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나는 한 과부를 만나 겨우 로총각신세를 면했다. 안해는 비록 예쁘지는 않았지만 어리무던하고 마음씨가 착했다. 결혼한 이듬해  딸애를 낳았고 우리는 그럭저럭  행복했다. 그런데 딸애가 한돌이 조금 지나자 안해는 이상하게도 시내돌이를 하고 이것저것 트집하던데로부터 자주 집을 나가더니 아예 딸애를 안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그해 겨울, 장인이 문득 나를 찾아와서 안해가 애를 친정에 두고 어디로 갔는지 행방불명이라며 딸애를 데려가라고 했다.   

가마목에 홀로 앉아 문쪽만 바라보던 딸애가 나를 알아보고 울음을 터뜨리며 나한테 안겼다. 때자국이 지질지질 흐르는 그대로 딸애를 안고 나는 뒤도 보지 않고 나왔다. 하지만 이듬해 겨울, 다시는 오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안해가 눈물코물을 흘려가며 다시 들어왔고 나는 딸애를 봐서라도 용서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안해는 딸애를 잘 돌보지 않았고 딸애 역시 제 엄마를 따르지 않았다. 안해는 봄이 되자 또 집을 뛰쳐나갔다가 겨을에 다시 들어왔다. 겨울을 말없이 잘 보내다가 또 봄이 되자 안해는 집 나갈 준비를 하자 지쳐버린 나는 끝내 리혼했다.

안해는 그렇게 떠나갔다. 리혼후 나는 엄마 없는 딸애를 남보다 더 예쁘게 잘 키우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 들어서면 웃어주는 딸애가 있어 힘드는줄 몰랐다.

딸애가 차츰 커가면서 모두 한국바람에 흔들릴 때 나는 엄마없는 딸애가 나마저 없으면 안된다고 출국욕망을 버리고 남의 밭을 더 양도해 부쳤다. 첫해 봄밭갈이때  일군을 고용했지만 이듬해부터 일군을 고용하지 못해 나 홀로 7헥타르 되는 밭을 다루었다. 먼저 비료주고 갈아번진 다음 이튿날 씨를 뿌리고 다시 묻었다.

그 와중에 딸애가 학교에 붙자 나는 신새벽에 일어나 10여마리 소를 옮겨매고 돌아와 아침을 짓고 딸애의 머리를 곱게 매여서는 밥을 먹인후 오토바이에 싣고 10여리 떨어진 학교에 실어준 다음 밭일을 했다. 그렇게 2년쯤 지나 시내 모 학교에서 기숙사생을 받자 딸애를 그 학교에 보냈다. 내가 힘든것 보다 시내는 그래도 교육시설도 좋고 또 겨울이면 딸애가 추운 고생을 면할수 있었기때문이다.

이제는 딸애와 함께 홀아비생활을 한지 7,8년이 된다. 그동안 딸애는 건강하고 반듯하게 잘 자랐고 하늘이 도와 농사도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농기계도 갖추어놓고 기계화농사를 하게 되였다. 실패한 혼인이였지만 딸애를 엄마 없는 그늘에서 벗어나 밝게 키운것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고있다.
연변일보/리광수 구술/ 전수화 대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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