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프롤로그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 황석영의 <바리데기> 중에서

 

1. 무엇을 왜 쓰는가

역사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아 동북아시아 질서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예상되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민족은 어떻게 20세기에 겪었던 아픈 역사를 치유하고 새로운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해 나갈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이다. 물론 이 같은 생각의 중심에는 연변과 조선족동포가 자리 잡고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역사적 트렌드와 동북아시아에서의 급격한 정세변화는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20세기에 겪었던 슬픈 역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 서세동점의 변혁의 시기, 우리민족은 그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또 애써 외면했다. 당연히 그에 대비하지도 못했다. 결국 10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우리민족의 질곡의 역사는 역사적 트렌드를 감지하지 못한 우둔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는 준비된 자의 편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만들어 지는 것이다. 따라서 21세기의 역사적 트렌드와 함께 동북아시아에서 형성될 새로운 질서를 헤아리는 것은 당면한 과제의 하나이다. 변혁의 시대에 우리민족이 어떻게 지난 세기의 슬픈 역사를 치유하고 함께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또한 이 시대를 사는 지식인에게 지워진 사명이다.

새로운 역사적 트렌드 및 동북아시아 질서의 변화를 직시하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 주목하려 한다. 첫째, 미래의 세상은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점점 단절의 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 나아갈 것이다. 냉전시대였던 20세기 국제사회는 국가 간 단절을 기정사실화하는 가운데 세력균형을 통해 평화를 유지했다. 국가차원의 철의 장막이나 죽의 장막은 물론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진영 간 대립으로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21세기의 국제사회는 이데올로기 대립의 역사가 종말을 고함으로써 세계화를 구가하게 되었으며 국가 간 관계에서도 점점 소통의 범주를 넓혀가고 있다. 바야흐로 국경을 통해 국가를 구획하던 단절의 시대를 벗어나 소통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새로운 소통의 시대에 즈음해 동북아시아국가들 간 공존공영을 위한 동북아시아공동체 건설을 향한 움직임이 구체화 될 것이다. 동북아시아는 역내 국가 간 갈등으로 인해 중동지역과 함께 20세기 가장 불안정한 지역 중의 하나였다.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여러 가지 갈등요인이 상존하고 있다. 하지만 탈냉전적 국제질서 하에서 동북아시아지역도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최근 동북아시아정세의 가장 큰 불안정 요인이었던 북한핵문제가 해결의 가닥을 잡아가기 시작하면서 주변 국가들이 지역공동체 형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세계화에 따른 지역 간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역내 국가 간 협력문제가 동북아시아에서도 적극 모색되고 있다.

셋째, 연변과 조선족은 지정학적 및 지경학적 그리고 지문화적 측면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21세기의 새로운 트렌드 속에서 추동되고 있는 동북아시아공동체 건설과정은 물론 건설이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연변과 조선족은 동북아시아 역내에서 특수한 위치에 있다. 연변은 중국의 변방이지만 동북아시아에서는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중심지역이다. 이에 따라 연변은 동북아시아공동체가 구현되는 과정에서 지정학적으로 주변 국가들을 연결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지경학적 측면에서 역내 국가 간 경제교류의 장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연변은 또 한민족과 중국의 한족을 아우를 수 있는 조선족의 주된 생활터전이다. 따라서 조선족동포들은 지문화적 측면에서 한국과 중국의 협력을 촉진할 중재자이다. 중국국민을 구성하는 소수민족으로서 중국의 법과 제도를 따르고 있지만 한민족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어 정서적으로는 한국과 가깝기 때문이다. 연변과 조선족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변경문화적 요소는 21세기 동북아시아국가들이 소통의 시대를 열어갈 때 새롭게 빛을 발할 것이다.

새로운 역사적 트렌드와 동북아시아 질서의 예상되는 변화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우리 민족의 미래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하나는, 연변과 조선족동포는 20세기 우리민족이 겪었던 민족적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이들을 통해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문제를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관심은 우리 민족이 지난 질곡의 역사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토대로서 한민족공동체 건설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동북아시아 질서가 급변하고 있는 시점에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가 감정적으로 멀어져 가고 있어 이를 극복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20세기에 우리민족이 겪었던 질곡의 역사를 온전히 치유하고 나아가서 동북아시아시대를 열어나가기 위해 우리는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시아 국가 간 공존공영을 적극 모색하여야 한다. 민족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 동북아시아시대라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기 위해 준비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는 머리를 맞대고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제 두 사회 간의 감정의 골을 메우고 동포애에 기반을 둔 공생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치밀한 전략적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 따라서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관심은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기 위한 동북아시아공동체 건설을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연변과 조선족은 이중적 관찰의 대상이다. 그리움의 대상인 동시에 계륵과 같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편한 존재라는 것이다. 연변과 조선족사회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의가 없다. 문제는 왜 계륵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는가 하는 점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양자 간의 인식의 차이/ 서로에 대한 기대심리의 불일치/ 상대방에 대한 실망감/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리움이 식은 것(사랑의 감정도 일정기간이 지나면 시든다) 등등.... 중요한 것은 정보화시대에 변화의 내용과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획기적이고 빠르기 때문에 눈앞의 문제에 집착할 여유가 없다는 점이다. 보다 멀리 바라보며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십상이다. 동북아시아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당장의 이해관계에 연연해 연변과 조선족사회를 계륵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당면한 모든 문제를 끌어안고서라도 그들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야만 한다.

따라서 동북아시아시대를 내다보며 지정학적 및 지문화적 측면에서 연변과 조선족사회의 중요성을 살펴보고 나아가서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가 멀어져가고 있는 이유를 조선족사회의 현실을 통해 진단해 보고자 한다. 조선족사회에 대한 현실진단은 우리가 연변 및 조선족사회와 함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준거가 될 것이다. 또한 이 같은 현실진단을 바탕으로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연변과 조선족사회가 지니고 있는 가치를 평가할 것이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동포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의미를 확장할 경우 연변은 조선족동포들이 주로 살고 있는 중국 동북3성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니까 연변은 중국의 조선족동포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지역을 포괄한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연변을 하나의 독립되고 단절된 공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조선족동포들이 살고 있는 주변지역을 연결하는 소통의 축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동북아시아공동체가 형성될 때 연변이 한반도와 중국은 물론 주변 국가들을 잇는 소통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도 맞닿아 있다. 연변과 조선족을 분리할 수 없음은 바로 연변이 조선족동포들의 소통의 공간일 뿐 아니라 조선족동포들의 미래를 담보하는 중심축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민족 모두를 대상으로 쓰여 졌다. 그 이면에는 한국사회가 상대적 강자의 입장에서 연변과 조선족사회를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상생적 관계로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한국사회가 똘레랑스의 실천자가 되어 먼저 손을 내밀어 그들을 포용하고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속>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