 두 딸(20살, 12살)을 돌보며 살아온 박씨는 남편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두 딸을 교육시킬 방도와 빚 600만원을 갚을 길이 캄캄하다. 남편의 죽음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는 박씨는 남편을 다치게 하고도 치료를 해주지 않은 한국을 이렇게 원망했다.

"중국에서 건강하게 농사를 짓던 남편의 허리를 다치게 하고도 고국은 치료해주지도 않았고 일자리마저 주지 않았어요. 시험치는 큰딸(대학1학년)이 타격을 받을까봐 별 소리를(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하지 않았는데…. 손에 든 게 아무 것도 없어 애들 교육을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남편과 같이 열심히 벌어서 자식들 공부를 잘 시켜 남과 같이 잘 살아보려고 했는데 고국이 우리 가족의 소망을 빼앗아 갔어요."

김해성 목사는 "강태걸씨가 한국에 온지 일주일만에 허리를 다쳐 고통을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게 그를 절망에 빠트리게 했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다"며 답답해했다. 김 목사는 "강씨에 대한 산재처리와 보상문제, 그리고 사고 당일의 행적 문제를 해결한 뒤 유족들과 상의해 장례를 치를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호진 기자 (tajin@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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