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규섭의 역사이야기>

 지체높은 이대감이 아들 희수를 슬하에 둔때는  양반의 무리들이 바야흐로 몰락해 가던조선 말기였다. 양반의 말로를 주야로 슬퍼하던 이대감은 드디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아버지의 그늘 밑에 호의호식하며 자라난 희수는 하루아침에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고 말았다.탈망살이에 빠진 희수는 학문은 아예 뒤전으로 하고 날에 날마다 기생들과 어우러져 술로 세월을 허송하고 있었다. 물려준 재산은 이미 거덜이 나고 그나마 남은 전장 마저 팔아먹고나니 이제는 완전히 알건달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꼴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애간장은 타다못해 재가 되어 버렸다.

 

   어느 화창한 봄날이였다. 이날도 늦잠에서 부시시 깨여난 희수는 때국이 꾸지지 흐르는 두루마기를 걸치고 갖 쓰고 밖을 나섰다. 산듯한 봄바람이 희수의 초쵀한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공연히 기분이 좋아진 희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저도몰래 놀이터로 발길을 옮겼다. 아지랑이 아물거리는 비탈길을 ‘따라 건들건들 올라가노라니 놀이터 정자 아래서는 벌써 친구들이 기생들을 끼고 앉아 희희락락 술판을 벌리고 있었다, 

   “어 이 친구 어서 오게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나”

 

   친구들이 희수를 반기며 자리를 내여 주는데 희수 역시 반색을 하며 서슴없이 좌석에 끼여 앉았다. 이때 마주앉아 희수의 얼굴을 이윽히 지켜보고 있던 한 기생이 “도련님 처음 뵙겠사와요 오늘은 제가 한잔 따르어 올리리다” 하고 희수의 술잔에 술을 따르는데 그 아릿다움은 양귀비에 빠짐이 없고 섬섬옥수에 연연한 자태는 사나이들의 간장을 녹아내리였다.

 

   술판을 파하자 희수는 취흥에 못이겨 그 기생을 한쪽에 끌어당겨 슬그머니 말을 건네였다.

   “내 오늘 즐거움에 술은 잘 마셨다만 어찌하여 이 하찮은 나에게 그토록 절친을 배푼거냐? 그것이 궁금하구나”

   “실은 내가 관상을 좀 볼줄 알지요 도련님의 관상은 장차 큰 인물이 될 상이여요 그런 대인 앞에서 소인이 어찌 감히 소홀히 할수 있겠사와요”

   “허허 그래 거 듣고 보니 자히 기분이 나쁘진 않구나 그런데 그런 너의 이름은 무었이더냐?”

   “임 타홍이라 하와요”

   “임 타홍이라!”

   희수는 잠시 생각을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내 오늘 밤 단독으로 너와 함께 즐기려 하니 약조 할수 있겠냐?”

   “도련님께서 이몸을 꺼리시지 않는다면 내 그리 약조 하리다.” 

 

   희수는 밤이 되기를 기다려 홀로 타홍의 처소를 찾아갔다, 술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서로 권커니 작커니 하며 이 예기 저 예기로 밤가는 줄 몰랐다. 밤이 깊어지자 희수는 끓어넘치는 정욕을 참을 수 없어 슬그머니 타홍의 옆으로 다가앉으며 그녀의 허리를 그러안고 옷고름을 잡아다렸다. 그러자 타홍이는 한손으로 가볍게 희수를 밀치며 말했다.

   “도련님 소인이 도련님의 소청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오나 다만 한가지 약조를 해 둘 일이 있어서 그러하옵니다.”

   “그래 무슨 약조인지 어서 말해 보아라” 희수는 마음이 급했다. 타홍이는 서랍에서 두툼한 책 한권을 꺼내여 희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지금부터 소인이 도련님께 책 한권씩을 드릴테오니 책 한권을 다 읽을 때마다 찾아오시면 소인이 이몸을 허락 하오리다. 약조해주실수 있겠지요?”타홍이 애원의 눈빛으로 희수를 바라보는데 희수 또한 기꺼이 그 약조를 지키겠노라 다짐하고 책을 받아 품속에 집어넣고 즉시 자리를 떴다.

 

   집으로 돌아온 희수는 침식을 잃고 주야로 책을 읽었다. 이틀만에 그 두툼한 책을 다 잃고난 희수는 그날밤으로 타홍을 찾아갔다. 책을 다 읽었다는 말에 타홍이는 반가히 그를 맞으며 약조대로 몸을 허락 했다. 타홍이와 하룻밤을 자고난 희수는 한없이 기분이 좋았다. 아침에 돌아갈 무렵 타홍이는 또다시 서랍에서 책 한권을 꺼내주는데 이번에는 그 책 두깨가 훨씬 더 두꺼웠다. 하지만 희수는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즉시 책 읽기에 몰두하였다. 사흩날 사흘밤을 꼬박 읽고나니 골이 윙 하고 코피가 터져 나왔으나 희수는 눈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아들이 갑자기 이토록 글공부에 열중 하는 것을 본 어머니는 “저놈이 이제 사람이 되는구나!” 하고 은근히 기쁨을 금치 못했으나 한편으로는 침식을 읽고 너무 책에만 매달리는 아들의 몸이 페로와질까봐 걱정도 되였다. 나흩날 아침이였다. 마지막 글줄을 다 읽고난 희수는 책두껑을 덮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겨드랑이에 날개라고 돝힌 듯 타홍의 처소를 향해 날파람처럼 달려갔다. 타홍이는 역시 희수를 반갑게 맞이했고 하룻밤 춘정을 또 한번 즐겁게 나누었다. 이렇게 하기를 꼬박 석달여흘, 그 사이 희수가 읽은 책무더기는 점점 높아졌고 두 사람의 사랑은 날로 깊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술상에 마주 앉은 희수가 타홍이 따르어 주는 약주를 기꺼이 한잔 쭉 들이키더니 오랫동안 품어오던 맘속말을 털어놓았다.

   “옛말에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했거늘 내 이재 그대를 아내로 맞아들이려 하니 그대 의향은 어떠하시오?”

   “미천한 이몸이 어찌 도련님의 아내가 될 수 있사옵니까” 타홍이는 뜻밖의 말에 머리를 다소곳하고 몸둘바를 몰라했다. 희수는 그러는 타홍의 손을 덥석 잡으며 애원했다.

   “부디 그런말일랑 마오 세상엔 양반 쌍놈이 따로 없소 사람이란 그 행실에 따라 품위가 바뀌거늘 어찌 스스로 자신을 미천한 몸이라 하오 내 그대없인 이세상을 살아가기 어려울 듯 하니 부디 내뜻에 따라주기 바라오”

    희수의 애절한 간청에 타홍은 끝내 응낙하고 말았다. 희수는 심히 기뻐하며 그길로  타홍이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은 희수와 타홍이는 어머니의 허락을 기다렸다. 허나 타홍이를 처음 보고 그렇게 좋아하시던 어머니가 뜻밖에도 그들의 혼사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안됀다,”  

   “왜 안됀다는 거애요 어머니” 희수는 어머니를 원망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네가 이제 겨우 글공부에 재미를 부쳤는데 결혼을 하고나면 글공부가 돼겠느냐!”

   “어머님 실은 소자가 글공부를 하게 된 것이 타홍이의 노력이였사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어머니는 금시초문이라 어안이 벙벙해서 아들을 쳐다보았다.  희수는 하는수 없이 얼굴을 붉히며 지난 사연을 낱낱히 여쭈었다.

   “오 그런 일이 있었구나 ” 그제사 어머니는 얼굴에 희색을 띄우고 타홍이를 돌아보며“참으로 기특하고 고맙구나” 하고 쾌히 혼사를  승낙했다.

 

   혼사를 치르고 난 뒤에도 둘 사이의 약조는 변함이 없었다. 희수는 매일과 같이 타홍이가 주는 책을 읽었고 매번 책 한권을 다 읽은 뒤에야 타홍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었다. 어느날이였다. 희수가 책 한권을 다 읽고나니 어느듯 정오가 돼였다.희수가 미닫이를 활짝 열어졌치고 바깓 바람을 씌우고 있노라니 때마침 일밭에서 돌아온 타홍이가 풀 한짐을 머리에 이고 대문간으로 들어섰다. 버선발로 쫒아 내려간 희수는 얼른 풀짐을 받아내리우며 책을 다 읽었노라고 자랑을 늘어놓으며 얼른 방으로 들어가자고 재촉 했다. 희수의 심사를 알아차린 타홍이는 쌩긋이 웃으며 서방님을 나무랐다.

   “아이구 서방님두 이 퍼런 대낮에 무슨 짖을”

   하지만 열이 오른 희수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발버둥질 치는 타홍이를 벌럼 들어안고 사랑채로 들어갔다. 방안에서는 한동안 폭풍이 일었다.

   그럭저럭 세월은 흘러갔고 희수가 읽은책은 그 수가 이루 헤아릴수 없었다.공자, 맹자는 물론 고금의 책을 거의 통달하다싶이 했다. 그러든 어느날이였다. 잠자리에든 타홍이가 느닷없이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서방님 과거시험에 한번 응시해볼 의향이 없으시오?”

   “아니 방금 나보고 과거에 응시하라 하셨소?” 희수는 펄쩍 놀라며 두눈을 둥그렇게 뜨고 부인을 쳐다보았다.그러는 서방님이 우스운 듯 타홍이는 입가에 홍조를 띄우고 차분히 말했다.

   “뭘 그리 놀라시는게요 그 많은 책을 읽었으면 세상에 나가 한번 큰 일을 해 보아야 할 것 아닙니까 .”

   “과연 내가 될 수 있을까?”희수는 자신이 없다는 듯 두눈을 껌뻑인다.

   “길고 짜른건 대여봐야 알 일입니다. 서방님은 꼭 될 수 있을거애요 자신심을 가지세요”

   부인의 말을 잠잫고 듣고 있던 희수는 갑자기 무슨 큰 결심이라도 내리운 듯 벌떡 일어나 앉으며 “부인 내 꼭 그리 하리다. 장성에 가지 못하면 사나이가 아니거늘 내 꼭 성공하여 부인의 그 옥같은 마음을 저버리지 안으리다.”하고 부인의 손목을 꼭 잡아주었다.

 

   그 후로 희수는 더욱 열심히 글공부에 전념했다. 해가 가고 달이 바뀌여 마침내 기다리던 과거 응시날이 닦쳐왔다. 이날 희수는 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과거길에 올랐다. 서방님이 떠난 뒤로 타홍이는 매일과 같이 서방님의 성공을 두손모아 빌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노력 끝엔 성공이 따르는 법, 타홍이가 쌓은 공은 결코 헛되지 아니하였다. 초가을 보리타작이 한창이던 어느 날이였다. 타홍이가 어머님과 함께 마당 설거지를 하고 있노라니 홀연 대문밖에서 꽹과리 소리가 요란 했다. 타홍이가 어머님을 부축하여 달려나가보니  이게 웬 일이냐 의젖한 서방님이 록의홍상에 백마를 타고 있지 않는가 어머니가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말에서 내린 희수가 깍듯이 절을 올렸다. 어머니는 희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어디보자 내 아들아 네가 정녕 금의환향 한것이냐”하고 넉두리를 하는데 그 정경을 바라보는 타홍의 눈에서는 어쩐지 눈물이 비오듯 했다.

   서방님을 성공시킨 타홍이는 이제 그 이상 더 바랄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 새로운 슬픔이 쌓여 있음은 누구도 알수 없었다. 그 슬픔은 숨길수도 간직할수도 없는 피치못할 운명의 슬픔이였다. 어느날 그는 어머니와 서방님이 앉은 자리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서방님 한가지 부탁이 있사와요”

   “무슨 부탁인지 어서 말씀해 보시구려 내 부인의 부탁이라면 무었이던 다 들어 주리다”

   “서방님께서 새 장가를 드세요 ”

   “아니 뭐라구요 나보구 새 장가를 들라구요?”희수는 깜짝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네”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나한데 이렇게 훌륭한 부인이 있는데 새로히 장가를 들라니?”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옛날엔 서방님이 일개 서민에 불과하였으나 지금은 나라의 록을 받는 관리옵니다. 그런데 어찌 저같이 미천한 몸이 정실부인으로 될 수가 있사옵니까 부디 새장가를 들어 정실부인을 맞아주시길 바라옵니다”

   “아니 아니되오 그리 할순 없소 두번다시 그런말 입밖에 내지 마오.”희수는 길길이 뛰였다.                                                                                 

     “그래 그건 아니됀다 네가 우리집 어떤 며느린데 이 에미도 그 부탁만은 절데 들어주지 못할거다.”어머니도 한사코 반대였다. 하지만 한번 먹은 타홍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서방님의 장래를 위하여 그는 모진 슬픔을 참고 이렇게 하는수 밖에 없었다.타홍의 절절한 간청에 희수는 하는수 없이 서울 어느 대감댁 규수를 정실로 맞아들였다.그 뒤 멷년이 지나 희수는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다.  워낙 총기가 뛰여 나고 재능이 출중한 희수는 이태만에 조정에 발을 붙이고 삼년만에 재상의 보좌에 올랐다. 재상의 자리에 앉아서도 희수는 늘 타홍이를 잊지 않고 자주 찾아주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시름시름 앓던 타홍이의 병세가 갑자기 위독해 졌다. 명의란 명의는 다 불러 보았지만 효험이 없다. 꽃다웠던 인생이 바람결에 초불처럼 간들거리고 있었다.

   “여보 이몸이 끝끝내 서방님을 모시지 못하고 먼저 갑니다.”

   서방님의 손을 꼭 잡고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타홍이의 눈가에 맥없는 이슬이 맻쳤다.

   “여보 나를 두고 어디를 간단 말이요 흐ㅡ흑”

   희수는 타홍이의 가슴에 머리를 뭍고 한없이 흐느꼈다.

   “서방님 내가 죽거들랑 부디 시댁 선산에 묻어주세요 훝날 서방님이 오시면 저승에서나마 길이길이 모시리다.” 말을 마친 타홍이는 눈을 흡뜨고 숨을 몰아 쉬였다.

   “여보ㅡ흐ㅡ흑”애간장을 녹이는 장부의 울음소리가 서울의 장안 거리에 회오리쳤다.

 

   희수는 타홍이의 삼일장을 성대히 치르고 그의 시신을 선산에 뭍었다. 이것은 양반 특권을 철통같이 고수하던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있을수 없는 일이였으나 한 인간에 대한 희수의 절절한 사랑은 그것을 무시하였다.   200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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