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림 강영애>

1

싸락눈이 싸락싸락 내리던 그날 아침, 난 병원에 실려갔다. 주기적으로 오는 통증으로 수없이 많은 땀을 흘렸다. 자신이 어떻게 산실에 실려갔는지도 모른다. 아픔, 아픔 외에도 또 아픔, 죽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다. 해서인지 산파의 얼굴도 마귀할멈처럼 일그러져 보였다. 산파는 중이 념불 외우듯이 계속 중얼거렸다.

《힘주세요! 조금만 더 힘주세요! 조금만 더…》

어쩐지 손가락 까닥할만한 힘도 없어졌다. 나는 다른 산모들처럼 울지도, 소리치지도 않았다. 다만 이를 옥물고 견지할 뿐 이였다.

《난 낳을 수 있어. 이 애를 꼭 낳을 수 있어, 꼭…》

《아, 보이네요, 조금, 조금만 더 힘주세요… 됐어요! 어휴―》

《응아―, 응아―…》

아기, 사랑하는 내 아이의 울음소리가 귀가에 들렸다.

(사랑하는 나―의― 딸―애―다―!)

눈물과 몸체 속의 피가 함께 솟아나는 그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크게 웨쳤다.

(아! 상―준―씨―!…)

상준씨는 나의 남편이 아니다. 그 사람은 사랑하는 내 딸애의 아버지이다.

 

2

개학한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가을도 다 가는데 겨울이 멀가?

지난 주말에 한 침실에 애들이랑 야외에 소풍을 갔었다. 그때 나무 잎에 눈을 슬쩍 한번 스쳤었다. 걸핏하면 감염되는지라 이번에도 끝내는 그저 넘어가 주질 않았다. 누워서 휴식하라는 의사선생님의 분부에 따라 다른 애들이 수업하러 떠나자 나는 커어다란 침실에 혼자 외로이 누워 있을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쾅쾅, 쾅쾅쾅, 쾅쾅―…》

점점 크게 들려오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람을 도취하게 하는 부드러운 음악소리 외로 불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다급히 침대에서 내려선 나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키가 훤칠한 웬 청년이 문밖에 서 있었다.

《실례합니다만, 김선미씨 있습니까?》

안경도 걸지 않은 데다가 그것도 한쪽 눈으로 그의 얼굴 생김새를 똑똑히 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였다. 초록색 군복을 입고있는 것 같았다.

《선미요? 지금 수업하러 들어갔는데…한시간 후쯤이면 돌아올 겁니다.》

《죄송합니다만 여기에서 선미를 기다릴 수 없을까요?》

문을 한쪽으로 열어젖힌 나에게 청년은 가쯘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량 미간 사이에서 나는 일종 감출 수 없는 흥분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전 선미의 고중 동창생입니다. 금방 참군 했는데 래일이면 이곳을 떠나게 됩니다.》

내가 묻기도전에 그 쪽에서 먼저 얘기를 꺼냈다. 고중을 졸업한지도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 왜 이제서야 참군하는가고 의아해서 내가 물었다.

순간,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한줄기 우울을 나는 느낄수가 있었다.
잠간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그는 끝도 시작도 없는 말을 했다.

《실로 당신들 같은 대학생들이 부럽습니다…》

후에 둘은 많고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대체 어떤 이야기들을 했었는지 기억 속에 진하게 남는 부분이 없었다. 다만 그 시각 느낀 점이라면 서로 공동한 애호가 많다는것 이였다. 이를테면 음악 듣기, 그림 그리기, 글 쓰기 등등이 그러했다. 그 날, 그는 왕국진의 시 한 수를 읊기도 했었다.

시가 없는 시가지는
어쩐지 황량한 감이 들게 하고
돈이 모자라지 않던 나날엔
오히려 황량하게 지내고
착상이 너무 빠른 사람이
결국 모자라는건 주장이더라
아마 시대를 앞서 나가려 하는 의식이
갑자기 방향을 찾지 못하게 하였나보네

선미가 돌아오자 그들 둘은 곧 밖으로 나갔다. 등뒤에서 나란히 걸어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던 나는 괜한 시샘까지 느꼈다.

(내가 왜 이러지? 좀 전에 알은 사람인데…바보 아냐?)

문가까지 바래주었을 때였다. 홀연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참, 깜빡했군요. 저는 민상준이라 부릅니다. 눈이 빨리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3

시간은 빨리도 지나갔다. 엊그제 개학한 것 같은데 벌써 양력설이 다가 오고있었다.

어느 날, 뜻밖에도 상준씨의 카드를 받았다.

《고향을 떠나던 마지막 날에 혜리씨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좋은 친구로 되었으면…》

다른 사람들과는 틀리게 내겐 특별한 점이 있단다.

(뭐가 특별할까? 생김새? 아니, 너무 보통일텐데…)

순간 뇌리에 스치는 게 있었다. 나는 홀로 소리없이 웃었다. 그때 눈 하나를 막고 있던 그 모습 때문에? 그게 특별한 점이였었나?

그에게 얼른 답장을 보냈다. 편지봉투에 서명할 부분에 이름대신에 눈이 하나뿐인 동화편에서 나오는 카통룡와(卡通龙蛙)를 그려 넣었다.

우리의 서신거래는 이렇게 막이 열렸었다.

처음엔 선미와 동시에 상준씨의 편지를 받았다. 해가 지고 달이 가면서 선미한데로 오는 편지는 점점 줄어드는 한편 나한데로 오는 편지는 되려 늘어만 갔다.

어느 토요일 날 저녁, 침실에 선미와 단둘이 남게 되였다. 선미 쪽에서 먼저 말을 건네왔다.

《혜리야, 솔직히 얘기해봐. 너 지금 상준이랑 사귀는 거 아니니?》
부인하는 나를 한식경이나 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속이려 하지마. 실은 나 그 날 수업 마치고 돌아와서 너희 둘 보는 순간 일이 생길 거라는 예감이 들더구나.》

잠깐 침묵이 흘렀다.

《너 대체 상준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선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또 인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상준인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어. 그의 부모는 시종 감정이 좋지 않았어. 늘 티각태각 하다가 우리가 대학시험 치던 그 해 봄에 끝내는 헤어지시게 되였어. 원적이 북경에 있는 그의 아버진 홀로 북경으로 훌쩍  되돌아가셨어.

상준인 원래 나와 성적이 어슷비슷했었어. 아마 정신적으로 많이많이 힘들었나봐. 결국 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어. 만일 재수했더라면 아마 지금은 대학 2학년일지도 모르지. 맹랑하게도 상준이 어머니가 다니시던 회사는 경기가 썩 좋지 않았어. 부모 되여 어느 누군들 자식 잘 되길 원하지 않겠어? 그 때 북경에 계시는 그의 아버지가 재수만 한다면 경제상에서 해결하시겠다며 얘기를 꺼냈었는데 상준이가 딱 거절해 버렸어.

학교에서 나온 후 3년 동안 상준인 여러 가지 일들을 했었어. 한때는 시장에서 과일을 팔기도 했었지. 때론 젊은 기분에 싸움질도 하기도 해서 구류소에 갇히기도 했구, 후엔 J시 중심거리에서 규모가 꽤 큰 꽃가게도 경영했었어. 이젠 그런 생활이 싫어지는 가봐. 참군 하겠다더니 정말 모든 걸 접어버리고 참군 했지 뭐야.》

선미는 우리 침실 아니, 우리 학급에서도 제일 속셈이 있는 애로 꼽힌다. 그녀는 여러 남자친구와 사귀였었는데 셋 모두가 간부자제였다. 그녀는 그의 인생원칙으로 나를 일깨워 주는 거였다.

나는 그 애와는 생각이 틀렸다. 사랑은 상대의 부모가 무슨 직무이든 상대가 무슨 직무이든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여긴다. 세상이 오염되고 가치관이 뒤흔들린 이 복잡한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깨끗한 마음이라고 생각된다. 권리를 바탕으로 사랑을 고려한다면 순수한 사랑일까? 변색된 사랑이 아닐까? 언젠가는 무너지지 않을까?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나였다.

선미로부터 오히려 상준씨를 더한층 알게 되였었다. 예전보다 상준씨를 더욱 동정하게 되였고 그이가 더 존경스러워 보였다. 내 마음속에서 상준씨의 위치는 뾰족한 바늘 끝으로 찍어놓은 하나의 점으로부터 커다란 원으로 점점 변해가기만 했다.

그때 우리 학급의 한 남학생이 나한데 각별한 관심을 돌렸다. 그가 바로 내 지금의 남편 차준수다. 준수는 나와 한 고향 이였고 소학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줄곧 한 학급 이였다.

준수는 언제나 나를 위했다. 짐도 들어주고 차를 탈 때면 내 자리까지 챙겨주기도 했다. 가끔 데리고 나가서 내가 즐겨먹는 음식도 사주기도 하고 주말이면 언제나 영화 표를 들고 와서 영화를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준수는 얌전하다하기보다도 어쩜 목석 같아 보일 때가 많았다. 영화를 볼 때거나 영화를 보고 나서 학교로 돌아올 때 기회 같은 건 많고도 많을텐데. 이를테면 손을 잡는다는가 아니면 마음속의 말이라도 하든가. 아니 하다 못해 저 하늘의 달이 이쁘다고 말 하든가. 그럼 나는 못 이기는 척 했을텐데….

4

4년이란 대학생활은 잠깐사이에 다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졸업 후 나와 준수는 같이 T시의 아주 잘 나가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였다.

그때는 내가 상준씨와 이미 정식으로 사귀고 있을 때이다. 누가 먼저 사귀자고 말을 꺼냈는지 별로 기억에 없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편지를 써서 보내고는 회답편지를 기다리고 또 답장을 써보냈다. 그런 나날에 둘은 서로 상대의 소중함을 강렬하게 느꼈다. 한편 이런 련애가 또한 너무 피곤하기도 했다. 다른 련인들처럼 늘 만날 수도 없었으니, 지어 상준씨가 소속 되여 있는 부대에는 전화마저 없어 목소리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도, 서로 위안해주는 말도, 고통스러운 이야기도…, 이 모든 걸 다만 편지로 표달 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사진도 많이 부쳐보냈건만 상대의 모습조차 머리에 또렷하게 떠올릴 수가 없는 정도였다.

준수는 나한데로 날아오는 편지가 늘어남에 따라 내게 남자친구가 생긴 거라고 추측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 대한 태도가 변한 것은 아니였다. 전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다. 여전히 주말만 되면 영화구경 시켜주고 내가 즐겨먹는 음식들을 사주었다.

회사에 입사해 처음으로 맞는 봄 이였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마음도 산란해 진다더니 문득 상준씨 부대에 가고싶어 났었다. 상준씨와 사귄지도 벌써 16개월이나 되였건만 한번도 만나 적 없었으니 그립기도 하고, 어떤 모습인지 너무너무 궁금해나기도 했었다.

 

5


곧 《5.1》절이 돌아왔다. 나는 꼬박 이틀 낮 이틀 밤이란 차를 탔다. 하지만 48시간이 2년보다도 더 길게만 느껴졌다.

그때 나는 웨딩드레스를 방불케 하는 새 하아얀 원피스를 입고 갔었다. 흡사 상준씨의 신부가 된양 나의 마음은 푸른 하늘우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같았다. 

아주아주 자그마한, 손님도 몇 안 내리는 역에서 우리는 서로 만났다. 몇 메터 사이 두고 서서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데 좋이 오분은 걸린 것 같았다.
서로가 상대를 확인하고 나서 상준씨는 늘 편지에서 나하고 약속했던 것처럼 그 억센 두 팔을 벌려 나를 건뜻 안고선 드라마에서만 많이 보았던 장면처럼 빙—빙— 돌았다. 어쩜 16개월 동안의 포옹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돌고 돌고 또 돌았다. 내가 어지럽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동안을 더 돌는지도 몰랐다.

그는 부대의 《141》형 자동차를 몰고 나를 마중 나왔다.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경적을 울렸다.
《빵빵, 빵빵빵―…》

어떤 사람들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큰 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허, 상준이가 여자친구 데려왔구먼!》

후에서야 알았지만, 나는 그가 있는 부대에 처음으로 간 녀성이였다. 그가 차를 몰고 마중나온 것도 련부의 토론을 거친 결과였었다.

부대에서 나는 특별대우를 받았다. 수장급의 침실에 안배되였다. 그는 그 때 반장일 뿐 이였다.

전사들이 몇명씩 같이 나를 찾아와서 여러가지 문제들을 물었다.

후에 상준씨한데 들을라니 전사들이 단 한번이라도 나를 더 보고싶어서 여럿이 물음들을 만들어서 찾아온 거란다. 아주 편벽한 군영에서 젊은 녀성을 볼 수 있다는 게 그들로 놓고 말하면 일종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손님들이 다 돌아갔다. 그제서야 단둘이 있을 수가 있었다. 자신 앞에 서있는 그를 자세히 뜯어 볼 겨를이 있게 되였다. 그는 사진에서보다 더 멋져 보였다. 어쩜 한국드라마에 나오는 유명한 탤런트같아 보였다.

그 걸음에 나는 부대에 삼일간 머물러있었었다. 삼일간, 어쩜 이 생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날이였던 것 같다. 우리는 그토록 원했던 만남의 달콤함을 한껏 향수할 수가 있었다.

그는 부대에서 시험을 쳐 다시 대학에 가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망설이고있었다. 물론 너무나도 갈망했던 바였다. 이래야만 내 앞에서 떳떳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단 대학에 가기만 하면 짧으면 3년, 길면 5년이란 시간이 필요로 했었다. 하니 내가 그때까지 자신을 기다릴 수 있을런지 그한데는 미지수인 것 같았다. 시험에서 떨어지게 되면 1년 반 후에는 제대할 수가 있었다. 내가 그의 고향 J시로 갈 수 없으면 내가 있는 T시로 신청하겠다고 했었다.

나는 그가 시험 칠 것을 극력 주장했다. 아무리 외롭고 괴로워도 그가 나한데 힘을 주기만 한다면 5년이 아닌 10년도 기다릴 수 있다고!

 

6

지금도 그때 둘이 서로 두 손을 마주 잡고 나란히 창가에 앉아 앞날을 그려보던 그 기억들이 머리 속에 떠오를 때면 너무나 감동 되여서 막 울고싶어진다. 이 생에서 가장 진실하고 가장 순결하고 가장 깊은 사랑을 느꼈었다면 바로 그 삼일간이라  여겨진다. 그 삼일간은 하나의 너무너무 아름다운 꿈이였다. 너무 아름다워서 믿어지기 어려울 만큼, 너무 아름다워서 조금도 실감이 나지 않을 만큼!

떠나는 마지막 날 밤, 우리는 공동으로 청춘남녀의 생명려정을 걸어나갔다. 그 날 밤, 우리는 진정한 남자, 진정한 여자로 되였다.

격정이 지나간 후, 우리 둘은 서로 부여안고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겠지?》

상준씨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힘있게 가로 저었다. 그가 내 몸체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기쁘다고, 행복하다고 굳게 믿었다. 늘 같이 있을 수는 없어도 머리 속으로 그려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꼈다.

《난 이 남자, 민상준을 사랑한다!― 하늘만큼, 땅만큼이나!》

사랑하기에 그를 위해서 내 자신의 모든 걸 주고싶었다. 그 어떤 원망도 없이, 그 어떤 후회도 없이.

《혜리야, 지금은 실감이 안나겠지만 너에게 행복을 주고 싶은 마음은 언제까지나 변함없을 거야! 내가 숨쉬고 있는 한. 나한텐 너뿐이야. 나만 바라봐. 나만 믿어.》


7


회사로 되돌아 온 나는 그가 선물한 그림 즉 오각별과 탄알껍질로 만들어진 금속그림을 벽에 걸어놓고 그의 사진이 끼워진 액틀을 내 침대머리에 놓아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친구들, 회사동료들은 물론 가족까지도 내게 군인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였다. 그런데 내 주위에는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 너무나 상상 밖의 일 이였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아시고 고향에서 부러 오시어 설득을 하셨다.

《너와 그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모르겠다만 안 된다, 안 돼, 무조건! 넌 그 사람하구 성격이나 조건이 다른 게 너무도 많다. 당장 그 사람하구 관계를 끊어라.》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시자 바람으로 매파를 시켜 여러 사람들을 소개시켜왔다. 바로 이때였다. 그렇게 어김없이 오 군 하던 달거리가 오지 않는다는 걸 나는 문득 알았다.

(설마…? 애가 생긴 것은 아니겠지? 아냐…)

한쪽으로 자신을 극력 위안했지만 그래도 어쩐지 두려움이 앞섰다.

혼자 개인진료소를 찾아갔다.

《임신입니다.》

(어쩜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무너지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어떻게 기숙사로 돌아왔는지도 전혀 기억이 없다.

돌아오자 바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상준씨한데 편지를 썼다.

《…상준씨, 나 어쩌면 좋아? 어쩌면… 어떡해야 하지? 어떡해야… 알려줘 응? 나… 나 너무 두렵단 말이야!…》

그러나 상준씬 순식간에 이 땅떵어리에서 소실되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나로 놓고 말하면 그 때가 제일제일 암담했던 나날들이였던 것 같다.

기다림에 지쳐버린 나는 상준씨가 선물로 준 그 그림도 벽에서 떼여냈다. 침대머리에 놓아두었던 상준씨의 사진도 치워버렸다. 상심한 나머지 끝내는 드러눕고야 말았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어쩜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만 발생할 수 있었던 비참한 이야기가 나한데 일어날줄은 정말 어지러운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했었다. 내가 잘못한 걸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가 않았다. 머리가 텅텅 빈 진공상태였다.

그렇게 나는 꼬박 삼일동안 누워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저녁, 준수가 왔다. 평시에 내가 즐겨먹던 음식들을 한가득 사 들고. 이상한것은 내게 무슨 일이 있느냐, 왜 그러느냐고 묻지도 않는거였다. 그저 뭘 좀 먹으라고 권할 뿐 이였다.

홀연 준수가 너무너무 미더워 보였다. 닭알 껍질을 천천히 밝고 있는 준수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량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준수야, 그 날 너 생일날에 내게 했던 말 지금도 유효니?》

 

8

한달 후, 그 해 7월 23일에 나는 준수와 결혼했다. 백설같이 새하아얀 웨딩드레스를 입고서. 마음을 새하아얗게 비우고서.

붉은 태양은 여전히 아침마다 두둥실 떠오르고 저녁이면 꼬박꼬박 서산아래로 뉘엿뉘엿 넘어가 군 했다.

준수는 정말로 훌륭한 남편이였다. 예전의 일에 대해선 입밖에 내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든 내가 원하는대로 모두 해주었다. 더우기 내가 홀몸이 아니라는 걸 알고부터는 아예 집안 일에 손가락도 까딱하지 못하게 했다. 실로 일종 안온한 행복을 느꼈다. 진짜로 좋은 남편을 만났다는 생각이 짙어만 갔다.

헌데 결혼한 지 꼭 두 달만에 상준씨의 편지를 받아보리라고는 나는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했다.

떨리는 두 손으로 편지 겉봉을 뜯는데 한식경이 걸렸다. 웬지 심장이 당금이라도 막 튕겨 나올 것만 같았다.

단숨에 편지를 다 읽고 난 나는 눈앞이 새까매져 났다. 맥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식은 땀이 흠뻑 났다.

(어쩜 이럴 수가? 어쩜…)

《…너가 돌아간지 오래지 않아서 얼른 예비시험을 치렀어. 항상 날 지켜 봐주는 너가 있었기 때문인가봐. 행운 하게도 합격했지 뭐야. 6월엔 S시에 가서 집중적인 복습에 참가했어. 이젠 성적도 발표됐어. 학교는 X시에 있어. 나 지금은 J시에 있거든…혜리야, 어떻게 지냈었니? 내가 부대에서 떠나면서 보낸 편지는 받아보았는지. 내가 그리워지면 J시에 있는 집으로 편지 보내라고 알려줬었는데… 오늘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한데 여쭈어 봤더니 글쎄 편지가 한 통도 없대는구나. 너무 실망이다! S시에서 봉페식 복습을 했거든. 잠시도 널 잊은 적 없었어. 내가 널 미치도록 그리워 했다는 건 아마 하늘이 다 알 거야. 시종 나를 지켜 봐줬으니까…

이젠 나도 대학에 붙었어! 나보다 너가 더 기뻐할 거다. 그지? 여하튼 너한덴 항상 고마움이다. 너에게 행복을 주고 싶은 마음은 언제까지나 변함없을 거야! 내가 숨쉬고 있는 한. 나한텐 너뿐이야. 나만 바라봐. 나만 믿어.

너가 너무너무 보고프다. 날개라도 있으면 당금이라두 너한데 훨훨 날아가고프다야! 음- 나의 사랑하는 혜리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되게 궁금한데…
편지 받으면 얼른 답장 보내.
X시로 떠나기 전에 너 보러 가고픈데. 날 반겨줄꺼지?》

편지를 읽어보고 또 읽어보았다. 이어 문제점들을 찾아냈다.

내가 울면서 써보낸 편지를 상준씨는 받지도 못한 것이다. 그때는 상준씨가 금방 소속부대에서 떠나 S시에서 복습을 하고 있을 때니까. 상준씨가 부대로 떠나기 직전에 S시로 복습하러 떠난다는 사실과 자기 집 주소를 알려주는 편지를 나 또한 받지 못했던 것이다.

급히 1층 접수실로 달려갔다.

《정아저씨, 혹시 저한데 온 편지는 없었어요?》

《오늘은 못 받았어. 오는 편지를 제일 늦어서 그 이튿날에 다 주네.》

《<5.1>절후에 저한데로 온 편지를 혹 다른 사람이 대신 가져간 적은 없는가 해서요.》

《오, 그래, 자네 남편 준수가 두 번 가져간 적 있지. 허! 그땐 부부인줄도 몰랐었어.》

《아, …그랬군요. 미안합니다만 혹시 언제쯤인지 기억나세요? 그 중 한통이라도 말이예요. 하긴 뭐 시간이 꽤 오래서…》

금방 정아저씨는 그 년세와는 별로 관계가 없듯이 가쯘한 흰 이를 드러내보이면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씀을 이으셨다.

《첫번째 편지인지 아님 두번째 편지인지는 확실하게 몰라도 여하튼 그 날만큼은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네. 암 기억하구 말구. 그 내 아들이 예쁜 며느리감을 처음으로 집으로 데리고 왔거든. 5월 27일이였네. 암 틀림없지.》

5월 27일? 순간 나의 뇌리를 스치는 일이 있었다. 5월 27일, 그 날은 마침 준수의 생일날이였다.

그 날 퇴근하자바람으로 준수는 나를 데리고 교외에 있는 음식점에 갔었다. 나는 그 음식점의 비빔국수를 엄청 즐겨먹었다. 그 음식점의 비빔국수도 별미겠지만 고즈넉한 그 환경이 더욱 내 마음을 끌었다. 창가에 앉으면 높지도 낮지도 않는 푸른 산과 산을 감돌면서 유유히 흐르는 맑은 강물까지도 환히 보인다. 비빔국수를 시켜놓고 기다리는동안이라도 인류의 손이 가닿지 않은 순수한 아름다운 대자연을 흔상하는 것이 복잡한 회사일로 진종일 팽이처럼 돌아치던 나에게는 너무너무 홀가분하고 황홀한 시각이였다.

창가에 기대서 자갈까지 환히 들여다보이는 강물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나의 귀가에 문득 준수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뒤돌아보진 않았어도 서있는 나와의 거리가 아주 가깝다는 것만은 느낄 수가 있었다. 오늘따라 이상할만치 부담스러워났다.

《혜리야, 나… 말이다. 너에게 행복을 주고 싶은 마음은 언제까지나 변함없을 거야! 내가 숨쉬고 있는 한. 나한텐 너뿐이야. 나만 바라봐. 나만 믿어.》

뜸을 들이며 겨우 끝마친 준수의 말에 난 당혹스러워났다. 준수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나오리라고는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엉켜진 복잡한 꿈속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니까. 뭐라 말을 했으면 몰라서 다만 창가에 비스듬히 기댔던 자신의 몸을 창밖으로 더 치우치게 했다.

바로 전번 주말 퇴근무렵이였다. 한 사무실의 미스권이 말수 적고 깐지게 일을 하는 준수가 마음에 든다며 제 이종녀동생을 소개해주겠다고 말을 꺼내였다. 준수는 시무룩이 웃으며 맞은 켠에 앉아있는 나에게 잠깐 눈길을 주더니 래생에 기회가 있기만 하면 그 땐 꼭 한번 만나보겠다며 연신 감사를 표시했었다. 녀자친구 있단 소문은 없었는데 언제 사귀였는지 어느 회사에 다니는 사람인지 저으기 궁금해나기도 했었다. 미스권이 언제 한번 데려와보라구 수선을 떨자 뜻밖에도 이제 오라지 않아 결혼할거란 얘기까지 했었다.

(너에게 행복을 주고 싶은 마음은 언제까지나 변함없을 거야! 내가 숨쉬고 있는 한. 나한텐 너뿐이야. 뭐? 이건 상준씨가 나한테 하던 말이잖아? 어쩜 한글자도 틀리지 않게 얘길 할 수가 있지? 어느 드라마에서 나오는 말인가?…)

그날 오후, 난 아예 출근도 하지 않았다. 홀로 터벅터벅 공원으로 갔다. 으슥진 곳에서 목놓아 울었다. 너무나도 불공평한 운명 때문에. 어쩜 그 짧디짧은 몇 달 사이에 왜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냐구…

이튿날, 상준씨에게 답장을 썼다. 쓰고는 찢어버리고, 그리고는 또 쓰고, 또 찢어버리고. 이렇게 헤아릴 수도 없이 거듭 되풀이하였다. 그러던 나중에 몇 글자만 적어보냈다.

《나 이미 결혼했어요!》

한 주일이 지났다. 상준씨의 편지를 받았다. 봉투 안에는 그가 직접 만든 예쁜 카드가 들어 있었다. 카드에도 똑같은 몇 글자만 적혀 있었다.

《당신을 영원히 축복해주고 싶소!》

준수와는 나 대신 가져간 편지이야기에 대해 전혀 입밖에 내지도 않았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젠 중요하지 않으니까. 어떤 의미에서 놓고 말하면 그 편지가 내 운명을 결정한 것 같기도 하다. 상준씨와의 그토록 아름다웠던 사랑이야기도 이제는 가슴속 깊고 깊은 곳에 깊이깊이 묻어두어야만 한다. 지금 차준수는 나 ― 림혜리의 남편이고 나 ― 림혜리는 차준수의 안해이다. 그리고 나와 나의 딸 유미에게 하나의 완전하고도 행복한 가정을 준 사람은 차준수이다.

딸 유미도 이제는 5살이다. 예쁘장하게 생긴데다가 귀엽게 굴어서 온 집식구의 총애를 받는다. 준수 또한 애한데 인내성이 여간 있지 않다. 그래서인지 유미도 제 아빠를 퍽 따른다.

나 자신 외에 이 세상 그 누구도 유미의 신세(身世)를 아는 사람이 없다. 준수와 결혼하겠다고 마음을 정리한 그 시각부터 나는 속으로 다지고 또 다졌다. 내가 숨쉬고 있는 한 그 누구에게도 이 비밀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물론 내 인생의 문을 열어주었던 상준씨까지 망라해서. 정말 나는 일생을 다 바쳐 내 딸을 꼭 지켜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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