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화와 함께 하는 이주사

제10절 조선이주민 여성운동


20세기 초,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연변에 신문화계몽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에서는 여성해방, 남녀평등, 남녀공학 등 사상이 고취되었으며 여성해방을 주장하였다. 이는 연변여성이 각성할 수 있는 외부환경이었다.

연변에 세워진 첫 여자 소학당은 1908년 구자윤, 김하석, 이동휘 등이 연길 소영자에 세운 사립 광성여자 소학당이다. 그 뒤를 이어 화룡현 용암동의 명동여학교, 연길현 신명촌의 신명여학교, 국자가 소영자의 길신여학교가 설립됐고 1912년 명동학교가 명동중학으로 된 후 여 학급을 설치하였다. 또 1911년 3월, 명동학교에 여 학부를 설치하였는데 교원으로는 정신해, 이의순(이동휘의 딸), 지봉순 등이 있었다. 당시 재교 여학생 수는 연변학생총수의 5%였다.

종교단체에서도 여성학교를 꾸렸는데 1910년 예수교에서 꾸린 상정여학교를 토대로 1913년 카나다 장로교회 박걸 목사의 부인이 용정에 여학교를 꾸렸다. 학교에서는 종교 앙 여부를 가리지 않고 과학문화지식을 전수했다. 1926년 통계에 따르면 조선인 종교단체에서 꾸린 학교의 여학생은 697명으로서 학생총수의 10%를 차지하였고 외국인 선교사와 종교단체에서 꾸린 학교의 여생 수는 407명으로 학생총수의 55%를 점하였다.

또 야학반, 동학반, 반일(半日)부녀학교 등이 꾸려져 더욱 많은 여성들에게 근대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연변에서의 맑스주의 전파는 러시아10월사회주의혁명 이후 특히는 1920년 이후부터였다. 1925년 이신애 등 여학생들은 동흥중학교에서 조직된 《사회과학연구회》에 참가하였다.

맑스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부단히 선전됨에 따라 연변에 초기 여성단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26년 1월, 동흥 중학 여학생들이 참가한 《간도여자청년회》가 창립되었다. 《간도 여자청년회》는 소련의 사회주의 제도를 찬성하고 여성해방을 제창하며 공산주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연변의 첫 진보적인 여성단체였다. 이신애, 조희숙, 이순희 등이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1928년 1월 13일, 《동만청년동맹》을 《동만청년총연맹》으로 고치고 조숙정을 집행위원으로, 김순림을 부녀부장으로 추대하였다. 7월 1일에는 연변여성의 통일단체인 《근북회(槿北会)》를 건립하였다. 산하에는 총재무부, 조직 연락부, 문화 선전부, 조사 연구부 등 기구를 설치하고 김순림, 조숙정, 장명숙, 박영식 등 수 명의 간부가 있었다.

연변의 여성들은 3.13반일시위운동과 5.4애국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반제반봉건운동을 힘 있게 추진하였다.

1919년 9월 25일, 훈춘에 거주하는 200여 명 조선여성은 박봉식의 집에 모여 집회를 열고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그 이름을 훈춘애국부인회라 달았다. 활동목적은 반일운동을 후원하며 평소에는 여성교육, 여성권리확대를 도모하고 전시에는 부상병을 구원, 간호하는 것이다. 집회에 참가한 여성은 단지동맹까지 결성함으로써 결심을 보였다. 이날 회의에서 회장에 주식덕, 부회장에 김숙경이 추대되었다. 애국부인회가 조직된 후 많은 여성들이 패물, 포목 등을 내놓아 한 달도 못되는 사이에 6000루블의 의연금을 모았다.

1929년 11월말, 조선 전라도 광주학생들의 대규모적인 반일애국운동 소식을 접한 명신여자중학교학생을 망라한 용정학생들은 1930년 1월 23일 조선 광주학생을 성원하여 반일시위를 단행한 후 은진중학교 마당에서 대회를 가졌다. 일본경찰은 대회를 해산시키려 했으며 수십 명 학생이 체포되었다. 1월 28일 은진중학교, 명신여자중학교, 광명여자중학교의 수백 명 여학생들은 동산의 영국조계지역에서 반일집회를 가졌고 시위행진을 단행했으며 련이어 동맹휴학을 하였다. 경찰당국은 끝내 체포된 전부 학생을 석방하였다.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정신에 따라 1930년 8월 13일, 중공연화중심현위의 건립대회에서는 여성운동에 3가지 결의를 채택하였다. 즉 각 급 여성조직을 건립하며 여성의 특수한 요구를 제기하고 여성투쟁을 영도하는 것이다. 이 시기 적지 않은 여성중공당원과 여성간부가 양성되었다. 1931년 2월 연변농촌여성 중 당원과 단원은 100여 명으로서 연변 당, 단원수의 20%를 점하였다.(《성위와 중앙에 보내는 중공만주성위 부녀위원회의 보고))

붉은 오월투쟁과 8.1 길돈 폭동에서 연변여성은 통신연락, 식량공급과 정찰임무를 수행했으며 전화선을 끊고 철교를 불사르고 친일주구를 처단하고 일제기관과 조선인민회를 들부시고 소작계약서와 고리대금계약서를 불태우는 등 각종 투쟁에 참가했다.

중공만주성위 부녀위원회에서 성 당위와 중앙에 보낸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었다. 《지난해 《5.1》, 《8.1》과 광주폭동 때 농촌의 한국여성(조선인여성)들은 모두 열정적 으로 각종 투쟁과 시위에 참가하여 적지 않은 역활을 놀았다. 그들은 머리에 석유통을 이고 다니면서 다리를 소각하였고 전선대를 태워버렸으며 쌀과 나무를 싣고 다니며 식량을 공급하거나 정찰 등 사업을 하였다. 광주폭동시위에 1만여 명 군중이 참가하였는데 적지 않은 여성들도 참가하였다. 여기에서 한국여성(조선인 여성)의 용감성을 뚜렷이 보아낼 수 있다.》



제5장 1931-1945년 조선이주민


제1절 위만주국설치와 개척정책


1. 만보산 사건

만보산 사건은 일제 만주침략의 전주곡으로서 그 내막을 여기에 적는다.

1927년 4월 20일,다나까 새 내각은 만몽을 점령하려는 《대화정책강령》을 《동방회의》에서 제정하였다. 만주에서의 세력 확충의 첫 사건으로 《황고툰 사건》이 조작되었으며 그 희생물은 폭사된 장작림이었다. 1928년 10월 장학량이 남경정부에 귀속되었고 장개석은 군벌혼란을 위해 12만 동북군을 관내로 진입시켰는데 이는 일제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었다. 동북의 병력이 줄어든 틈을 타서 중조 두 나라가 참살하는 《저항역량의 분산》을 위해 조작된 것이 《만보산 사건》이다.

만보산은 장춘현성에서 동북쪽으로 60화리, 한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일찍 20년대 길림성의 제요탕 등이 수전개발을 계획하였으나 물도랑을 파자면 당지 농민들의 땅을 지나야함으로 그들의 반감이 두려워 그만두었다.

그 후 만철은 수전개발을 대대적으로 고취하였으며 암암리에 당지의 중국인을 수매하여 수전개발을 꿈꾸었다. 학영덕(郝永德)이 그중 선택된 한사람이다.

1931년 3월, 학영덕은 《장농도전회사(长农稻田公司)》를 성립하고 토지를 경영하였으며 4월에는 만보 부근의 소우춘(萧雨春), 장홍빈(张鸿宾), 맹소화(孟昭和) 등 12명 중국인지주의 500쌍 땅을 10년 기한으로 세를 맡고 이를 다시 친일파 기관인 장춘조선인거류민회의 평의원 이승훈(李升熏) 등 9명 조선인에게 10년을 기한으로 세주었다.

4월 9일부터 조선농민 188명이 논밭을 만들기 위한 수리공사로 20화리 물도랑을 파기 시작했는데 중국인의 밭을 지나게 되여 말썽이 생기게 되었고 조선농민은 일손을 멈추었고 5월 31일 100여 명이 이미 돌아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뒷일을 처리하고 떠나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이때 일제가 간섭하였다.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7월 5일까지 물도랑을 준공해라고 독촉하였으며 이로 인해 도랑을 도로 묻는 수십 개 마을의 400여 명 중국인과 마찰이 생기게 되었다. 7월 2일,30여 명 일본무장경찰이 물도랑 양옆에 늘어섰으며 농가를 강점하고 일본 국기를 꽂았다. 8시경, 일경과 물도랑을 묻는 중국농민 사이에 마찰이 생기였다. 4-5명 일경이 중국인대표 손영청(孙永清)을 끌어가려 하자 주변 중국농민들이 욱 달려들어 도로 빼앗아 냈다. 일본경찰서 주임 나까가와(中川)가 총질하자 100여 명 농민들이 집에 뛰어가 재래식 엽총을 갖고 와서는 마가초구의 집을 음폐물로 대항 사격하였다. 쌍방은 약 1시간 대치하였으나 살상자는 없었다. 나중에는 소문을 듣고 온 제3구공안국 정국장의 화해로 해산되었다.


7월 3일까지 장춘일본총영사관에서는 돌연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일본경찰 60명, 헌병 20명, 기관총 6정, 포 2대를 포치해 놓고 이승훈 등이 계속 시공할 것을 독촉했다. 그리고 또 일본관동청에 1000여 명의 병력을 출동시킬 것을 독촉했다.

한편 일제는 《조선일보》특파기자 김리삼(金利三)을 매수하여 연속 7차나 조선일보에 왜곡된 보도를 하였다. 조선의 여러 신문에 《만보산에서 조선사람 수백 명이 중국인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퍼져 조선에서 화교를 살해, 박해하는 《배화참안》의 광풍이 몰아쳤다. 서울, 원산, 진남포, 신의주 등 지방에서 화교 150여 명이 참살되고 수천 명이 상했으며 재산손실은 수억 원에 달하였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도 화교들이 조선폭도들에 의해 180여 명이 피살되고 상한자와 재산손실은 헤아릴 수 없었다.

7월 14일, 양심가책을 받은 김리삼은 《길장일보》에 《조선일보기자의 사죄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며 이튿날, 조선인순사 박창하(朴昌厦)에 의해 길림 원동여관에서 피살되었다.

7월 8일, 남경정부는 만보산 사건이 《일방적인 지방성문제》라고 결론을 내렸으며 1931년 9월 15일 남경정부외교부가 중국주재 일본공사에 두 번째로 각서를 보낸 3일후엔 《9.18사변》이 일어났다.

《만보산 사건》은 일제가 동북침략을 발동하기 전에 장개석정부의 태도를 시탐하기 위한 고의적인 도발사건이기도 했다. 일본은 장개석의 양보, 유회정책을 알아낸 후 동북군의 25분의 1의 병력으로 《9.18》사변을 시름 놓고 발동했다.


2. 나까무라 사건

만보산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반화열조는 나까무라 사건을 통하여 마른 나무에 지핀 불길마냥 사납게 타번지었다.

1931년 6월초, 일본 참모본부 작전과 병참반원 나까무라 신다로는 이노스끼 엔다로(井杉延太郎)와 함께 향도인 몽골인 1명, 백러시아인 1명을 앞세우고 흥안령 소룬산 지역에서 간첩활동을 하였다. 25일, 되돌아오는 길에 소악공부를 지나다가 중국 둔간 공서 제3퇀 관병들에게 체포되었다. 나까무라가 죄악을 승인하지 않고 오만했고 또 도망치려했기에 중국관병은 그를 죽여버렸다. 일본관동군 참모부에서는 8월 2일에야 나까무라 일행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으며 8월 17일에는 나까무라가 피살되었다는 것을 반포했고 24일에는 중국 측에 요구를 접수하지 않는다면 일본군이 조남, 소룬 지구를 점령할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중국당국은 처음에는 부인, 후에는 사태가 엄중해지자 죽였다는 것을 승인했다. 9월 10일, 일본 외무, 육군, 해군 3성과 참모, 군령 2부 소장파 과장 등으로 《10일회 (十日会)》를 조직하여 정우회(政友会)와 함께 밀모회의를 열었다. 나까무라사건을 계기로 우선 철도교섭을 진행하고 나아가서 미결 중인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의했다. 이렇게 일제의 침략마수는 만주에로 뻗치게 되었다.


3. 《9.18사변》과 위만주국

1931년 7월, 관동군은 일본 고베로부터 24cm 유탄포 2매를 비밀리에 대련으로 운수하였고 거기서 다시 심양의 봉천독립수비대에 운반하여 9.18사변 때 북대영과 심양을 폭격하는데 사용하였다.

원 계획은 9월 28일에 전쟁을 책동하려 했으나 일본군내부의 분기로 인해 전쟁음모가 폭로되어 9월 18일 밤 10시 20분으로 앞당기기로 급급히 결정했다.

9.18사변의 총지휘는 관동사령관 혼쇼시게루(本庄繁), 관동사령부 위치는 지금의 심양중산광장에 위치한 심양시 총공회 청사, 9.18사변의 획책기구는 일본봉천특무기관, 그 소재지는 화평가 류주가(柳州街)부근이다. 9월 14일 밤, 일본봉천특무기관 2층에서 긴급비밀회의를 열었다. 일본관동군참모 사가기가 일본관동군 사령관을 대신해 9월 18일밤에 전쟁을 일으킬 것을 명령하였다. 구체적 군사행동은 이마다(今田)대위가 책임졌고 폭파임무는 가와모도 (川本) 공병중위가 맡았다.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 가와모도는 병사 7-8명을 거느리고 할빈-대련 철도선(원 남만철도선)의 대련에서부터 404.44km 상거한 곳 (북대영까지 800m밖에 안 됨)을 폭파시켜 놓고 (《辽沈晚报) 2001.8.30) 이것은 중국군대가 한 짓으로 우기며 북대영과 심양성에 불의습격을 발동했다. 심양주둔군은 장개석의 명령을 받고 저항하지 않았으며 19일 아침 일본군은 손쉽게 심양을 강점하였다. 이어 몇 갈래로 나누어 매우 짧은 시간에 요녕, 길림 두개 성의 주요한 도시를 차지하였다. 연길의 중국군은 용정촌 간도일본총영사관에 항복을 표하여 일본군은 총 한방 쏘지 않고 간도를 점영하였다. 11월, 일본군은 흑룡강성으로 군대를 몰아 치치할을 함락했다. 장개석의 불저항 매국정책으로 하여 일본군은 3개 월 내에 동북의 대부분 지역을 강점했으며 동북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환되었다.

일본군은 동남과 남만의 조선인 거주지역에 대해 군사《토벌》을 감행하여 수만의 무고한 백성을 참살하였다. 봉천일본영사관의 통계에 따르면 9.18사변 시 봉천에서만 조선인 160여 명이 살해되고 128명이 부상 입었으며 190명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만철연선의 조선인 수난자 수는 1931년 11월에 5843명, 1932년 2월에는 1만 9304명에 달했다 (《满州农业朝鲜移民概况) 满铁产业调查部)

1932년 3월 1일, 일본은 부이의 명의로 《만주건국 선언》을 발표하였고 부의는 《집정》에 임했다. 1934년 3월에는 《만주제국》을 세웠다. 《만주국》은 일제가 봉건관료, 매판세력과 상호 결탁한 괴뢰정권이다. 위만주국의 대정방침은 일본관동군이 제정하였으며 일본인이 층층이 집행하였다. 중앙 각 부로부터 성, 현 행정기구에 이루기까지 한간이 관리를 담임한것 외 모두 일본인이 《차장》을 맡았고 참사관으로 되어있어 실권은 일본인의 손악에 단단히 잡혀있었다. 일본은 한간, 지주를 내세워 기층에서 식민지통치를 실시하였고 한간, 지주는 일본인의 세력에 의거하여 경제적 착취를 강화하였다.

1932년 6월, 일본은 《만주중앙은행》을 성립하여 만주금융을 조종하였고 1932-1937년 35개의 《특수회사》와 《준 특수회사》를 설립하여 만주의 중공업과 대형 경공업을 통제하였다. 1937년부터는 《만주산업개발 5년 계획》을 실시하여 식민지 공업체계를 다그쳐 건설하여 자원을 약탈하여 일본본국의 생산수요를 만족시키었다.

일본의 대동 북투자는 철도수건에 많이 집중되었다. 돈화-도문선이 1933년 4월에 준공되었고 1933년에는 천도선(개산툰-로투구)이 넓은 궤도를 바꿰 이듬해 3월에 준공되었다. 목도선(도문-목단강)은 1934년 12월에 준공되었다. 이리하여 동만 철도와 남만철도는 연결되었고 일본은 만주의 자원을 조선의 항구와 대련항구를 이용해 직접 일본으로 실어갔다.

1932-1936년에는 《토지국》, 《토지조사위원회》,《지적정리국》 등 약탈기구를 설치하여 토지를 측량하고 정리한다는 명목 하에 만주의 토지를 대량적으로 약탈하여 저들의 이민정책의 투입에 준비사업을 다그쳤다.

일제는 정신상의 통제를 조이기 위하여 노화교육과 우민정책을 강행했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