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년 대흉재에 기아와 병으로 사람들은 무리로 죽어나갔다. 그래서 죽음의 동의어였던 <<월강죄>> 역시 재난을 입어 오히려 월강을 꼬드기는 유혹으로 되였다.

<<녕고탑과 훈춘경계로 되고있는 황편구(荒片溝), 가야하, 아밀달(阿密達)일대에는 사람들이 보짐을 지고 무리를 지어 서쪽으로부터 동쪽 산지방향을 향해 꼬리를 물고 걸어가고있었다. 그곳으로 가면 생활의 방도가 있는가를 물었더니 금년 봄 두어달동안 그곳을 지나간 사람이 2, 00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

1877년 3월 19일 <<훈춘부도통아문당안>>에 적힌 글이다.

1870년 녕고탑부도통에게 보내온 각 초소 관리들의 보고는 또 아래와 같이 적었다.

<<지금 조선 남녀로소들이 이곳을 부단히 래왕하는데 그들은 마을마다 찾아다니면서 류리걸식하고있다. 그러나 언어가 통하지 않으므로 물어도 실정을 알수 없는 가련한 형편이다. >>

산설고 물설고 말이 선 이국 타향으로 찾아온 그들은 식구들을 살리려고 귀여운 어린 자식들을 쌀 한말에 팔지 않으면 안되였다.

만족 본토민이나 산동쪽에서 밀려와 자리잡은 실향민들은 서푼 싼 <<인력>>을 짐승 부리듯 했다.

12살 어린 소녀를 헐값으로 산 주인은 개, 돼지 취급을 했다. 수십마리 소를 방목시키면서도 쩍하면 앞남산이 거꾸로 비낀 멀건 죽사발마저 발길로 걷어찼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 들어 소를 몰고 돌아오니 주인은 소가 한마리 없어졌다고 열두밤이라도 찾아오라고 매질을 해서 문밖으로 내몰았다.

<<이년아, 송아질 찾지 못하면 이 대문에 발을 들여놓지 마라!>>

소녀는 어둠속을 정처없이 헤매면서 <<쇄자, 쇄자!―>>목메여 불렀다. 하지만 들려오는것은 억수로 쏟아지는 비소리와 굽이쳐 흐르는 골물소리뿐이였다.

하루종일 굶고 지친 가녀린 소녀는 송아지를 찾고 찾다가 숲속에 쓰러졌다.

소녀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불쌍한 소녀의 넋은 쇄자새가 되여 지금도 <<쇄자(송아지의 사투리), 쇄자―>>하고 옛설음을 구슬프게 하소연한다고 한다.

어른들은 지주의 머슴으로 되였다.

안도현 이도백하진에서 백두산으로 곧추 남으로 내려가면 황송포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다섯쌍 한전을 가진 지주가 있었는데 이주민들은 너나없이 머슴을 살려고 했다. 그래서 삯전이 하루 세끼 밥을 먹여주는데 그쳤다. 어느해 황송포라는 젊은이가 머슴으로 들어앉았는데 힘이 장사고 일을 잘하는것만치 먹새도 좋아 지주는 식사때마다 돼지죽이나 다름없는 음식을 주면서도 욕사발 대접은 아끼지 않고 듬뿍듬뿍 안겼다. 가을이 끝나자 지주는 한겨울동안 놀리고 먹이는 곡식이 아까워서 타작을 마치자 쫓아냈다. 화가 상투밑에까지 치민 젊은이는 그날 저녁 지주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갔다. 이 사실은 후에 전설로 전해지기를 젊은이가 머슴으로 들어설 때 일년 삯전으로 한단의 곡식만 달라고 해서 지주가 쾌히 받았는데 가을에 힘이 장사인 그는 다섯쌍 곡식을 한단에 몽땅 묶어서 지고 가더라는것이다. 하긴 다 지고 갔던 불에 탔던 지주한테 남은것은 없다는데서 생긴 이야기일지 모른다. 어쨌든 당시 이주민들의 비참한 처지는 글로나 말로써 표현이 닿지 않는것만은 독자들은 명기하시라.

화룡시 로과에서 무산을 경과하여 남평(南坪)까지 30리 인적없는 한적한 산길에 나는 가슴 아픈 사색을 깔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제날 할아버지 세대분들이 쪽박을 차고 울며 가던 한맺힌 길이여서 나는 발목에 천근추를 달아맨듯 걸음이 무거웠다.

감뛰며 출렁이는 두만강의 물결소리는 혹시 그제날 물을 건너다 빠져죽은 수중고혼의 애통한 울음소리는 아닐가?!

쏴쏴 바람에 설레이는 숲의 하소연소리는 그제날 눈덮인 산을 넘다가 얼어죽은 림중고혼의 절통한 울부짖음은 아닐가?!

11월 짧은 해가 뉘엿뉘엿 나무 우듬지에 매달렸을 때 나는 먼발치에서 남평진을 바라보며 수리봉아래에 이르렀다. 사나운 독수리가 당금 날개를 치며 강을 건너갈듯 웅크리고 앉아있는 바위기슭 펑퍼짐한 개활지대에 210호의 집들이 두만강을 마주하고있었다. 인구는 720명, 거의 모두가 조선족이라고 한다.

이곳이 바로 화룡시 덕화진(德化鎭) 소재지 남평이다. 강 하나를 사이두고 조선 함경북도 무산군 로덕리(盧德里)부락이 산비탈에 터를 잡았다. 남평은 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문들을 내고 로덕은 북쪽 산비탈에 북향으로 문을 내서 두 마을 사람들은 문을 열고 나오면 마주 바라본다.

강폭은 겨우 30여메터, 두나라를 잇는 남평해관과 조선 함경북도 무산군 칠성리통검소가 서기는 1927년, 1948년에 남평관세소에 7명 관원이 있었다는 기재가 있다. 1952년 새로 남평통상구를 설립, 600평방메터의 단층 벽돌집안에 해관, 변방검사소, 위생검역소, 동식물검역소 등이 자리하고있다.

1994년 봄 조선측에서 놓았다는 국경다리는 너비가 3m, 길이가 50m인데 궁(弓)자형국으로 기둥은 철이고 다리표면은 널판이였다. 중국측으로부터 30m 되는 곳에 철문을 장치하여 두나라의 분계선으로 했다. 그때로부터 나루배로 오가던 력사에 드디여 종지부를 찍었다.

지난 세기 중엽 여기 강량안은 인가없는 숲이였다고 남평마을 천중백(千重佰―66세)로인은 말한다.

<<선생이 무산에서 오면서 보았을테지만 호곡아래 룡암봉(龍岩峰)이 대밑에서 바라보면 멋없이 아칠한 절벽이지만요 조선에서 보면 한마리 거대한 룡의 형국이랍니다. 예전에 룡머리가 두만강속에 쳐들려서 여간 사나운것이 아니였다고 하데요. 남이장군의 선산이 무산 칠성동에 있었답데다. 그런데 어느해 갑자기 강속의 룡의 머리가 떨어져나갔지요. 그래서 남이장군이 모함을 받아 홍안으로 죽었다는 풍수설이 생겼답니다. ―

나라의 동량지재들이 간신적자들의 모함을 받고 혼암한 임금의 명에 따라 하수를 당하니 나라가 엉망으로 찌들었답니다. 도탄속에 빠진 백성들은 강을 건너왔지요. 그때 강북은 땅이 기름져서 감자 한알을 둘이 배를 두드려가며 먹어도 다 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호박이 항사리만하고 조이대가 참대처럼 굵었다지 뭡니까. 로과진 죽림촌(竹林村) 이름이 그래서 생긴것이랍니다. 비법월강해서 날농사를 짓던 사람이 가을에 뒤를 보려고 조이밭에 엉거주춤 앉아서 흐뭇한 심정으로 손가락마디씩한 조이대를 바라보니 참대밭에 든 기분이더라 그거지요. ―

남평과 로덕의 이름 유래도 이민사와 관계가 되더군요. 몇해전에 조선 로덕에서 스피카로 방송을 하는걸 들었는데요―>>

당시 무산 칠성동에 김씨일가가 살았다. 일년내내 새별을 이고 밭에 나갔다가 별을 지고 돌아왔어도 척박한 땅은 린색하기만 해서 가렴잡세를 내고나면 타작을 끝낸 날부터 입에 풀칠도 어려웠다. 쌀독엔 거미줄이 치고 사람은 먹지 못해 해골같이 피골이 상접했다. 우로는 부모를 모시고 세월이 갈수록 잔밥들이 줄줄이 생겨나서 생계가 극난이였다.

청정부의 조선난민에 대한 구축요구에 따라 리조는 150리 기나긴 변경선에 60여개 포막을 세우고 월경입북을 엄금했으나 포도청은 멀고 목구멍은 속일수 없어 김씨는 이른 봄에 죽음을 각오하고 강을 건넜다.

그는 쳐다보아도 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록음이 우거진 깊숙한 골짜기에 들어가 땅막을 쳤다. 산마루에 올라 바라보면 사면 어데라 없이 푸른 물결 넘실대는 망망한 숲 태고연한 밀림이였다. 맑게 개인 날 저멀리 하늘과 푸른 숲이 하나로 엉켜붙은 지평선에 백두산 흰머리가 알릴듯말듯 시야에 들어와 천리림해에 신비감을 더해주었다.

그해 그는 성산의 혜택을 받아 조이며 옥수수며 감자농사가 작황이 좋았다. 그는 등짐으로 수확물을 한짐한짐 지어다 강역 숲에 감추었다가 강이 얼기 바쁘게 집으로 날랐다. 봄에 집을 나갔다가 겨울에 문득 나타난 김씨를 월강죄인쪽으로 생각을 꺾는 사람은 없었다. 해마다 객지로 품팔이를 살아온 그였으니말이다.

그런데 화는 감자에서 생겼다. 구은 감자를 냠냠 먹으며 동리 아이들과 휩쓸려 숨박꼭질을 하던 막동이가 라졸의 손에 잡혔던것이다.

<<너 감자가 어데서 생겼니?>>

라졸의 물음에 천진한 막동이는 아버지의 부탁을 감감 잊고 곧이곧대로 이실직고했다.

사령들이 김씨를 잡으려고 도적개마냥 밤중에 마을로 기여들었다. 다행히 관청에 척형이 있어서 선통을 받은 김씨는 삼십륙계 줄행랑을 놓았다.

그후 김씨는 집으로 돌아올수 없는 몸이 되였다.

온집 식구들의 명줄을 쥐고있는 김씨가 없으니 집안은 늘 초상난 집안처럼 쓸쓸했다.

세월은 흘러 또 년륜 하나를 그었다. 겨울이 오고 강이 얼자 김씨는 곡식 짐을 무겁게 지고 도적고양이마냥 집으로 왔다. 하지만 죽음이 웅크리고 기다리는 집에 시름놓고있을수가 없었다. 그는 집식구들을 거느리고 솔가도주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 요구는 부모들의 마음을 통할수 없었다. 선산을 버리고 갈수 없다는것이였다. 요즘 세월엔 살아있는 부모마저 박대하는 일이 항다반하지만 그때는 죽어서 땅에 파묻혀 해골이 된 선조들의 산소를 버린다는 일 자체만으로도 사람이 짐승으로 되였으니 김씨는 부모의 고집을 꺾을 엄두도 못냈다. 그래서 김씨는 부모와 자식들을 안해한테 맡기고 다시 강을 건널수밖에 없었다.

생리별이였다. 자나깨나 부모처자 생각에 가슴이 찢겼다. 끼니마다 음식을 놓고도 목이 메고 밥알이 모래처럼 씹혀 도저히 먹을수가 없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늙은 량주는 자식을, 안해는 남편을, 자식들은 아버지 생각에 한숨과 눈물로 나날을 보냈다.

그때 그들의 심정을 리기영의 <<두만강>>에서 찾아본다.

―고향에 남아있는 그들의 젊은 안해들은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고 남몰래 애를 태웠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안해들은 그리운 남편의 소식을 모르는게 못내 안타까웠다.

이러한 심정이 쌓이고 쌓인것은 그들이 부르는 월강곡에 련련하게 표현되였다.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

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

이 몸이 건너면 월강죄란다.

그리하여 아낙네들은 눈이 빠지게 두만강 북쪽 하늘을 무시로 쳐다보며 창자를 끊는듯한 상사일념의 깊은 한을 느끼였다. 애오라지 그들은 월강곡을 부르고 부르고 하며 바람편에 그리운 정을 부쳐보냈다.

그러나 두만강 저편에는 무심한 구름만 오락가락할뿐 저 하늘밖의 창망한 허공같이 그들의 소식은 아득하였다. 아! 이렇게 가신 랑군을 일각이 여삼추로 그리워할 때 그들은 대인난(待人難)의 노래를 다시금 부르지 않을수 없었다.

세봄이 다가도록 기별조차 없는 님을

가을밤 안신(雁信)까지 또 어찌 참으래요

두만강 눈얼음은 다 풀리여 갔다는데

세봄이 아니오라 열세봄 지났어도

못참을 내 아니언만 가신 님 날 잊을가

강남의 제비들은 제집 찾아 왔다는데

이 노래의 임자들중에 강금령을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와서 동북지방을 헤매던 사람이 과연 얼마나 많았으며 또한 그대들에게 묻노니 그후에 누가 고향에 돌아가서 사랑하는 부모처자를 반가이 만나보았던가? 아낙네들은 무정한 랑군들을 원망하며 어제도 오늘도 그대들을 고대하고있지 않았던가?!

현실은 이같이 피에 맺혀있었다. 하지만 고달픈 현실의 꿈이 담긴 전설은 희망적이라 하겠다.

칠성리 김씨는 인총이 없는 오늘의 남평 뒤산에 밭을 일구고 씨를 뿌렸단다. 그리고 남편의 거처를 알게된 집식구들도 칠성동을 떠나 지금의 로덕으로 와서 초가를 짓고 밭을 붙였으니 남편과 그 안해는 강 하나 사이두고 지척에서 살았다는 말이 된다. 그랬으면서도 서로 만나 부둥켜안고 회포를 씻고 사랑을 나눌수 없다니 그 애달픈 마음 더구나 간장을 오렸다고 해야 할것이다. 행방을 몰랐을 때는 무사히 있게 해달라고 성황당에 빌면서 마음을 달랠수도 있었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면서 옷 한번 빨아 입히지 못하는 안해의 마음이나 집의 모든 근심과 일을 가녀린 녀자의 몸으로 해가는 처량한 모습을 강건너 불보듯 지켜 보아야만 하는 남편의 심정은 찢어졌다.

세월의 무정한 흐름속에 이마에 주름이 가고 흰서리가 머리에 내리여 로데기(로친의 사투리)로 되기 시작한 안해와 령감이 된 남편 김씨는 죽음의 강이 가로 놓여서 손저어 부르고 문안을 하면서도 따뜻한 온돌에 단란히 모일수 없는 신세, 눈물은 흘러서 강이 되고 한은 맺혀서 고드름으로 마음의 처마에 얼어붙었다.

― ―

<<조선의 녀성아나운서는 챙챙한 목소리로 <그로부터 이 고장 이름은 로덕과 남평으로 되였는데 로덕은 로데기의 준말이고 남평은 남편의 오발이라 하겠습니다. >라고 하고는 오늘의 행복이 어디에서 왔다는것을 잊어선 안된다고 이야기하더군. >>

천중백로인은 여기에서 이야기를 한단락 지었다.

로인은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리고 웃음 뒤끝에 우리는 심각해졌다.

한낱 보잘것 없는 짐승들도 자유로이 오가며 먹이를 뚜지는데 인간은 어이하여 국경을 조작하고 상호 총뿌리를 맞대고 살육을 일삼는것일가?!

인간으로 태여나서 <<제집 찾아 나온>> <<강남의 연자>>보다도 불행하게만 살아야 했던 할아버지세대의 피눈물로 얼룩진 한생을 어찌 짐승보다 낫다고 하리요!!

19세기중엽부터 조선의 가난한 농민들은 강을 건너 부대밭을 일구었다. 봄이면 씨를 뿌리고 가을이면 타작을 해서 등짐으로 날라갔는데 이런 농사를 라농질 혹은 날농사라 한다. 그같은 라농질시기에 생긴 이름이 바로 남평(남편에서 편의 류사음을 따서 언덕 평(坪)자를 붙인것임), 로덕이 되였다.

짜리로씨야의 침략의 마수가 연변으로 뻗혀오는 실정에 비추어 청정부는 봉금을 페지하고 <<이민실변>>정책을 폈다. 물론 그것은 조선 월강민에 한한것이 아니고 중국내의 만족외의 한족 등 다른 민족에 대한 정책이긴 했으나 그 혜택은 조선민들에게도 비쳐왔다.

1883년 서북경략사 어윤중(西北經略使 魚允中)은 함경북도를 순열하던 도중 종성의 수항루에 올라 두만강 대안의 산발로 뱀이 기여가듯 구불구불 난 오솔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무슨 길인고?>>

종성부사가 대답을 올렸다.

<<백성들은 저승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나이다. >>

어윤중은 놀랐다.

<<저승길이라니?>>

부사는 이실직고했다.

<<이곳 날농사군들이 강을 건너서 골짜기에 들어가 부대를 일구면서부터 난 길이옵나이다. 월강죄는 목을 친다고 했으니 저승길이 아니겠나이까?>>

드디여 깨닫는바가 있어 어윤중은 월강금지령을 페지하고 <<월강죄인 불가진살(越江罪人不可塵殺)>>이라고 하면서 월강자들에게 지권을 주어 강북으로의 이주를 승인하라고 했다.

한편 길림장군 명안과 오대징은 연변지방에서 이미 다수를 차지한 조선족을 축출시킬수도 없고 이미 개간한 토지를 황무지로 만들것을 념려하여 집조를 발급하여 개황을 허용하되 일후의 월경을 엄격히 단속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1883년 3월 9일 중국 량국은 <<봉천과 조선변민의 교역장정>>과 <<길림조선상민무역 지방장정>>을 체결했다.

이로부터 변경주민들속에서 불려지던 <<월강곡>>은 마침내 피를 끓이는 노래에서 해탈할수 있는 조짐을 보였다.

그런데 어윤중의 령이 제때에 변강 각 부에 전해지지 못해 월강죄로 아쉽게 죽어간 사람이 있으니 그는 무산의 사포수라고 한다.

월강 사냥을 한 사실이 탄로가 나서 관가에 잡힌 사포수는 달구지에 앉아 두만강변 사형장으로 떠났다. 국경 한계가 없이 자유로이 넘나드는 짐승이야 국적이 있으랴만 사람이 강을 건넜다는 리유 하나로도 당시엔 사형판결이 쉽게 떨어질수 있었으리.

수인차를 끄는 둥굴소는 울퉁불퉁한 길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암소처럼 대소변때문에 멈추는 시간랑비도 없이 슬슬 잘도 끌고 갔다.

강변 사형장의 단두대 량옆엔 벌써 명을 받고 온 도부수들이 름름히 대기하고있었다.

도부수들의 손에 들린 선들선들한 큰 칼을 보자 사포수는 진작 혼백이 구중천에 날아올랐다.

수인차가 사형장에 이르기 바쁘게 사령들은 결박한 사형수를 끄집어 내려 꿇어 앉히고 단두대에 머리를 얹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 고을쪽에서부터 말 한필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말등에 앉은 파발군은 손을 휘저으며 뭐라고 소리를 쳤는데 거리가 멀어서 무슨 소리인지 가려 들을수가 없었다.

판결문을 읽고나자 도부수들은 칼을 허공에 들었다가 힘껏 내리찍었다.

목이 두동강이 나면서 뻘건 피가 분수처럼 쏴―솟아 사방에 휘뿌려졌다.

<<사형을 정지하시오! 월강죄 불문에 붙이라는 어명이오!>>

파발군이 들이닥치며 바쁜 소리를 쳤다.

모두들 아연해졌다.

하지만 어명은 행차뒤의 나발이였다.

사포수의 시체는 꿈지럭거리다가 굳어졌다.

목에서 떨어져나간 머리와 싸늘히 식어가는 몸둥이는 마치도 커다란 웨침표마냥 모래사장에 뉘여졌다.

그것은 월강죄에 대한 종지부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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