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은 조선 태종 16년 2월 25일(무자)의 일이다. 대언(代言)을 지낸 윤수(尹須)의 아내 제석비(帝釋婢)는 불경을 읽어 액을 막고자 장님 승 신전(信全)을 초청하였다. 하지만 제보다 젯밥에 마음이 있었던가? 윤수의 아내 제석비는 신전에 대한 작업에 들어갔다. 태종실록은 이를 이렇게 적고 있다. 제석비는 승려 신전에게 껍질 깐 밤을 건네주며 말한다. “밤 맛이 어떠세요?” 신전이 말한다. “밤이 참 달고 맛있네요!” 이어지는 제석비의 말 “스님, 밤보다 더 달콤한 맛이 있는데……” 결국 둘은 눈이 맞고야 말았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지속된 둘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에서 자식이 태어나 버렸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들은 제석비를 모시고 있던 어린 계집종을 죽여서 입을 막아 일이 새나가지 않게 하였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둘의 부적절한 관계는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사헌부는 이 사실을 왕에게 고하였고, 결국 둘은 목을 베는 참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당시 사건 처리를 위한 논의에 참석했던 이숙번(李叔蕃)의 말을 빌면 사실 둘의 죄목은 “장(杖) 80대”에 해당되는 화간(和奸)이었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화간에 대한 법률이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사대부의 아녀자와 승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일반적인 법률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태종은 신료들의 손을 들어 둘을 참형에 처하게 된 것이다.

사진설명 : 태종실록의 한 페이지

세종대에는 이러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건은 세종 9년 1월 3일(임진) 기사인 이지(李枝)의 졸기에 실려 있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태종의 종제인 이지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일이 다가오면 항상 연말에 절에 가서 재를 올리고 반승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느때처럼 재를 올리기 위해 향림사(香林寺)에 갔던 이지가 갑자기 죽어 버린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79세였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이지가 후처(後妻)인 김씨(金氏)와 더불어 절에 가서 수일 동안 머물렀다. 어느 날 밤에 김씨가 승려와 간통(奸通)하는 현장을 목격한 이지는 그 자리에서 김씨를 붙잡아 꾸짖고 구타하니, 김씨가 이지의 불알을 끌어당겨 죽였다.” 당시 향림사에 갔던 노비는 모두가 김씨의 노비(奴婢)였기 때문에 이 사실을 숨기고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하였다. 하지만 부고를 듣고 달려온 이지의 전처(前妻) 아들 절제사(節制使) 이상흥(李尙興)에 의해 사실이 관아에 알려질까 두려웠던 김씨는 결국 발광(發狂)하여 천치(天癡)처럼 되었고 이상흥 또한 사실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음으로써 이 일이 묻혀져 버렸다고 한다. 태종과 세종대에는 강도 높은 대불교정책이 실시되었다. 부녀상사금지법, 도첩제의 시행, 불교종파 통폐합, 국가가 사찰에 지급했던 토지와 노비의 대폭적인 축소 등이 이 시기에 실시된 대표적인 불교정책이다. 비록 조선이 숭유억불을 국시로 표방하여 건국했지만 삼국시대 이래로 이어져온 기나긴 불교의 전통을 하루 아침에 없앨 수는 없었다. 때문에 태조, 정종 대까지도 불교에 대한 이렇다 할 정책은 시행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태종과 세종대에는 과감하게 불교에 대한 칼을 들이댐으로서 유교국가로서의 면모를 확립하고 부족한 국고를 충당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서 일어났던 불교계와 관련된 부적절한 관계는 결과적으로 당대에 시행되었던 강도 높은 대불교정책의 명분을 제공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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