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산의 장편답사기>

장백산천지 또는 룡담(龍潭)이고 두만박(圖們泊)이다…평균수온은 0. 7℃―11℃ 이고 년평균기온은 ―7. 3℃이다. 11월말부터 물이 얼고 다음해 6월에 해동되는데 얼음두께는 1. 2m이다. 천지의 수질은 맑고 청량(淸凉)하여 성수(聖水)라 일컬은다.

산마루에 오르니 페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석벽이 둥그러니 병풍같이 에둘렸는데 열여섯 기이한 형국의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민족의 기염을 떨치며 들쑹날쑹 치솟았다. 천상의 신령님께 지상사(地上事)를 고하듯 하늘을 향해 활짝 부리를 벌린 하나의 독수리같은, 해발 2670m의 천활봉(天豁峰 일명 응취봉(鷹嘴峰)), 천변만화의 하늘의 조화를 예측하는 영특한 지상 인간들이 세운 천지기상관측소가 앉은, 해발 2622. 2m의 봉우리는 1958년부터 천문봉(天文峰)이라 불리였다. 천문봉에서 서쪽으로 1750m 상거한 곳에는 거대한 룡 한마리가 한가히 누워 갈한 목을 추기고있는데 그것은 룡문봉(龍門峰)이고 룡문봉 서북켠 1075m되는 곳에 해발 2603. 1m 고공에는 수시로 신선들이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기에 알맞는 둥근 소반 하나가 지반봉(芝盤峰) 혹은 록명봉(鹿鳴峰)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구설에 오른다. 엄동에 백두산은 어데라없이 백설에 덮여도 유독 록명봉만은 지하의 열기가 치솟아올라 사시장철 원모습을 잃지 않아 한겨울에도 신선들은 단란히 앉아 담소한다. 봉마루에는 시황제가 찾았다는 장생불로약 령지초가 난다. 깎아지른듯 험하디 험한 봉이라 사람은 오를수 없고 날새와 사슴만이 신선을 동반하니 산 사람이 <<천국>>의 맛을 어이 보랴. 록명봉 남쪽켠 1260m 되는 곳엔 백두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 백운봉(白云峰)이 해맑은 날 지상의 천태만상이 모두 드러나도 유독 종일 구름속에 묻혀있어 그우에 올라서면 <<천국>>이 머리에 닿인다. 백운봉 남 1270m 상거에는 하늘을 떠받든 기둥이 치솟아 하늘이 무너질가 두려워했다는 기나라 사람의 부질없는 근심을 덜게 하는 옥주봉(玉柱峰, 옛명 靑石峰)이 바다 표면에서 2662. 3m로 높이 솟아있다. 백두봉(白頭峰―해발2749. 6m), 화개봉(華盖峰―일명 白岩峰 해발2640m), 고준봉(孤準峰), 자하봉(紫霞峰), 관면봉(冠冕峰)―바로 옥주봉 동남 1300m에는 제운봉(梯云峰―해발 2543m)이 하늘을 오르는 사다리로 놓여있고 제운봉과 1925m 상거에는 당금 잠에서 깨여나 따웅! 하고 덮쳐올것만 같은 호랑이가 누운 와호봉(臥虎峰)이 있다. 와호봉의 음달진 곳엔 백설이 녹지 않아 한여름에도 범의 발자국이 나있다고 한다. 1712년 우라총관 무커덩(穆克登)과 리조 전판사가 각각 소속된 나라의 대표가 되여 천지 동쪽켠 정계비(定界碑)를 세운 때로부터 제운봉과 와호봉은 두쪽으로 나누어지고 천지의 남쪽켠의 삼기봉(三奇峰―해발 2525. 8m, 일명 玉雪峰)마저도 썩뚝 잘라졌다. 삼기봉은 일명 삼인봉(三人峰)이라 눈발속에 발을 잠근듯 백옥같이 반짝이는 땅우에 가지런히 선 저 세분 석인(石人)은 국경법을 지켜 말없이 묵묵히 침묵만 지키고있는것일가?!

황금을 깎아서 세운듯, 비취를 다듬어 붙인듯 이루 형언할수 없는 금상첨화, 장엄한 기봉들이 둘러선 그속에 선녀들이 무지개 타고 내려 미역을 감는다는 천지가 있다. 하늘빛에 물들어 파아란 천지물은 녀호와의 조화로 만들어진 거대한 옥그릇에 담긴 하늘 물이요 구름과 함께 가지각색 봉우리들을 그대로 비껴담은 하늘의 거울이란다.

옛날 서왕모(西王母)한테는 딸 둘이 있었는데 절세의 미녀라 자매의 아름다움을 비길수가 없었다. 어느날 반도(蟠桃)회에서 태백금성 리장경(太白金星李長庚)이 신기한 거울을 주어 비쳐보니 동생이 더 고왔다. 이에 분노한 언니가 옥거울을 요지(瑤池)에 던졌다. 그래서 인간에 떨어진 거울이 오늘의 천지가 되였다고 한다.

거대한 이 거울의 남북 길이는 4. 85km, 동서 길이는 3. 35km로 호면 면적이 무려 10평방km이다. 중국에서 제일 큰 화산호가 한낮 신선들이 손에 들고 얼굴을 비쳐보는 자그마한 거울이였다는 말이다.

나는 그 거울에 자기의 모습을 비쳐보았다. 령혼의 거울은 깨여진 나의 령혼을 그대로 비쳐보였다. 내 마음에 덕지덕지 앉은 비늘에는 까맣게 때까지 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누구인가? 내 마음은 웨쳤다.

마를줄 모르는 천지의 눈물이여

숭엄한 메부리들앞에서

창천의 뜻이 비낀 푸른 물에

내 령혼의 얼룩을 헤우노니

력사의 회고로 무거워지는 마음

추돌인양 호심깊이 가라앉으며

설음과 한의 깊이를 재여본다

못이 된 눈물의 깊이를 헤아린다

시인 조룡남선생의 눈에 눈물로 비쳐온 천지 호면의 해발은 2194m라니 수면은 제일 높은 백운봉보다 502m 낮고 중국에서 가장 깊은 고산호로서 평균 수심은 204m, 제일 깊은 곳은 373m이니 천지 바닥의 돌은 백운봉보다 875m 낮다. 서왕모의 맏딸이 화김에 던진 거울이 쇠같이 굳은 산봉우리를 펑 뚫러서 일조에 면모를 뒤바꿔놓았으니 <<천국>>에서 쓰는 절구통이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가?

제4기 지질력사를 펼쳐보면 당시에 얼어붙었던 빙설이 녹으면서 화산구에 물이 고이고 다시 사시절 눈과 비물이 보충으로 되고있는 천지의 물은 맑은 하늘빛을 닮아 파아랗다. 땅덩어리 전체가 오염병을 앓고있는 오늘 다행이도 천지만이라도 한점의 어지러움이 없다. 고산준령에 터를 잡았고 자연환경이 악렬한데다 주위는 초목이 자라지 않는 벌거벗은 암석이고 물속에 유기질과 부유생물(浮游生物)이 거의 없어 미생물외의 어류는 없다고 인간은 나름대로 믿어왔다. 하지만 자연 그대로의 저 물속에서 자연 그대로 살고있는 복받은 동물이 있다니 인간의 과학은 여기에서 또 한번 준엄한 도전을 받고있다.

강희(康熙)16년(기원 1677년)에 천지에 척추동물이 있다는 기재가 잠간 비치다가 수백년 함구했던 일이 <<무송현지(撫松縣志)>>에서 중복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년전에 사냥군 넷이 천지가의 조오대(釣鰲臺)에 이르렀을 때 록명봉아래 천지물속에서 대야만한 대가리에 뿔이 돋고 수염이 난 금황색 괴물이 요동을 치면서 물을 먹는것을 보고 경황실색했다고 쓰고있다. 1962년 길림성 기상기재공급소의 주봉영(周鳳瀛)은 쌍통망원경으로 백암봉에서 천지를 관찰하다가 천지의 동북각에서 2, 3백m 되는 수면으로 흑갈색의 개머리만한 대가리 둘이 나타나 헤염을 치는데 좋이 한시간이나 물에서 자맥질을 하며 노닐더란다. 작가 뢰가(雷加)는 1980년 8월 21일과 그 다음날 아침에 천지물이 커다란 나팔같이 갈라지면서 대야만한 까만 머리가 드러나고 소같이 큰 등허리가 북처럼 안겨오더라고 목격담을 쓰고있다. 그리고 같은 달 23일에 주봉영과 정보시(鄭寶詩), 그리고 백두산 천지기상관측소의 영화방영원 박룡식(朴龍植), 관측원 최성은(崔星恩)도 뱀과 같은 커다란 동물을 보았는데 머리가 둥글고 주둥이가 뾰족하고 목이 길고 회백색의 바다사자와 같은 매끌매끌한 피부더란다. 1981년 조선 사회안전부 탐험조는 천지에서 송어와 작은 고기들을 발견했다. 목이 길고 머리가 작고 꼬리가 길며 몸체가 큰 이 회갈색 혹은 흑갈색이라고 하는 괴물을 1만6천5백만년 이전에 생존했던 사경룡(蛇頸龍)으로 가설을 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착각이라고 목격자들의 목격담을 무마하는 사람도 있다. 좌우지간 어찌 됐든 1996년 9월 6일 백두산천지괴물연구회와 길림대학 문화연구소에서는 천문봉아래 천지물에서 길이가 500여m, 너비가 2―3m 되는 온천군을 발견했는데 섭씨 40도가 되는 온천에서 붉은 점 연어, 회색등어리 비둘기, 호랑나비벌레, 고산쥐, 말풀 등 생물을 발견, <<천지에 생물이 없다>>는 설법이 무근거함을 실증했다. 1960년전까지만 해도 천지에는 미생물과 하등동식물밖에 없었다. 1960년 조선에서 어류전문가들이 산천어와 함께 연어등속을 실험으로 천지에 넣은것이라고 한다. 산천어가 주류였는데 34년이 지난 오늘 천지 산천어는 두만강 산천어에 비해 한배가 커서 보통 길이가 40―50센치메터, 큰 것은 70센치메터가 되였다고 한다. 천지 산천어는 두만강산천어를 넣은것인데 변화된 환경에서 산천어도 입이 뾰족하고 길며 아가미와 유문도 변했다. 천지의 산천어는 7―8월에 곤충과 수생생물을 먹고 겨울에는 얼음밑의 생물을 먹고 자라며 9월이면 알을 깐다는것이다. 천지에서의 양식업 성공은 천지에 괴물이 있을수 있다는데 일정한 생태적의거를 제공한 셈이였다.

천지의 괴물은 세계를 들썽해놓았다. 연변에서는 이 수수께끼를 풀려고 괴물 사진 한장에 인민페 만원이라는 상금까지 내걸었다.

천지의 괴물에 대한 정확한 해답은 세월의 흐름과 인간의 노력에 맡길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민족은 천지속에 백장수와 공주가 사는 수정궁이 있다고 전설로 믿어왔다. 심보가 고약한 동해의 감둥이 흑룡이 불칼질로 가물을 몰고 올 때 공주의 인도를 받아 석달 열흘 옥장천을 마시고 무적의 힘을 얻은 백장수가 흑룡과 겨루었단다. 힘에 부친 흑룡은 동해로 줄행랑을 놓고 백장수와 공주는 인간의 안녕을 위해 인적을 떠나 천지를 지키고있다는것이다.

꾸며낸 전설은 목격자를 가진 괴물보다 진실하지 못하지만 그속에 담긴 위대한 인간애를 되살리는것은 괴물의 진실여부를 파헤치는것보다 억천만배 귀중하고 급하다. 이 전설에는 단군왕검의 건국리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이 깃들어있다. 모든 백성들이 잘사는 나라,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단결해서 자기보다는 남을, 혼자보다는 전체의 리익을 위해 노력하는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것이다. 장민석선생은 <<코리아니즘선언>>에서 <<홍익인간>>을 이렇게 해석한다.

<<―부자는 자기만 잘사는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신분이 높은 자는 낮은 자의 형편을 항상 보살피며 개인은 부족을, 부족은 나라의 리익을 먼저 생각하고 전체의 리익을 위해서는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수 있는 마음자세를 가졌던것이다. >>

모든 사물이나 리론이 앉은뱅이가 아닌이상 오늘의 <<홍익인간>>은 나라는 전체 인류의 리익을 도모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승화되여야 할줄 안다.

기원전 인류력사에서 거대한 별처럼 빛난 동이(東夷)의 강성은 천지와 같이 넓고 깊은 단군왕검의 흉금에서 비롯된다.

비록 먼 옛날의 일이지만 그 후예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푸른 정 고여고여 철철 넘치는 겨레의 맑은 순정을 가슴에 지니고 선인에 부끄러움없이 생을 장식해야 할것이다.

천지는 줄줄 모르는 20억㎥의 물을 저장하고있는 거형 천연저수지이다. 출구를 통해 동으로 흐르는것은 두만강, 서로 가는것은 압록강, 북으로 빠지는것은 송화강이다. 조룡남선생의 비유대로 눈물이 고여 천지를 이루었다면 이 세줄기 강은 눈물의 강이다.

나는 우유빛 안개에 무릎을 묻고 서서 바둑판에 놓은 바둑알같이 줄룩줄룩 솟아 끝없는 지평선으로 펼쳐간, 눈물에 적시여진 저 산, 저 평야를 바라보았다.

천지는 또한 심장이다. 천지의 물을 원류로 흐르는 강줄기는 이 땅의 혈맥이다. 힘찬 심장의 박동으로 줄기차게 흐르는 혈액순환에 의해 세월과 더불어 숲은 우거지고 동물은 번성하고 인간은 발전해왔다.

예나 지금이나 심장에서 뿜겨져나오는 혈액은 맑고 깨끗하지만 원시림이 끝나는 발아래 지척에서부터 혈맥은 터지고 어지러워져서 피는 고름처럼 더럽다. 철기문화의 시작으로부터 인간은 령토확장으로 상호간 원쑤가 되여 싸움을 일삼아왔다. 살육의 결과로 심장까지도 썩뚝 중간이 갈라지고 혈맥이 국경선으로 변해 인간의 자유로운 왕래에 스톱을 시켰다. 더욱 가슴 아픈것은 백두산에서 제주도까지 겨우 3천리밖에 안되는 손바닥만한 땅마저도 둘로 쪼개져서 골육상잔을 겪는다. 남북으로 갈라지고 국경으로 헤여진 리산가족들은 슬픈 애환에 목놓아 운다.

조상의 뼈가 묻히고 자기의 태를 묻은 고향을 떠나 살길을 찾아 저 백두산아래로 월경해온 한 로인은 높은 언덕밭에서 기음을 매다가도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아들하고 목메여 말했단다.

<<얘, 저 남쪽 산과 하늘이 하나로 맞붙은 곳이 이 애비의 고향이란다. 강원도 제일봉 대관령아래 오손도손 모여앉은 초가가 보이지? 지금 너의 할머니가 이 애비와 너 손자가 그리워 동구밖 수양버들밑에서 하염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섰구나. >>

이민 2세인 아들의 눈에는 옥빛 하늘과 바다빛 산발이 하나로 엉켜 보일뿐 마을은커녕 대관령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바로 이자리를 파고 관을 세워서 머리가 우로 행하게 묻어다오. 죽어서도 고향을 봐야지. >>

고향을 그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아들은 분부를 따랐다. 그런데 밤이면 꿈마다 아버지 혼령이 나타나서 고향이 보이지 않는다고 성화다. 죽어서라도 고향땅에 묻히는것이 소원이였던 아버지의 원통한 마음이라고 아들은 믿었다. 삼년제가 가까와 올 때 아들의 잠속에 찾아온 아버지는 어렴풋하게나마 고향이 보인다면서 기분이 돈 기색을 지으셨다. 죽은 귀신도 세월의 흐름속에 애향심이 들어가는 모양이라고 아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후에도 아버지는 이젠 맥이 진해서 어쩔수 없으니 면례를 해달라고 간청했다.

아들은 그 말을 따랐다. 묘를 파니 관널이 터져나가고 아버지의 머리가 시신의 허리께까지 비탈려 올라와있었다. 처음 매장할 때 아들은 머리를 밑에 놓고 발을 우로 관을 세워 묻는 불찰을 저질렀던것이다.

고향이 원쑤라는 노래구절이 있다. 죽은 해골마저도 고요히 잠들게 못하는―

이주민 3세인 나한테서 아버지의 고향은 멀다. 하지만 생전에 잔소리처럼 하시던 고향 춘천회억담이 이 뇌리에 살아있어서 어슴푸레나마 감각할수 있다.

나는 천지를 배경으로 포즈를 잡고섰는 아들녀석을 렌지속에 맞추어넣으면서 저 자식이 장차 커서 할아버지 고향을 얼마나 생각이나 할가 하고 대중을 떠보았다. 마음이 괴로움으로 차기만 한다. 혹시 어느 한 리조의 병사(兵使)의 시종을 담지나 않을는지? 리조의 병사가 백두산 장군봉에 올라 남을 바라보면서 시종을 보고 강원도 시골 아낙네가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것이 보이냐고 물었을 때 시종은 머리를 저었다고 하니 천지와 같은 흉금이 아니고는 천리안을 어이 가지랴!

갑자기 우뢰가 꽈르릉 꽝꽝 울었다. 흑운이 몰려오면서 시야를 어둠으로 꽉 채웠다. 천지는 삽시에 비를 실은 구름에 축축히 젖어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는 부랴부랴 천활봉을 내려 펑퍼짐한 천문봉 기상관측소앞에 세워진 택시로 몸을 사렸다.

폭우가 창살같이 내리 꼰졌다. 천지룡왕의 애첩인 룡녀 미홍이를 빼앗으려고 흑룡강 룡왕이 검은 검을 들고 덤벼들어 천지룡왕과 늘 싸우므로 백두산의 기후는 천변만화라고 전설은 일러준다. 금시까지 꽤 날씨가 좋았던것은 아마 휴전상태에 잠시 머물렀던 모양이였다.

신선세계 전쟁은 인간의 삶의 현장을 어둠속에 파묻고 사람들의 물욕싸움은 인간의 마음하늘에서 해빛을 몰아간다.

이윽고 폭우가 멎고 서서히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자 택시가 움직였다.

나는 작은 가슴에 천지를 안고 귀로에 올랐다.

<<쾅쾅 바위를 찧는 폭포의 기백과 펄펄 피를 끓이는 온천의 정열과 사품치는 백하의 절주>>(조룡남의 시에서)를 지닌 백두산이 마음의 기둥으로 이 내 가슴에 세워졌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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