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월 강 곡

1994년 11월 7일.

로과에서 취재를 마친 나는 남평을 바라고 길을 떠났다. 로과와 남평구간 30리 길은 오가는 뻐스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잡이뜨락또르나 다른 기동차신세를 져야 했고 그렇지 않을 경우 몸에 붙은 11호(두 다리)를 믿어야 했다.

나는 진정부 찦차를 바랄수도 있었지만 마침 일요일이라 체면에 모처럼의 휴식시간을 점할수는 없었고 또한 도보로 걸어보는것도 의의가 있을것 같아 보행을 시작했다.

오전 아홉시 로과를 떠날 때만 해도 해빛이 밝고 유난히 잠풍했다. 그런데 얼마 안가자 북쪽 하늘이 어두워지더니만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어오며 추적추적 격에 맞지 않게 비가 내렸다. 겨울의 문턱을 넘어선 때에 불청객마냥 비가 내리니 여간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아니였다.

보슬비에 옷 젖는줄 모른다고 비발은 가늘었지만 한참 가니 입은 솜옷이 무거워지며 이발이 덜덜 떨렸다. 무례할수가 없었다. 나는 치마대마을에서 한 1리가량 떨어진 호곡령(虎谷岭) 최상봉에 높이 앉은 화룡시 텔레비죤중계소에 들려 비도 끊고 점심 한끼를 먹었다. 마침 나젊은 기술자가 손을 반갑게 맞아 술까지 권해 비에 젖은 몸을 후끈하게 덥일수 있었다.

오후 한시 나는 다시 길을 떠났다. 상봉을 내려 국도에 들어서니 저만치 애나무숲속으로 콩크리트계단이 눈에 맞혀왔다. 호기심에 끌려서 그리로 발길을 돌렸다. 대리석 비석 하나가 저만치 숲속에 세워져있는데 <<리욱시비>>였다.

시비 정면에는 <<칠순 할아버지/ 나무를 심네/ 어린 손자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 그 모습>>이라는 짧은 시 한구절이 새겨져있었다.

나는 시비앞에 옷깃을 여미고 숙연히 섰다.

조선족시단의 개척자이시였던 리욱교수님의 숙원은 무엇이였던가?

한그루 나무를 심는 그 정성, 정녕 그 나무는 우리 민족의 상징일것이고 함께 심는 손자를 바라보며 웃는 그 빙그레한 미소에는 민족의 희망을 기탁하는 선배로서 후배에 대한 어떤 만족감이였을것이다.

원로시인께서 저의 답사길을 밝혀주는 변덕스러운 날씨를 언제 흐렸더냐싶게 맑게 해주었다. 비온 뒤의 청신한 공기를 마시니 가슴이 후련해졌다.

시비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한동안 묵도를 드렸다. 나는 시인과 인연이 있었던바 시비앞에서 경건해질수밖에 없었다. 시인 리욱선생님은 1907년 로씨야 극동지역 울라지보스토크에서 태여났고 1984년 연길에서 세상을 떴다. 시인의 인생 74년, 그 세월의 갈피갈피에는 피눈물이 고여있었다. 시인은 문화대혁명 당시 반동학술권위자로 몰려서 연변대학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화룡시 서성진으로 정배를 왔었고 당시 서성중학교 학생이였던 나는 시인의 집에서 책을 빌어다가 목마른 사람 물마시듯 탐독을 했었다.

반우파투쟁으로부터 문화대혁명에 이르는 장장 20년 세월 지식인들이 당한 수모와 박해는 이루 말할수 없었다. 원로작가 김학철선생께서 미발표 소설 <<20세기의 신화>>가 문제가 되여 10년 옥살이를 한것은 가장 전형적인것이라 하겠다.

개혁개방이 되여 지식인들에 대한 정치적박해가 사라지자 경제의 충격에 지식인들의 생활은 또 흔들리고있는 실정이다. 수술칼을 손에 쥔 의사가 면도칼을 든 리발사 수입만도 못하고 교수나 작가의 수입이 콩나물장수를 못따른다. 바로 이러한 세월의 버림속에 리욱선생님은 꾸준히 참인간의 참삶의 <<나무>>를 심고 키워왔던것이다. 그런만큼 이시각 시인에 대한 추모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다

나는 비에 씻긴 호곡령 리욱시비옆에 서서 발아래를 굽어보았다. 비탈이 와장창 수직으로 떨어져서 수백길아래 산굽이를 에돌아 흐르는 한갈래 두만강이 코앞에 이르러서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기 맞은쪽 버럭산은 무산 로천광산, 함지박처럼 산발에 둘린속에 오구작작 단층집들이 모여 앉은 시가지가 해빛속에 시원하게 안겨왔다. 바로 조선 무산이란다.

아세아에서 두번째로 큰 로천철광이 바로 한눈에 담겨왔다. 무산철광은 중국측으로 보면 철광분수입의 래원이기도 하다고 한다. 흑룡강성 할빈기계수출입공사에서만 남평통상구를 통해 수입하는 철광분은 하루에 평균 80대 트럭, 겨울 한철은 철광분에 수분이 있어서 얼어들므로 수입을 정지한다.

18세기 갑신년 여름 백두산기행을 떠난 박종을 맞은 무산은 <<백성들이 널리 분포되고 토지가 개척되여 농사와 작업이 날로 왕성하니 태평하고 번영하여 강산이 그림인양 아름답게 되였>>단다. (박종 저 <<백두산기행>>에서)

이곳에는 한때 번호로토(藩胡老土―녀진을 이름)의 부락이 있었고 마을우(녀진 추장의 이름)의 시배(施培―보루, 성)의 옛터라고 박종은 말했다. 로토가 남북 여러읍을 늘 침노함으로 회령에서 단천까지의 각 읍마다 산보(山堡)를 쌓고 적당을 방비했었는데 그때로부터 100여년전엔 무산읍이 고무산(古茂山)에 설치되였고 거기에 만호(万戶)를 두었다고 한다. 무산은 회령, 부령, 경성 등 세개 읍의 교차점이고 이곳을 지나면 곧장 남으로 명천, 길주, 단천에 이르게 됨으로 아주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그래서 무산읍은 고무산에서 페무산으로, 페무산에서 다시 고무산으로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남구만에 의해 그제날 박종이 이르러 무산군수의 환대를 받았던 삼봉평에 고착되였다. 토지가 척박하고 국경(두만강)이 멀다는 리유로 읍이 취소된 고무산이나 아홉살내기 계집아이가 아이를 낳아 불길하다는 해괴망측한 요언때문에 읍을 옮기지 않으면 안되였다는 페무산이나 오늘 두만강답사에 오른 나한테는 갈수도 없는 이국땅이다.

당시 척형(戚兄) 최석륜과 함께 무산군수의 인도를 받아 성루에 오른 박종의 가슴으로 <<변방의 감회>>(동상서)를 심어준 강을 격한 이국의 산―호곡령은 로과진과 덕화진의 분수령이다.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여울목을 범구석, 그것을 한어로 번역하여 부른 이름이 호곡이라 령 이름을 호곡령이라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지명전설을 갖고있는 이 호곡령은 무산에서 마주보면 하늘을 찌르고 선 깎아지른 절벽이라 당금 무너져내릴듯 해 호랑이를 마주대한것 못지 않게 등골에 땀을 배게 한다는것이다.

새가 아니고는 오를 엄두를 내지 말라는 높고 험준한 령길을 도보로 조여가는 나를 따라 한줄기 긴 강이병풍바위를 들이박으며 총총히 흐른다. 산굽이를 돌아 호를 그린 강너머 언덕과 좁디좁은 골짜기를 비집고 낮다란 층집과 단층 벽돌집들이 빽빽하게 꽉 메웠다. 눈뿌리가 모자라게 쀼죽쀼죽 치솟은 봉우리들이 련줄련줄 이어간 산발들은 수십년 내내 쇠돌을 캐고있어서 지금은 훌렁 벗어진 대머리였다. 여기가 바로 유명한 무산광산이란다. 이따금 광석을 실어나르는 기관차의 고동소리가 뿡!―산간에 맞혀 메아리로 울린다.

류원무선생은 <<두만강 8경>>에서 이렇게 썼다.

―호곡령 중턱 <<천하제일루(天下第一樓)>> 팔각정(八角亭)에 앉아 아찔한 벼랑밑을 흐르는 두만강을 굽어보는것도 일미이다. 강복판에 머리를 추켜들고 엎드려있는 큼직한 검은 바위 하나, 두만강 푸른 물이 그 앞에서 량편으로 쫘악 갈라지며 흐르는 양상은 신통히도 룡이 물결을 거슬러 헤염치는듯 과시 룡바위, 룡암(龍岩)이다.

지금 호곡령기슭에는 룡암 두자에서 이름을 따온 룡암유람지가 꾸려져있다. 산뜻하고 아담한 유람지호텔, 여기저기 둔덕에 세운 붉은 기둥에 노란 사기기와를 인 <<망강루(望江樓)>>, <<망강정(望江亭)>>, <<룡암정(龍岩亭)>>, 개바닥 인공호수옆에 세워진 <<수선각(水仙閣)>>을 에돌며 미끄럼질쳐 다니는 새하얀 뽀트, 인간세상의 숨결이 호곡령에 금상첨화되여 아름다운 호곡령은 더더구나 이채롭다.

하지만 아쉬운것은 여기서부터 두만강은 맑음을 잃고 뿌연 감탕빛으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무산광산에서 배출하는 쇠가루에 혼탁해진 청천강이 두만강과 합류하면서 푸른 청산을 비껴 담고 흐르는 두만강은 황하의 물빛처럼 시누렇다.

먼 력사의 진창길을 소급해서 숨가쁘게 오늘 가까이로 터벅터벅 답사 길을 걷고있는 나의 사색도 여기서부터 감탕빛이다.

강역 모래사장과 쇠돌을 씻어내린 물빛은 하나여서 갑자기 여기서부터 강폭이 넓어진듯한 착각을 준다.

오늘과 그제날 역시 한빛으로 물들며 여기서부터 나의 력사의 사색 또한 시공간의 분별을 잃었다.

나는 무산을 굽어보며 앉은 룡암(龍岩)관광지 호곡령 정자에 앉아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을 굽어보았다.

두만강이여, 굽이굽이 험한 골짜기를 흘러 흐르는 너의 찬 물결에 묻노니 너는 이 땅의 서러움에 얼마나 울었고 이 땅의 기쁨에 몇번이나 웃었더냐?!

바위에 부닥치며 감뛰는 물결에 시선을 박고 강심에 비낀 력사의 기억을 더듬노라니 흰 옷의 짓찢어진 그림자가 비껴온다.

느닷없이 할아버지세대가 목메여 부르던 <<월강곡>>이 이 내 심장을 칼침인양 아프게 찌른다.

월편에 나붓기는 갈대잎 가지는

애타는 내 가슴을 불러야 보건만

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밀고 밀리며 국토의 지경은 강도 되고 산도 되였지만 <<정계비>>가 선후처럼 린색하고 무자비한 적은 없었다.

<<대동여지지(大東輿地志)>>를 보면 두만강안에 68개소의 파수소를 설치하고 당지 주민을 5호씩 단위로 하여 <<리(里)>>에 소속, <<리>>는 또 <<면(面)>>의 관리밑에 두어 <<5가통절목(五家統節目)>> 행정조치를 세웠다.

강희53년(1714년) 리조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은 국왕에게 <<두만강 좌안의 중국측에서는 이주민이 나타나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며 길을 닦는것이 보이므로 함경도 감사와 병사에 명하여 그들의 동정을 살피는 동시에 강변파수를 엄격히 단속해야 하나이다>>(<<숙종실록>>에서)고 했다.

1744년 겨울 녕고탑장군은 기아에 허덕이다못해 강얼음판을 건너 조선으로부터 월강한 시눈다이 등 25명을 체포하여 강제 출경시켰다.

1721년 11월 조선 종성에서는 군민(軍民)월강사건이 발생하여 주모자 2명이 체포되여 효시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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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삼수, 갑산을 갈지언정―>>이라는 말이 있다. 정녕 참기 어려운 처지에 놓일 때면 속담처럼 입에 오르는 이 말은 당시 두만강역 변방의 험악한 형편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죄인들의 정배지라 하지만 기실 량민들 역시 정배생활을 하는거나 매한가지였다.

암행어사 홍승유가 조정에 올린 1858년의 보고에 따르면 함경도 관청에서 받아들이는 량곡은 남관보다 10여만석이나 더 많았으나 북관의 인구는 도리여 남관보다 4, 000―5, 000세대나 적었다. 특히 6진의 관리들이 농민을 강박하여 걷어들인 량곡은 대단히 많았는바 어떤 가정에서는 매년 정곡으로 50―60석을 바쳐야 했다. 그리고 백성들을 각종 부역에 내몰았다. 1876년 안무사 김유연이 북관 6진 사람들의 생활형편을 이야기할 때 <<관리들이 탐욕스럽고도 잔혹하기 짝이 없으며>> <<가혹한 정치는 맹호보다 더하다>>고 하면서 백성들이 <<친척과 리별하고 조상들의 산소를 버리고 월북하려고 하니>> 사람으로서 사경에 이르지 않고야 <<어찌 그럴수 있겠는가>>고 상소하였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1860년이래 끊임없이 덮쳐드는 자연재해로 하여 농민들은 더는 살아나갈수 없게 되였다.

훈춘시 경신진 옥천동(敬信鎭玉泉洞)에 사시는 김광익(金光翼 75세)로인은 경신진 권하(圈河) 태생이고 조부는 조선 함경북도 경원군 유덕면에서 살았다고 말했다.

<<기사년 재난을 당하고 떠나왔다니 벌써 130년이 되지우. 옹근 10년동안 가물과 장마가 겨끔내기로 덮쳤다고 하데유. 기사년 해동머리부터 가물이 시작했는데 여름이 다 가도록 비 한방울 오지 않았다니 전대미문의 왕가물이라 하겠수다. 풍년해에도 굶어죽었다는 세월에 어찌 살아갈수 있었겠수? 산열매와 풀뿌리로 주린 창자를 달래였는데 나중엔 나무껍질마저 거덜이 났지유. 영양부족으로 사람들은 얼굴이 누렇게 되였고 몸은 퉁퉁 붓고 굶어죽지 않으면 풀독에 죽었다우다. 그래서 조부님께서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월강을 했어유. 월강죄 목을 친다고 해도 성공하면 살길이 틔이는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수는 없지 않냐고, 조상산소도 사람이 살아야 할것 아니냐는 배짱이였다고 생각되우다. >>

사실 월경이주는 당시 북도 주민들의 유일한 삶의 출로였다. 국법을 지켜 굶어죽을바엔 월강하여 한끼라도 배불리 먹다가 죽는것이 복하리라. 먹다 죽은 귀신은 한이 없다는데―

정다산은 <<목민심서(牧民心書)>>, <<리전(吏典)>>에 썼다.

<<백성은 땅을 밭으로 하나 관리배는 백성을 밭으로 삼고 껍질을 벗기고 골수까지 빼먹는것을 밭갈이와 김매기같이 여기며 백성의 지물을 긁어먹는것을 가을걷이나 다름없이 여기는것으로 습성이 되였다. >>

<<리조실록>>에는 이런 한토막이 실려있다.

<<호구가 3분의 1이상 감소된 원인은 병혁(兵革), 기근, 질병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랜 유래가 있다. 과거를 징계하고 앞을 삼가해야 하는바 관건은 보민(保民)에 있다. 보민은 페단을 제거함에 있고 박절성을 말하면 군정(軍政), 전정(田政), 고책(庫責)의 3대 페단을 제거하는데 있다. 그중에서도 군정의 페단을 제거함이 더욱 박절하다. >>

어느날 밤 회령의 한 집에서 월강을 서둘렀다. 챙길 짐이래야 지게에 달랑 얹힌 솥과 호미와 바가지짝뿐이였다. 입은 옷이래야 남자는 개가죽을 꿰맨것이라 멀리에서 보면 커다란 개와 같았고 녀자는 헌 베쪼박을 다닥다닥 기워 지은 누데기를 걸쳤으므로 은밀한 곳까지 비쳐보였다. 발에 신은 신은 철판이나 널판자를 새끼로 붙들어맨것이였다. 남자는 이불뙈기를 멜빵으로 걸머지고 그우에다 어린것을 앉혔다. 그의 뒤에는 함지박을 인 녀인이 등에도 보따리를 지고 따라간다. 보따리뒤에는 바가지짝을 달아매였다. 맨 앞에는 지팽이를 짚은 할머니가 맥이 빠진 걸음으로 지척지척 걷고있다.

그들이 집을 나서 강가에 이르는데 찍찍―쥐울음소리가 지꿎게도 뒤를 밟아온다. 쌀 한톨 없는 가난한 집에 굴을 파고 근근득식으로 살아오던 쥐들도 주인을 따라 월강도주의 길에 묻어나섰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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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암바위산을 에둘러온 큰길로 두대의 하이야가 미끌어져오더니 저기 움푹진 곳에 지은 룡암관광지 가라ok 뻘건 벽돌집 마당에 멎어섰다. 신사차림의 중년사나이들이 화사한 차림의 아가씨들을 달고 차에서 내렸다. 그중의 한 사나이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뭐라고 지껄여댔다. 주인인듯한 해사한 녀자가 문을 열고 나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윽고 집안에서 쿵작쿵작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담가담 흘러간 옛노래의 곡조가 까르르 깔깔, 꺼르르 껄껄 대는 남녀의 웃음소리에 범벅으로 짓뭉개왔다.

그제날 눈물의 강이 오늘은 오락장으로 되여가고있었다. 수난의 력사를 비껴담고 흘러가는 두만강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맥주잔을 기울이며 유흥을 즐기는 저들은 나처럼 이민 3세이리라.

나는 외로운 우울감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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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시인 조기천은 <<두만강>>에서 이렇게 읊었다.

찌프린 낯 투럼이 옷

재산이란 가슴속 옹이진 노예의 설음

의탁이란 장알진 손지팽이뿐

놈들에게 빼앗기고 짓쫓기는 그 신세

두만강이여 이것이

그대 그려둔 조선의 사나이 아닌가

째진 가난속에 부대껴도

말 한마디 틀리랴 겁내며

눈물에 치마고름 썩어도

앞날을 바라고 한숨을 죽이는―

두만강이여 이것이

그대 그려둔 조선의 녀인이 아닌가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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