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화의 조선인이주사>

    간도의 많은 지명에서 우리는 조선말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경신향의 《버리동(?璃洞)》은 조선어 지명이 《벌등》이였는데 벌판가의 등성이란 뜻이였으나 한어음으로 번역한다는 것이 《버리동》으로 되었고 《장고봉》은 산봉오리 모양을 따서 지은 것인데 한어로 음이 같은 자를 쓰다보니 《장고봉(?鼓峰)》으로 되었고 중로 국경선에 솟아있는 《로룡산(老?山)》은 조선어로 《놀음뫼》였는데 근사한 음으로 적은 것이 《老?山》이 되었다. 경신향의 《부암산(富岩山)》은 조선어로 《번산》이라 불렀는데 역시 음을 따 적은 것이 《富岩山》이 되었다. 량수진의 《비파동(琵琶洞)》은 조선어의 《피나무골》의 음을 딴 것이였다. 반석향 춘경촌의 《길성(吉城)》은 이곳 주민들은 본시 함경북도 길주(吉州)와 성진(城津,현 김책시)의 사람 들이여서 고향의 첫 글자를 따내여 《길성》이라 했고 밀강향의 《김희관 골》, 마적달의 《김초시골》 등은 당지의 이름난 개척자를 기념하여 지은 지명이다. 훈춘 경신향의 회룡봉은 옥피리를 빼앗으려 왔다가 용왕이 사납게 맴돌이치던 산봉우리를 회룡봉 (回?峰)이라 불러 그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도 점차 회룡봉으로 부르게 되였고 조선 남양과 도문 사이를 지나 30여 리 되는 곳의 쿠룽산(구멍산)꼭대기의 구새바위는 이성계와 박달천이 싸움 끝에 이성계가 활로 바위를 쏘아 생긴 모양이 구새통을 세워놓은 것 같아 구새바위라 불렀으며 훈춘 춘하진 서토문자 동쪽 30여 리에 위치한 초모정자는 마치 초모자처럼 생긴 높은 산 아래 있는 마을이기에 그 산을 초모산이라 하고 마을은 초모정자라 불렀다. 훈춘 경신의 금당이라는 마을은 이성계가 신덕황후 강현비의 병을 치료코서 조상묘 지역에 세모난 금붙이를 묻었다하여 이 금탑을 파내려고 새로 앉힌 마을을 금탑이라 부르다가 후에는 금당이라 불렀고 훈춘 영남촌의 관문이라는 마을은 관처럼 기이하게 생긴 산 아래 단란히 모여 사는 마을이래서 그곳을 관문이라 불렀다. 팔과수는 일곱 그루의 고묵이 둘러싼 부락이래서 그 마을을 팔과수라 부르게 되였고 경신벌의 남릉산과 여릉산은 성모라는 여신선의 딸과 한 나무꾼 총각의 사랑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남자가 죽은 자리에 솟아난 산을 남릉산, 여자가 죽은 뒤 솟아난 산을 여릉산이라 불렀다.

     어떤 지명에는 우리 민족의 미담을 담은 전설들이 있다.

     도문시 량수는 석두하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옛날 이 고장에 늙으신 량주가 살았는데 반백이 넘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어느 날 백학이 날아와 집뒤 덩실한 언덕에 내려앉아 뿌리로 샘물을 파헤친 꿈을 꾸었다. 삽과 괭이를 가지고  부지런히 그 곳을 파보았더니 정말로 샘물이 솟아났다. 늙은 량주는 그 샘물을 양껏 마셨고 나중엔 귀동자를 보았으며 애 이름을 샘물 《천》자에 아들 《자》를 합쳐 천자로 지었다. 그런데 애는 태여나자 잠이 들었는데 석 달 열흘이 지나도록 잠을 깨지 못하였다. 어느 날 길손인 늙은 도사가 이 사연을 듣고 샘물을 한입 물어 천자의 낯에 뿜었더니  애는 꿈지럭거리더니 정기도는 큰 눈을 뜨고 제꺽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천자는 '틂だ美뗌? 제법 걸음도 걷고 말도 잘하였다. 그 후 천자는 도사를 따라 산속에서 무예를 익혔다. 늙은 량주는 샘물로 마을 사람들의 병을 수없이 치료해 주었다. 샘물의 신기한 소식을 들은 이웃마을 석수부자는 샘물을 탐내여 늙은 량주를 때려죽였고 도사를 따라 산속에서 무예를 익히던 천자는 석수부자를 처단하고 도를 닦으려 홀연히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후 이 고장사람들은 이 샘물을 마시면서 그 마을을 양수천자라 불렀고 또 얼마 후에는 량수라고 불렀다.

    1907년 연길청 호구구역일람표, 1894년 월간4보 조선인호구 및 토지는 당시 여러 책에 기재 되었으며 토지집조에 관련되는 청표, 집조, 부본은 그대로 다음과 같이 남겨둔다.


                                     (2) 서간도지방

      19세기 40년대에 접어들어 청나라의 금지령은 차츰 느슨해졌고 조선개간민의 압록강대안지대에로의 이주는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1845년, 10여 명 조선인이 임강현에 천입했으며 5년 후에는 21명이 칠도구(七道?)에 정착했었다. 1852년 함경남도 단천군의 10여 명 거주민이 로영하에 와서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시작하였다.《?白???》 1850-1860년 월경한 조선농민은 조선의 삼수, 인서 대안에서부터 후창대안인 청금표 사이 400리 구간에 18개 부락을 형성하였는데 192세대,1633명에 달하였다. 청금동부터 판내동(板乃洞)구간의 150리에 270호,1465명이 널려있었다. 집안시 량수조선인향 외차구(外??)촌은 19세기 60년대에 형성된 것이다. 1861년, 청나라는 혼강유역에서 채벌과 수상운수업을 대대적으로 벌리였는데 떼목꾼으로 월강한 조선인들은 이 일대가 땅이 비옥하고 개간히기 쉬운 것을 알아차리고  정착하여 농사를 짓게 되여 부락을 따라 이주하는 현상이 생기였다. 1868년에 이르러서는 《강안지대의 개간민과 목민이 몇 천 호에 달하는》 농업목축구로 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만족인은 수렵과 목축업을 위주로 하였으며 농사일에  대해서는 그닥 익숙하지 못했기에 부득불 한족이나 조선인을 고용해야했음으로 조선개간민의 이주에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1869년 조선북부지역의 대흉재로 이주민수가 급증하였고 그 결과로 그해  강계군수는 조선정부의 명도 받지 않고 서간도 일대를 28개 면으로 나누고 강계군, 초산 군, 자성군, 후창군에 귀속시키였다. 1872년 조선 후창군 최종범은 《서쪽의 분계강으로부터 북쪽의 당하까지의 근 천 리 되는 구간에 청나라사람들과 삼삼오오 뒤섞여 사는 사람들이 수 만 호에 달한다.》고 류랑민 정황을 순찰하고 나서 말했다. 한편 1875년에 조선개간민은 통화현 상전자, 하전자 등 지역에서 벼농사에 성공하게 되었으며 이로 하여 많은 조선인이 이 지역으로 휩쓸렸다.

    중국 측은 조선개간민의 월경을 묵인하는 동시에 변무를 강화하고 재정수입을 늘이기 위해 행정기구를 조절하였다. 1875년 봉천성 봉금령을 폐제하고 이듬해에 봉황직예청(?凰直??)을 설치하였으며 그 소속에 안동(현 단동)현을 두었다. 1877년에는 관전, 환인(현 桓仁)과 통화현을 설치하였고 환인과 통화현은 변외북로로 흥경청(?京?)에 귀속하고 안동과 관전현은 변외남로로 봉황직예청에 귀속하게 되었다. 동시에 무민국(?民局)을 내와 초민개간을 추동하였다. 1883년 3월에는 《봉천과 변민교역장정》의 체결을 보았다.  24조로 된 이 장정은 호시(互市)를 임의교역으로 개변시켰으며 봉천성과 조선 국경지대 상인들이 수시로 거래하도록 용허하였다. 1891년에 이르러 《본 도 강역의 9개 읍이 국경선과 접경하고 있사온데 월경하는 우리나라 백성이 10여 만은 되나이다.》(평안감사 민병석(?丙?))고 했다.      


    1889년에는 면의 분할을 재조정하였다.


    강계군소속(괄호안은 청나라 지명임)  

     新兵堡(京),大荒石(大荒), 小簧面(通),八道江面(八道江),九?面(麻泉?),泰平面(太平?), ??面(??林子),新上面(大???子), 新下面(冷水旬子),福江面(江旬子),芦?面(拉古子) 

     이상 11개 면


    자성군소속

     ?生石(帽?山), 流?面(七十二道口河),?沙面(?沙河),祥和面(三道口)

이상 4개 면


   초산군소속

   云山面(外?河下流),云下面(外?河上流),?上面(二股流),?下面(??河),?道面(?道川),邱山面(?鹿吻?),央?石(冷水泉子)

이상 7개 면


    백동군소속

    水上面, 水下面

 이상  2개 면

      총 24개 면

   당시 조선이주민은 8723호, 3 만 7000여 명이였다. 이는 압록강서쪽지역에서 가장 일찍 형성된 조선이주민집거구일 것이다.

    1890년에 면을 강 연안 각 군에 안배하고 관리케 했으며 이주민에게서 호당 30전의 세금을 납부하게 했다.

    각 군의 배치는 다음과 같다.


     후창군

    九道面,八道面,七道面,六道面

    자성군

    帽山面,?沙面,流?面,祥和面

   강계군

    大篁面,小篁面,新上面,新下面,九?面,志?面,福江面,泰平面

   초산군

   央道面,云上面,云下面,?上面,?下面,邱山石,?道面,新上面,新下面,泰平面,??面

   벽동군

   水上面,水下面


    1894년 장백현(1908년 정식으로 설치) 조선개간민은 1350호, 5630명 (《??江北岸 朝?族的??制》李?洙)이다. 1899년부터 조선이주민은 화전현 고려력구자와 두도구, 이도유하, 삼도유하로 이주하였으며 1900년부터는 덕혜현, 흥경현, 해룡현, 서풍현, 철령현 등 내지로 확장 되였다. 1903년 봉천당국은 압록강북안 동변도 조선이주민촌락을 향, 갑제로 개편하고 향약제를 설치하였다.

   조선 측은 1897년에 서상무(徐相懋)를 서변계 관리사로 임하고 본 지역의 조선인을 관리케 했으나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고 1902년 관내에 향약을 설치하고 의정부참사 이용태(李容泰)를 향약장에, 서상무를 부향약장으로, 이완구(李完求)를 파원(派?)으로 위임하였다. 1903년 이 지역에 총 32개 면, 조선인 9754호, 4만 5593명이였다. 1905년에 와서는 변외북로의 장백, 임강, 집안 등 지역에 조선이주민 8750호, 3만 9440명이 있었고 변외남로의 안동, 봉성, 관전 등 지역에 1190호, 4920명이 있었다. 그해 조선인은 해룡현 동항하 지역에로 이주하였다. 1905년 이후 압록강 통화지방에 한국 유신 참판(?判) 이시영(李?榮)을 비롯하여 조선남부 농민이 많이 이주하여 왔다.

    그러다가 1909년 간도문제의 낙찰로 하여 향약제는 페지되고 중국지역에서의 자치제도가 인정 되였으며 따라서 이 지역은 조선과의 정치인연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 지역 조선인의 주요 이주지를 보면 흥경(현 신빈현)은 조선이주민이 비교적 일찍 들어온 지역의 하나이다. 집안,회인, 통화 등 지역에서 점차 신빈보, 위자곡, 왕청문 (旺??), 홍묘후창(??后?), 란기(?旗), 영릉(永陵) 등 지역에 장착하여 농사지었다. 이들 일부분은 소자하(?子河), 태자하(太子河)를 따라 무순, 본계, 청원에로 이주하였다.

     심양에 최초로 이주한 이는 안봉태 (安奉泰)이란 상인이다. 1889년에 이주해 와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1906년 선후 조선에서 직접 봉천으로 조선이주민이 건너왔다. 《한일합병》 후 조선의 반일지사와 파산된 농민들이 대량 밀려들었다.

 

3). 북만지방


    1860년 전후 시비리아로 갔던 조선인들이 다시 이주 길에 올라 동녕현 경내에 들어섰고 1867년에 애훈 등 지역에 정착했다. 1890년초 조선이주민은 시비리아와 간도에서 대량적으로 북만에 천입하였으며 동녕, 녕안, 해림, 목령 등 많은 지역에 조선개간민촌이 건립되였다. 《흑룡강 조선인》, 《조선독립운동》(金正明)등 책에 산재된 기재가 있다. 예컨대 1871-1872년 조선유민 몇몇 호가 동녕현 삼차구로 이주해 왔고 1880년 3명 조선유민이 요하현 의순호(???,현 대하진(大河?))에 이주해 왔다는 등등 기록이 있다. 1893년 12월 흑룡강 중류 동해안 지역에 조선인 1015명이 있었으며 1만 4700쌍 개간지를 갖고 있었다.

    1900년 러시아는 동청철도를 수축하기 위하여 시비리아와 조선으로부터 대량의 조선고용인을 모집하였다. 이 철도는 할빈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은 수분하까지, 서쪽은 만주리까지, 남쪽은 대련까지 이르렀다. 철도가 수건된 후 부분적 조선인은 할빈, 일면파. 횡도하자. 목릉 등 동청철도 동선의 목단강, 목릉하 유역에 남았다. 우수리강 서부연안의 무원, 요하, 호림, 보청, 밀산 등지의 조선이주민은 처음엔 시비리아에서 넘어왔고 후엔 간도,통화 지구와 조선에서 천입하였다. 할빈의 조선인은 1892년에 처음 있었으며 중동철도수건 후 그 지역에 남은 이들은 농사를 짓거나 식당, 여관을 경영하였다. 치치할의 조선개간민은 조선 북부에서 시비리아를 거쳐 천입되였고 만주리의 조선인은 19세기말 녕고탑에서  눈강을 거쳐 해라얼에 이주하였다가 동청철도가 준공되자 남아 정착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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