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인구변동


인구변동은 자연변동과 기계변동 두 가지를 포함한다. 우선 출생에 직접 영향을 끼치 는 결혼상황을 적어본 다음 본편으로 들어가겠다.

결혼에 대해서는 리훈구씨가 《만주와 조선인》에서 적어둔 자료를 거듭겠다. 이 조사자료는 1074명을 상대로 하여 얻어진 것이다. 이미 결혼한 자는 583명이다.

재만조선인 중 조혼이 있으며 결혼 왕성기는 대체로 18세이고 평균으로 보면 16-20세까지 약 70%를 점한다. 여자는 남자보다 일찍 결혼한 것으로 적혀 있으며 대부분 여성은 22세 이하에서 결혼하고 있었다.


1. 자연변동

조선인의 출생율은 매우 높다. 《재만 조선인의 빈곤상 및 해결책》에 의하면 1922-1928년 조선인의 평균 출생율은 37.9‰ 로서 동시기 일본인의 34.4‰보다 3.5개 천분점이 높다. 조선인의 출생율은 파동이 큰바 1922년에 34.3‰이나 1925년에는 40.4‰이다. 기타 나라와 비교해 볼 때 프랑스는 18.4‰로서 비교적 낮은 편으로서 조선인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된다. 출생율이 25‰좌우에 달하는 나라가 많은 데 스위스, 영국, 오지리, 독일, 스웨덴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딸리아, 뽀루뚜갈 등 나라는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나(31‰좌우) 조선인, 일본인보다는 낮다.

사망율을 볼 때 조선인의 수준은 일본인보다 높다. 1922-1928년 조선인의 평균 사망율은 21.6‰, 동시기 일본인은 20.9%이였다. 사망율은 1‰좌우의 폭으로 움직였다. 동시기 기타 나라의 사망률을 보면 화란은 9.6‰로서 10‰이하를 기록하고 스위스(12‰), 스웨든(12.0‰), 영국(12.3‰), 독일(11.6‰), 오지리(14.9‰)가 15‰이하로 기록되고 이딸리아(15.6‰), 뽀루뚜갈 (18.2‰), 프랑스(16.5‰)가 비교적 높은 수준이다. 18‰를 기본상 초과하지 않았다.

재만 조선인의 연령별 사망율은 자료의 제한으로 리훈구씨가 조사한 자료에 의한 것이다.
연년별 사망 곡선은 정상적인 사망곡선 U자형과 너무나 차이가 있는 바 이는 당시 조선인의 생활, 환경, 위생보건 등의 악렬한 환경과 연계된다고 생각한다.

이상을 종합하여 보면 1922-1928년 조선인의 자연 장성율은 16.3‰로서 세계 기타 국가들보다 퍽 높은 편이다. 기타 나라의 상황을 적으면 일본은 13.5‰, 독일은 3.0‰, 스위스는 6.3‰, 이딸리아는 6.9‰, 프랑스는 2.6‰, 영국은 7.9‰, 오지리는 15.3‰이다.


2. 기계변동

조선인의 만주이주는 평탄한 과정이 아니였다. 반복과 곡절과 불행과 눈물이 동반 되는 삶의 터전을 개척하는 판가리 싸움이었다. 파산당한 이, 모종 꿈을 품은 이, 살길 찾아 헤매던 이, 망국노의 설음에 일제의 통치를 피하여 자유를 찾으려던 이, 각자의 경우는 달라도 만주라는 이 지대를 공동으로 선택하여 운명이라 간주하며 모여온 조선인이지만 정작 오고 보니 상상과는 다른 데가 많았고 게다가 여러 면에서 닥쳐드는 박해와 무정한 자연재해로 부득불 만주를 떠나 고향으로 되돌아갔거나 중국 타지방에로 옮겨갈 수밖에 없던 많은 조선인은 다시금 부평초처럼 하염없이 떠돌아 다녀야만 했다. 조선인주민의 재이주는 1910-1931년 조선이민의 특징이라 할 수도 있다. 20세기 10년대 초 만주조선인의 재이주는 그닥 선명하지 않았으나 점차 조선으로 되돌아가는 이주민이 많아졌으며 1928년 후에는 아예 조선으로 돌아간 조선인이 그해 만주이주 조선인보다도 많은 형편이였다. 표 1-04-13에서 보다싶이 《한일합병》 2-3년 내 4만 3000명 조선인이 만주로 밀려왔으며 그 후 몇 년은 1만 명좌우를 유지하다가 3.1독립운동 당해에는 3만 7000여 명이 만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듬해에 1만을 넘는 조선인이 조선으로 되돌아갔고 그 후 몇 년은 6-7천명을 기록하다가 1926년, 1927년에는 1만 명 좌우에 달했고 1928년에는 1만 5천명을 넘어 1910-1931년 조선으로 돌아간 조선인이 최고치를 기록 하였다. 1928년 후부터는 조선에로의 귀환자가 만주입주자를 초과하여 그해 조선인이주는 마이너스룰 기록했다. 중국과 일본측이 조선이주민에 대한 외부환경이 조선인 만주 이주에 커다란 요소로 작용하였다. 박해가 심한 시기면 만주이주자가 줄고 조선귀환자가 늘어났고 조선이주민에 대해 격려 또는 묵인정책을 취하면 만주조선인이주자가 급증 하였다. 1910-1931년 만주조선이주민은 29만 6359명이고 조선에로 귀환한 수치는 13만 4983명으로서 만주에 남은 이주민은 16만 1376명이다. 1922-1928년 만주조선이주민의 지역별을 보면 간도에 이주한 조선인이 이주 총수의 50%를 점하고 압록강대안지방과 기타 지방에로 이주한 조선인이 약 나머지 절반씩 점한다. 간도에로의 조선인이주는 해마다 5000명 정도로 유지 되다가 1926년 후에는 1925년의 3배에 해당하였다. 이런 현상은 압록강대안이나 기타 지방에로의 이주에서도 나타나지만 기수(基数)가 적었으므로 그 현상이 더욱 뚜렸했다.

만주 내에 있어서도 조선이주민의 류동은 빈번했다. 아래의 그라프는 이훈구씨가 201명 대상자에 대한 조사 자료에 근거하여 작성한 것이다. 4번씩 이주한 자가 가장 많으며 5-6차례 이동한 자가 다음으로 간다. 만주조선인의 대부분은 최초의 정착지를 떠났는데 이는 조선이주민의 이주가 맹목적이고 당시의 상황에서는 부득이한 행위라는 점을 깊이 감안할 수 있다. 가난에 쪼들리면서 추운 만주의 날씨에 이주하기란 워낙 쉬운 일이 아니였고 또 심리상에서 커다란 타격과 고통을 느꼈을 것이라고 새삼 느끼게 된다.

아래에 지방별 조선이주민의 기계변동을 적어둔다.

간도지방의 조선이주민은 대체로 두 개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조선에서 직접 건너온 이주민을 새 이주민이라 하면 이들은 각종 원인(앞장에서 상세히 기록했음)으로 하여 간도를 이주지로 선택했고 대부분은 함경도 출신들이다. 이미 러시아방면에서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있는데 북만을 거쳐 만주에 이르렀다. 이들은 러시아에서 실업당한 자, 징병을 도피한 자, 러시아 측에 불만을 품은 자 등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주 경로를 보면 두만강, 해란강, 홍기하 등 유역을 따라 점차 간도지방에 널려 있었다. 1918년 조선이주민의 이주상황을 보면 80%가 연길현에 정착했고 왕청현에는 몇 백 명에 불과했다. 후에 점차 안도, 돈화방면에로 이주지역을 넓히였다.

서간도지역에 있어서 1913년의 한재와 이듬해의 수재로 하여 조선으로 돌아가는 자가 다수였으며 1921년에 이르러 한재와 수재로 인해 수확이 거의 없게 되자 많은 조선이주민이 귀환되였는데 봉천부근에만 해도 1818명이상으로 예견된다.

북만에 있어서는 대표적 예로 해룬현에 있는 선목(善牧)농장의 조선이주민의 이주 상황을 보면 144호 농호중 약 절반이 경상북도에서 왔으며 평안북도와 절라북도 출신이 각 10%를 좀 벗어진다. 이들의 이주경로를 보면 조선에서 봉천, 안동을 경유한 이주자 가 많으며 간도를 거친 이주민은 그닥 많지 않았다. 또 조선에서 직접 농장에 온 조선인이 절반을 점하고 2차 이동을 거친 자가 다음으로 많은 비례를 점한다. 본 농장에서 2-4년 정착생활을 한 조선인이 60%이상을 점하고 있다.

북만에서 중동철도 동부선을 통과한 조선이주민의 이동을 보면 (1930년 1-8월) 총
1261호 중 할빈에 내린 조선인이 가장 많고 (386호 1655명) 녕고탑에 내린 조선이주민이 다음으로 많다(100호 565명). 50호를 넘는 목적지들로는 모아산, 이도하자, 소주참, 일면파, 산석, 해림, 소수분하 등 역들이다.(《만주와 조선인》에서)


제4절 시가지인구

20세기 10-20년대 만주에 있어서 조선이주민이 시가지역에 거주하고 있은 비례는 극히 적다. 이는 한 면으로는 당시 도시발전이 더디고 규모가 크지 못하며 도시의 인구 용납량이 제한되어 있은 것이고 다른 한 면으로는 조선이주민의 경제실력과 밀접한 연계가 있다. 조선이주민의 대부분은 소작농, 고농의 신분으로서 사회의 최하층에서 허덕이고 있었으며 시가지역에서 생활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또 이러한 요소로 하여 조선이주민에 대한 박해와 감시와 타격이 시가지가 기타 산골 보다 더 심한 것에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제와 중국 측의 통치관리기관이 시가지역에 더 많이 집중되여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와 동반하여 시가지연구에 대한 자료가 어느 정도는 좀 더 준확할 것이라는 믿음도 간다.
1919년 당시 북간도의 시가지 조선인상황을 훈춘현을 예로 들어보면 훈춘현 9008호 4만 7098명 인구 중 조선인이 5078호 2만 6145명, 그중 훈춘시가지역에 거주한 조선인은 185호 561명으로서 조선인의 2% 정도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조선인의 호당인수는 3.3명으로서 5.1명의 평균수준 보다 낮은 것이다. 시가지역에서의 생활은 노동력 보다는 경제실력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고 느껴진다. 훈춘시가지인구 중 중국인이 87%로서 절대적 우세를 나타내고 있다. 그 당시만 해도 중국인의 세력이 기타 민족을 압도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풀이 된다.

1923년 4월 일본 측 조사에 의하면 당시 만주조선인 시가지인구(북만지방은 할빈만을 포함)는 만주조선인의 약 2.9%를 점한다. 그중 조선인이 비교적 집중 된 곳은 안동(817호 3633명), 용정촌(1435호 5437명), 투도구(470호 1836명)지방이다. 2년 후인 1925년 6월 조선총독부에서 상업중심지대별 조선인수를 발표하였는데 당시 시가지 조선인수는 2만 8256명, 주요한 시가지 조선인수가 현저히 늘어났다. 용정촌 조선인수는 1만 1236명으로서 최고를 기록하고 있으며 국자가(1468명), 투도구(2509명), 안동(6418명)지방의 조선인이 1000명을 넘고 있었다. 1927년, 중국 전역에 있어서 조선인은 56만 437명(관동주 1169명, 만주 55만 7111명, 중국내지 2146명, 홍콩 11명)이며 재만 조선인 시가지인구는 3만 8163명으로서 2년 전 보다 1만 명의 증가를 보았다. 《9.18》전쟁직전 시가지 조선인인구는 6만 3371명, 사변 후에는 9만 7682명으로 부쩍 늘어났는데 이는 《9.18》전쟁으로 인한 국세의 혼란, 마적과 패잔병들의 발광으로 인해 랑패한 농민들이 땅을 포기하고 생활의 기반을 시가지로 옮겨 노동력을 팔며 나날의 생활을 유지하는 생활방식의 변화와 관계된다.


제5절 조선인직업


아시다싶이 재만 조선인의 9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특히 수전 농사는 조선이주민의 특장으로 주목 받았다.


1. 간도지방

간도는 조선인이 가장 많이 집중된 곳이다. 특별한 설명이 없으면 아래의 숫자는 《간도사정》에 근거한 1917년 6월말의 것이다.
국자가 재주조선인 중 농업 외의 직업에 종사하는 이가 413명이다. 잡화상과 여인숙을 경영하는 가구가 주류로 되는데 각 28호, 22명으로서 총호수의 45%를 점한다. 이 시기 국자가에 조선인 책장사가 있었으며 요리점에 1호, 음식점에 7호, 약장사에 6호, 재봉업에 4호, 관리 7호가 있었다. 재직인구 중 남녀비례는 비슷했다.

용정촌 비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2071명, 여인숙업(34호, 87명), 음식점(70호, 321명), 약장사(18호, 88명) 등이 역시 조선인이 종사하는 주요한 업종으로 되었다. 이밖에 주목해야 할 점은 용정촌에 전도사, 목사 등 종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천도교전도사 1명(남), 예수교목사 5호, 30명(남 17명 여 13명), 예수교전도사 5호, 30명 (남 17명 여 13명)을 합하면 61명이 된다. 이밖에 소주제조업에 종사하는 자는 34호, 163명, 소고기장사군 11호, 57명이 있었다. 두부를 제조, 판매하는 집도 4호가 되었다. 농업에 종사하는 호수는 106호, 617명으로 알려진다.

투도구 농업에 종사하는 호수는 18호, 78명이며 비농업에 종사하는 이는 124호, 542명이다. 음식점(14,호 81명), 여인숙(14호, 81명), 雜商(37호, 148명) 등 업종이 조선인 직업 중 주요한 것으로 되며 이는 간도의 기타 시가지와 별다른 점이 없다. 투도구에는 사진업에 종사하는 조선인 1호가 있었다.

배초구 배초구의 33호 조선인 중 24호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기타 9호는 관리, 여여인숙, 잡화상 등을 직업으로 하고 있었다.

대랍자 21호 조선인 중 잡업에 종사하는 이가 14호, 72명이다. 근근히 2호가 농사를 짓고 있었다.

동성용 간도에서 유명한 벼농사기지로서 51호 조선인 중 49호가 농업에 종사하였다.

동불사 34호 조선인 중 상업(6호), 雜業(7호)을 제외하고 모두 농사를 짓고 있었다.

남양평 84호, 477명 조선인 중 48호가 농사짓고 10호가 상업에, 23호가 잡업(雜業)에 종사한다.

천보산 671호, 1165명 조선인 중 탄부燒炭夫(239호), 갱부(93호)가 주요 업종이며 기타 업종 중 우마차운수업에 84호로서 크게 눈에 띄운다.

훈춘시가지 조선인은 잡화상(32호), 약장사(5호), 음식점(28호)을 주요한 업종으로 삼고 있으며 잡업(雜業)에 종사하는 이도 26호로서 비교적 많다. 시가지역에는 147호, 508명 조선인이 있다. (1919년 9월)

이밖에 1920년 신흥평을 경유한 3008호, 1만 4194명 조선인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東三省朝鮮人移住史》)상업에 종사하는 호수는 80호, 농업에 종사하는 호수는 2892호이다. 3007호가 지닌 자금은 38만 357엔인데 그중 농업종사인의 자금이 23만 1143원으로 인구 당 80엔, 상업종사인의 자금은 4만 520엔, 인구 당 506엔이다.

이상을 개괄하여 볼 때 비농업에 종사하는 간도조선인은 주되게 여관업, 음식점, 약재판매를 기본업종으로 삼았다.


2. 압록강대안


압록강대안 안동지방 각 현 조선인직업을 보면 절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였는데 특히 봉성현, 수암현, 장하현, 집안현 경우는 거의 전부가 농사짓고 있다. 안동의 조선농민은 2619명으로서 그 비례가 상대적으로 작은바 총인구의 45%를 점한다. 상업(1515명)과 공업(826명)에 종사하는 자는 많은 편이다. 장백조선농민의 비례는 안동현 보다는 높은 편으로서 약 70%이다. 본 현에 상업에 종사하는 자(1390명)가 높은 비례를 점하고 있다 (이상 1922년도 숫자. 《만주와 조선인》참고). 관전현의 조선인(3588명) 은 전부가 농사에 종사하였고 임강현은 상업(56명), 공업(35명), 여관과 음식점(152명)에 일부분이 종사하였고 총인구 4285명 중 3756명이 농사를 짓는 상황이다.

3. 봉천지방

일본 봉천총영사관 관할 내 조선인의 97.8%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외 비교적 집중되여 있는 업종은 상업, 공업, 잡업이다. 아래의 숫자는 1923년을 기준하였다.
봉천성소재지의 조선인 중 절반이 농사에 종사하고 35%가 상업에 종사하며 나머지는 회사원 등 기타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심양현, 신민현, 흥경현, 통화현, 환인현, 장무현의 조선인은 거의 모두가 농사를 짓고 있었으며 그중 흥경현, 통화현의 상업에 종사하는 조선인의 비례가 상대적으로 좀 높았다.

무순방면에 있어서 1923년 조선인은 2540여 명이나 지주나 자작농은 극히 적었고 무순시가지역에 1290명 조선인이 거주하였다. 이들 중 쌀장사에 15명, 정미업에 4명, 약재장사에 1명, 여관업에 9명, 잡화업에 2명, 음식업에 3명, 고물상에 3명, 탄광업에 14명이였다. 무순에서 동포가 경영하는 장미소에는 윤영계씨의 경영하에 있는 영송호 정미기계 2대, 이상현 씨가 경영하는 대성동에 동 정미기계 2대 및 조은목 씨가 경영하는 동성 상회에 동 정미기계 1대가 있어 부속설비까지 하면 약 3만 원 가치의 정미소는 일 가공능력이 70-150석으로 계산된다.

대련 및 사하구방면의 조선인은 1923년에 60여 호, 500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각 지역별을 열거하면 요리점 21호, 쌀 및 타면 직업 5호, 여관업 1호, 기타는 상점 또는 공장 고용인으로 되었다. 그중 가장 우세적인 업종은 요리점인데 10-15명의 미모를 갖춘 접대원을 모두 갖고 있었다.

철령 방면에 있어서는 1923년에 철령 일본영사관관내 11개현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4623호, 2만 2520명으로 계산되는데 동포의 일반상황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부는 철령, 개원 만철부속지역에서 여관, 요리점, 의사, 잡화점 등 업종에 종사했다. 철령에 있어서는 동 지가 매밀 집산 시장임으로 기계정미와 제분소가 5개소나 된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