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두만강천리

설음의 강이길래 여울마다 소리 높소

원한의 강이길래 구비마다 물이 깊소

오늘은 무슨 시름 한강물 실었소?

조룡남 작 <<두만강>>

제1장

두만강 발원지

전설에 따르면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은 옥황상제의 세 자매강이라고 한다. 천지의 맑은 물에 미역을 감으러 백두산에 내려왔다가 아름다운 산천경개에 현혹되여 부왕의 명을 어긴 그녀들은 부득이 동해 룡왕을 찾아 동, 서, 북으로 떠났단다.

나는 막내 두만선녀의 전설의 행적을 찾아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산곡길을 신나게 조여갔다. 자애로운 해빛은 호듯호듯 내리쪼이고 싱그러운 바람은 피부를 간지른다. 숲속에선 갖가지 새들이 비릿쫑 비릿쫑뻐꾹 뻐뻐꾹―사랑을 속삭인다. 오매에도 그리던 사랑하는 녀인을 찾아가는 그런 기분으로 나는 뜻깊은 답사의 길에 올랐다.

하늘아래 첫동네라 일컬어지는 화룡시 광평농장(廣坪農場)을 지나 푸른 솔과 은빛봇나무와 백양이 우거지고 기화방초 손저어 부르는 산곡길을 75km 줄여가서 나는 발길을 멈추었다. 백두산 천문봉에서 동으로 30. 4km, 지도에서 동경 128. 27도, 북위 42. 01도 선 교차점이다.

백두산 용대지상(熔臺地上)에 붙어사는 화산추(火山錐)로 허리가 굵은 절구통에 삿갓을 씌워놓은듯한 적봉(赤峰―일명 紅土山 해발 1321. 4m)이 내가 선 길에서 서남으로 불과 0. 7km이다.

숭선에서 적봉으로 가는 길은 별로 어렵지가 않았다. 그러나 후날 백두산에서 적봉으로 오는 길은 갈림길이 많아서 미궁속에 든듯 했다. 이도백하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 왼손켠에 <<화룡 277km, 백두산 31. 4km>>라는 도로표식이 나온다. 바로 그길로 차머리를 돌려서 줄곧 달리되 오른손쪽으로 열개, 왼손쪽으로 여덟개의 갈림길을 버리고 곧장 달려야 한다. 그사이 크고작은 다리 일곱개를 건너고 연지못으로 가는 길옆 숲 소나무가지에 필자가 비닐을 매여놓아 표적을 삼았다. 적봉은 연지늪에서 1. 5km 상거의 지척이다.

작가 류원무선생은 <<두만강팔경>>에서 이렇게 썼다.

―적봉은 운치가 있는 산이다. 백두산 화산분출에 의한 부석은 거개가 검은 재빛인데 여기 적봉을 덮은 부석은 신기하게도 적갈색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적봉, 그 적갈색 산을 푸르른 소나무가 덮은것도 조화고 그 생김새가 만두와도 같이 뉘연한 구릉가운데 우뚝 솟은것도 유표하고 감칠맛 있다. ―

수탉의 볏마냥 빨간 홍토가 푸른 숲에 쌓인 산정의 수평면적은 0. 8평방km, 그 둥두렷한 산정에 올라 사위를 바라보면 멀리로 크고 작은 두 연지봉(嚥脂峰)과 백두봉이 지척으로 달려오고 서북쪽으로 몸을 돌리면 원지(圓池)가 해빛아래 둥근 손거울처럼 반사되여 눈을 부신다.

직경이 180m, 맑고 얕은 못물속에서 꽃무늬가 돋힌 산천어가 무리지어 춤추는것이 마치도 선녀가 미역을 감는듯 아름다워 일명 천녀욕궁지(天女浴躬池)라고 한다. 옛 이름은 푸러후리(布勒瑚里), 만족어로 <<룡구(龍駒)>>라는 뜻이다. 못가에는 들쭉과 진달래와 도라지풀이 잔디처럼 곱게 깔리고 주렁진 머루다래가 향기를 뿜는다. 우리 민족과 같이 백두산을 룡흥지지(龍興之地)로 삼아온 만족들은 일찍 이 연지에 신화적인 전설을 만들어 넣었다.

<<청조실록>>에 의하면 백두산은 청조통치자들의 발상지로 되여있는 건국전설이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옛날 백두산 천지에서 세 천녀가 목욕을 했다. 그중 제일 어린 천녀 푸쿠륜(布庫倫)이 붉은 열매(들쭉)의 씨를 먹은후 푸쿠리옹순(布庫里雍順)을 낳았다. 그는 성장한후 어머니의 분부에 따라 삼성(三姓)이란 지방에 가서 그곳의 내란을 평정하고 국주(國主)로 되였으며 나라의 이름을 만주(滿州)라고 하였다.

류건봉은 안도현 지사로 있으면서 청나라 선통원년(宣統元年) 7월 못가에 <<천녀욕궁처(天女浴躬處)>>라는 돌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암몰되고 없다. 1995년 당시엔 인적이 닿지 않았던 연지늪에 1997년에 <<천녀욕궁지>>라고 쓴 세멘트 표말이 세워있었다.

만족들이 옹순황제의 어머니라고 하는 푸쿠륜이나 우리 민족이 전설로 기억하는 두만선녀도 역시 옥황상제의 셋째딸이다. 하지만 푸쿠륜은 겨우 기동을 낳았다면 두만선녀는 20세기에 이르러 옥녀의 형상으로 부상한다.

한 산간마을에 항일유격대에 남편을 보내고 외롭게 사는 젊고 아름다운 옥녀가 있었다. 전설속의 녀주인공은 하나같이 아름답듯 그녀도 경국지색이였단다. 이웃마을의 일제주구놈이 옥녀의 미색에 반해 핍박하자 녀인은 남편을 찾아 적봉령으로 떠났다. 마침 토벌대를 이끌고 그곳에 이른 주구놈은 옥녀를 보자 겁탈하려고 했다. 병풍같이 깎아지른 적봉에 뒤길이 막히고 앞은 원지가 길을 막아 피할수 없게 된 옥녀는 치마를 머리에 둘러쓰고 늪에 뛰여들었다. 뒤를 쫓던 주구놈은 늪에 빠져죽고 뒤미처 남편이 유격대를 거느리고 나타났을 때는 못우에 비낀 아름다운 무지개를 타고 옥녀는 승천을 했단다. 그래서 현재 연변 사람들한테 원지라는 이름은 생소하고 오히려 옥녀늪으로 기억이 깊다.

대같은 민족의 절개가 깃든 이 옥녀늪이 바로 두만강의 발원지이다. 못에서 흘러내리는 약류하(弱流河)와 조선 서남쪽에서 오는 홍토수(紅土水)가 적봉기슭의 개바닥에서 합류하여 두만강의 흐름을 시작한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중조국경은 시작된다.

늪에서 3km 떨어져있는 적봉령, 그 적봉령에서 겨우 30m 되는 발치에 <<21변계비석(二十一邊界碑石)>>이 세워졌다. 새하얀 돌비석 남쪽켠엔 <<조선>>, 북쪽켠엔 <<중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바로 이곳에 이런 비석이 세개가있는고로 사람들은 이곳을 일명 <<삼각지대>>라고도 한다.

생명을 걸고 모험하지 않고는 감히 오갈수 없는 국경선표식이 처음 선것은 1712년 봄, 청나라 우라총관 무커덩이 리조의 군관 리의복(李義復)일행과 함께 백두산 동쪽 10리 되는 곳에 세웠다는 <<정계비>>라고 력사는 말한다. 너비가 한자 여덟치, 높이가 두자 세치되는 돌에 78자를 새겼다는 <<정계비>>는 <<문헌>>에만 살아있고 실물과 원 지점은 바이 찾을 길이 없다. 그리고 광서 13년(1887년)에 두만강 발원지의 암류가 흐르는 곳에 경계석 10개를 세우고 비석마다 <<화하금탕고하산대려장(華夏金湯固河山帶礪長)>>이라는 글자를 새겼다는데 찾을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 나라의 이름과 반들반들하게 잘 다듬어진 차가운 돌의 어마어마 무서운 성질을 밝힌 글자까지 겨우 열한자로 함축된 비석이 그것을 대체하여 두나라 사람들의 자유로운 왕래의 발목을 려권이나 통행증이 없이는 꼼짝 못한다고 린색하게 묶어놓고있다.

나는 중국측 바위에 걸터앉아 약류하와 홍토수가 서로 만나 주절대며 흘러가는 개울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남북 길이가 4m, 동서 길이가 2m인 합수목, 고작 무릎을 적시는 개울이 나라와 나라의 지경이라는 사실을 나는 도저히 믿을수가 없었다.

전날(1994년 11월 1일) 나는 두만강답사의 첫코스인 화룡시 숭선진 고성리촌(崇善鎭古城里)에 이르렀었다. 화룡시와 80km 떨어진 고성리는 해발 600―800m의 고한지대에 속한다. 군함모양의 두개의 산아래 손바닥만한 벌에 논을 풀고 밭을 부치여 살아간다. 대안은 조선 량강도 대홍단군 삼장리이다. 몇십여m 너비의 강을 사이두고 마주 앉은 고성리촌과 삼장리는 호수나 집모양이 어슷비슷했다. 다르다면 450여명 인구를 가진 고성리에는 진 소재지 치고는 상점과 려관, 식당, 난전이 많고 삼장리의 조용한 거리엔 거폭의 표어가 많은것이 대비적이였다. 강물은 물살이 세 긴해도 강바닥이 환히 보이게 물깊이가 겨우 무릎을 치고 강폭도 십여m에 불과했다. 강물속에 널린 돌들을 징검다리로 삼아서 물을 묻히지 않고도 국경을 건널듯 싶었다.

교두려관에 짐을 벗어놓고 곧장 해관으로 나갔다. 강북안에 세워진 2층 건물이였다. 1952년에 건립되여 이듬해 12월부터 정식으로 변경검사업무를 실시해온 고성리통상구는 국가의 2급 통상구였다. 자초에는 두나라사이에 쇠바줄을 걸고 쪽배로 왕래를 했고 그후엔 숭선공급판매합작사 앞 두만강우에 나무다리를 놓고 오갔다고 한다.

해관앞 공지엔 조선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쑤군거렸다. 그들은 십여m 정도의 폭에 무릎을 넘을가한 개울을 건너려고 수삼일 지어 한달씩 려관에 묵으면서 통관이 되기를 고대하고있었다. 일년에 한번씩밖에 허용이 안되는 <<친척>>방문을 <<특수상황>>을 위조해서 두번, 세번씩 나들며 장사를 하려니 조선측의 허가를 따기가 극난이란다.

산곡간을 누비며 주절주절 흐르는 맑디맑은 두만강을 마주하고 서서 나는 이것이 두 마을을 두 나라로 갈라놓는 국경으로 받아들이려고 무등 애를 썼다. 겨우 무릎을 칠가한 깊이에 십여m 폭이라 물우에 보이는 큰 돌을 골라 디디며 징겅징겅 건너뛰면 될것이 아닌가. 개울이나 다름없는 두만강우에 가로 건너간, 1994년 중조 두나라에서 투자하여 놓은 콩크리트 국경다리(1995년 10월부터 정식 개통됨)는 너비가 9m, 자동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다닐만했고 길이는 72m, 지척으로 바라보이는 콩크리트 다리 량켠 머리에 선 복장이 다른 두나라 군인의 손에 들린 총이 마구잡이로 내 머리속에 국경의식을 쑤셔넣었다. 그리고 어두운 색갈의 복장에 네모난 수건으로 머리를 싼 조선녀성들의 모습이 이국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했었다. ―

그런데 이 시각 인적도 없고 강도 없는 수풀속에 세워진 돌비석을 소름 끼치는 국경으로 받아들이려니 도저히 실감이 오지 않았다.

이른바 국경이란 문명의 사생아이다. 오늘 해발 1400―1800m의 백두산 구간에서만 간신히 찾아볼수 있는 목본식물이 여기 두만강류역의 생존공간을 장식했다는 2만 6천년전 구석기시대의 <<안도인(安圖人)>>들한테 국경이라는 말은 당치도 않은 존재였을것이다. 털코끼리, 털코뿔소, 히에나와 같은 맹수들과 가렬한 생존투쟁을 벌리면서 그들은 자연이 준 혜택을 고스란히 그대로 <<향수>>해왔다고 석문산 석회암 동굴유적은 말한다.

안도현 명월진에서 남쪽으로 2. 5km 떨어진 석문산(해발 50m)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나지막한 산줄기이다. 1963년 이산 남쪽 비탈에서 회돌을 캐다가 우연히 동물화석을 발견하였다. 후에 과학자들의 조사와 발굴을 거쳐 두개의 석회암동굴이 발견되였고 동굴안에 쌓인 퇴적층에서 고대의 포유동물의 뼈화석과 사람의 이빨화석 하나가 나타났다. 오른쪽 아래의 첫번째 앞 어금니였다. 이빨의 맞물림면의 사기물질이 꽤 닳긴 했어도 볼과 혀끝이 현대인과 근사한 고인류로 추측되고있다. 동물화석의 종류는 도합 10과 16속 19종이고 현대 동물무리의 종속들로 추정된다. 일부 짐승의 뼈와 사슴뿔은 날에 찍히운 자리가 뚜렷이 남아있다. 아마 이 짐승들은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불행이도 <<안도인>>의 식탁에 올랐을것이고 화석으로 굳어진 이빨의 주인도 중년 혹은 장년으로 학자들이 의견을 모으고있다니 혹시 사냥에서 상한 미열로 운명을 하지 않았을가고 나는 생각을 굴려보기도 한다. 박룡연선생이 <<안도인>>을 <<털코끼리 사냥군>>이라고 표현한것은 그럴듯하다고 하겠다.

<<안도인>>은 물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던 짐승 역시 아쉽게도 벌써 1만년전에 멸종되였다. 세상 만물은 세월의 흐름속에 사라지기 마련이다. 어쩔수 없는 자연의 법칙앞에서 모든 존재는 무력하다. 하지만 가엽게도 살아 뛰는 짧디짧은 과정은 피빛으로 랑자해 물씬물씬 비린내를 풍긴다.

몽둥이며 돌멩이며 투창따위에 매달려 채집과 사냥으로 삶을 영위해갔던 <<안도인>>들은 맹수의 위험에 늘 불안했을테지만서도 하나로 뭉쳐서 생사를 같이하지 않을수 없었던만큼 오히려 화목했을것이다. 하지만 구석기시대를 살아온 <<안도인>>을 지나 룡정시 지신향 금곡촌(龍井市智新鄕金谷村) 경내 서산유적지에서 발견된 4000여년전 신석기시대의 씨족부락에서 살았던 <<금곡인>>들로부터 인간의 화목은 깨지기 시작했고 동산유적지에서 나타난 2000―3000년전 <<금곡인>>들은 부락간의 참혹한 전쟁속에서 허덕였을것이다.

서산유적지 절반 땅굴로 된 장방형의 6채의 씨족부락민 집터에서는 석기며 골기며 토기가 출토, 꽃무늬가 돋힌 토기에는 <<인(人)>>자형 무늬가 태반이였다.

동산유적지 14개 옛 무덤속에서 출토된 문물은 장식품을 비롯, 돌보습이며 도자기들 외에도 사냥도구이면서 동시에 살인공구인 칼이며 화살촉 등이다.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생성된 잉여생산물은 인간의 욕심을 꼬드겨서 인정을 삭막한 사막에로 몰고 갔다. 모든 생물의 공동 소유물인 땅덩어리에 느닷없이 <<임자>>가 생겨나고 더욱 많은 비옥한 땅과 량곡을 차지하려고 <<임자>>들은 욕심사납게 전쟁을 선택했다. 1972년 룡정시 동성용향 용성촌(東盛涌鄕勇成村)에서 1. 5km 남쪽에서 발견한 40여개 석마동(石磨洞) 옛무덤속에 동거울, 자기병, 짐승이빨장신구―등과 함께 묻힌 료(遼), 금(金)시대의 해골들은 살아 생전에 거칠고 완강한 이민족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고애를 무던히들 겪었을 줄로 안다.

인류문명의 력사란 지루한 전쟁사로서 뒤돌아보면 비운에 죽은 무덤으로 충만되여있다. 묘비나 다름없는 깜찍한 <<변계비석>>의 작간으로 웅장한 백두산이 뭉청 두쪽이 나고 산과 벌을 적시는 강물로 중국과 조선의 강토가 굳어지기까지의 이왕지사를 사책은 미처 다 적지 못하고있다. 하지만 해지는 서녘으로 흐르는 압록강과 해뜨는 동녘으로 달려가는 두만강은 낱낱이 빠짐없이 보아왔고 한시도 쉬지 않고 주절주절 이야기하고있다.

천문봉을 내려 적봉령까지 험한 산길로 조여 적봉에 이른 두만선녀는 원지의 맑은 물에 목욕을 하고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희망의 바다 동해로의 원정을 시작했다. 바위에 바위, 돌에 돌을 지나 험한 산길을 구름인양 내려서 동해까지 뒹굴며 달리며 에돌아간 520km 먼먼 행로에 올랐다. 련꽃잎을 쪽배삼아 타고 물결에 실려가는 두만선녀는 련꽃같이 아름다왔다. 그 자색에 반한 중도의 280여갈래 사나이 강들이 서둘러 두만강에 몸을 합치고 애걸복걸 지꿎게도 사랑을 고백하며 선녀를 잡아두려고 했단다. 웅숭깊고 능청스러운 총각 하나가 수다를 떨지 않고 <<가야지!>>하고 한마디 뱉고는 묵묵히 앞서서 길을 인도했단다. <<가야죠!>> 두만선녀도 그말을 받아 외우고는 바지런히 뒤쫓아갔다. 그래서 그 강 이름이 가야하, 동해에 이르러 두만선녀와 부부가 되여 지금도 룡궁에서 행복하게 살고있다는 전설이야기이다.

꼬지깨덩이가 울끈불끈 솟은 삼각지대에서 개울물처럼 조용히 흐르는 두만강을 두고 류원무선생은 <<수줍은 소녀마냥 조용히 걸음발을 떼고있다. 자취소리 한번 낼세라 서두름도 없이 조용히 천리길을 떠나고있다. 참한 마음씨 기리여 내물 량역의 울로초도 조을고 뉘연한 구릉을 아득히 덮은 홍송, 백송, 락엽송도 숨을 죽이고있는듯 하다>>라고 묘사했다.

산과 강의 분위기에 젖은 나도 조용히 물길을 따라 발길을 놓았다. 한숨 좋이 걸어서 김일성낚시터에 이르니 강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해도 고작해야 너비가 서너메터 될가 물깊이는 겨우 발목을 감칠뿐이였다. 언젠가는 강우에 나무다리가 놓였던듯 지금도 강량안에는 마주 다가서던 나무다리가 강상에서 강폭만치 뭉턱 잘라져있다.

여기 두만강은 맑다. 물밑에 깔린 말쑥한 자갈돌도, 떡가루같은 모래알도 해빛에 반사되여 생명체마냥 빛을 뿌린다. 이따금 삼삼오오 떼를 지어 물속을 거닐던 한 뼘씩한 고운 산천어들이 물속에서 뛰여올라 수면우를 나르는 날벌레를 납작 받아 물고 퐁당 물속으로 사라진다. 순간 수면에는 이남박같은 주름이 퍼진다.

나는 바지가랭이를 무릎까지 불끈 걷어올리고 티없이 깨끗한 우리 백의 민족의 마음을 닮은 맑은 물속에 성큼 발을 잠그었다. 감전이라도 된듯 찡 하고 찬기운이 뼈속까지 맞혀왔다. 순간 나는 겨레의 맵짠 성미를 육감으로 느꼈다.

나는 엎드려 강물에 뜨거운 키스를 했다. 랭장고에서 끄집어낸 사이다마냥 한모금 삼킨 물이 목젖을 넘어 밸과 위를 시원히 적셔주었다. 잔뜩 무겁고 흐리터분하던 정신이 대번에 맑아졌다. 이 강물은 겨레의 어머니 백두산의 젖이다.

나는 물에 발을 잠근채 그제날 김일성동지가 앉아서 낚시를 했다는 물역의 커다란 바위에 걸터섰다. 산천어 한마리가 나의 종아리에 난 부시시한 털을 그 무슨 잔풀로 보았는지 겁도 없이 다가와 아가미로 건드려 본다. 사랑하는 녀인의 매끄러운 손이 살결을 쓰다듬듯 기분이 붕― 뜬다. 나는 살그머니 손을 넣어 산천어 몸가까이 가져갔다. 깊은 산 찬물속에서 살면서 사람 단련을 받아보지 못한 천진한 고기는 손이 몸에 닿았는데도 달아날념을 전연 하지 않는다. 오늘의 류행어로는 위험의식이 트지 않았다고나 할가? 나는 고기의 배허벅을 손바닥으로 받쳐서 천천히 수면까지 떠올렸다가 불시로 기슭으로 뿌려던졌다. 삶의 천지를 잃은 고기는 그제야 파닥파닥 뛰며 아가미를 짝짝 벌리는데 비명을 지르는 모양이였다. 길이가 한뼘도 넘고 굵기는 아기 손목만한 산천어는 어림짐작으로도 150g은 될것 같았다.

<<류선생, 2십원 벌었네요. >>

오토바이로 나를 싣고 온 청년이 환성을 질렀다.

산천어 한근에 가을엔 60원, 겨울엔 80원인데 흥정여지가 없다고 한다. 광평농장 40여호 사람들은 가을이면 산천어를 잡는데 한해에 적어도 1만원 하나는 쥔다고 한다. 산천어는 대자래야 석냥이니 해마다 수만마리가 인간의 식탁에 오른다는 계산이 나온다. 암컷 한마리가 10월에 물밑 자갈판에 200―500개의 알을 쓴다고 하니 이듬해 1월에 까날 새끼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엄청난 수자이다.

광평농장 맞은쪽 조선측에서는 산천어는 아주 좋은 물고기라고 한 김일성주석의 말씀을 받들어 전문 알깨우기터를 만들어놓고 산천어의 알을 받아 깨워서는 새끼고기들을 놓아주어 기른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측에서는 돈을 벌기에 미쳐서 뒤단도리도 않고 <<대토벌>>을 하고있다.

<<류선생, 술안주감 만들어 갖고 갑시다. >>

동행 친구가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며 물에 들어섰다.

모든것을 운명에 맡긴듯 나의 손바닥에서 맥을 버리고 축 늘어진 산천어를 보니 어쩐지 서글픈 생각이 그들먹히 나의 마음을 채웠다.

나는 잠자는 아이를 잠자리에 눕히듯 조심히 물속에 손을 넣어 손가락을 폈다. 그러자 산천어는 잠결에 놀라 깬 아이처럼 파다닥 손바닥에서 뛰여 물속을 헤여 도망을 갔다.

<<류선생, 왜요?>>

친구가 눈이 휘둥그래서 나를 바라본다.

<<그만 돌아갑시다. >>

나는 뭍으로 올라섰다.

머리우 나무가지에서 새가 지저귄다.

어디선가 에미를 찾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애절하게 들려온다.

두만강은 나의 귀에 주절주절 겨레의 력사를 이야기한다.

눈물에 절고 피로 얼룩진 목메인 구절구절이 이 내 마음벽에 부딪쳐 메아리로 울린다.

두만강은 겨레의 강이다.

두만강의 세찬 물결은 겨레의 거친 꿈이다.

두만강의 파도소리는 겨레의 힘찬 숨결이다.

<<가야지!>>

나는 가야하―사나이의 말을 받아 외웠다.

<<가야죠!>>

처녀의 강 두만강도 나의 말을 받아 외웠다.

운동은 생명이다. 툭툭 뛰는 심장박동의 충격을 받아 세차게 흐르는 피는 생명체의 건강이다.

천년을 두고 만년을 두고 두만강은 여기에서 흐름을 시작해서 산야를 질주해왔다. 이제 또 천년이고 만년이고 두만강은 영원히 여기에서 시작하여 영원히 흘러갈것이다.

여기에서 시작되는 나의 답사길도 이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영원한 시작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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