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수필>

세월이 흐를수록 나의 머리속에 인상깊었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잊혀져가지만 유독 한분만이 나의 머리속에서 봄풀마냥 파랗게 잊혀지지 않고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조선민족의 저항시인 윤동주 부친이다. 지금도 지나간 어린시절의 일들을 생각하노라면 갈피갈피 엇물며 오는 파도처럼 나의 머리속에는 윤할아버지에 대한 여러가지 잊지 못할 지나간 일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오늘 가슴에 이는 파문의 갈피를 하나하나 번져가노라면 내 어린시절에 인상깊었던 일들이 눈앞에 삼삼하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룡정 광신공사 룡남2대에 자리잡고있었다. 윤할아버지와 우리 집은 불과 20여메터밖에 떨어져있지 않았다. 동향쪽을 향하고 자리잡은 윤할아버지네 집은 초가집이였는데 정주간과 방을 합쳐 20평방좌우였다. 그때 윤할아버지네 식구는 아들 윤광주(윤동주의 동생)와 로인 두분이 살고 계셨다. 자그마한 키에 좀 구부정한 허리, 홀랑 벗겨진 이마, 하얀 머리칼은 누가 봐도 인생행로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로인님이라는것을 일견에 엿볼수 있었다. 비록 윤할아버지네 생활형편은 곤난했지만 윤할아버지는 금쪽같은 자식의 앞날에 항상 신경을 도사리고 계셨다.

한번은 윤할아버지네 집에 내가 놀러갔을 때였다. 그때 윤할아버지의 안로인께서 앞동네에 고구마장사군이 왔다면서 윤할아버지가 즐기시는 고구마를 사겠다고 윤할아버지한테 돈을 달라고 청구했다. 그러자 윤할아버지는 호주머니에서 비닐쪼각에 정히 싼 돈을 꺼내 몇번인가 매만지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것이였다.
《이 돈은 요긴한데 쓸건데…》
그리고는 뭔가 꿀꺽 삼키시고는 밖으로 나가셨다.
윤할아버지가 자리를 뜨자 나는 윤광주형님과 글쓰는것을 두고 이것저것 물으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이 퍼그나 지나서 윤할아버지는 시가지에 나갔다가 서점에 들려 두터운 책 (지금 생각하면 시집 아니면 소설책이였다.)한권을 사들고 집에 들어섰다. 로인은 그 책을 아들한테 건네주면서 《문학에 꼭 성공하거라!》하고 무거운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때 페가 나빴던 윤광주는 아버지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고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문학창작에 전념했다. 지금도 룡정 백금 평두산에 가서 쓴 윤광주의 시 《고원의 새봄》을 읽그면서 윤광주의 성공에 윤할아버지의 뒤심이 얼마나 위대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양력설 림박의 어느 눈오는 날로 기억된다.
그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참대비로 우리 집마당과 길에 덮힌 눈을 쳤다. 내가 울바자앞에 덮힌 눈을 금방 치고 몸을 돌리는데 눈결에 누군가 우리 집쪽으로 눈을 치며 오고있었는데 자세히 여겨보니 다름 아닌 윤할아버지였다.
나는 윤할아버지의 거동에 발이 저려 얼굴을 붉히며 윤할아버지한테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제가 쓸지요.》
《괜찮다, 마을길은 따로 계선이 없니라.》
윤할아버지는 고드름이 매달린 눈섭사이로 나를 건너다보고는 그냥 앞으로 눈을 쳐나갔다.
나는 순간 윤할아버지의 그 깊은 마음을 알것만 같았다. 사와 리가 따로 없이 곧은 그 성미, 나 혼자만이 아닌 이 사회의 모든 이들을 포옹해보려는 그 미덕에 나는 숙연히 머리가 숙여짐을 어쩔수 없었다.

그렇게 위대한 시인을 낳으시고도 입한번 놀리지 않고 평범한 인생을 조용히 살아간 로인의 그 대공무사함에 또한 나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이러한 평범한 로인이 밑거름이 되였기에 윤동주와 같은 우리 조선민족의 산맥같은 저항시인을 탄생시킨것이리라.
오늘 저명한 윤동주시인의 부친이 바로 그날의 윤할아버지였다는것을 뒤늦게야 안 나는 눈까풀이 뒤집힐 지경으로 놀랐다. 아니, 나뿐만아니라 우리 동네 사람들 모두를 깜짝 놀래웠다. 그저 유식한 로인, 마음씨 착한 로인으로, 말수적은 로인으로만 통하던 윤할아버지. 동네사람들이 아는것은 고작 이것뿐이였다.

지금 윤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내가 어릴 때 윤할아버지를 조금 더 돌보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더 알지 못한것으로 하여 슬픔, 후회, 괴로움이 반죽이 되면서 가슴이 오리오리 찢기는것만 같다.

비록 윤할아버지는 소리없이 우리곁을 떠났지만 어려운 생활에서도 자식의 등을 밀어준 굳센 의지, 사심없이 남을 관심하고 돕는 눈같이 깨끗한 마음, 로년에도 자기 힘으로 꿋꿋이 살아가는 자립정신을 세월이 흘러 날이 바뀌고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여도 나는 영원히 잊을수 없다.

2008년 1월

용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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