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선인의 동화

재만 조선인에 대한 강제입적은 민족동화의 최후수단이라 하겠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볼 때 조선인의 동화는 여러 객관, 주관적 요소로 인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이주초기 특히는 《한일합병》전에 동화의 주요형식은 외족인들과의 통혼이다. 이런 현상은 중국, 러시아의 변경지대에 있어서 더욱 뚜렷했다. 동지철도 동부에 위치한 동빈, 녕안, 목릉, 동녕 등 4개현의 상황을 살피겠다.

녕안현을 중심으로 일찍 19세기 중기, 후에는 조선북부의 흉재로 인하여 간도를 경유하여 북상한 이주민은 중국인과 혼혈동화가 생기였다. 녕안현의 귀화조선인은 약 2500호, 현소재지 녕고탑시는 200여 호로 추산된다. 녕고탑, 동경성 시가지 부근의 촌락에 있어서는 산간에 거주하는 사냥군, 인삼채취자, 아편재배자 등이 중국 측에 동화혼혈한자가 적지 않았다. 이들은 대개 19세기 70-80년대에 이주한 자들이었다. 그중 러시아에 귀화된 자도 섞여있다. 귀화자 대부분은 함경북도에서 이주한 것으로써 상기 4개현에 약 6000 호를 헤아릴 정도이며 이들 혼혈자손의 수는 수만 명을 초과할 것이다. 물론 그 후 각 지역에 재이주한 자가 있었는지 상세한 기록은 찾을 바 없다. 러시아, 중국측에 동화된 조선인의 호수는 동녕현에 1000호, 목릉현에 1800호, 녕안현에 2500호, 동빈현은 미상으로 적혔다. (《만몽의 쌀농사와 이주조선농민문제))

그 후 간도지방을 경유하여 친척, 고향친구 등의 편리로 녕안 등 지방에 내왕하는 자가 《한일합병》전 보다 많았으며 따라서 귀화자도 늘어났다. 그 후 청나라의 입적 강요로 하여 귀화는 강제수단을 택하였다.


제7절 조선인 생활


재만 조선인의 생활은 경제상황에 의하여 결정된다. 조선이주민은 최초로부터 절대 다수가 파산된 농민이었으며 이들은 살길을 찾아 비자원적인 이주를 강행하였다. 또 거개가 돈이 없고 특별한 기능도 지니지 못하였으며 지식도 풍부하지 않아 중국 지주의 소작인 또는 머슴으로 사회의 최하층에서 허덕이었다. 그만큼 이들의 의, 식, 주 등 생활에서 조선민족의 고유의 풍속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자랑할만한 점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1918년 회령을 경유하여 간도에 이주한 조선인은 2086호, 1만 2216 명으로서 지닌 자금총액은 38만 5854원, 호당 184원에 불과했다. (調査報告書 第四卷 《吉林省其一,吉會線關系地方)) 또 당시 봉천부근의 조선인소작농 생활수입, 지출을 보면 일가 4명의 한달 생활비는 12원, 거주비 1년에 15원, 3천지를 경작하는데 수요 되는 종자값 2.60원, 수리세 8원, 세금 2.50원, 경작비 4원, 농구비 2원, 비료2원, 경작잡비 3원, 땅값(借地)비용 50원, 경작대부금이식 20원 등을 합하면 103.10원이다. 이러고 보면 조선소작인이 3천지를 경작하여 번 돈은 15원에 불과했다. 오지에 있어서는 4인가족의 1년 수입은 65.70원으로 좀 높은 편이다.


1. 의류


도시의 남자들이 양복을 입는 외 농민 및 일반부녀들은 조선옷을 입는데 색상은 흰색이 주되고 옷천은 삼베와 서양천 두 가지이다. 겨울, 여름을 막론하고 맨발에 고무신을 싣는 이가 많다. 1920년대 투도구의 조선인의 복장가격을 보면 솜옷 한 벌에 6원 좌우, 여름옷 한 벌은 2원 좌우, 보선은 0.30원, 신 한 컬레는 3.0원으로서 기타 부품을 합쳐도 1년 복장비용은 20원 미만으로서 중국인의 30원 복장비용 보다 퍽 낮은 편이었다.


2. 식류

조선인은 늘 배고픈 고통을 겪었다. 조를 위주로 수수, 보리, 옥수수, 감자 등을 부식물로 하였으며 채소는 배추, 마늘, 무를 즐겨 먹었다. 최하층 사람들은 감자, 옥수수 등으로 굶주림을 참아야 했다. 중등수준의 노동자는 콩기름 등을 애용하여 일인당 월 생활비는 2.30원좌우이고 담배를 피우는 이는 한 달에 50전 좌우로 더 소비해야 했다. 고기는 경상적으로 먹지 못하며 단오에는 3일간 쉬면서 성대히 쇤다. 술, 고기로 즐기며 부유한 집들에서는 찰떡 치고 개도 잡았다.

3. 거주

재만 조선인은 이 시기 여전히 조선식 초가집에서 살고 있었으며 기와집은 드물었다. 집둘레에는 울바자를 세웠고 사람과 가축은 한집에 살았다. 보통가옥 한 채를 짓는데 드는 비용은 50원 안으로써 중국집의 300원 비용 보다 많이 낮았다. 자기가 집을 갖고 있는 이 보다 중국인의 집에 세맡고 있는 이가 다수였다.


4. 생활정도

재만 조선인의 신분으로 보아도 그들의 생활의 빈궁함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잡비 중에는 교육, 위생, 신앙, 연초, 음료, 혼인, 장려 및 사교 등 다항목이 포함되며 그 비중은 5.8-19.3%이며 식비의 비용이 가장 커 총 비용의 55%이상을 점하고 있다.

다음 재만
조선인의 생활수준을 이훈구씨의 조사에 따라 적으면 쌀, 콩, 야채, 과일, 육류, 어류, 알류, 장, 기름, 술 등을 포함한다. 사회 비용는 종교비용, 자경단비용, 마적으로 인한 손해, 교통비, 자선오락, 교육, 의료, 혼인, 장례, 회비, 피복, 가구, 차와 연초, 촌비, 구급비 등등을 포함한다. 주택비는 집세와 기타를 포함한다,

상기의 비용에서 오락도박비가 7.3%를 점하고 있는 것을 보아 조선인의 도박습성을 다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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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매인 연평균생활비는 101.71원으로 중국인의 149.33원에 비할 때 퍼그나 적은 편이다.


5. 가족관계

재만 조선인의 가족관계는 여전히 옛 습성을 따르고 있다. 같은 성씨를 지닌 마을에는 족장이 있어 예의를 집행하고 가정에는 가장이 있어 가문의 모든 행사를 집행한다. 가장이 사망하거나 또는 능력이 따르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는 가문에서 가장 능력이 있는 노자에게 넘겨준다. 만약 가산이 많고 인구가 방대하면 따로 거처를 잡을 수 있다. 그때면 가족 중 명성 높은 분을 청하여 재산을 나누어 각자가 각기 생활을 하게 한다. 시아버지와 며늘은 정상사무가 없이는 마음대로 이야기하거나 웃지 못하며 동석하여 식사하지 못한다. 시형과 제수 사이도 그러했다. 노년에 아들이 없으면 사위를 맞아들여 양자로 삼을 수 있다. 여자가 젊어서 과부로 되면 평생 과부로 사는 이가 있고 또 재가하는 여자도 있다.


제8절 중공조직체계의 건립


1.중공지방조직


간도에서의 중국공산당의 초기조직은 중공용정촌지부, 중공연변구위였다. 구위가 파괴되자 중공연변특별지부를 설립하였고 얼마 후에는 중공연(길)화(룡)중심현위로 발전되었다.
1928년 2월, 《민성보》를 진지로 중공용정촌지부가 설치되었다. 주동교가 서기를 임했다. 이것이 간도의 첫 중공당 조직이었다. 그해 10월 민성보사에 중공연변구위를 설립하였으며 주동교가 구위서기를 맡았다. 1930년 2월 중공연변특별지부를 설립하였고 조선인 왕경이 서기를 맡았다. 6명 위원 중 이창일, 주건, 이용 등 3명 조선인이 있으며 대감자 지부 서기 홍범식도 조선인이다. 중공연변 특별지부는 산하에 4개 지부와 15명 중공당원을 두었다. 4월 24일, 연변특별지부 서기 왕경, 만주성위 순시원 박윤서, 원 조선 공산당동만도 책임비서 김근 등은 동량어구촌에서 연석회의를 열고 《5.1투쟁행동위원회》를 내오고 투쟁방안을 연구하였으며 연변 각 지역에서는 동맹파업, 동맹휴학, 농민폭동 등 여러 가지 형식의 《붉은 오월투쟁》을 벌려졌다.

1930년 8월 13일, 평강구 약수동에서 연변 제1차당원대표대회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원 조선공산당당원을 중국공산당에 받아들인 사업을 총화하였다. 또 만주성위 소속으로 된 연화중심현위를 설치하였으며 지도기관을 용정에 앉혔다. 산하에 10개 구위와 61개 지부를 설립하였다. 당원은 480명이었다. 중공연화중심현위원회의 지도자는 전부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로는 서기에 왕경, 조직부장에 마준, 선전부장에 한별, 군사부장에 박윤서, 청년부장에 이용국, 부녀부장에 김영신이다. 각 구위서기도 조선인이 많았다. 이들로는 개산툰 구위에 이성구, 로투구 구위에 류영호, 용정구위에 김성호, 삼도 구위에 안학선, 평강구위에 주현갑, 연길구위에 서공일, 옹성라즈 구위에 이춘일, 하마탕 구위에 김상화, 라자구 구위에 김세훈, 훈춘 구위에 최창복이었다.

1930년 9월 20일, 중공만주성위는 중공 동만특위를 내오기로 결정하고 료여원을 서기로 임명하고 양림을 군사서기로 임명하였다. 10월, 중공 동만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지도기관은 조양천 이발소에 두었다가 국자가 북산아래에 있는 약방으로 옮겼다. 중공동만특별위원회 각부의 책임자 역시 조선인으로 구성되였는데 조직부장 왕경, 선전부장 주건, 통신연락부장 이용, 비서처장 라일, 청년부장 이용국, 부녀부장 이인활 등이었다.

중공 동만특위는 연화, 왕청, 훈춘 현위와 안도, 돈화현위를 설립하였다. 각 현위의 서기, 군사부장, 조직부장, 선전부장, 청년부장, 부녀부장, 통신연락부장, 비서 등은 모두 조선인이 담당하였다.


2. 정권조직

1930년 4월말, 중공 연변특별지부는 황포출신인 조선인 신춘을 평강, 약수동에 파견하여 토지사업을 지도하게 하였다. 5월 27일, 약수동일대의 농민은 성대한 집회를 가지고 박필종 등 친일주구를 처단하였고 약수동쏘베트정부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이는 동북지구의 첫 쏘베트 정권이다. 8월말, 중공평강구위에서는 약수동 상촌에서 《쏘베트를 건립할데 관한 대회결의안》을 채택하였고 평강구 쏘베트정부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주석에 조선인 이봉삼이 임했다.

1930년 10월 19일, 만주성당위의 지시에 따라 평강구 소베트정부를 해산하고 연화현 혁명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주석에 이승도(조선인), 당서기에 이영규(조선인)이었으며 산하에 토지, 비상, 노동, 군사 등 4개 위원회와 출판, 통신연락 두개 부를 설치하였다. 같은 달, 연화현행동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지도자는 모두 조선인이다. 서기에 배동건, 조직부장에 김성, 선전부장에 이명의, 군사부장에 한준이었다.


3. 군사조직

동만의 반일유격대는 1930년《붉은 오월투쟁》때부터 형성되었다. 이해 6월에 화룡-훈춘유격대를 조직하였으며 7월에 평강구약수동에 전이하여 평강유격대를 건립하였다. 총지휘는 조선인 신춘이였고 인원수는 70명이었다. 그해 10월에 왕청현 유격대가 건립되었으며 대장에 박세운, 정치위원에 한권, 인원수는 30명이었다.

1930년 9월, 연길구군사위원회를 내왔는데 서기에 조선인 박윤서, 위원에는 조선인 류지원, 송국서였다.

1930년 10월,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성위의 군사서기 양림을 동만에 파견하여 중공동만특위군사위원회 서기로 임명하였다. 양림(조선인), 류지원(조선인), 송국서로 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3개 유격대를 정돈하였으며 총을 지닌 인원이 70명이었다.

중공동만특별위원회 군사위원회는 직속특무대를 조직하였으며 주건(조선인)이 책임 졌다. 특무대소속에 정탐부를 두고 김명균(조선인)이 책임졌으며 적색부는 강철이 책임 졌다.


4. 군중조직

1930년 10월, 중공동만특위가 설립될 때 중국공산주의청년단 동만특위도 설립되었으며 조선인 이용국이 서기로 임명되여 각 현의 공청단 현위를 조직하였다. 연화현, 왕청현, 훈춘현, 연길현, 화룡현의 단서기는 모두 조선인이었다. 1930년 말 동만의 공청단원은 1000명이며 1931년 초, 동만공청단 조직은 두 차례의 파괴를 받았다.

연변의 여성조직은 다음 절에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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