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정일

누군들 례외일까만 나는 어쩐지 나무만 보면 무작정 좋다.

그래서 자주 산을 찾는 편이지만, 사철푸른 소나무, 곧게만 자라는 이깔나무,태깔스럽지 않은 떡갈나무를 비롯하여 은색의 우아한 봇나무, 가을에 화려한 단풍나무며 휘휘 늘어진 버드나무, 도고한 백양나무 할것없이 나무는 어느것 하나 정겹지 않은게 없다.  

 

물론 사정에 따라 나무들에 약간씩 차별을 둘 때도 있기는 하다. 만약 시내 거리에 한줄로 심는 가로수라면 나는 그늘도 없는 철모르기 침엽상록수보다는 계절에 따라 단장을 바꾸며 유연한 반응을 보이는 활엽수들에 보다 더 친근감을 느낀다. 잎이 돋아 록음을 이루었다가는 단풍이 들어 락엽으로 떨어지는 활엽수의 그 변화의 몸짓에는 우주의 신비한 호흡이 깃들어있으리니 락엽을 즐길대신 청결이 시끄럽다고 아니꼽게 보며 부담스러워하는 시각은 진작 교정돼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나무라 해도 주변환경이나 심경의 변화에 따라 달리 보이는수도 있다. 이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는데 근년에 와서 한겨울이면 나는 줄기와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를 감상하는 취미가 생겨나 나로서도 조금은 뜻밖이다. 뭐 낮에도 볼만은 하지만 감상의 가장 적당한 시간대는 저녁나절이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할 무렵, 노을 비낀 하늘을 배경으로 알몸으로 서있는 겨울나무를 쳐다보면서 나는 그 어떤 마력적인 매력에 심취하군 한다.

 

왜 하필이면 봄나무도 여름나무도 아닌 앙상한 겨울나무인가ㅡ그것도 대낮이 아니라 저녁켠의 나무인가ㅡ하고 의아함을 호소할이도 없지 않을테지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자신도 이전엔 추위에 로출된 겨울나무를 가여워하기가 일쑤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혹시 강물에 거꾸로 비낀 하늘과 구름을 보고 멋지다며 감탄을 련발한 분도 있을것이다. 같은 풍경이라도 수면에 비치는 모습은 별다른 정취를 자아낸다. 얼마전 외국에 나가 학위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류학생을 만났다. 정돈된 교정생활이 외롭고   단조로웠던지 그녀는 고향의 아침시장을 돌아보고 감탄해마지 않았다. 채소류가 풍성하고 값싼데다 금방 잠에서 깨여나 시장돌이를 하는 사람들의 다듬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 그토록 정겹더라는것이였다. 연길의 거리가 몰라보게 변했군요, 하는 칭찬의 말을 들을줄 알았던 나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인상담이였다.

 

나의 겨울나무에 대한 애착도 경우는 마찬가지일것이다. 엄동의 한복판, 넘실거리던 강물도 꽁꽁 얼어붙고 잔잔하던 호수도 차디찬 빙판이라지만 《숲속에 들어가면 뱀이 그 껍질을 벗어버리듯이, 사람은 자기의 년령을 벗어던진다》는 에머슨의 말과 같이 나는 청년호수가를 지날 때면 호수에 둘러선 버드나무와 백양나무들을 바라보며 발길을 떼지 못할 때가 많다.

 

저녁나절, 어스름이 깃들기 시작하지만 아직은 노을의 확실한 지원을 확보하고있는 하늘은 최상의 배경이다. 천상의 조화를 배경으로 호수가에 늘어선 나무 한그루 한그루를 유심히 바라보면 부채살같이 하늘로 뻗은 힘찬 나무 줄기와 전자회로같이 수없이 많은 잔가지들이 유난히 선명한 륜곽을 드러내면서 일종 색다른 신비감을 자아낸다. 저녁만의 배경에는 저녁만의 색조가 있다. 저녁만의 색조는 저녁만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찰라적인 분위기속에서 그토록 선명히, 그토록 적라라하게 자신의 은밀한 몸체를 유감없이 열어보이는 라목이야말로 나무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갈마들면서 나는 저도 몰래 제법 경건한 생각에 젖어든다.

 

겨울나무는 《비움》의 리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봄에는 탐스런 새잎을, 여름엔 록음의 성장(盛粧)을, 가을엔 울긋불긋한 단풍축제를 한껏 선물하더라도 때가 되면 유감없이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체중감량, 군살빼기를 결행하는 영특한 나무가 바로 라신의 겨울나무가 아닐까 한다.

 

어느 한 건축가와의 텔레비죤 인터뷰를 시청하며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그 건축가는, 옛건축은 자연과 썩 잘 어울렸었는데 지난 세기의 건축은 물신숭배하에 남보다 크게 짓고,  잘보이게 짓고, 남보다 더욱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안달을 해서 문제였다며 자신은 자연과의 조화를 살려내는 《비움》의 건축미학을 주장한다고 밝히였다.

 

귀가 솔깃해지게 하는 말씀이였다. 공간개념이라곤 전혀없이 콩크리트벽체만 빽빽히 쌓아가는 도시는 아름답기는커녕 숨막힐 지경으로 삭막한것이다. 겨울나무처럼 비우면서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자고 다이어트열이 일고있는 요즘이건만 건축에서만은 왜 정신없이 《채움》의 욕심만 부리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다.

 

겨울나무는 삶의 리듬에 대해서도 적잖은 계시를 주고있는것 같다. 겨울나무의 《비움》은 일종 휴면기이다. 눈먼 질주보다는 한해동안 지친 몸을 잠시 쉬우며 새해의 삶을 위해 에너지를 비축하는 필요한 과정이라고 볼수 있다.

《너무도 바쁜 삶의 허망함을 경계하라.》(소크라테스)

《시간이라는 들판 한가운데 있는 기회를 잡으려고 한다면, 먼저 그 들판주위를 둘러가야만 한다.》(발타사르 그라시안)

 

겨울나무의 계시와 통하는 현인들의 말씀들을 떠올리면 브레이크가 고장난듯한 맹목적인 질주는 재고되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모처럼 휴식하러 나온 산책길에서까지 반도체기기를 목에 걸고 방송뉴스에 정신을 파는 모습은 안스럽다. 겨울나무와 더불어 비축의 시간을, 장고의 년말년시를 가져야지싶다. 해묵은 가지에도 어지간하게 근사한 새잎들이 파릇파릇할 새봄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수필 / 연변녀성 2008년 제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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