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고향은 중국흑룡강성 수화시 흥화 조선족 민족향(中國黑龍江省 綏化市 興和 朝鮮族民族鄕)이다.
1936년 조선을 발판으로 중국을 침략한 일제는 조선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주로 벼농사를 지어본 농부들을 강제, 혹은 모집 방법으로 개척단을 만들어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은 우리 고향에 원주민 한족들을 강제로 몰아내고 데리고 간 개척단(開拓團) 농부들을 안착시키고 본격적인 조선족 집거 거주지로 만들었다. 장기적인 타산으로 그들은 천년 묵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송화강(松花江) 물줄기의 하나인 낙민하(諾敏河) 물을 끌여 들였고 주간선에서 몇천 미터(2리) 한 줄기 인수로를 파서 자연수로 벼농사를 짓게끔 잘 건설하여 놓았다. 8·15 해방이후, 특이하게도 우리 지방에는 자연 재해라곤 거의 없어 해마다 풍년이 들었고 소문을 듣고 우리 동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처음 백여호가 순식간 몇 백호의 순 우리 민족 집거지로 변했다. 흑룡강성 전 성적으로 세 개밖에 안되는 조선족 민족향 중의 하나가 바로 나의 고향 흥화 조선족 민족향이다. 60여년 세월을 거쳐 중국 공산당 정부의 소수민족 우대정책에 힘입어 자치정부향(鄕) 산하에 순수한 우리 민족 인재를 등용하여 중학교 1곳, 소학교 2곳, 민족 병원, 상점 은행, 농기계공장 등을 세워 완벽한 우리 민족 자치향을 건립하였다.
중국정부의 우대정책과 근로용감한 우리 민족의 우량 전통 발휘하에 고향은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개혁, 개방 이후 몇 십년 살아 오던 초가집을 밀어 버리고 아스팔트 길을 내고 벽돌집을 규격적으로 지어 행복하게 살아 왔다. 대대손손 한전 농사밖에 지을 줄 모르던 린근 한족들도 선진적이고 경제가치가 높은 우리 벼농사를 배워 한전을 몽땅 수전으로 고쳐 그들도 우리들과 이웃하며 화기애애하게 잘 살아 왔다. 1990년 초 우리 민족향 총인구 3920명, 중·소 학생 수가 700명에 육박했다. 그러던 것이 한국바람이 불면서 비극적인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물가상승, 생산한 량식의 가격인하로 한국에 나오지 않으면 겨우 먹고나 살뿐 자식 공부나 기타는 근본 택부족이어서 죽기 살기로 한국행을 택했다. 두 사람만 모여도 한국에 갈 토른, 자나깨나 한국꿈에 들떠있고 농사는 아예 뒷전에 놓였다. 목숨을 내걸고 밀항선을 탔고 거짓 이혼을 하고 애지중지 키워온 딸 자식을 눈물을 삼키며 제 아버지나 다름없는 한국 총각에게 시집보냈다. 한국행을 택한 수 많은 사람들이 사기를 당하고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조상들이 물려준 비옥한 땅과 집을 한족들에게 팔지 않으면 안될 위기에 처했다. 이것저것 아무 것도 내밀 것이 없는 사람들은 아예 어린 자식 손목 잡고 야간도주에 정처없는 타향살이에 나섰다. 1998년 전까지는 우리 고향에는 한국에서 벌어온 돈보다 사기당한 돈이 훨씬 많았다. 해마다 수 많은
처녀와 과부들이 일본, 한국에 거짓, 혹은 진짜로 시집을 갔고 연줄이나 있고 먹물 깨나 먹은 사람들은 대도시로 진출하여 고향을 떠났다. 온 동네 사람들이 이산가족이 되었다. 나를 놓고 보면 우리 내외는 동포 2세 친지방문으로 3년째 한국체류 중이고 큰 아들 놈은 고향에서 신학을 다니며 교회에서 총무로 일하고, 작은 놈은 한국에 왔다 간 후 청도 한국 기업 SK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다. 한집 식구 네명이 세 곳에 찢어져 전화로만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시대의 행운일까 그나마 나는 하느님의 은혜와 조상들의 복을 받아 두번째로 친지방문으로 한국에 나와
돈을 벌게 되어 참으로 한국정부와 한국에 계시는 친척들께 감사드리는 바이다.
나와 같이 행운을 탄 사람은 극히 소수이고 대다수 사람들이 중국에서 평생 상상도 못해 보는 거액의 빚을 내고 별별 고생과 천대 속에서 이를 악물고 돈을 벌어 이제 막 빚을 물고 좀더 고생하여 돈을 벌어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돌아가 자식 공부도 시키고 온 가족이 한데 모여 행복하게 잘 살아 보려하니 불법체류자 신분이 되어 집에 가지도 못하고, 이곳에서 일도 못하는 안타까운 실정에 직면했다. 빚도 갚고 돈푼이나 모은 사람들은 괜찮지만 아직 빚도 못 다 물은 사람들은 돌아가면 한가지 길, 오직 죽음 뿐이다. 빈손으로 돌아가 집도 절도 땅 한 뙈기 없는 사람들은 오직 그 길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서 혹은 한국에서 바람을 피워 이혼을 하고 예상치 못했던 사고나 병이 들어 죽고하여 집구석이 풍비바산이 난 사람이 부지기수다. 나와 벽 하나를 사이둔 친구 김××는 92년에 다행히 한국에 나왔다. 집에는 병든 아내와 두 어린 자식을 두고. 고혈압 병 중이던 아내는 그 이듬해인 93년에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 다행히 한 동네에 삼촌이 있어 두 조카를 맡았다. 큰 놈은 자기가 맡고 있는 양어장 일을 시켰고 작은
놈은 군대에 보냈다. 김씨는 몇 년을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고 이악스레 돈을 벌어 빚도 갚고 돈도 꽤나 모았다. 그러던 김씨는 재수없게 한국인 여성을 애인으로 만나 서로 투자하여 간두부(干豆付) 공장을 차렸다. 어지간히 기술도 배우고 본전을 건진 여 애인이 돈을 다 빼돌리고 김씨를 루명을 씌워 경찰에 신고했다. 강제추방이 된 김씨는 돈 한 푼없이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 왔다.
아내를 잃은 슬픔과 억울하게 루명을 쓰고 강제추방 당한 한국 애인에 대한 원한으로 매일 술과 담배, 눈물 속에서 세월을 보냈다. 하여 그 좋은 벽돌집을 팔고 금방 쓰러져 가는 초가집으로 물러났다. 그러다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정신을 차리고 동네 품팔이를 하여 겨우겨우 먹고는 사는 판인데 몇년간 술과 담배에 절은 김씨는 울화병이 들어 쓰려져 가는 초가집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당시 삼촌네 양어장에서 일하던 큰 아들놈은 하루 일은 마치고 지친 몸에 술을 마시고 장작불에 구들이 난로 같은 방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큰 아들은 구들의 고온으로 가슴과 배, 량 다리에 엄중한 화상을 입었다. 삼촌이 병원에 데려가 치료하는데 살집이 많은 가슴과 배는 피부이식을 하여 괜찮은데 유독 다리 관절부위엔 살이 없어 화상 입은 피부를 떼어내니 허연 관절뼈가 훤히 보여 보기만해도 끔찍했다. 죽은 이를 갸륵히 여긴 동네 사람들이 모여 초상을 치르는데 30세가 다 되도록 장가도 못간 큰아들이 병원에서 임시로 량 다리 관절에 붕대를 감고 아버지 장례에 술을 부었다. 허술하게 만든 시체가 든 관이 초가집 창문을 뜯고 나오는데 두 무릎 붕대속에 허연 관절뼈가 보이는 큰 아들이 벌벌기어 나오며 아버지 관을 꽉쥐고 “아버지, 아버지, 혼자만 가지 말고 나도 데려 가세요”하며 우는데 너무나도 처참한 광경에 온 동네가 울었다. 아마 하느님도 울었을 것이리라! 몇 년 전만 하여도 순수한 우리 조선족 민족 집거구역이던 고향이 이젠 주인 없는 집이 이곳저곳에서 쓰러져 폐허가 되고 조선민족 자치향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던 향정부(鄕政府)에서도 별 방도가 없었다. 땅은 한족에게 양도할 수 있되 집은 절대로 한족에게 팔지 못한다고 정책으로 정했으나 실지로는 팔고 남들에겐 집을 지키라고 빌려주었다 한다. 하여 동네는 한족들 세상이 됐다. 한국에 나간 사람은 한국에 나왔다고 땅을 버렸고, 동네에 남은 사람들마저 쪽 팔린다고, 수입이 없다고 너도나도 농사를 버려 근 80호인 우리 동네엔 이제는 벼농사 짓는 사람은 단 한 집뿐이란다. 인구도 급속도로 하강해 이젠 겨우 2천명 좌우밖에 안되고 그 많던 학생수도 급급히 감소돼 이젠 중·소학생 총수가 81명에 불과해 원래 세 곳이던 학교를 한 곳으로 했으나 그나마 학생 래원이 없어 곧 폐교가 될 판이다. 수십년 동안 수많은 인재를 배육해낸 수화시 조선족 중학교도 례외가 아니다. 세계속도스케이트 1500m정상에 오른 나치환(羅治渙) 중국 대형 음악 작곡가 한민수(韓民秀)등은 우리 수화시 조선족 중학교에서 배출한 중국에서도 이름있는 인재들이다. 재능을 겸비한 우리 민족 간부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기의 한 몫을 다했다. 린근 철려(鐵力)시는 90
년 초 우리 민족 간부가 과장(科長)급 이상만 200명이 넘었다 한다.
아직까지도 우리 조선족은 전 중국 56개 민족 중 문화수준이 제일 높은 민족으로 꼽힌다. 그러나 지금 돈을 벌기 위해 우수한 인재들이 하루 아침에 자기의 직무를 이탈하고 외국이나 대도시로 진출했다. 해마다 수십명의 고향 자녀들의 대학 입학 소식은 들으나 필업하고 고향에 정착하여 사업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변변치 못한 고등학교 출신 미만인 학생이 중·소학교 선생을 맡고 그나마 기회만 생기면 휘군하여 인재교육에 막중한 어려움이 있었다. 넉넉한 가정의 자녀들은 전학을 갔고 남은 학생은 모두 가난한 집 자식들만 소복히 모여 공부하는 판이란다. 수화시 조선족 중학교도 현재 겨우 백여명 학생을 유지해 곧 문을 닫을 판이다. 해마다 열리던 향(鄕)체육운동대회는 경비 부족과 인원 부족으로 열지 못하고 2년에 한번씩 조직하던 시(市)조선민족체육대회 역시 이젠 먼 옛말이 되고 말았다. 동네에 처녀라곤 병신 말고는 근본 찾아볼래야 볼수 없고 아무데도 못나간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총각들이 짝이 없어 매일 술과 도박에 빠져 있다.
자고로 수컷이 많이 모이면 싸움이 많은 법. 관계하는 사람 없고 별볼일 없이 매일 빈둥빈둥 놀기만 하던 사내 애들이 돈과 여자 때문에 은행을 털고 강도, 강간, 사기 등 법을 어겨 지금까지 근 30명이 되는 새파란 총각들이 철창 속에서 아까운 청춘을 썩여야만 했다. 조상들이 물려준 살기 좋은 나의 고향 수화시 흥화조선족 민족향은 무너지고 있다. 우리 민족이 무너져 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고향, 우리 민족의 현실이다. 참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은혜로운 하느님이시여!

부디 나의 고향을 지켜주시옵소서.

박안산(안산에서 고향을 그리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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