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절 안전농촌

안전농촌은 집단부락의 특수한 형식이다. 안전농촌의 건설은 《자작농창정계획》을 밑거름으로 하고 있다.

만주의 수전개발은 조선농민에 의해 시작되었고 지속되었다. 하지만 수리시설이 낙후하고 병충해가 심하고 자금이 극히 부족하고 농민들의 수익이 대부분이 소작료, 가렵잡세 및 고리대의 농업대부금에 먹히고 원래 수전을 풀던 땅이 점차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황무지로 변해 수전 농사는 그 성적이 점차 내려갔다. 또 홍수 피해로 많은 밭이 밀려가기도 했다. 조선농민은 소작농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생활의 거주지를 잃었다. 이러한 개관조건에서 일제의 《자작농창정계획》이 《통제-안정정책》에 맞추어 제정되였는데 그 뜻인즉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동아권업회사는 1932년부터 남만과 북만에 《안전농촌》을 세웠다.

철령 안전농촌 만철본선인 란석산역 서쪽 2600m 되는 곳에 위치했다. 사타자촌을 기점으로 탕우보자, 영가툰, 신안촌 등 4개 부락을 포함하며 봉천성 철령현의 행정구역에 속한다. 이주역사를 보면 조선농민이 거주하기 전 중국인 부락이 있었으며 1924년 사타자촌에 석리제(石利济), 이진건(李镇健), 김상승(金相乘), 윤량택(尹两泽) 등 조선농민의 이주가 있었다.

철령촌은 기후가 요동반도와 북만의 중간기후에 속하며 겨울에는 강설이 많고 이듬해는 우기에 강우량이 많아 농사에 대단이 이로웠다. 또 본촌은 만철 부속지 근처에 있어 교통이 편리했다. 조선총독부의 보조를 받았으며 동아권업주식회사가 대행하여 1932년에 건설되었다. 1941년 현재 383호가 있으며 경작면적은 960정으로 대부분 수전이며 대부금상환 연한은 10년, 이미 5만 2422엔을 갚았다.

영구안전농촌 봉천성 영구현 영구부근에 있다. 1933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건설되었다. 1939년 현재 호수는 1834호, 수전개발면적은 4069정보이며 대부금상환 연한은 15년이다. 요하의 하구와 전장대 사이의 쑈연자방아방에 1500정보를 개간하고 2500 정보를 상조했다. (1934년 6월말)

수화안전농촌 위 빈강성 수화현 흥화향에 위치해 있다. 빈-북선 진가강역에서 동쪽으로 4리 되는 곳이다. 북으로 노민하가 흐르고 있어 수전농사가 적합했다. 1934년 동아권업회사는 우증점 대 40명 지주의 토지 1602헥타르를 렴가로 강제 수매하여 수화안전농촌을 세웠다.

동아권업은 피난민을 구제한다는 명의로 할빈 조선민회 수용소에 수용된 조선남부의 이민들과 만주리, 목단강일대의 조선이민 도합 488호를 선후하여 안전농촌에 이사시켰다. 농민들은 매호당 땅 2.4 헥타르와 한 칸 반짜리 집 한 채를 대부 받았는데 수리비용, 이사 비용을 합쳐 10년 기한으로 해마다 130원을 갚아야 했다. 1941년 현재 480호, 거주민과 1142정 경작면적을 갖고 있다.

하동안전농촌 위 빈강성 주하현 오길밀하역 부근에 위치했다. 1939년 동아권업주식회사에 의해 건설되었다. 2000여보를 자연 관개하였으며 9.18사변 후 1000호 수용하였다. 1933년에는 579호, 2509명으로 800정보 경작지를 운영, 1941년 현재 거주인구는 766호, 경작면적은 1878정이다.

삼원포안전농촌 봉-길선 산성진 동남쪽 160리에 위치한 유하현 삼원포시가지의 접경지대이다. 일찍 1911년 4월, 삼원포의 서추가에 《경학사》가 무어졌고 그해에 《신홍무관 강습소》가 세워졌으며 1919년에는 《대한독립단》이 건립되었다. 1935년 예정된 제2차 안전농촌건설계획으로 건설되었다. 건설자는 동아권업주식회사이다. 1939년 현재 172호에 수전면적 355정을 소유하였다. 농업대부금은 10년 기한으로 되었고 1940년까지 이미 3518엔을 갚았다.

이외 위금주성 반산현 영흥안전농촌에 조선인 1832호, 경작면적 4200정이 있었고 1936년에 설립된 위 빈강성 연수현에 중리진 안전농촌(설립자 김영창)에 120호 조선인이 80정 수전을 가꾸었다. 위 삼강성에는 1936년에 건설된 안전농촌이 두개 있었는데 의란현에 길성훈 안전농장(234호, 300정 수전), 류가툰 안전농장(설치자 정수홍, 호수 130호, 경작수전면적 133정)이었다. 탕원현에도 금곡안전농촌, 학립강 안전농촌이 세워졌다.


제9절 조선인농장개황


조선인농장은 집단부락의 또 하나의 다른 형식이다. 조선인농장은 주요하게 북만과 남만의 영구, 해성 등 지역에 분포되었다.

해륜현 선목농장 1929년에 건설되였는데 대표자는 정준수(鄭駿秀), 당시 농가호수는 55호, 151명이며 경영토지총면적은 120쌍, 투입자금은 2만 3527엔이었다. 빈-북철도가 농장의 중앙을 관통하여 교통이 편리하였다. 그 후 해마다 자금투입이 있었으며 많을 때인 1937년에는 5만 3000엔에 달했다. 농장의 조선농민은 남선출신이 많았고 더욱이 경상북도 인이 많았다. 이것은 농장의 주요 창시자인 정준수씨가 경상북도인 것과 연계 있는상 싶다. 1936년 현재 농장의 호수는 184호, 인구는 764명이고 600정의 논밭만 경영하였다. (《재만조선인현세요람))

또 《在北滿鮮人農家的入植過程和鮮滿的工地所有及利用事情》에 따르면 1938년 현재 선-목농장의 호수는 144호, 인구는 723명이며 경작총면적은 712쌍이고 총 수확고는 9692석이었다.

아성현 평방농장 동지철도 소가하역의 동북쪽 약 20화리 지점에 위치하였다. 1929년 4월에 설치되었으며 농장에는 중국인지주 수 명이 있고 조선인대표는 배선용 (裴善容)이다. 1934년 현재 조선인 120호, 520명이 있으며 200정 수전을 경영했다. 미개간지는 개간하기가 쉽고 벼농사에 적합했다. 농장에는 조선인 의약 자가 없기에 중국인의 약방에서 치료받는 것이 보통이며 농장부근에 천주교교회당이 있고 조선인신도도 많았다. 소작료는 1쌍에 알곡 3석 5두이다.

오상현 소산자수전농장 소산자에 거주한 조선인 박의영(朴義永)씨는 약방을 경영하면서 중국인속에 상당한 위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소산자 시가지역에서 500m 떨어진 서남지대를 개간하여 300쌍 수전 농사를 계획하여 80여 호 조선인을 이주시키였으나 중국인지주 조 씨의 반대로 하여 이주자는 사처로 흩어졌다.

오성현 충하농장 중국인지주로는 우험주(于险舟)가 있었다. 우 씨는 원 동북군사장을 맡은바 있다. 조선인대표는 류대흥(刘大兴), 박일만(朴一万)이고 조선농민은 200여 호이며 경작지는 450쌍, 미경작지는 600쌍 이상이었다. 소작료는 1쌍에 3석이다.

유수현 고자교농장 유수현성에서 8화리 떨어져 있는 동북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고자교, 소흥륭구, 포저툰 등 3개 부락을 덮고 있다. 중국인지주로는 충하조전(稻田) 회사의 복진동(朴振东), 양씨가 있으며 조선인대표는 박일만, 김규진(金奎镇), 박진동 (朴镇东) 등 이다. 조선농민호수는 150여 호, 인구는 약 700명이다. 소작료는 4석 5두 내지 5석이고 개간지는 350쌍, 미개간지는 50쌍이다. 조선인거주자는 거의 모두가 귀환자였다.

유수현 삼가자농장 도뢰소에서 40화리인 삼차하서남쪽 35화리 지점에 위치했다. 중국인지주 수 명이 있고 조선농민은 약 80호이며 경작지는 약 200쌍, 미개간지는 200쌍이상이다. 삼가자 시가지역에 학교가 있었다.
내몽골 삼합농장 1936년 말, 전곽기(前郭旗) 하라헤이, 류수천, 바르그대 등 지방의 조선농민은 조선인자치농장창립을 계획하였다. 대표자는 오자안, 정운락이다. 이들은 지주와 협의하고 측량을 시작했다. 이쯤 류수천의 지주 박재숙은 《만선척식회사》의 힘을 빌어 삼합툰에 만척회사 삼합농장을 건설했다. 타지방에서 농민을 모집하여 이주시켰다. 1938년 오리라하는 일본인이 농장의 관리를 맡았다. 《만선척식회사》는 헐값으로 산 토지를 세놓은 외 첫해에 식량, 종자, 부림짐승과 농기구를 값을 쳐서 농민에게 대부해주었고 옷, 신발, 기름, 소금 등 일용품을 외상으로 배급하였다. 소작료는 3·7제였다. 농장에는 학교도 있었으나 일본어를 국어로 하는 노예교육을 강행했다.

이밖에 적지 않은 조선인농장이 있다. 영구 장가탕의 삼익농장(1934년 5월 설치, 설치자 장세경, 호수 51호), 할빈 교외 원향툰의 원향툰 농장(1927년 4월 설치, 호수는 40명), 아성현 취원창의 취원창농장(1925년 7월 설치, 호수 170호), 아성현 이층전자의 이층전자농장(1926년 4월 설치, 호수 100호), 녕안현 해림남전자의 남전자농장(1934년 설치 설치자는 녕고탑 조선인민회, 호수는 104호), 태래현 파대의 파대농장(1922년 3월 설치, 대표인 류종호, 호수 101호), 통료현 오도만의 오도만 농장(1932년 4월 설치, 설치자는 坂本直吉, 호수 85호) 등등 이다.

만주를 벗어난 기동벌에도 조선인농장이 세워졌다. 1937년 은리 동남쪽 25리 되는 바다가에 조하농장이 섰다. 조선인지주 최상기가 8세대, 40명의 조선농민을 소작농으로 받아들여 1000여 무의 경작지를 경영하였다.

1938년 란하 하류의 창려 해변가에 35세대 조선인 소작농으로 이루어진 창려농장이 섰다. 조선인지주 신영철이 1500정보의 경작지를 가꾸었으며 일본인 특무 2명이 있었다.

1940년 천진동북쪽 로태 지구에 조선총독부가 로태농장을 세웠다. 당해에 조선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150여 호의 농민을 끌어왔고 또 동북과 화북 각 지역에서 700호를 모집 하여 3500정보의 땅을 차지하는 농장을 꾸렸다.

1944년 일본 《화북간업 회사》는 하북성 관현에다 백각장 농장을 건설하였고 조선인과 한족 각 300여 호를 모집했다.

이외에도 서하남농장, 칠이해농장, 적양해농장 등 조선인농장이 있었다.


제 10절 조선인의 생활

만주조선인의 노동보수는 동업종 일본인보다 퍽 낮으며 중국인 보다는 좀 높은 편이다. 조선인을 1로 표준한 비률을 보면 일본인은 1.81이고 중국인은 0.86이다. 특히 야쟁업종에서 일본인은 조선인보다 0.95배 높아 첫자리를 차지하고 중국인은 인부(人夫) 업종에서 조선인의 0.74배밖에 안 되여 보수가 가장 높은 업종으로 된다.

조선인의 노동보수를 업종별로 적으면 목공은 1.85엔, 석공은 1.60엔, 木挽은 1.83엔, 좌관(左官)은 1.81엔, 단조(锻冶)는 1.52엔, 인부(人夫)는 1.08엔, 평균 1.60엔이다. (《재만조선인현세요람)에서)

조선인의 1개월 생활비용을 예로 살펴보면 월수입이 20원일 경우 집세, 연료비용, 화식비용이 주요한 지출로 되며 의료비용, 교육비용, 저축은 없는 형편이다. 월수입이 50원일 경우 집세가 10원으로서 가장 많은 지출로 되고 연료비용과 화식비용이 20원, 의복비용이 5원, 교육비용 및 기타가 4.50원, 교제비용 3원, 저축은 3.50원이다. 월수입이 70원일 경우 집세는 12원, 연료비용과 화식비용이 25원, 의복비용 8.50원, 교제비용 8.00원, 의료비용 2.50원, 저축은 4.0원이다. 월수입이 100원일 경우 집세가 20원, 연료비용과 화식비용이 31원, 복장비용 12.00원, 교제비용 12.00원, 교육비용 및 기타가 7.80원이다. 저축은 8.0원으로 되었다.

만주의 조선농민의 수익은 대체로 농사와 부업으로 나눠지는데 생활형편이 이전 보다 별다른 호전이 없음으로 보아진다. 농사로는 끼니를 이어가기 바쁘고 부업은 새끼, 멍석, 천을 짜는 소규모의 일로서 크게 발전이 없었다.


제 6 장 조선인의 농업

재만 조선인의 80%이상이 농민임은 앞에서 지적한바 있다. 조선농민은 수리에 천성적인 재질을 갖고 있어 물이 흐르는 곳에는 논을 풀어 벼농사를 시작하는 것이 통례이다. 아무리 편벽한 산간지대에서도 2-3호 농가가 때론 동떨어져 있어도 수전을 경영하는 것이 조선농민의 개척모습이라 하겠다. 중국인들이 거들도보지 않은 습지가 조선농민에게는 버릴 수 없는 벼 농장이 되는 일을 가꿈 찾아볼 수 있다. 만주 벼 생산량의 약 90%가 조선농민에 의해 산출 되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만주이주역사가 수전보급의 경로라 생각하여도 과오는 아닐 것이다.

제1절 조선인의 초기벼농사

일찍 고구려와 발해시기에 우리 선조들은 동북에서 벼농사를 하였다. 《책성의 콩(柵成之豆)》, 《로성의 벼(盧城之稻)》란 말이 있었다. 《발해 지리사》에 의하면 로토성은 중경 현덕부(관할범위는 오늘의 화룡시, 용정시, 연길시, 안도현, 왕청현과 조선의 함경북도, 양강도의 일부분) 서쪽 130리 되는 곳이다. 발해가 멸망된 후 요, 금, 원, 명, 청 몇개 왕조에 걸쳐 무려 900여 년 간 동북에서 벼농사를 했다는 기재가 있었다. 19세기 중엽부터 많은 조선인이 만주로 이주하였으며 이들은 진펄을 갈아 번지고 물도랑 을 빼고 논뚝을 만들고 강물을 끌어들여 논을 풀고 벼농사를 다시 시작하여 만주 벼농사 의 개척자로 되었다.

1846년, 조선농민이 혼강 입구 부근에서 벼 재배를 하였고 1861년 안동의 삼도랑두 부근에서도 벼 재배를 하였다. 이 두 곳의 벼 재배는 전해지지 못하였다.

1870년 김 씨라는 조선농민이 통화현 하전자에 왔다. 몇 해동안의 세심한 관찰과 체험을 거쳐 그 일대의 기후와 수온의 변화정황을 파악하게 된 그는 소택지와 수렁을 논으로 개답하고 벼농사에 성공했다. 때는 1875년이었다. 이는 근대동북수전개발의 첫 시작이다.

1880년 단동 탕산성 3호 조선농민이 수전을 개발하였으며 그 후 봉성현 사리채, 륙구자 (陸溝子) 등지로 확대되었다가 나중엔 수암현, 장하현 및 단동 남부지대로 확대되었다.

1883년 김화룡(金華龍) 등 수 명 조선농민이 통화 소만구(小灣溝)로부터 유하현에 이사해 와서 벼농사를 시작했다. 그 후 1921년까지 삼원보, 대화사, 소사탄, 선인구, 록미구 등 지방의 2000여 호 조선농민이 3500여 정보의 논을 풀었다.

집안현의 벼농사는 1895년 팔왕조촌에서 조선농민에 의해 시작되었다.

1900년, 유하의 조선농민들이 해룡, 동풍, 서풍, 개원 등지로 이주하여 수전을 개간 하였다. 1905년 조선 경상남도 협천군 용정면의 손재두 씨가 네 식솔을 거느리고 동풍현 화수화로 이주해와 수전을 개간하였으며 같은 해에 평안남도 평원군의 김응룡이 와우산으로 이주해와 수전을 개간하였다.

1900년 조선농민 김지순 등이 덕혜현 남령자에 1.5헥타르의 논을 풀었다. 이것이 길림, 장춘지역의 첫 수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간도는 기후가 영하이고 무상기가 짧기에 벼농사를 할 수 없다고 여겼다. 기재에 의하면 《명치초년, 즉 1868년경 두만강 연안지역에서 벼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1890년 두만강안 종성위자(현 용정시 광개향 광소일대)에서도 벼를 재배하였다. 1900년 조선함경남도에서 이주해온 농민들이 해란강 유역의 세전벌과 지신 대교동 부근에서 습지를 개간하여 논을 풀어 벼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수전면적이 확대되었다.

1890년 유하, 해룡, 안도 등지의 조선농민이 관전에 이주하여 수전을 개발했다.
1908년 조선농민은 영구현에서 수전개발을 하였다. 그 후 송화강 및 그 지류를 따라 휘남, 반석, 교화에서 계속 수전개발에 힘썼다.

1905년 일-러전쟁 후 안-봉철도가 개통되자 조선농민이 압록강을 건너 안동 지구의 하탕지자, 백채지, 맥기산, 소단산 등 지역에 집결되여 벼농사를 지었다.

봉천, 신민지역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벼농사는 1908년 김시정(金時禎) 등 조선농민 5-6명이 신민현 서공태보의 황무지 10헥타르를 소작 맡아 시작되었다.

무순일대는 1910년경에 평안북도 의주군의 송병주(宋秉柱), 김만리(金萬里) 등이 무순현 포가툰(飽安屯)에서 논을 처음 풀었다. 1921년에는 포가툰, 동사, 남장당 일대에 1600여 명 조선농민이 1200여 정보의 수전을 개간했다.

반석현의 벼농사는 명성에서 시작되었다. 1910년 가을, 조선남부에서 농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벼농사를 지었다. 1921년에 이르러서는 500여 호 조선농민이 600여 정보의 논을 풀었다.

1910년, 조선농민은 장춘지역의 공주령 대유수를 중심으로 채가, 삼가자, 이통의 각소 등 지역에서 수전을 개발하였다.

북만의 수전은 1910년 이후 동녕현에서 우선 개발되여 여기에서 목릉, 녕안, 해림 방면에로 확대되었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10년대까지의 벼 재배를 시험단계로 볼 수 있다. 이시기 규모가 작고 범위도 넓지 않았으며 수리관개시설도 많이 않았다. 1906년 6월, 연길현 지신향 대교동의 14명 조선농민은 자체로 모금하여 길이 1308m에 달하는 인수로를 파서 7정보의 논을 관개하였다. 이는 간도 최초의 수리관개시설이다.

벼농사는 수확고가 높고 쌀밥은 먹기 좋았다. 적지 않은 지주들은 조선농민을 모집하여 벼농사를 짓기로 하고 소작을 주었다. 1908년 금주(金州)사람 조은해(趙恩海)가 조선농민을 모집하여 신민현 공태보에서 황무지 100무를 개간하여 논을 풀었는데 당해에 풍작을 거두었다. 이듬해에는 50-60명을 모집하여 벼농사를 지었는데 좋은 해는 큰 이익을 보았다.

만주의 벼농사가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 중 하나가 중국인지주와 중국당국에서 벼에 커다란 흥취를 가졌고 조선농민을 소작인으로 쓰면서 벼 재배기술을 보급한 것이다. 이 시기를 거쳐 만주의 벼농사는 북만과 서만에로 확대되었으며 만주의 농업과 대외무역에서 날로 중요한 작용을 발휘하였는데 이는 우리 민족의 공헌이 아닐 수 없다. 수전 농사는 우리 조선인의 선천적인 농사기술이며 만몽, 시비리아의 수전은 조선인을 제쳐놓고는 운운할 수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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