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력사의 숨결

백두산의 천지에 뿌리를 박고 희망의 동해로 굽이쳐 흐르는 두만강은 화룡시, 룡정시, 도문시, 훈춘시를 경유, 총 류역면적은 33, 168㎢이고 중국쪽 류역면적은 22, 861㎢이다. 봄이면 빙설이 녹고 여름이면 비물에 수위가 불어 홍수가 범람하는 두만강의 년평균 흐름량은 68. 9억㎥이고 최대의 흐름량은 140억, 최소의 흐름량은 20. 4억이라고 권하수문관측소(두만강 입구에서 40km 떨어져있다)는 기재하고있다. 년평균 흐름량은 219m/초, 최대의 흐름량은 444m/초이고 최소의 흐름량은 219m/초이다. 년평균 모래수송량은 469만톤, 최대수송량은 2. 190만톤이고 최소수송량은 43. 7만톤이다. 그리고 년평균수위는 84. 74m 최고수위는 85. 16m이고 최소수위는 84. 38m이다.


두만강류역은 한온대 대륙성 반습윤계절풍기후구역이다. 서북풍이 기승을 부리는 겨울은 춥고 길어 박달나무도 얼어튄다는 1월의 평균기온은 령하14. 2도이고 최하 기온은 지어 령하40도이하이다. 한여름 무더위는 잠간 선이나 보이는 정도이고 락엽이 흩날리는 10월이 가기전부터 두만강은 하류로부터 얼어붙기 시작한다. 12월 중순이면 떵떵 언 강우로 눈보라가 쓸고 다니고 이듬해 4월초에 이르러서야 결빙기가 종말을 고한다. 결빙기는 140―150일좌우, 붕하기는 100―120일좌우이다.


아아한 백두산이 뻗어내려 련면한 기복을 이룬 지세는 서남, 서북과 동북부가 높아 동남부로 경사져내리는데 동해 가까이에 이르러 겨우 해발고가 10m밖에 안된다. 산지는 42, 700평방km 연변 총 면적의 74%이고 구릉은 14%, 분지는 겨우 12%밖에 안된다. 해발 300m이하는 중, 저위도 하곡분지이고 해발 300―600m사이는 고위도 하곡분지와 구릉지이다. 해발 600―1, 200m사이는 저, 중산지모류형에 속하는 침엽―활엽혼성림지대이고 해발 1, 200―1, 800m사이는 중산지모류형의 침엽림지대이며 해발 1, 800―2, 000m사이는 중산악화림지대, 그이상은 고산태원지대이다.
동부의 대려령과 반령, 북부의 로야령과 할바령, 서부의 장광재령과 위호령, 남부의 백두산과 남강산이 분수령을 이루고 줄줄이 뻗어내린 여기 두만강류역 연변 땅의 맨 처음 주인은 북옥저인(北沃沮人)이란다. 서한초에 연(燕)나라의 망명자 위만(韋滿)이 고조선을 통치할 때 옥저는 고조선에 예속되였었다. 그후 한무제(漢武帝) 원봉(元奉)2년―기원전 109년에 한나라는 고조선을 징벌하고 옥저성에 현토군을 두었다.


기원전 37년 주몽이 졸본(卒本―지금의 료녕성 환인현 부근)땅에 고구려를 일떠세웠다. 동명왕 10년(기원전 28년)에 고구려의 부위염(扶尉厭)은 북옥저를 쳐서 고구려에 귀속시키고 두만강하류, 오늘의 훈춘부근에다 책성(柵城)을 세웠다.
고구려는 1세기 중엽부터 그 주변 여러 종족들을 정복하고 또 옥저(지금의 조선 함경도 해안과 연변의 훈춘지방), 량맥(지금의 태자하 상류)과 한고구려현(지금의 료녕성 신빈) 등을 정복하였다. 이리하여 당시 고구려 령토는 백두산을 주축으로 동으로는 책성 및 동해가에까지, 서로는 길림성의 합달령으로부터 태자하 상류, 서남으로는 애하상류, 남으로는 살수(지금의 조선 청천강), 북으로는 송화강 상류에까지 이르렀다.
고구려 6대왕 태조대왕 궁은 태조대왕 46년(기원 98년) 3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책성을 순행했다. 당시의 강대했던 고구려의 위엄은 임금의 순행장면에서 볼수 있다. 력사는 이렇게 적고있다.

―국내성(고구려의 수도―오늘의 길림성 집안시)을 출발한 그날 순행대오는 무려 수백명이였다. 오색비단 룡포를 입고 흰 라직으로 만든 왕관을 쓰고 가죽띠에 반짝이는 금단추를 단 태조대왕은 자단과 침향목으로 만든 붉은 거마에 앉았다. 여러 대가(귀족)들이 말을 타고 량켠에서 임금을 호위하였는데 하나같이 푸른 라직관과 붉은 관에 새깃 두개를 꽂고 여러가지 금, 은 단추를 달고 허리에는 흰 가죽띠를 두르고 누런 가죽신을 신었다. 거마앞에서는 악공들이 렬을 지어 탄쟁, 국쟁, 공후, 오현금, 생황, 저, 퉁소, 장고, 첨고, 패 등을 불고 치면서 고구려악곡을 연주했고 대오의 맨 앞에서는 네사람씩 여덟조로 나뉘여 궁정무인들이 춤을 추었다. 거마뒤로 칼, 창, 활 등으로 무장하고 흰 띠를 두른 라졸들이 렬을 지어 따랐는데 참으로 위풍이 당당했다.


책성에 이른 다음날 태조대왕은 잔치를 베풀어 책성의 관리들에게 공로에 따라 물품을 하사하고 손수 술을 부어 권했다. 어주를 받아든 여러 관리들은 저마다 감격으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북옥저와 부여인의 말은 고구려말과 같아 책성의 관리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고구려 신하들과 무랍없이 속심을 펴보였다.
태조대왕은 책성을 순행하는기간 선량한 사람, 효성이 지극한 사람을 책성에 천거하게 하고 홀아비, 과부, 고아, 의지가지 없는 로인들에게 입을것과 먹을것을 주게 했고 죄수들을 대사하고 한해동안 조세를 면제시켰다. 책성 뒤산 바위에 책성의 공적을 새겨놓고 그해 10월 국내성으로 돌아갔다.
그후 태조대왕 50년에 왕은 사신을 보내여 많은 식량과 천으로 책성의 백성들을 안위시켰다. ―

지난해 12월 두만강답사길에 훈춘에 이른 나는 당시 태조대왕을 모셨던 책성을 더듬었다. 하지만 력사 기재도 불투명한 1900년전의 터전을 어림짐작으로 찾는다는것은 바다에서 바늘 찾기였다. 다행히 선인들의 거친 숨결을 심장으로 느낄수 있는 훈춘시 삼가자향 고성촌(三家子鄕古城村) 옛성터가 당시 책성일것이라는 집요한 추정을 불러일으켰다.
고성촌마을 입구에 쌍보초를 세운듯 가지런히 세워진 두개의 세멘트 패쪽에는 조, 한문으로 <<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이라고 새겨져있었다. 만족의 대성(大姓)을 따서 지은 성의 이름은 고구려 이 옛성이 발해를 거쳐 료금시기에까지 련속되여왔음을 말해주고있었다.


드넓은 훈춘벌에 터전을 잡고 도도한 두만강을 멀리 남으로 바라보며 앉은 성벽은 흙을 다져쌓았다. 제형으로 된 성벽의 현재의 높이는 2. 3m, 둘레의 총 길이는 2, 269m이다. 지금은 동쪽과 서쪽 성벽의 북쪽부분은 평지로 되였고 남쪽 성벽은 두만강 강바람에 날려온 강모래에 덮여서 거의 흔적을 잃어갔다. 성벽의 파괴정도가 너무나도 엄청나서 여직 성문터도 찾지 못한 형편이란다. 하지만 성의 째임새와 성안 경작지에서 문득문득 출토되고있는 료금과 발해유물들속에서 나타나는 고구려의 문물들에는 용감하고 지혜로운 고구려인의 체취가 짙게 슴배여있다.
조선족들이 고구려인의 꿈자리였던 이 옛성안에 이사짐을 풀고 살림을 차리게 되자 청나라 선통 2년(1910년)부터 1933년까지 마을 이름은 고려성툰(高麗城屯)이였고 강덕원년 일제의 보갑제의 실시로 고력성갑(高力城甲)으로 창씨개명하듯 했고 그 이름이 50년대에까지 연장선을 그어왔다. 그후 1965년부터 고착된 촌명은 고성촌, 현재 626명이 살고있는데 한족 210명, 만족 392명, 조선족은 쌀에 뉘만큼 겨우 24명이 끼살이를 하고있다. 당시 기와지붕 고구려 건물이 즐비했을 성안에 지금 147채의 벽돌기와집과 초가들이 질서없이 터전밑에 숱한 문물들을 깔고 들어앉았다.
기원 668년 라, 당련합군의 진공에 고구려가 무너지면서 당나라에 귀속되기까지 연변은 장장 696년동안 고구려의 튼튼한 변방이였다. 그 사이 단 한번 동부여가 고구려의 통치에서 반기를 들고 매골(북옥저)을 자기의 통치구역으로 삼은 한단락 력사가 있었을뿐이다. 하지만 서남전선에 빠져 동부에 대한 단속을 늦추었던 광개토대왕이 노하여 동부여를 토벌하려고 원정을 떠나자 대경실색한 동부여는 싸우지도 않고 투항했다. 수천명 대군이 매골의 책성에 이르자 두령 압려는 관리들을 거느리고 관복을 벗고 흰 옷차림으로 성문밖에 나가 땅에 엎드려 치죄를 청구했다. 하지만 고구려 장수는 친히 말에서 내려 그들을 부축여 일으켰고 어진 통치를 폈고 책성과 성자산 등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온특혁부성을 내놓고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고구려 평원성은 훈춘시 반석향 태양촌 번가구툰(石鄕太陽村藩家溝)의 석두하자고성(石頭河子古城), 룡정시 덕신향 중평촌(德新鄕中坪村)의 중평고성과 광신향 동흥촌(光新鄕東興村)의 동흥고성, 그리고 팔도향 서산촌 토성툰(八道鄕西山村土城屯)의 토성툰고성, 연길시 장백향 하룡촌(長白鄕河龍村)의 하룡고성, 왕청현 왕청진 하북촌(汪淸縣汪淸鎭河北村)의 하북고성 등이 있고 산성으로는 훈춘시 양포향 포자연촌(楊泡鄕泡子沿村)의 살기성(薩其城)과 도문시 장안진 마반촌 산성리툰(圖們市長安鎭磨盤村山城里屯)의 성자산산성(星子山山城) 등이 있다.
신라 김춘추와 김유신이 당나라를 등에 업고 백제를 뒤엎고 뒤미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조 통치자들은 고구려유민과 말갈족사람들을 중원과 영주(오늘의 료서)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적지 않은 고구려유민들은 동족의 나라인 신라땅으로 살길을 찾아갔다. 애당초 북쪽에 또다시 고구려와 같은 강국이 복구되는것을 무서워한 신라는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안승이 세웠던 <<고구려국>>도 신라의 배신행위로 망하고 울분을 못이겨 봉기를 일으킨 고대문도 신라인에 살해당했다. 그러던차 696년 5월 거란인의 추장이고 송막도독인 리진충(李塵忠)이 영주의 고구려, 말갈, 거란인을 련합하여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고구려유민들은 북으로 북으로 희망의 발길을 옮겼다. 무측천은 말갈인 걸사비우(乞四比羽)를 허국공(許國公)으로, 고구려인 걸걸중상(乞乞仲象)을 진국공(震國公)으로 봉하고 그들의 반당죄를 용서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단호히 회유책을 거절하고 영주일대를 떠나 옛고향으로 진군했다. 당조는 폭동군의 변절자 거란인 리해고를 옥검위대장군(玉鈐韋大將軍)으로 대군을 파견하여 토벌했다. 전투에서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죽자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군사를 수습하고 천문령(天門嶺)에서 리해고를 대패시키고 휘발하(輝發河)를 건너 <<읍루의 동모산에 주둔하고>> <<오루하에 이르러 성을 쌓고 지반을 닦았다. >>(<<신당서―발해전>>에서)


당시 대조영이 승전한 군사를 조련하면서 진국을 세울 준비를 하던 동모산유적지가 지금도 돈화시 현유향 성산자촌에 있다. 지금은 성산자산성으로 일컬어진다. 목단강 지류인 대석두하강안에 해발 600m 높이로 우뚝 솟은 외딴 성산자산 허리에 돌과 흙으로 벽을 쌓은 산성의 평면모양은 반원형이고 둘레의 길이는 2000m이다. 성벽에는 서문터와 동문터가 있다. 동문안쪽에 50개의 반움집터자리가 있고 그 부근에 저수지터가 있다. 성의 서남쪽 성벽에 치가 설치되여있고 성 서쪽 복판에 길이 100m, 너비 30m가 되는 평평한 터자리가 있는데 아마 조련장이였을것이다.
698년 대조영은 오동성을 서울로 삼고 진국(震國)을 세웠다. 오동성은 발해초기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중심으로서 여기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의 빛나는 문화창조의 기틀을 잡았다. 나라가 갓 건립되여 세력이 약하고 경제력량이 충족하지 못함으로 오동성은 규모가 크지 않다. 돈화시 돈화진 동남쪽 목단강변에 세워진 오동성은 흙을 다져 성벽을 쌓아 수축한 성의 동서 길이가 400, 남북 길이가 200m이고 내성은 변의 길이가 80m인 정방형이다. 지금은 남쪽 성벽이 25m 남아있고 서쪽성벽이 190m만 간신히 남아있고 성벽을 두른 해자도 남쪽 성벽에만이 비교적 완정하게 남아있을뿐이다. 키도 1. 5―2. 5m 정도로 낮아진 성벽안에 왕국 옛터에는 궁궐도 성곽도 없어 애수만 마음의 선반에 차곡차곡 쟁여진다.


오동성을 수축할 때는 당나라와 전쟁상태에 있었으므로 고구려의 국내성과 완두성을 본따 도성을 산성과 배합하여 수축했고 도성의 규모나 설비가 미약하고 화려하지도 못했다. 돈화에서 녕안(흑룡강성 녕안현)에 이르는 구간 목단강류역에 산성과 평지성은 당시의 전화와 아성을 탐방자의 심령에 몰아오기도 한다.
713년 당현종(唐玄宗)은 최흔(崔炘)을 사신으로 오동성으로 보내여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韋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 겸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봉한다고 했다. 이때로부터 진국은 발해라 불렸다.
로야령산맥과 장광재산맥이 갈라지는 험준한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막힌 천연적 요새인 돈화분지에 도성을 잡은 발해는 고왕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대무예(大武藝)까지 륙정산(발해 귀족과 왕족들의 명당자리로서 1949년 무왕의 릉묘와 정혜공주(貞惠公主)묘를 발굴했다)에 모시기까지의 57년간 주위의 각 부를 통일하고 강성의 길로 내닫기 시작했다.
736년 문왕 대흠무(大欽茂)는 도성을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로 옮겼는데 바로 나의 고향 화룡시 서성진(和龍市西城鎭)에 있는 북고성촌(北古城村)에 있다.
성벽은 흙을 다져만들었고 남북 길이는 730, 동서 길이는 630m의 장방형인데 성벽의 둘레의 길이는 2720m이다. 남, 북 성벽의 중부에 성문터자리가 하나씩 있고 성벽 바깥에는 해자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성은 외성, 왕성, 궁성으로 구성되였다. 왕성과 궁성은 외성의 남, 북문을 이어놓은 중심선을 축으로 하고 동서에 대치되게 안배되였다. 궁성과 왕성터자리에서 일찍 궁전터가 발견, 회색기와, 유약바른 기와, 유약바른 기둥밑치레, 유약바른 피면쪼각, 꽃무늬 벽돌, 문자가 찍혀있는 기와들이 많이 출토되였다. 성은 당나라의 장안성 짜임새를 많이 닮았는데 이는 당시 당나라와의 거래가 밀접했음을 말해준다.
한줄기 해란강이 흐르는 평강벌에 도성을 잡고 로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 등 여섯개 주를 령유한 당시 발해인들의 거창한 꿈은 오늘 서고성 부근의 하남툰(河南屯―화룡시 룡수향 룡해촌 룡두산(龍水鄕龍海村龍頭山)에 정효공주(貞孝公主)묘가 발견)과 내 고향 북대촌(北大村)의 무덤떼에 파묻혀있다.
내가 1957년 음력 8월 12일에 태를 묻은 북대촌은 평강벌 최상단, 봉밀하를 등지고 해란강을 바라보며 앉은 촌락이다. 내가 어릴 때만해도 우리 마을에서 남으로 3리를 가면 벌로부터 산언덕에 이르기까지 울룩불룩한 무덤 천지였다. 어른들은 고려장이라고 불렀다. 청개판같은 넓은 돌을 물리치면 김치움만한 깊이와 크기로 돌을 쌓아만든 묘지에는 백골과 토기며 거울이며숱했다.
나는 소꿉친구들과 함께 늘 무덤떼에 가서 술래잡기를 했고 녹이 낀 동, 쇠쪼각(유물)들을 주어서는 옷에 쓱쓱 닦아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러나 일단 집문앞에 이르면 <<장난감>>을 굴뚝이 있는 곳에 가져다 치워야 했다. 부모의 눈에 띄면 야단을 맞기때문이였다. 말하자면 죽은 귀신을 묻혀서 들여온다는 리유였다.


어릴 때 나는 시시콜콜 앓으며 자랐다. 두세살에 실명해서 화룡병원에 입원하고 아버지의 피를 수혈 받아서야 용케 살아났다는것이였다. 어머니는 내가 하도 앓음자랑을 하니 점을 쳤는데 점쟁이는 나한테 양모를 세워주고 이름을 칠성이라고 달아주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몇해전까지 정한수를 떠놓고 칠성기도를 드렸다. 나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이 지극했던만큼 감시 또한 각별했다.
한번은 내가 극성으로 모아들인 <<장난감>>들이 아버지의 <<토벌>>을 당했다. 마침 그때 내가 위장염으로 앓았는데 점을 치니 옛날 마귀가 물건을 따라 집에 왔다는 점괘였던것이다. 그때 무당출신인 양모가 식칼을 나의 얼굴앞에서 찌를듯이 휘두르며 놋양푼을 치고 종이를 태우기도 하면서 귀신을 쫓던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지금도 나의 뇌리에 살아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발해 <<유령>>이 떠돌던 곳에서 나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귀신을 쫓는다고 무당놀음도 많이 하고 방책도 여러가지로 했지만 발해무덤에 대한 공포감은 가져본적이 없었다.
평강벌은 연변의 곡창이다. 평강벌에서 서고성의 입쌀이 유명해 만주국 때엔 전문으로 궁정으로 조공했다고 한다. 여름이면 60리 벌에 푸른 물결 넘실대고 가을이면 황금파도가 출렁인다. 아마 중경현덕부 때에도 그러한 장관이였을것이다. 고구려 책성의 된장과 발해의 벼는 당조에까지도 소문이 높았다는 기재가 있다.


기재에 따르면 중경현덕부 서남쪽에 된장을 전문 만드는 곳이 있었다고 했다. 서고성의 서남이면 나의 고향마을이 된다. 고구려가 멸망해서 1200여년, 발해가 멸망해서 900여년후에 조선족들이 이 땅에 이주해와 정착하면서 벼를 심고 된장을 담그었다. 나는 고구려, 발해 옛땅에서 난 이밥을 된장국에 말아먹으면서 자라났다.
1973년 연변박물관에서 우리 촌에 와서 54개 무덤을 발굴했다. 지금은 그 무덤터에 집들이 촘촘히 앉아서 눈에 띄는 무덤이 거의 없다.
755년 문왕은 도성을 상경룡천부(上京龍泉府)로 옮기여 중경현덕부는 겨우 15년간 발해의 중심이 되였다. 상경룡천부는 오늘의 흑룡강성 녕안현 동경성(寧安縣東京城) 부근의 개활지이며 30년동안의 서울구실을 했다. 그 사이 762년에 <<안사지란>>의 진통속에서 쇠퇴의 일로를 걷기 시작한 당조는 발해군을 발해국으로 고치고 대흠무를 발해국왕으로 봉했다.
생기발랄한 청년시기에 왕위에 올라 57년간 긴 통치를 해온 대흠무시기는 발해의 전성기였다. 그는 건국후 40여년간의 겸병전쟁을 결속짓고 주위의 여러 종족, 왕조와 평화적친선관계를 맺었으며 당조의 생산기술과 문화를 적극 받아들여 발해의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켰고 다시 바다 건너 일본에 선진 경제와 문화를 전수했다.
문왕 대흠무는 785년, 확장된 동쪽의 령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해상경제를 발전시키고 당조 및 일본과의 무역을 더욱 활발히 하기 위하여 서울을 동경룡원부(東京龍原府―오늘의 훈춘시 팔련성)로 옮겼다.
동경룡원부는 오늘의 훈춘진에서 7. 5km 상거에 있는 삼가자향 팔련성(八蓮城)이다. 동쪽으로 동북향 산줄기가 북으로 뻗고 북쪽으로는 낮다란 팔련산맥이 동서로 가로놓이고 서쪽으로는 두만강을 끼고 80리 훈춘벌이 아득히 펼쳐있다. 바로 여기에 세워졌던 동경룡원부 내성의 동서 길이는 700, 남북 길이는 730m이고 동서남북에 4개 성문이 있다. 궁성은 동서 길이가 220, 남북 길이가 310m이며 동서남으로 3개의 성문이 있었다. 외성은 지금 원 형태가 사라져 그 크기를 정확히 말할수 없지만 대개 서고성과 비슷하고 오동성보다는 3배 더 크다고 어림짐작한다. 유지에서 최근에 발견된 련꽃무늬막새와 암키와, 수키와, 풀색 사기물을 바른 광택나는 막새, <<소(素)>>, <<공(工)>>, <<도(刀)>> 등 문자를 새긴 기와로 미루어 당시 건축물의 화려함을 넘겨짚을수 있다.
지난 2월 동경룡원부를 찾았을 때 나를 영접한것은 논밭기퉁이에서 거의 쓰러져가는 세멘트 패쪽이였다. 새긴 글도 없어지고 검은 판에는 어떤 무지한 사람의 조작으로 <<변소문화(서툰 남녀 생식기 그림)>>가 몰렴치하게도 력사유적 표식판에 올라있었다.


동경룡천부는 겨우 9년동안 서울구실을 했지만 5천리 강토와 10여만 세대에 10만의 강병, 5경 15부와 62개 주, 130여개 현을 통치했다는데 당시 해동성국의 위풍과 찬란한 문화는 어디로 가고 비뚤비뚤 성기가 그려져있는 패쪽의 우롱을 받으면서도 침묵을 지키고있는걸가?.
오늘의 팔련성은 천년 세파에 씻기고 바래여 외성의 동쪽벽과 남쪽 끝머리와 남쪽 성벽의 동쪽 끝머리가 아슴프레하게 남아있을뿐이다. 북쪽 성벽은 한메터가량의 너비가 네댓메터쯤 알리고 서쪽 성벽은 큰길로 되고 북쪽 성벽은 저수지 제방이 되였다. 그다음은 평지―
작가 리혜선은 <<땅의 래력>>이라는 수필에 이렇게 썼다.

―평지로 된 땅에서 나는 축축히 젖어있는 흙 한줌을 쥐여본다. 냄새를 숨소리를, 느껴본다. 인간이 죽어 분토가 되는것은 어느 사람에게나 공평하게 차례지는 진리이다만 위대한 나라가 분토된 이 진리를 내가 지금 가볍게 느낄수가 있을가? 여느 력사책에든 개미 한줄의 문자로 적혀있는 사실이지만 이 숨쉬는 흙과 냄새를 풍기는 흙을 쥐고도 그처럼 가볍게 느껴볼수가 있을가?
그것을 가볍게 느껴볼수가 없기에 그것이 무거운 나머지 나는 일체 그에 비해 가벼운것들을 잊어버리는 경지에로 빠져들었다.
그 축축한 한줌의 흙에서 강대했던 발해국을 보며 찬란했던 문화를 본다. 발해국의 번창했던 궁성과 아름다웠을 궁녀들과 용맹한 군사와 씩씩한 말과 활과 창과 사냥개를 본다. 일망무제한 벼밭을 본다. ―향기로운 쑥떡과 이밥과 된장의 냄새가 풍겨온다. ―
 
리혜선녀사가 팔련성을 찾았을 때는 만물이 우썩우썩 자라는 한여름이라 푸른 벼가 주단처럼 펼쳐진 팔련성터를 바라보며 랑만의 사유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쓸쓸한 벌거벗은 겨울에 옛성을 찾은 나는 자꾸만 무리꾸럭 비감만 마음의 덕대에 얹어놓았다.
794년에 옮겨간 상경룡천부는 그때 동부아세아에서 가장 크고 번영한 도시로서 외성, 내성, 궁성으로 구성되였고 그 둘레의 길이는 무려 16, 296m로 약 16km나 된다. 그때로부터 발해가 망하기까지 발해의 서울은 여기에 고착되였었다.
926년 발해는 거란국 료태조 야률아보기(耶律阿保機)의 진공에 물먹은 모래담처럼 맥없이 무너져 220여년의 력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동부아세아의 대국이였던 발해의 발전한 경제, 교육, 불교, 음악, 문자, 풍속과 습관도 점차 사라져 지금은 그 력사의 숨결을 발해강토의 유적과 유물에서 흔적을 더듬는다. 연변에서만 하더라도 발해의 평원성은 39개, 산성은 22개나 있다.
내가 도문시 장안진 마반촌(長安鎭磨磐村) 뒤산에 있는 성자산성에 오른것은 몇해전이였다. 연길에서 10여 km 떨어진 가까운 곳이고 이른 아침 6시 연길역에 잠간 쉬였다가 떠나는 조양천―도문행 렬차를 타야 했으므로 산성에 올랐을 때만해도 산야가 안개속에 파묻혀있었다.
성자산성은 울뚝불뚝한 산봉우리 천연요새가 사방을 둘러선 속에 자리잡고있다. 은팔찌마냥 산기슭을 끼고 급급히 에돌아온 부르하통하가 깊은 계곡의 동남방향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해란강을 얼싸 안고 출렁이는 정경이 꿈속처럼 아리아리 안겨왔다.
우에 덮은 흙이 세월의 비바람속에 씻겨내려 돌로 쌓은 성벽이 혹간 성해있었는데 원래의 총 길이는 4, 454m이고 타원형 성벽안에는 궁전터, 건물터들이 남아서 신음하는 력사의 넋을 지켜가고있었다.
안개발속에 몸을 묻고 우유빛 안개에 젖은 산성을 딛고서니 오늘과 흘러간 력사가 하나로 엉키여왔다.


뽀얀 안개속으로 북소리, 주라소리, 주악소리가 흘러간 옛노래와 오늘의 쟈즈곡과 어울려서 하나의 교향곡으로 귀청을 울린다. 금은 장신구에 비단옷을 입은 옛사람과 양복차림의 나는 천년을 사이두고 한담을 나눈다. <<부키와 치욕과 명예와 슬픔과 번영과 재난과 승리와 피와 죽음과 재생의 순환>>(리혜선 작 <<땅의 래력>>에서)으로 메워진 천년 세월의 흐름이 손가락 튕기는 한순간이다.
나는 꿈을 꾸는듯한 기분이였다. 성벽 기초돌과 널려져있는 고구려, 발해, 료금, 동하국의 기와쪼박들에 벌겋게 물들었던 뜨거운 피가 딛고 선 파랗게 이끼가 낀 성벽 기초돌에서 솟아나와 나의 심신을 벌겋게 물들였다.
발해가 쇠퇴의 일로를 걷고있을 때인 876년, 경기도 송악군 사찬 왕륭이 새 집을 지어놓고 집들이 대잔치를 벌리였다. 주객 모두가 취흥이 도도해 시들을 읊조리는데 문득 삼베장삼을 걸치고 대지팽이를 짚고 지나가던 도사 한분이 <<아쉽다, 기장을 심을 터에 삼씨를 뿌렸거니―>>라고 한탄을 하더란다. 왕륭이 버선바람으로 천방지축 달려나와 도사를 집으로 안내하여 상빈으로 모셨다.
 <<아득한 태고적부터 백두산은 이 나라 강토에 우뚝 솟은 조종의 산이였소이다. 사방 수천리를 발밑에 굽어보며 백발을 흩날리는 숭엄한 모습은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호걸의 기상이 아니겠나이까! 당에서 귀국하던 길에 백두산에서부터 산수의 태맥을 짚으며 여기에 이르렀소이다. 우로 천문을 살피고 아래로 시운을 보매 이 땅의 지맥은 백두산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부터 내려와서 저기 마두명당(馬頭明堂)에 떨어졌소이다. 당신은 물의 명(命)을 타고났으니 마땅히 물이 대수(大數)를 쫓아서 륙륙삼십륙의 구(區)의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에 부합하여 오는 해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들을 낳을것이거니 이름을 세울 건(建)자를 쓰도록 하시오. >>


이분이 바로 전라도 동리산에서 20여년 도를 닦은 도사 도선이였단다.
그 말을 좇아 행한 왕륭은 이듬해 아들 왕건을 낳았으니 바로 고려의 태조란다. 918년 태봉국을 엎고 개주(개성)에 도읍을 잡고 고려를 세워 삼한통합의 대업을 밀고나가던 왕건은 발해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비통에 잠겼다.
발해의 유민들은 나라 잃은 설음을 지니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 고려땅으로 들어섰다. 935년 발해세자(渤海世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명을 거느리고 고려에 이주했고 938년 박승(朴昇)이 3, 000세대를 거느리고 고려로 이주, 979년 수만명이 고려로 도망했다. 그 수가 무려 10만으로 헤아렸단다. 왕건은 혈육을 만난 것 같은 심정이였다. 관리를 지냈던 사람한테는 고려의 벼슬을 품계에 맞게 주고 군사와 백성한테는 거처할 집과 땅을 마련해주었다. 라, 당련합군에 망한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부득이 영주로 끌려가지 않으면 안되였던 신세에 대면 발해의 유민들은 아주 다행했다 하리라.
아보기는 발해를 멸망시킨 다음 발해경내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태자 야률배(耶律倍)에게 <<인황왕(人皇王)>>이라는 이름을 붙여 <<동단국왕>>으로 들여앉혔다. 그리고 발해 유민들을 오늘의 료녕성 료양, 조양 등지와 내몽골지대로 강제로 끌어갔다. 926년 7월 철주(鐵州―오늘의 화룡현경내)에서 자사 위균(刺史 韋鈞)이 봉기를 일으켰고 동시에 안변(安邊), 막길(膜吉), 정리(定理) 3부와 남해부(南海府)에서도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아보기 차자 야률덕광(耶律德光)한테 참패를 당했다. 그 이듬해 야률덕광이 황위를 계승했으니 그가 바로 료태종(遼太宗)이다.
거란은 물론 거란의 통치하에 점차 강성을 보인 녀진도 늘 국계를 넘어 고려의 령토를 침입하여 물건을 략탈하고 사람을 랍취하였다. 고려의 동북면행영 병마도통(東北面行營 兵馬都統) 동현 윤관(同玄 尹瓘 ?―1111)은 녀진정벌 원수가 되여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녀진을 정벌하고 공험진 선춘령(로흑산부근)까지 진출하고 9성(九城)을 쌓았다. 그러자 지꿎게 침범하는 녀진을 다시 정벌했으나 별 소득이 없어서 결국 9성을 돌려주고 강화했다.
훈춘현 경신벌 오도포에서 동남으로 꼬불꼬불 에돌아간 한줄기 강을 사람들은 권하(圈河)라고 부른다. 멀리 흘러갔다가는 다시 되돌아와 원줄기와 맞붙을듯 말듯 하는 강 굽이굽이에 깃든 비장한 전설을 정영석선생은 이렇게 적고있다.

 ―아득히 멀고 먼 옛날 이곳 련화동에는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단란히 모여 화목하게 살고있었다. 그런데 어느해 가을 북쪽으로부터 괴물들이 몰려와 지물을 략탈하고 녀인들을 랍치해갔다. ―지상락원 련화동은 무시로 재앙을 입게 되였고 백성들은 도탄속에서 허덕이게 되였다.
― ―
그때 이 마을에는 성이 리가라는 용맹한 젊은이가 살고있었다. 젊은이는 이 괴물을 처단하고 빼앗긴 행복을 다시 찾아오리라 굳게 결심하고 활쏘기재간을 익혔다. ―삼년 석달 열흘을 하루같이 활쏘기에 정력을 몰부은 그는 한 화살에 기러기도 두세마리씩 꿰는 명궁수로 되였다.
어느날이였다. 갑자기 북으로부터 광풍이 일고 먹장구름이 쓸어오기 시작하였다. 젊은이가 이마에 손을 얹고 쳐다보니 구름속에서 백룡과 흑룡이 꼬리를 저으면서 조화를 부리고있었다. 틀림없는 괴물 두목이였다.
젊은이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활에 살을 메웠다. 그가 백룡을 겨누고 팽팽해진 시위줄을 슬쩍 놓자 화살은 <<슈―욱!>> 소리와 함께 백룡을 향하여 번개같이 날아갔다. 화살은 면바로 백룡의 숨통에 박혔다. 백룡은 피를 토하며 몸부림치다가 훈춘벌 복판에 있는 나지막한 산에 부딪쳐서 대가리가 박산났다. 후세 사람들은 이 산을 룡두산(龍頭山)이라고 불렀다.
백룡이 떨어지자 흑룡은 황황히 도망쳤다.


젊은이는 흑룡을 산채로 잡아서 동리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려고 마음 먹었다. 그는 베실로 꼰 노끈을 화살뒤끝에 매고 흑룡의 눈통을 겨누어 활을 쏘았다. 화살은 면바로 흑룡의 눈알에 푹 꽂혔다. 흑룡은 피똥을 갈기며 오도포부근에 떨어졌다. 젊은이는 삼각산 마루의 바위에 발을 붙이고 지그시 노끈을 당겼다. 흑룡은 땅을 파헤치며 용을 썼다. 그 바람에 깊숙한 곬에 아흔아홉굽이가 패였다. 베실로 꼰 노끈이 끊어지는 바람에 흑룡은 간신히 두만강에 기여들었다. 강을 따라 40여리를 창황히 도주하던 흑룡은 바다의 바위섬에 대가리를 부딪쳤다. 흑룡은 섬을 피로 물들이고 죽었다. 후세사람들은 이 섬이 붉다고 하여 붉은 적(赤)자에 땅 지(地)자를 붙여서 적지섬이라고 불렀다.
그후 세월이 흘러가며 흑룡이 파고 지난 아흔 아홉굽이에 비물이 고이고 늪물이 흘러들어 강이 되였고 굽이굽이 에돌아 흐른다고 권하라 불렀던것이다.
전설이란 인간 소망의 표현이다. 백두산에서부터 줄곧 동해에 이르면서 산과 강에 깃든 전설들은 태반이 괴물과 싸우는것이니 우리 민족이 외세의 침노에서 받은 피눈물 고인 고통의 깊이를 알겠다. 옛 사람들은 천하를 호령할수 있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귀인이 나타나 자기들을 고난에서 구해줄것을 오매에도 바랐다. 그렇다면 그 귀인은 누구였던가?


전설은 계속 말한다.
훈춘현 량수진 경영촌(凉水鎭慶榮村)에서 동으로 2리쯤 가면 사품치는 두만강을 굽어보며 쿨룽산이 우뚝 솟아있는데 일명 <<귀인봉산(貴人逢山)>>이라 한다.
락조가 붉게 타는 어느날 저녁녘에 리씨총각이 두만강기슭에 이르르니 맞은켠 산 관목숲에서 웬 사내가 나타나 다짜고짜 활을 겨누어 쏘았다. 순간 총각도 화살을 먹여 쏘니 두 화살은 하늘 공중에서 부딪치며 쟁강 쇠소리를 내며 강심에 떨어졌다. ―
그때 한 녀인이 동이에 물을 담아 이고 걸어가고있었다. 사나이가 녀인의 물동이를 바라고 살을 날리니 물동이에서 대뜸 한줄기 물이 새여나왔다. 총각은 못내 경탄하며 인차 화살에 진흙을 발라 쏘니 물이 새는 곳에 화살이 박히며 구멍을 메워주었다. 그런데 녀인은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하였다. ―
사나이는 읍하고 물었다.
<<나는 저 산성(량수진 정암촌 정자봉 서북쪽)에 있는 퉁두란인데 그대는 뉘신지요?>>
총각도 답례했다.
<<나는 종성 리성계요. 그대의 활재주가 정말 귀신같도다. >>
그들 둘은 옛 친구를 만난듯 손을 잡았다. 후세 사람들은 두 귀인이 상봉한 산이라고 해서 이 산을 <<귀인상봉>>이라고 불렀다.
두만강 하류에 큰 늪이 있어 사람들은 적지(赤池)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리성계는 자랐다고 전설은 이른다.
용맹한 친구 퉁두란도 함께였단다. 두사람은 용맹과 궁술, 검술을 비기였는데 퉁두란의 재주가 리성계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흑룡과 황룡이 마을 상공에 나타나 싸우는데 천둥이 울고 폭우가 쏟아지고 늪이 범람하였다. 구술자가 흑룡은 퉁두란의 조상이고 황룡은 리성계의 조상이라고 하니 아마 퉁두란은 거란족일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느날 늪옆에서 재간을 비기던 두 사람은 룡을 맞히기를 했단다. 리성계는 퉁두란의 조상인 흑룡을, 퉁두란은 리성계의 조상인 황룡을 쏘기로 했다. 리성계의 화살에 명중된 흑룡은 곧추 날아 늪에 떨어져 죽었다. 흑룡이 흘린 피에 늪밑의 모래가 물들어서 지금도 늪바닥이 벌겋게 보인다고 적지라 한다. 그런데 퉁두란은 실수로 황룡을 맞히 못한고로 황룡은 승천을 했다. 그래서 리성계는 함흥지구 장령으로 있다가 공민왕을 내몰고 리씨 조선을 세울수 있었다고 한다.


명나라 초기 녀진족은 건주, 해서, 야인 등 세부분으로 구분되여있었는데 1404년 료동지방의 천호(千戶) 왕가인이 두만강연안에 파견되여 모련위(毛憐韋―두만강좌안에 설치)와 건주좌위(建州左韋―두만강 우안에 설치)를 설치하고 다스렸다. 모련위 녀진은 자기들의 세력이 점차 강대해지자 늘 리씨 조선의 일부 지방을 침노하여 사람과 재물을 략탈했다. 리조는 모련위 녀진에 대하여 회유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군사적탄압을 가하였다. 1410년 3월 길주도찰사 조견은 1, 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투먼(오늘의 훈춘현 영안일대)에 쳐들어와 모련위 녀진추장 파아손을 비롯한 백수십명을 살상 포로하였다. 1434년 함길도(함경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김종서는 백두산 동북쪽에 9성을 쌓은 고려 윤관의 용맹과 애국의 뜻을 이은 장수였다. 그는 부루말을 타고 백두산으로부터 두만강을 따라 녕북진을 지나 경원고을까지 수없이 오가며 북방 6진을 설치했으니 경원부, 회령부, 종성부, 경흥부, 온성군, 부령도호부 등이다.
부루말 잔등에 훌쩍 뛰여올라 새로 닦은 군용도로로 나는듯이 달려 백두산 절정에 오른 김종서는 병사봉의 바위돌을 꽉 끌어안고 부르짖었다.
<<아, 백두산아!―정녕 네가 호랑이라면 압록강 4군과 두만강 6진은 날개이니라. 4군과 6진이 있어 이 백두산은 날개 돋힌 범이 아니겠는가. ―이 김종서라는 사람은 죽을수 있어도 이 백두산은 불멸하리니 우리는 끝까지 6진을 지켜야 한다. >>
김종서는 장수의 기발을 버쩍 쳐들고 호랑이 울음소리로 온 산발을 우렁우렁 울릴듯이 시 한수를 읊었다.

백두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희냐
어떻다 릉연각상에 뉘 얼굴을 그릴고

참으로 김종서의 기백과 위풍은 <<삭풍은 나무끝에 불고 명월은 눈속에 찬데 만리 변역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한 소래에 거칠것이 없>>었다.
조선의 권택무선생은 <<백두산에 기를 꽂은 김종서>>라는 글에다 이렇게 썼다.

―새로 온 함길도 도절제사가 날이 갈수록 방비를 빈틈없이 다져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강건너 멀리 도사리고있는 우디거 녀진 침략무리들이 안절부절 못하였다.
그들은 농사라고 짓는척 하였으나 그것으로는 생쥐 볼가심도 안되였다. 다른 녀진부락들도 들이치고 두만강 저쪽 저들이 도사리고있는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조선사람 마을도 침략하였지만 그것으로도 어방없이 모자랐다. 우디거무리는 식량과 소금, 천 등 아주 요긴한 많은것을 강너머 함길도쪽에 기여들어서 로략질해다가 충당하여왔다. 그런데 김종서가 와서 6진을 설치한 다음부터는 그것이 제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침략자의 우두머리들은 이마를 맞대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김종서를 살해하기로 하고 자객을 들이밀었다.
자객은 여러달동안 애써 정탐한 결과 김종서가 각 진으로 다니면서 방비를 다져나가는 로정을 알아냈다. ―김종서가 자객이 잠복하고있는 진에서 하루밤을 묵게 된 어느날 저녁이였다. ―김종서는 초불을 켜놓고 아래 사람들과 무슨 문제인가를 의논하고있었다.
이때였다. 난데없이 펑하고 바람을 가르면서 화살 한대가 날아오더니 김종서의 방문을 뚫고들어가 뒤벽에 팍하고 들이꽂혔다. 화살은 김종서의 상투끝을 스칠듯이 지나갔다. 마당에 있던 군사들은 황급히 김종서의 방문앞으로 달려갔다. 방안에 모여있던 관원들도 김종서가 다치지나 않았는지 살피였다.
― ―
<<―원래 저 혼자를 위하는 목숨은 눈먼 화살에도 쉽게 맞지만 나라에 바친 생명은 화살도 피해가는 법이네. >>
적의 화살앞에서도 이처럼 태연한 도절제사의 태도는 군사들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었다.


― ―
김종서는 ―기발을 손에 든채 말우에 날아올라 다그닥 다그닥 산발을 날아내려 두만강을 따라 내달렸다. 장수들도 군사들도 그를 따랐다. 그 기세는 백두산의 맹호가 적진을 무찌르면서 내달리는것 같았다. ―
김종서의 뒤를 이어 20대의 병조판서 남이장군이 대호같이 두만강을 달리며 장수의 기발을 날렸다. 일대의 영웅 두사람은 혼암한 임금과 간신들의 구설에 대역모반죄로 효시되였지만 5백년도 더 지난 오늘에도 두만강 연안 천백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호방한 시와 함께 거연히 솟아있다.
화룡시 덕화진 룡연촌(德化鎭龍淵村)의 현송원(玄松元 67세)로인은 말한다.
<<전설에 남이장군이 날린 화살 하나에 송화강 물길이 틔였다고 하데요. 남이장군은 두만강 6진을 지키며 녀진족을 물리치면서 백두산에 올라 바위에다 시 한수를 새겼다고 합니다. <白頭山石磨刀塵, 豆滿江水馬飮无. 男兒二十未平國, 后世誰稱大丈夫. > 비장한 시지요. 한데 예종이 즉위하자 류자광(柳子光)이 모함을 했는데 어떻게 했는지 아시우? 백두산 바위에 새긴 시 구절의 <未平國>을 <未得國>으로 고쳐놓고 모반을 한다는 죄를 엎어씌웠답니다. 통탄할 일이지요. 자고로 영웅호걸은 간신적자들의 모함에 천명을 못하게 돼있답니다. >>
무거운 행장을 둘러메고 두만강기슭을 걸어가는 나는 저도 몰래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가슴 아픈 생각에 눈물을 지었다.


혹시 저 바위벼랑이 충익 김종서가 그제날 일장검 짚고 섰던 곳은 아닐가?
혹시 저기 저 가람기슭이 남이장군이 말을 먹이던 곳은 아닐가?
걸음걸음 발목이 잡히는 력사의 땅을 가노라면 차거운 두만강의 물결소리가 가슴 깊이 젖어온다.


두만강은 력사의 강이다. 두만강의 물결은 력사의 흐름이다. 백두의 심장에서 솟아 흐르는 두만강 출렁이는 파도에는 겨레의 한이 서려있고 설음이 슴배여있고 용맹이 깃들어있다. 그래서 두만강의 물결은 벼랑에 부딪쳐 산산히 부서져도 겨레의 하얀 혼이 되는것이리라! 그래서 포효하는 강의 세찬 물결에 여울은 목놓아 울면서도 선조의 넋을 부르는것이리라!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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