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캐니지의 색소폰소리가 제격일 습한 날이다. 부엌에서 음식을 훔쳐먹어 포만감에 젖은 살찐 쥐가 하품하는 소리마저 들릴것 같은 고요, 나는  그냥 벽에 등을 기댄채 잠잠히 앉아있다. 가버린 사랑이 남기는 허탈과 고독, 고통과 목마름을 견뎌내야 할, 훌쩍 큰 키에 야윈 어깨의 오빠가 가을비속에서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과 색소폰 부는 캐니지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여 코등이 찡해난다.

불을 때지 않아 약간 축축한 방우에는 장미빛 스카프가 아무렇게나 던져져있다.
장미빛은 사랑을 의미해. 《해란강》 시응모 시상식에서 탄 상금으로 미자언니한테 줄 스카프를 사들고와서 확신에 차넘쳐하던 조금은 가난하고 조금은 어수룩하고 조금은 촌스러운 오빠의 모습이 생생히 떠올라 명치끝이 아파온다.
만나고 알고 사랑하고 리별하는것은 슬픈 일이다. 오빠한테 미자언니를 소개하지 않았던들 리별이 주는 고통과 괴로움을 오빠는 겪지 않아도 되였을것을.

초중을 졸업하고 시골로 돌아가지 않은 나는 연길 한 복장공장에 취직하였다. 단순한 류수작업이라 나처럼 도시진출을 꾀하는 몇십명의  시골처녀들이 미싱사로 일하였다. 거기에서 미자언니를 알게 되였다 자그마한 키에 외겹눈, 약간 살찐 볼이 뚱해보이긴 해도 부담없고 산뜻한 성격이였으며 기분에 따라 시도 읊조리는 랑만파였다. 나는 인차 그녀와 가까와졌으며 두권의 시집까지 낸 오빠를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향토시인이라는 사실이, 아니면 나의 물밑작업이 은을 내였는지 미자언니는 대뜸 오빠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들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였다. 고달픈 농사일의 여가를 타 쓴 오빠의 시에는 사랑에 대한 확신과 미래를 향한 무한한 동경으로 충만되여있었다.
《그대의 마음 한구석에 내가 자리잡고있다는것만으로
  설사 래일 이 마을 어딘가에 묻힌다 해도
  내 삶은 아름다웠다 감히 말하겠노라.  
  나무와 풀과 꽃과 오곡백과속에
  그대의 얼굴 담겨있으니
  그들과 더불어 한평생을 산다 해도
  내 삶은 행복하였노라 감히 말하겠노라.》
미자언니는 오빠가 선물한 스카프를 길게 늘어뜨리거나 혹은 나비모양으로 예쁘게 두르고 행복에 겨운 새마냥 오빠가 쓴 시를 읊조리며 미싱사이를 오고갔다. 그녀의 사랑은 오빠로 하여금 삶이 안고있는 짐마저 사랑하게 하였다. 그러나…
장미빛 스카프는 그들의 사랑을 옭아매지 못했다. 생각주머니를 비우려고 아무리 애써도 소용없는 일, 산다는것은 언제나 이렇게 내 뜻과는 엉뚱한 결말에 부딪치기도 한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가?

중한 수교후 이미 아세아 경제대국으로 우뚝 선 한국이 우리 조상들의 땅이라는것이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가난에 신물났던 많은 사람들이 노다지를 캐러 한국으로 밀려갔다. 약삭바른 처녀들은 청춘을 밑천으로, 한국 로총각들을 미끼로 가난한 집안을 춰세우는 대들보로 되였다. 《촌뜨기》로 도시총각들의 눈에 차지 않았던, 림시공이라는 지푸라기를 짚고 근근득식하던 우리 복장회사 처녀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달아올랐다. 근 반수이상의 처녀들이 힘들고 지겨운 미싱사일을 그만두었다. 남아있는 처녀들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들떠있었다.  미자언니도 차일피일 결혼을 미루었다. 읊조리고 다니던 시도 사라지고있었다. 사랑스러운 눈길로 오빠를 바라보던 눈빛이 차츰 원망의 눈빛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시골에 처박혀 시나 쓰고있으면 뭐해? 돈벌이도 안되는걸.》
《영혜야, 너라면 시골로 시집가겠니? 우리가 도시 밑바닥에서 헤매는 목적이 뭐야?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니?》
미자언니가 장미빛 스카프를 두르는 차수가 적어지더니 끝내 최후의 통첩을 내렸다. 농사를 집어치고 도시에 집 사고 도시에서 살자는것이였다. 아니면 결혼은 없던 일로 치자고. 오빠가 대학시험치는 해에 아빠는 몹쓸병에 걸려 숱한 빚과 땅을 유물처럼 남기고 북망산으로 길고긴 려행을 떠나셨다. 가정의 중임은 고스란히 오빠의 어깨에 지워졌다. 그러한 오빠에게는 집 살 돈도 없거니와 도시에 들어와 당장 먹고살 일도 막막하였다.
《오빠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조금만 기다려줘. 내가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살게 해줄게.》

이미 많은것을 잃은 오빠를 사랑까지 잃게 하고싶지 않았던 나는 미자언니를 극구 만류하였다. 네가 동의하면 그 남자 도시에 집도 사주고 달달이 생활비도 보내주겠대. 너네집 살릴 사람은 너밖에 없어. 이모가 나에게 하신 말씀은 가히 유혹적이였다. 나는 한두번 만나보고 한국으로 시집가는것을 경멸해왔다. 오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으리라.
하지만 가을바람에 나무들이 제 화려한 잎을 뚝뚝 떨구어버리던 날, 오빠는 미자언니를 떠나보냈다. 미자언니는 목에 둘렀던 스카프를 확 풀어내여 오빠 손에 던지듯 쥐여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아무런 쓸모가 없는 비가 그냥 추적추적 내린다. 하숙집 방안에는 랭한 물기가 촉촉히 흘러들어온다. 내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오빠의 가슴에는 피눈물이 흘렀으련만 사랑을 영원히 떠나보낸 날  내앞에서는 태연하다.
《너의 희생으로 바꾸어온 행복속에서 나는 영원히 자유스럽지 못함을 너는 알아야 해! 그리고 나는 누가 뭐래도 고향의 산과 들을 떠날수 없어. 마을사람들이 다 떠나고 결코 혼자가 될지라도. 나는 고향을 지킬거야. 내 마음이 이러하니 너는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찾도록 해라. 래일은 보다 나은 삶이 우리를 기다릴거야.》
비칠비칠 방안을 나서던 오빠가 호주머니에서 스카프를 꺼내 구들우에 홱 던진다. 그리고 나무와 풀, 맑디맑은 시내물이 흐르는 논과 밭, 평생을 일하며 살아온 농부들이 있는 시골쪽을 향하여 씨엉씨엉 걸어간다. 오빠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이 시리도록 바라본다. 오빠의 아픈 가슴을 달래줄 아무런 힘이 없었으므로 나는 더욱 가슴이 터지는것 같았다.

인간에게 땅을 하사하시여 일용할 곡식을 가꾸게 하신 하나님이시여! 그 아름다운 땅을 영원히 지키려는 해살같이 마음 고운 오빠에게, 아니 모든 시골총각들에게 장미빛 사랑을 내려주십시오. 라고 속으로 기도드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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