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동근 박사

1.가리봉 중국동포타운의 형성

 “천국”과 “지옥”을 넘는 가리봉의 중국동포들

  2004년에 우연히 k씨를 가리봉에서 만났다. 그가 거주하고 있는 쪽방촌은 중국 농촌의 시골에 살고 있는 필자가 보기에도 사람 사는 곳이 아닌 지옥같이 보였다. 코 구멍한 방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고 해 빛조차 잘 들어오지 않아 습기가 찬 방이었다. 바로 이런 곳에 중국동포들이 2,300명 거주한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  아팠다. 그보다 더 답답한 것은 한평생 외국도 가지 못한 주인집아줌마들이 “중국에는 TV가 있나? 밥은 배 불리 먹나? ” 등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나라면 벌써 이 지옥 같은 동네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K씨는 꿈 참고 잘 지냈다.

  2008년에 K씨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래서 가리봉에서 약간 떨어진 독산동에서 3000만 전셋집에서 사는데 방은 휠 씬 좋아 보였다. 그래서 우스개로 12만 벌집의 머슴꾼이 3000만원 전셋집에서 사는 오야지가 되었다고 추켜 주었다. 그랬더니 K씨는 “중국 연길에서 이미 지주(地主)가 되었다는 것이다. 새로 개발된 지역에서 한화 5000만원좌우에 해당되는 아파트를 사서 다른 사람한테 임대하여 주고 왔다는 것이다.

  4년 전에 K씨는 하루에 평균 10시간이상으로 철근관련 일을 하였다. 현장작업에서 사용되는 일본어 단어들이 그의 입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이제는 농사꾼이 아니라 숙련된 노동자로 보였다. 몇 년 전에 철근에 찔린 다리는 아직도 절룩절룩 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천국의 꿈”을 얘기하면서 행복해 하였다. 처자식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연길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 자녀들이 다니는 대학은 중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 그 건물들이 마치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나듯 전달하였다. 자식들은 아직 대학은 가지 못했지만 아파트천국은 이미 실현 되었다. 그는 자신이 배우지 못한 지식, 가난에 찢어지는 생활, 고되고 지루한 노동, 수많은 “탈출”을 위해 “코리안 드림”을  갖고 한국에 나섰다.

  가리봉타운은 바로 1992년 한중수교이후 본격적으로 K씨와 같이 꿈을 가진 조선족동포들이 “도시에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등 수많은 꿈을 갖고 한국으로, 서울로, 가리봉으로 달렸다. 그들은 천문학적인 빚을 내면서 인생의 새로운 도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에 도착하는 순간 상상속의 한국은 완전히 깨어져 버렸다. 미디어에 나타난 한국, 드라마에 나타난 한국이 아니라 그들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은 바로 한국의 산업화의 최전방이었던 구로공단이었고, 그곳에서 제일 값싼 거주공간을 구입하여 현시대의 “노동 벌”로 변신되는 운명이었다. 그들은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동포들의 자존심을 심어준 모국에 아직도 이런 “벌집”이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였고, 이렇게 고된 노동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동포들은 바로 이런 “지옥”에 선택되었고, 여기에 하나하나 모여 살면서 점차 가리봉 동포타운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중국동포타운 이주민의 이주배경

  2001년에 중국의 국가 주석(당시 국가부주석) 후진타오(胡錦濤)가 연변 용정의 조선족가정을 방문하였다. 아래의 사진처럼 TV도 있고, 과일도 풍부하고 주택환경도 좋은 편이다. 그때 연변을 포함한 전반 조선족은 먹고 입는 문제는 벌써 해결되었지만 소득은 높지 못하였다. 사회주의 이념이 제일 잘 반영된 동북지역은 시장경제로 전환하면서 국유기업이 파산되고 구조 조정되면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동북경제는 상대적으로 지체되었다. 이때 조선족이 집거하는 연변을 포함한 동북3성의 대부분 지역에서 노무수출이라는 루트로 대규모의 인구유동이 일어났다. 조선족은 바로 한국이란 모국으로 국제유동을 통하여 “외화벌이”에 나섰으며, 송금으로 자녀와 가족을 지탱하였고, 연변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족 집거지역의 지역경제를 발전시키는데 매우 큰 공헌을 하였다. 중국의 지역정부는 조선족의 “외화벌이”를 지원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조선족농촌은 “공동화”와 해체의 위기가 출현하였다.

  
  한국의 재외동포정책은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방문 후, 본격적으로 오픈되면서 담론이 활성화되고, 재외동포법이 추진되면서 가닥을 잡히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국과의 외계관계 등 여러 원인으로 구 사회주의권의 조선족과 고려인이  제외되는 재외동포법이 통과되었다. 불과 민족국가체계가 건립되었는지 50년도 안되었는데 한국 국가의 정당성과 정통성에 기반이 되는 만주벌판과 연해주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던 “독립투사”의 후손들이 동포에서 배제되는 것은 한국의 민족성에 거대한 타격이 아닐 수도 없었고, 중국동포들의 정체성에 혈연적 민족성을 약화시키고, 국민적 정체성을 강화하여 주었다.

  그러나 2003년 11월 조선족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2002년 한나라당과 열린 우리당의 후보 때부터 연수생제도를 수정하여 고용허가제가 공약이 되면서 조선족문제는 다시 수면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노무현대통령은 2003년 11월 한국시민단체가 조직한 조선족 2000여명이 참가한 농성 장소 서울조선족교회를 방문하면서 “동포포용”의 의지와 입장이 표현되었다. 노 대통령은 농성 장소인 서울조선족교회를 방문하면서 방명록에 "중국 동포 여러분 힘내세요. 국경과 법제도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우리 국민들의 믿음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정부도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건강 잘 돌보십시오."라고 적었다.

  이 시기에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재외동포법을 위헌으로 판결을 내렸고 새로운 재외동포법수정안이 제기되었고, 또한 외국인이주노동자정책이 고용허가제중심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시점이었다. 2003년 말에 고용허가제가 통과되면서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정책은 정책적“합법화”가 추진되었고 노동력수출중심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노동력시장접근”과 “동포접근”이 병행되면서 한국이란 모국에 대한 동포들의 호감이 급속히 호전되었고, 노무현 정권에 대한 고마움이 내심으로 솟아났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2008년 노문현대통령이 귀향할 때 2000명의 중국동포들이 환송식을 벌인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최고 지도자의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족은 오늘날의 주권중심의 국민국가단위에서 국민 혹은 한민족 등으로 해석할 수 없는 특수성을 갖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족은 누가인가 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차원에서 볼 때 중국과 한반도(북한도 포함)의 최고지도자들이 어떤 태도를 갖고 조선족을 대하는 가에 의하여 1차적 정치적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민간교류에서 부동한 공간과 시간에 따라 2차적, 3차적 등 다중적 정체성이 출현되는 것이다.

  2008년 현시점에서 가리봉동 중국동포타운에는 조선족만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한족들이 더욱 많이 생활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지역 상인을 포함한 지역주민들이 생활하는 것이다. 이들은 바로 한족과 한국동포들 사이에 어느 한쪽도 버릴 수 없는 존재자로 되었다. 그것이 한국이든, 중국이든. 이러한 환경에서 조선족 엘리트들이 선택하는 가치는 바로 “화합과 공존”의 가치이다. 이것은 바로 가리봉에서 실천하는 가치지향이며, 이 가치를 통하여 새로운 초월의 “정체성”을 확보하자고 하는 것이다.


2. 한국식 차이나타운: 지역주민들과 상인들이 바로 보는 동포타운

과거기억으로서 빈민타운

  90년대 초반에 한국인에게 있어서 가리봉은 이미 슬럼화 된 지역이었고, 산업구조조절로 한국의 노동자들이 빠져 나가면서 외국인들이 3D업종에 종사하는 새로운 ‘머슴’을 받아들이면서 선진국의 꿈을 꾸는 한국이었다. 가리봉에 거주하는 대부분 주민들은 역시 60년대 산업화의 물결을 탄 이농민들이 대부분이었고 오늘날 그들의 기억에 있어서 이민은 ‘빈민’과 같은 존재이고, 60년대의 아픈 기억들로 ‘불쌍한 동포’로 보이는 것이었다. 지역주민들은 쉽게 “중국에도 TV가 있나요?” “중국에서 쌀밥을 먹을 수 있나요?” 등 수많은 한국의 60년대 이농민의 기억들로 질문을 하는 것이다. 또한 가리봉은 바로 수많은 영화와 소설에 의하여 ‘노동’, ‘빈민’으로 낙인 되었다. 이러한 기억들이 중국동포들이 들어오면서 새롭게 재생산되고, 강화되었지만 가리봉의 모습 뒷면에 은폐된 중국동포들의 ‘천국’의 모습은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선택은 가리봉을 ‘가산디지털’로 이름까지 바꾸어 버리는 새로운 시도로 ‘망각’하려고 하는데, 중국동포들의 밀접거주는 과거의 상처를 회억하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하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가 상실한 타운

  바로 이러한 공간 이미지 속에서 조선족 동포들은 중국의 고향을 그리고, 중국의 친구들이 더 소중해 보였고, 고향의 음식과 술이 더 맛있어 보였다. 한주일 노예처럼 일하고 온 그들은 노래방에서 중국노래를 부르고 싶어 했고, 비오는 날에는 별로 좋은 휴식공간도 없는 가리봉에서 친구 집에 모여 마작(중국식 놀이)가 신선노름이 되는 것이다. 또한 수년간 처가자식을 떼놓고 이국에서 생활하는 그들은 생리적 수요가 급히 해결되는 분출구도 필요 되었다. 바로 이런 인간적인 기본적인 생존욕구와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는 서비스업들이 국제결혼가족, 귀화한 중국동포, 일부 성공한 중국동포들에 의하여 음식점, 노래방, 게임방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에 의해 ‘시장’으로 조직되었다. 이런 시장의 확대가 바로 “차이나타운”의 이미지를 통하여 지역 상인들에게 새로운 장사기회를 제공하였으며, 나쁜 이미지는 ‘차이나타운’으로 타자화하면서 자신들의 도덕성의 책임에서 회피하려는 현상도 보이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는 기회의 타운

  중국 동포타운신문 김용필 편집국장은 이제 한국사회는 중국동포 밀집거주지역인 가리봉동 등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중국동포타운이라 해도 좋고 차이나타운이라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중국동포 밀집거주 지역은 분명 차이나타운과는 차이가 있으면서 동시에 한국식 차이나타운이 형성될 수 있는 곳입니다.”

  가리봉타운은 바로 ‘차이나타운’, ‘조선족타운’, ‘옌볜타운’, ‘동포타운’ 등 수많은 이미지로 ‘한국 속의 중국’으로 고립화되었다.  짜장면과 짬봉이 없는 차이나타운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중국음식점의 간판이 대부분 중국의 간자체로 표기되어 분위기적으로 중국의 모습들이 나타나 중국과 관련된, 조선족과 관련된 이름들로 호칭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런 호칭은 후에 중국의 조선족사회에 널리 퍼져 한국에 가면 우선 가리봉타운을 찾는 것이 한국에서 정착생활을 하는 첫 발자국이 되기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 새로 온 조선족 이주민들, 한족들은 고향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쉽게 방을 구할 수 있었고, 일자리를 찾을 수 있고, 고향 맛이 진한 분위기속에서 생활할 수 있기에 가리봉중심으로 차이나타운은 확대되어 갔다. 3-4년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한국정책에서 의하여 합법자격으로 거주할 수 있는 동포들은 점차 대림-신대방-봉천-낙성대 심지어 강남까지 확대하면서 점차 집값이 높은 동네로 확산되었다. 최근에 구로지역만 3만명 이상의 중국동포들이 밀접거주하면서 중국동포타운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문화요소와 소비집단의 증가는 새로운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지역정부가 도시정비와 개발에서 이런 요소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새로운 변신을 시도를 하려고 한다.

3. 범죄의 타운: 일부 한국 언론에 비쳐진 가리봉타운

취재왜곡에 정정요구를 하는 사람들

  중국동포타운신문사 김용필편집국장은 “2008년 4월 8일 발행 <시사저널>에 보도된 위 제목의 기사내용은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마치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과장 확대하여 보도하여, 중국동포 이미지뿐만 아니라 중국동포 밀집거주 지역인 가리봉동에 대한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키고 있으며, 중국동포와 한국사회를 하나로 잇고자 노력해온 필자의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에 필자는 <시사저널> 보도내용에 대한 사실 여부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 보도기사에 대한 해명자료로 이 글을 쓰며, 정정보도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5년동안 가리봉에서 지역주민들과 동포들 사이를 오가는 김용필국장은 한국의 가리봉타운 뿐만 아니라 중국에 사는 한국인과 동포들이 함께 거주하는 코리안타운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여러 차례 중국의 단동-심양-연길-청도 등 한국인 밀접거주지역을 방문하면서 가리봉과 새로운 연대관계를 모색하는 작업도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언론에 과대 포장된 범죄현상에서 중국정부가 어떻게 중국의 코리안타운에 대하는가에 대하여 깊은 우려도 표시하였다.

  김용필편집국장은 “ 중국에도 중국동포와 한국인이 모여 사는 코리아타운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한국의 중국동포타운(일명 차이나타운)과 중국의 코리아타운은 비슷한 문화공감대 지역입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중국동포 밀집거주지역을 자꾸 범죄지대로 몰아가려는 성향이 많습니다. 그것은 한국에 형성되는 차이나타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될 것이고, 결국 중국사회도 중국에 형성되는 코리아타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공격을 퍼부 울 것입니다.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때입니다. “

  유학생 K씨도 이 기사를 보고 아래와 같은 댓글을 달았습니다. “나도 이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기사가 아니라 완전 액션소설 같습니다. 현재가 아니라 예전에 잠깐 있었던 일, 그것도 엄청 과대 보도하여 재한조선족사회와 가리봉지역민들을 모함하였습니다. 정정요청이 아니라 김국장과 동포사회 전체가 시사저널에 항의하고 관련기자의 공식 사과를 요청해야 될 것 같습니다”

  서울대 등 한국의 언론정보학과의 석박사 학위논문에서 한국 언론에 비친 “동포이미지”에 분석연구에서 대부분 “조선족”, “옌볜”, “차이나타운”은 부정적 이미지와 연결되었고, 한국과 관계가 끊기는 배제의 방식으로 표현된다면, “교포”,“중국동포” 등 호칭과 관련된 기사는 긍정적 이미지와 사건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현장에서 일하는 많은 조선족들마저 “조선족”의 호칭을 싫어하고, “교포” 혹은 “동포”의 호칭을 자신들끼리 서슴없이 사용하는데서 잘 입증되고 있다.

 특징공간과 새롭게 부정적 이미지화

  중국동포타운 김용필국장를 비릇하여 많은 사람들이 중국동포와 관련이 있는 범죄를 다루면서 특징지역을 과도하게 부각시킨데 불만이 있는 것이다. 한국에 국제이주민들이 증가하고, 통신정보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국제범죄가 뚜렷한 현상으로 부각되며, 범죄율도 상승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범죄는 강남지역과 같은 서비스산업이 집중된 지역에서도 자주 발생하지만, 그런 지역과 연결되기보다 가리봉, 안산 원곡동 등 특징 외국인 혹은 동포밀집주거지역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지역의 외국인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게 하여 지역주민과 외국인 혹은 중국동포들 간에 갈등을 새롭게 증가시키는 현상이 실제적으로 발생하기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안산원곡동과 가리봉동 등 지역에 대하여 마약, 범죄 현상에 대한 집중보도가 진행되면서 마치 이 지역들을 “사람이 살지 못하는 인간지옥”으로 과대 포장하는 현상도 두드리게 나타났다. 그러나 각 지자체에서 “차이타운 건설 붐”도 일어나고 있었다. 한국에 “부유한 차이나타운”을 건설하기 위해 세계화상대회를 유치하는가 하면, 지자체별로 지원을 하여 차이나타운을 건설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인천의 차이나타운이다. 이처럼 같은 이름의 차이나타운이지만 그 속에 수많은 차별이 숨어 있었다. 이런 자본과 지자체에 의해 주도되는 차이나타운과 가리봉동의 동포를 중심으로 형성된 중국동포타운 혹은 차이나타운의 근본적 구별점은 무엇인가?

 4.평화와 행복의 타운: 상상하고 실천하는 가리봉의 미래

자연발생적인 가리봉 동포타운: 신뢰와 연대의 가능성이 보이는 공간

  가리봉타운의 생명력은 관광지로서 개발된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는데 있다. 그래서 더욱 중국적이고, 더 문화적이고, 더 인간적인 것이다. 비록 관광지인 차이나타운처럼 질서정연하고, 깔끔하지 못하지만, 무질서 속에서 인간중심의 본연적 질서가 숨어져 있는 것이 가리봉타운 인 것이다. 비록 언론에 의하여 도끼, 칼, 마약 등이 자주 등장되고, 싸움이 일상화되고, 술 취한 사람들이 자주 지나가고, 욕 짓거리가 도처에 들린다. 이런  “원초적인 모습”을 노골 시킨 이미지들은 “문명인”들에게 불안과 불쾌감을 갖다 줄지 모르지만, 국민보다 우선 동포가 앞서는 가리봉동에서 바로 “찐한 충돌과 신뢰”가 형성되는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된 노동, 강제추방의 압력, 보장 받지 못한 취업과 노동임금, 수시로 위험에 처한 노동사고, 이민정책에 의해 강제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 등 수많은 비인간적인 제도에 의해 재생산되고 만들어지는 “일상의 저항”속에서 그들은 새로운 연대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자는 2004년, 2005년, 2006년 3년간 가리봉, 안산, 그리고 일본에서 일본의 재외동포들이 밀집 거주하는 일본 군마현 오오타시와 오이즈미마찌에 대한 문헌과 현지조사를 통하여, “법과 원칙”이 우선시되고 제도가 이미 시스템화로 굳어진 일본의 지역사회에서 브라질계 일본인과 그 주변의 중국인들을 포함한 다양한 외국인들이 일상에서 얼마나 고립되고, 원자화되어 “충돌”없는, “범죄”가 적은 사회는 가능하지만 진정으로 다문화의 공간의 실천은 힘들어지는 것을 깊이 느꼈다. 오히려 이런 아래로부터 시작되는 공생, 서로 충돌되고, 모순이 표출되고, 역동적으로 교류하면서 새롭게 만들어질 때 그런 희망과 가능성은 보이는 것이다. 일본의 “요코하마식 차이나타운” 은 지역 상인들과 지역에 수조원의 관광이윤을 마련하고, 또한 이런 차이나타운을 벤츠마킹하기 위하여 현재 각 지자체에서 추진되는 “차이나타운” 새로운 “원자화된 깔끔하게 정리된 인간관계”를 만들고 있는지 깊이 느끼게 되며, 우려가 되기도 한다.

새로운 상상과 실천을 향하여

  2004년에 재한 조선족유학생과 중국동포타운센타는 공동으로 “공존과 화합”의 문화축제를 벌렸다. 그곳에 만 5천여명의 중국동포들이 모였다. 이 활동을 조직하기 위하여 유학생, 지역상인연합회, 중국동포타운센타는 공동으로 자금을 모금하였다. 한집 한집 다니면서 하루에 백여개의 상가에서 문화축제의 취지와 목적을 설명하면서 3일간 지역상인들로부터 천2백여만원의  후원금을 받아 냈다. 그리고 그들은 공동으로 힘을 합하여 “강제추방”을 반대하였고, 일부 지역 상인들과 지역교회목사들은 차밑으로 들어가면서 식당에서 식사하는 동포들을 짐승 잡듯이 끌어 잡아내는 비인도적인 행위에 저항하였다.

  이런 특수한 법적 환경에서 동포들은 더욱 가리봉타운으로 찾아 들고 “믿음과 신뢰”를 확보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실천하고 있다.

 2004년 “공존과 화합의 거리선포식”, 2005년 가리봉 동포축제를 개최하면서 새로운 문화의 공간, 새로운 비즈니스마켓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부단히 나타나고 있었다. 중국동포운신문의 광고지에는 이미 중국 청도 모회사의 “코리안타운”주택분양광고가 나타나고 있다. 전화카드, 국제여행 수많은 한-중 비즈니스사업이 이미 활성화되고 있다.

  가리봉은 이미 정보화와 근대화의 상징인 KTX가 지나가고 있으며, 새로운 디지털단지가 설립되고 있다.  이런 정보화와 지역공간이 특징 이익집단에 의하여 자원이 양극화로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들과 동포들이 공동으로 화합과 협력 속에서 균형적 이윤창출과 배분이 이루어지는 “평화”와 “행복”의 공간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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