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산의 역사이야기>

일송정 푸른 솔옅선구자》는 없었다

제8회 전성호와 민생단

류연산


  제목을 쓰고 나니 어쩐지 전성호(全盛鎬 1896-1950)에 대한 한국의 평가가 못내 궁금해 졌다. 그래서 야후 <<백과사전>>을 펼쳐 보았다. 이름을 쓰고 검색을 누르자 전성호는 <<독립운동가>>로 눈앞에 다가섰다.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닌지, 동성동명의 다른 사람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독립운동가로, 내가 찾는 전성호였다.

  호 철주(鐵舟). 함북 경성(鏡城) 출생. 1910년 만주로 망명.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에 가입하였으며, 3.1운동 때는 용천(龍川으로 되었는데 그것은 龍井의 오식인 것 같다. 당시 간도에는 용천이란 지명이 없었다)은행을 습격하다가 실패하였다. 그 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졸업하고 교관을 지냈다. 1920년 청산리(靑山里)전투 때 편의대(便衣隊)로 정보수집에 종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공을 세웠다. 1927년 김좌진(金佐鎭), 지청천(池靑天) 등과 한국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만몽일보(滿蒙日報), 간도(間道)일보, 간도통신 등을 경영하며 독립운동과 민족계몽에 진력하였다.

  1928년 간도 연변자치촉진회의 부회장으로 있다가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고 청진(淸津)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35년 중국의용군 총사령 왕더린(王德林)과 회담을 하였고, 지청천의 부대와 지하연락을 맡아 활약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국군에 입대, 6.25전쟁 때 육군대령으로 영덕(盈德)상륙작전에 참가하였다가 전사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 되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1919년 3.1운동이 실패하자 무장투쟁의 기치를 들고 임국정(林國楨), 한상호(韓相浩), 윤준희(尹俊熙) 등 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철혈광복단은 독립운동사에서 유명한 <<간도 15만 탈취사건>>을 만든 주역들로 조직되었다. 회령으로부터 조선은행 용정지점으로 보내는 돈을 동량리에서 탈취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를 구입하던 중 일제 간첩 엄인섭의 고발로 의사들은 체포된다. 비록 거사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그러한 조직의 성원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전성호는 독립운동에 뜻을 둔 사람임을 알 것 같다.

  그리고 독립운동사상 가장 휘황한 전과를 올린 청산리전투에 편의대로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고 하고 그 후 김좌진, 지청천 등과 혁명위원회를 결성하기도 한 전성호는 참으로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는 1928년 연변자치촉진회 부회장으로 활약하던 중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다. 연변자치촉진회의 전칭은 연변귀화선인자치촉진회(延邊歸華鮮人自治促進會), 간도에 거주하는 40만 조선인들이 중국 국적을 획득하고 중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 연변을 조선인 자치지역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 민족주의 단체였다. 일제가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침략의 마수를 뻗치고 있었던 당시에 귀화선인은 일종의 항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조직은 중한 두 나라의 공동 항일을 도모하는 단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미루어서 전성호는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백과사전>>의 기록에 전성호는 출옥 후 자치촉진회의 회장으로 되었고 1932년 2월 조직을 대표하여 친일단체 민생단(民生團)에 가입하였다는 사실이 없다. 기록자가 생략했는지 아니면 전성호 자신이 그것을 숨겼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종이로는 불을 쌀 수가 없는 법, 출옥 후 전성호의 역사행적을 추적해보기로 하자.   

   1931년 9월 18일 일본관동군은 봉천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북대영을 습격하고 봉천거리를 폭격하였다. 이것을 역사상 만주사변이라고 한다. 일본관동군은 1만 4백, 장학량의 동북군은 35만, 역량대비로 보아서 일본군의 무모한 군사행동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의 부저항 명령 한마디에 동북군은 서둘러 투항하기 시작했다. 길림 부사령관공서 참모장 희흡은 연길진수사 겸 길림성방군 제27여단 길흥여단장한테 명령하여 용정일본영사관에 가서 투항하도록 명령했다.  

   만주사변은 중일전쟁의 서곡임을 예감한 친일파 조병상(曺秉相 서울갑자구락부 이사)과 박석윤(朴錫允 매일신보사 부사장), 김인선(金仁善), 김동환(金東煥) 등은 9월 26일에 부랴부랴 용정으로 왔다. 만주사변으로 하여 중국정부가 당황망조(唐慌罔措)한 기회에 간도에서의 조선인의 자치권을 얻고 간도를 조선인의 자유천지로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물론 그것은 만주로 이주해준 조선인들의 생계와 관련된 절실한 문제이기도 했다. 부패한 중국정부는 조선인 이주민에 대해 우호적이 되지 못했고 갖은 수단으로 압박하고 착취하였다. 봉천성정부는 1924년 <<재만조선인취체령(取締令)>>을 발포하고 뒤미처 1929년에는 <<조선이주민 취체에 관한 훈령>>, <<조선인 토지경작지에 대한 취체령>> 등 가지가지 법령을 내왔다. 그리하여 토지소유권은 물론 소작권도 박탈했고 어떤 곳에서는 조선인 주택에 불을 놓고 경찰을 동원하여 축출하기도 했다. 가렴잡세(苛斂雜稅)와 관리들의 횡포에 조선인들은 그 어디에서나 피눈물 나는 생활을 하였다. 

   박석윤, 조병상, 김인선, 김동환 등은 당시 연변의 조선인 단체장들을 하나씩 만나서 자치운동을 토의했다. 당시 연변에는 여러 개의 조선인 정치단체들이 있었지만 대표적인 것은 일본영사관에서 영도하는 조선인민회와 중국 당국을 뒷심으로 한 귀화선인단체인 연변자치촉진회였다. 전자는 친일이고 후자는 친화이므로 상호 대립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일본영사관이나 중국 당국이나 산하 단체에 대한 지원과 지지가 미지근해지면서 두 파는 각기 상전에 대한 불만정서가 깊었다. 그러한 때 <<자유천지를 건설하자>>는 정치적 주장은 두 파를 하나로 융합시킬 가능성을 가져왔다. 조선인민회는 두손들어 찬성, 그러나 자치촉진회는 우유부단한 태도였다. 귀화선인과 배일자(排日者)들을 규합하여 숭화선인(崇華鮮人)의 단결을 공고히 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자치촉진회로서는 당연히 중국 당국의 지지를 얻어내야 했던 것이다.   

   전성호와 김연일은 용정일본영사관의 태도가 어떠할지, 시국의 추이(推移)가 어떻게 변할지 몰라 두루뭉실 넘겨버리고 오히려 조, 박 등의 활동을 일본영사관에 밀고를 했다. 그리하여 오까다 가네이찌(岡田兼一) 총영사와 스에마쯔(末松)경시는 총독부에 사전 보고를 올려 반대했다. <<민족자유의 천지>>라는 구호는 민족독립이나 간도독립으로 오인 받을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오라지 않아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동북 3성은 일본의 식민지로 번져갔다. 불원간 만몽(滿蒙)에 새로운 국가가 설 것은 불 보듯 환했다. 그러므로 만몽성립시에 공민권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되며 특히 간도를 자치구역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에는 자치촉진회도 동감이었다. 10월 7일 조, 박 등은 간훈조선인민회장(間琿朝鮮人民會長)과 재간동포구제단장(在間同胞救濟團長) 김택현(金澤鉉), 자치촉진회의 전성호의 지지를 받아 총영사관에 민생단을 조직할 것을 서면으로 신청하였다.

  11월 민생단 발기인 회의가 용정에서 열렸다. 회의에는 간훈 18개 민회 대표와 지방 민족파, 공산계통의 조선인들이 동참했다. 공산파들은 민생단을 무산대중의 기관으로 하고 소작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위주로 한 임시 단체로 설치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이 통과되지 않자 그들은 회의에서 퇴출했다. 민족파들도 민생단을 종합성적 민중기관의 상설단체로 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결국 타협하고 말았다. 전성호일파는 우선 자치권을 쟁취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인 중국 관방이 제거된 다음 공개적으로 반화태도를 표명하고 민생단과 인민회와 결합한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다. 

   12월 24일 용정일본영사관 오까다총영사는 총독부의 지시에 좇아 민생단설립을 비준했고 이듬해인 1932년 2월 15일 용정 공회당에서 민생단성립대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2월 16일과 17일 간도신보(間道新報)에 실린 민생단 성립에 관한 보도를 추스리면 아래와 같다. 

   전성호가 개회를 선포하고 박석윤이 <<간도의 40만 동포의 생존을 확보하고 낙토로 건설할 중대한 사명>>을 지닌 민생단 성립대회의 개막사를 했다. 대회에서는 단장(후에 단장으로는 일본군 대좌 출신 박두영(朴斗榮)이 되었다)은 잠시 보류하고 부단장에 한상우(韓相愚)를, 그리고 이사 31명을 선거하였다. 전성호가 형세보고를 하고 나서 <<산업인의 생존권리를 확보하고 세계의 대세에 순응하여 독특한 민족문화를 건설하며 일치 단결하여 자유천지를 개척한다>>는 민생단의 강령을 선포하였다. 천도교 지도자 이인구(李麟求)가 각지에서 보내온 축하신을 낭독하였다. 그리고 조두용(趙斗容)씨가 재무보고를 했다.

   참으로 민생단은 간도 조선인의 생존권을 위한 조직이었던가?

   그 후 간도신보에 실린 민생단 관련 보도를 보면 민생단의 실질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1932년 3월 6일과 7일 용정에서 민생단 주지하의 간도 40만 동포 대회를 가지고 박석윤 등 10명 대표를 만몽신국 수도인 신경으로 가서 공민권과 특별자치구의 설정 청원운동을 진행할 것을 결의했다. <<만몽국가가 바야흐로 탄생하는 때에 40만 조선인의 정당한 요구가 정당한 도경을 통하여 새 국가의 새 기관에 전달되고 관철되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민생단이 말한 만몽국가란 괴뢰 만주국을 가리키는 것이며 일제의 식민지 국가의 수뇌부의 동의를 얻는 것을 <<정당한 도경>>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4월 12일 신문에는 황군출동의 진심실의(眞心實意)를 이해시키기 위한 민생단의 강연대가 각지로 파견되어 간다는 소식과 비행기로 산발하게 될 <<동포들에게 알리는 글>>이 실렸다. 이 글에서는 <<대만주국의 건립은 우리한테 미래의 찬란한 평화의 서광을 가져왔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평화생활을 파괴하는 각색 비도 집단이 살인방화를 일삼고 있다. ---끝내 일본군의 출동을 초래했다. 우리는 군부의 포고에서 보다시피 전문 간도지방의 치안을 유지하고 양민을 보호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음을 심심히 믿어마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반 양민들은 무서워말고 환영하면서 하루 속히 비도 집단을 깡그리 소탕할 것을 바라야 한다.>>라고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한 동시에 그에 협조할 것을 호소했다.

    민생단에서 진심진의로 바랐던 황군출동의 결과는 어떠한 것이었던가?

   2002년 10월 22일 연변일보는 <<잊어서는 안될 일본간도총령사관의 죄행>>이라는 글에서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피의 죄악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1932년 4월 2일 조선 나남에 주재하던 일본군 19사단과 손고 <<천명을 오살할지언정 공산당을 하나도 놓치지 말라>>고 외치면서 야만적인 대학살을 감행하여 4,000여명을 살해했다. 1932년 5월 총영사관은 은진중학교와 대성중학교의 학생운동을 탄압하고 100여명의 학생을 체포하였으며 그해 8월 7일 화련리에서 6차의 토벌을 감행하여 반일군중 150여명을 학살했다. 1933년 가을 총영사관 경찰부는 일본군 19사단을 이끌고 왕우구항일근거지를 반달동안 대소탕하여 700여채의 집을 불사르고 58명을 살해하였다. 이렇듯 길림성 용정에 뿌리 박은 일본총영사관은 1930년부터 1935년까지만 해도 2만명을 학살했다.

   민생단이 친일활동을 시작함에 따라 중국 공산당 조직과 독립군 등 무장세력들은 단합하여 민생단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그들은 용정 민생단사무소의 간판의 민생단(民生團)이라는 생자를 죽일 살(殺)자로 바꾸어 쓰기도 했고 <<일본제국주의 주구 민생단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도처에 뿌렸다. 3월 26일 <<동아일보>>의 <<영경분서(領警分署) 총동원, 7명 민생단 피살>>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24일 오후 7시 국자가(오늘의 연길시) 서산에 천여 명 공산당인이 나타나 남양(南陽)에 사는 이모 이하 7명 민생단 혐의분자를 처결했다. --- 시국이 하도 불안하여 민생단을 탈리하는 현상이 날 따라 격증하고 있다.>>라고 썼다.

   한편 민생단은 마을마다 자위단을 조직할 것을 일본총영사관과 특무기관에 요구하여 비준을 얻었다. 5월 25일 <<간도신보>>는 <<공비(共匪), 병비(兵匪)들의 연속부절(連續不絶)한 폭행에 지극히 위험한 처지에 떨어진 각지 만선인(滿鮮人)들은 자위단을 조직할 필요를 통감했다.>>고 썼다. 그들이 말한 공비는 공산당 항일세력이요, 병비는 독립군 및 기타 반일세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생단이 자위단을 조직하는 목적은 일제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데 이바지하겠다는 것이다. 민생단은 간도자위단훈련소를 꾸리고 시험을 거쳐 선발된 130명의 소원들을 첫 패의 자위단 골간으로 받아  7월 1일 개학했다. 그러나 며칠 후 일제는 간도에서의 조선인들의 정치조직이 성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민생단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야후 <<백과사전>>에서 박석윤을 찾아보면 민생단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 단체는 겉으로는 @생존권확보(생활안정)과 독특한 문화건설, 자유로운 천지의 개척(낙토의 건설)#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한/중 양 민족을 이간하여 중국 공산당 조직 및 산하 대중단체를 파괴하고 독립군 등 무장세력을 탄압하려는 반공/ 친일의 간첩(밀정) 조직이었다.>>

   바로 이러한 친일단체에서의 주요한 활동가였던 전성호이므로 연변 역사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친일파로 보고 있다. 그는 20년대 독립운동에 참가하였고 30년대부터는 친일파로 전락한 인물인 것이다. 바로 민생단을 계기로 연변자치촉진회가 친일파 조직으로 되면서부터 그는 친일단체의 두목으로 살아온 것이었다. <<백과사전>>에서는 <<1935년 중국의용군 총사령 왕더린(王德林)과 회담하였고 지청천의 부대와 지하연락을 맡아 활동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왕덕림(1878년  산동성 沂水縣 태생)은 만주사변 당시 동북 육군 제27려 677퇀 제3영(營: 대대) 영장이었고 1931년 말 의거한 동북항일부대의 장령이었다. 바로 민생단이 일본군의 출동을 미화하면서 비도 집단이라고 꼬집어 말한 독립군 부대장이었다. 그의 부대는 만주사변 이후 간도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 유일한 부대이기도 했다. 그는 1933년 초에 항일구국군 총부를 거느리고 소련경내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전성호가 만났다는 1935년에는 왕씨의 부대는 이미 만주에서 사라진 뒤였다. 사전의 기록은 전설같은 것이다.  

   전성호의 집은 현재 연변대학 농학원 부근에 있었다고 하며 간도 성장은 물론이거니와 신경에서 오는 만주국의 거물들도 용정으로 올 때면 큰길에 차를 세워놓고 걸어서 전성호의 집을 찾아 인사를 하고 갔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듣는 바에 따르면 전성호는 일본군 징병에 나간 아들이 탈주해오자 덜미를 잡고 부대로 데려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그만치 천황에 대한 전성호의 충정이 갸륵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야후 <<백과사전>>에서는 전성호를 독립운동가로 적기도 했지만 친일민족개량주의자, 반공주의자라고도 낙인찍고 있다. 하나의 사전에서 하나의 인물을 상호 상반되는 두 극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알고도 모를 요지경 같은 사전이다.

조글로/  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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