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웬 일인지 꿈에 아버지가 자꾸 보인다. 길 가다가도 문뜩문뜩 머릿속에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난다.
타향살이 어언 몇 해이던가. 몸도 마음도 지쳐서인가 아니면 중년이 된 내가 마음이 늙어가고 있어 그런가. 아니면 아버지의 제삿날이 곧 돌아와서 그런가.
“아버지!” 입속말로 나직이 불러본다. 아버지의 성격은 어떻다고 할까? 친절보다 무섭다는 생각이 더 들 때가 많다. 동네 사람들도 아버지가 성내면 감히 대들지 못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도 남을 열심히 도와주고 사업에서는 사심이라는 것이 없이 열심히 일한다.
그래서 해마다 성, 시 현 급의 표창을 받으며 년말 에는 여러 가지 상장들을 들고 집으로 들어온다. 그러는 아버지를 나는 못내 우러러 본다. “아버지는 참 대단하시다!” 그런데 내 기억에 오래 남고 또 더더욱 아버지를 우러러 보게 되는 것은 바로 아버지만이 가질 수 있는 그 자존심과 자신심이다.
아버지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다. 60년대에 아버지는 인민공사(오늘의 진 정부)의 한 간부일원으로서 당지부의 파견을 받고 농촌마을에 조사를 다녀왔다. 한 주일의 농촌실태조사를 마치고 인민공사로 돌아 온 아버지는 집에도 들리지 않고 노고도 풀 사이도 없이 곧장 당위서기의 사무실로 향했다.
아버지는 당위서기의 책상을 마주 하고 앉아 지난 한 주일동안 농촌실태조사내용을 또박또박 적은 수첩을 들여다보며 조사내용을 당위서기에게 회보하기 시작하였다.
40년대 초에 중국으로 이주한 아버지는 20여년 중국에서 생활하였지만 중국어는 아주 유창한 편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사업회보를 듣던 당위서기는 불쑥 이런 말을 내던졌다. “꼬리빵즈”, “뭐~~야!” 다음은... 철썩! 철썩!! 당위서기는 놀란 토끼마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입만 하- 벌리고 아버지만 쳐다보았다.
“쭤샤”(앉으세요.) 아버지의 위엄 있는 말에 당위서기는 벌겋게 달아오른 두 볼을 슬슬 어루만지며 그 자리에 눌러 앉았다.
아버지는 계속 수첩을 꺼내들고 사업보고를 하기 시작하였다. 당위서기는 용케도 아버지의 사업보고를 끝마칠 때가지 들어주었다.
당위서기의 사무실에서 나올 때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한마디 남겼다.
“사업시간에 꼬리빵즈가 뭡니까. 다른 장난의 말이나 나 자신 한 사람을 욕하는 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조선민족을 모욕하는 그런 말은 저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손을 대여 미안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발생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당위서기는 “예, 예,”하며 복도까지 바래다주었다.
그 후 당위서기는 아버지를 각별이 존중했고 그 일이 어떻게 밖으로 새여 나갔는지 다른 한족간부들도 아버지 있는 장소에서는 절 때 꼬리빵즈 라는 말을 감히 꺼내지 못했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소학교에 다니던 70년대 중기였다.
어느 날, 학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조선마을과 한족 마을이 인접해있는 곳에서 왁짝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기심에 동학들과 함께 달려가 보니 곡괭이를 들고 있는 아버지에게 한족부부가 손이야 발이야 하고 빌고 있었다.
그 한족부부의 어린 아들이 나의 아버지의 뒤에서 꼬리빵즈라고 욕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 한족아이의 뒤를 쫓아 집에 까지 찾아가 아이를 어떻게 교육했는가 하며 아이를 제대로 교육하지 않으면 곡괭이로 밥 해먹는 큰솥을 부서치우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후 나는 거리에서 한족들에게 꼬리빵즈 라는 말을 별로 들어 못 보았다.
요즘, 나를 낳으시고 길러주신 아버지를 추억하면서 “재외동포법개정”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에 이름 할 수 없는 감회에 빠지곤 한다.
아버지는 재외동포법이라는 그런 법을 모르고 살아왔고 더욱이 그 시절 재외동포법이라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민족의 자존심을 잃지 않고 떳떳이 나서 반민족적인 언사에 주저 없이 불을 질렀다.
중국과 러시아의 우리 민족도 대한민국의 동포라는 것을 승인한 재외동포법개정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에 제꺽 축하 리플을 단 나이지만 마음 한 구석으로는 어쩐지 쓸쓸한 생각이 든다.
동포, 원래 말 안 해도 같은 동포라고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7천만 한겨레 중 몇 사람이나 되였을가.
사실 나 개인적으로는 지금 재외동포법이 재외동포에게 어느 만큼의 혜택이 오는가에 별 관심이 없다.
한 것은 아버지는 생전에 고향땅을 밟아보고 싶었던 소원을 풀지 못했고 더욱이 한국에 계시는 유일한 친인 88세의 고령에도 살아계셨던 고모내외를 친 눈으로 뵙지 못한 그 한을 가지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호적도 없고(전쟁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호적은 전화에 타버리고 없었다) 어렵게 살던 그 년대에 아버지는 고모와 함께 사진도 못 찍어봤다. 호적 없고 동년의 사진이 없다는 이유로 분명 KBS방송국을 통해 찾은 친 누나였건만 아버지의 한국행은 그렇게 막히고 말았다.
지금은 한국에 계시던 고모도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슬하에 자식 하나 두지 못했던 고모님이시고보면 앞으로 기회가 있어 한국에 가도 나를 친척이라고 반겨 줄 혈육은 하나도 없다.
한국에 가면 달러를 많이 번다고 한다. 헌데 달러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 가던 다 있다. 다만 나라에 따라 차이가 있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많이 벌고 적게 벌고의 차이이다.
반면에 나의 고모는 한국에만 계시고 지금은 한국에도 없다. 나는 지금 한국이 내 부모님이 성장하신 고향이라는 것조차도 증명할 수 없고 한민족이라는 것도 증명할 수 없다. 가짜가 범람하는 오늘의 세월에 중국의 신분증 위조도 가능하고 한글은 흑인이나 아랍인중에도 말하고 쓰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나란 존재는 부평초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개정된 재외동포법을 가지고 우쭐하며 우리는 당신들을 동포로 인정했는데 어쩔래? 하고 딴지를 걸어오는 덜 먹은 작자들의 글을 가끔 인터넷에서 본다. 나는 “한국인에게 고함”이란 글도 썼다. 그리고 대다수 한국인들이 재중, 재러 동포는 같은 동포라고 긍정적인 답안을 준 것에 대해 한없이 기뻐했다. 나 개인에게 있어서 이것만이라도 족하다.
하지만 아직도 나의 아버지처럼 분명 한국에 친척이 있으나 호적이나 어릴 때 혈육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없어 친척방문이 이루지 못하는 딱한 사정을 가진 노인들도 있을 줄로 안다. 그들에게는 기다림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른다.
그들의 자식들 또한 나와 같이 부평초 같은 존재로 남아있을 것이다.
나는 당위서기의 뺨을 치던 아버지의 그 날카로운 손을 머리에 떠올려본다.
철썩! 너무도 멋진 장면이다.
나는 정말 아버지의 손색없는 훌륭한 아들이고 싶다!

<고개길>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