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생각하며>

여행은 휴식이며 놀이이고 일상을 벗어나는 일탈이다. 그뿐인가. 때로는 숨어 있는 우리 삶의 비경(秘境)을 보여주는 투명한 창이기도 하다. 중국이 ‘죽의 장막’이란 별칭으로 불렸던 냉전시대가 막을 내린 무렵에 내가 경험한 중국 여행이 바로 그러했다. 당시 그곳에서 들었던 중국인들의 관용적인 군말 하나가 오늘날까지 때때로 뇌리에서 불쑥 솟아올라 마음을 흔들곤 한다.

당시 여행중의 어느 날 옌볜(延邊) 지방에 가서 그 지역의 고위 공무원이자 공산당 간부인 조선족 인사를 만났을 때 일이다. 그가 사전에 나와 약속했던 일 하나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뒤늦게 기억해낸 뒤에 몹시 미안해하더니 돌연 탄식했다.

“아이고! 나도 이젠 맑스를 보러 갈 때가 된 모양이오!”

귀가 절로 쫑긋 올라갔다. 말의 어감에서 이미 짐작한 대로였다. “그게 무슨 의미냐”고 그에게 확인해 보니까, 그곳 사람들은 “나도 이젠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을 그렇게 한다고 했다. 본래 한족들이 쓰기 시작한 관용적인 군말인데, 조선족들도 입버릇이 될 만큼 많이 쓰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맑스’는 우리 표기법으로는 ‘마르크스’.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선언’을 기초하고 ‘자본론’을 쓰는 등 공산주의 이론을 체계화한 유명한 사상가다. 부유한 변호사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으나 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한 뒤로는 나머지 생애를 참혹한 빈곤과 박해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맑스를 보러 갈 때…” 운운하는 이야기는 매우 비상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예전에는 우리 사회에서도 ‘저승’과 관련해서 흔히 썼던 말이 있었는데 그 대상은 ‘조상’이었다. “그런 일을 했다가는 나중에 저승에 가서 무슨 낯으로 조상님들을 뵙겠는갚와 같은 말로 자신을 경계하면서 당당치 않은 일을 하는 것을 삼갔던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이 날로 영악해지면서 한국에서는 이제 ‘저승’은 물론 ‘저승의 조상’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지 오래다. 그런데 유물론자인 중국 공산당원이 아직도 ‘저승’의 존재를 인정하고, 게다가 그들이 죽은 뒤에 저승에서 보고 싶은 인물이 누군가에 대하여 광범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공산국가인 중국에서 그런 형태의 사람 사는 풍경을 보게 되리라고는 정말이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맑스 외에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어떤가요? 레닌은? 스탈린은?”

내가 아는 공산당 거물들의 이름을 대자, 상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레닌이나 스탈린의 경우, 그런 식으로는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중국 공산당 지도자의 경우는 어떤가요?”

캐묻자 즉각 대답이 돌아왔다.

“중국 지도자의 이름을 자주 내세우기도 합니다. 흔히 ‘후야오방(胡耀邦)을 보러 갈 때가 됐다’는 말을 많이 쓰지요.”

“후야오방이라면?”

“전에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서 중국을 영도했던 지도자 동지입니다. 1989년에 별세했지요.”

“그렇다면 마오쩌둥(毛澤東)은요? 저우언라이(周恩來)는요?”

내가 알고 있는 고인이 된 중국의 국가적 지도자들의 이름을 대자, 그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마오쩌둥은 전혀 거론되지 않고, 저우언라이의 이름은 더러 거론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후야오방에는 못 미친다. 후야오방의 이름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자주 거론된다, 그런 이야기였다.

중국의 국부(國父)에 해당하는 그 유명한 마오쩌둥과 그의 후계자인 저우언라이조차 못 미칠 정도로 후야오방이 인기가 있다는 이야기가 정말 뜻밖이었다. 그래서 후야오방의 어떤 점 때문에 중국인들이 그를 그처럼 좋아하게 된 것인지 이유를 묻자, 짐작을 뛰어넘는 대답이 건너왔다.

“유능하고 청렴했지요.”

대답은 짧았지만, 울림은 컸다. 유능과 청렴! 나는 깊은 감명을 느꼈다. 국가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서 그처럼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그 여행 뒤로 한국과 중국은 수교했고, 양국 국민들이 쉴 새 없이 서로 교역하고 방문하고 여행하는 매우 가까운 이웃 나라가 되었다. 물론 나도 그 뒤로 여러 번 중국 땅을 여행했다. 그리고 중국 땅을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마다 “죽을 때가 됐다”는 뜻을 “후야오방을 보러 갈 때가 됐다”는 말로 나타낸다는 중국 국민에 대한 깊은 호감을 느꼈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머리를 치고 들어온 생각이 있었다. “중국 국민이 ‘맑스를…’이나 ‘후야오방을…’과 같은 말로 나타내려 한 것이 과연 무엇인갚 하는 의문이었다. 중국인들을 대하면 대할수록 그들이 단순한 어린애들처럼 순진하게 ‘저승’의 존재 같은 것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아님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의문을 한참이나 곱씹어보고 나서야 유물론자인 그들이 굳이 그런 식의 말을 만들어 쓴 것에는 보이지 않는 이면의 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 그들이 실제로 ‘저승’이 있고, 죽은 뒤에 ‘저승’에 가면 정말로 ‘맑스’나 ‘후야오방’을 만날 수 있다고 믿어서 그런 말을 썼다고는 볼 수 없다. 중국 국민이 그런 표현을 통해서 ‘지금 중국을 영도하는 살아 있는 지도자들’에게 “유능하고 청렴하라”고 요구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의사 표현이 극도로 억제됐던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 사회에서 중국 국민은 그런 식으로 에둘러서 간접적인, 그러나 더없이 강력한 정치적 발언을 한 것이다.

대통령을 뽑는 대선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는 우리 사회는 지금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을 코앞에 두고 있다. 그래서 절로 의문이 떠오른다. 선거에 출마하는 그 많은 후보자 중에서 ‘유능과 청렴’, 후야오방의 장점이었다는 그 두 가지 덕목을 제대로 갖춘 이는 얼마나 되는가? 아아! 현재 이명박 정부 최초의 내각을 구성할 15인의 장관조차 ‘유능하고 청렴한 이’로 채우지 못하는 우리 현실에서, 그건 너무 사치스러운 질문인가?

[[송우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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