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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녀자가 형편없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우린 너무 쉽게 헤여졌어요...>>

스타일은 그런대로 화이트칼라처럼 보였으나 목소리만은 사람 잡게 조잡하고 음이 틀렸다. 그러면서도 사랑에 상처를 입었던 모양, 눈물까지 글썽해서 한번쯤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후렴부분에 가서 노래라기보다는 절규를 해대고있었다.

창호와 인순이는 이 도시에서 금방 류행이 되기 시작한 가라오케에서 술을 마시고있었다. 노래하던 녀자가 마지막 절규를 찢을 듯 뱉아내고 작은 무대에서 내려오자 함께 한 동행들인지 어느 좌석에서 짝짝 박수를 쳐댔다.

<<앵콜!>>

창호는 무대에서 내려 자기들 동행쪽으로 가는 그 녀자를 바라보며 실실 실웃음을 날렸다.

<<이쁜 녀자가 목소리 하나 재수없군요. 인순씨 한번 나가보아요. 여기 모인 사람들 주눅 좀 들게.>>

인순이는 맥주잔을 든채 창호를 흘겼다.

<<누굴 웃기려구요? 가라오케 명가수는 창호씨잖아요? 창호씨가 한번 기죽여보지 왜 저가 나가야 해요?>>

<<인순씨 명창이라던데 왜 그래요? 이런 곳에 왔으면 즐기려는건데 남 의식할 필요가 있어요?>>

<<뭐요, 창호씬 아주 예술가적인 운치가 있던데요? 들을라니까 한창때는 청년시인이셨다면서요?>>

창호는 젊은 시절의 시적인 흥분을 다른 사람이 론하는것이 유쾌한 일이 아니였다. 더구나 오늘날 시라는것에 거의 미련을 두지 않고있는 현시점에서 그에게 시는 하나의 과거요 젊은날의 어리석음이였다.

<<아픈 곳만 꼬집는군요. 시를 쓴건 처음부터 바보짓의 시작이였어요.>>

<<어머머, 고상한 취미에 왜 그런 험담을 해요?>>

창호는 이 화제를 더 이끌어가고싶지 않았다.

<<인순씨 초청이라면 제가 노래를 하지요.>>

인순이는 활짝 웃었다.

창호는 복무원을 불러 노래제목을 적은 쪽지를 주었다. 잠간이 지나자 창호가 선택한 노래의 반주부분이 흘러나왔다. 창호는 빠른 걸음으로 작은 무대우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북방의 승냥이>>라는 노래였다.

나는 북방의 눈보라속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이는, 외로운 승냥이라는 가사의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창호는 근육마다가 곤두서는 흥분을 체감했다. 령하 삽십도를 오르내리는 따구쟈의 겨울밀림, 하얀 연기 피여오르는 시골마을의 아침, 그리고 시큼한 쏸차이(중국 북방의 배추절임)의 큼큼한 냄새, 그리고 또 카이란이라 부르는, 봄을 맞는 밀림의 눈속에서 소리없이 피는, 북방사람들이 빙릉화라 부르는, 하아얀 눈속의 그 노오란 꽃처럼 수수하면서도 이쁜, 북방이 처녀답게 길다란 쌍태머리를 드리운 카이란을 창호는 생각했다. 외롭게 피는 금빛의 빙릉화를 창호는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고있었다.

나는 북방의 외로운 승냥이 한 마리, 창호는 눈보라 세찬 밀림의 눈보라를 보고있었다.

창호의 노래가 끝났다. 소란스럽고 떠들썩하던 가라오케의 홀이 미러볼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릴뿐이였다. 미러볼이 회전하며 던지는 색등의 빛오리들이 흩어져있는 좌석들의 얼굴들을 스치고있었다. 갑자기 약속이나 한 듯이 박수소리가 터졌다.

<<앵콜!...>>

<<!...>>

창호는 사처에서 터져나오는 박수소리를 들으며 인순이가 앉아있는 자기의 좌석으로 돌아왔다. 인순이의 눈에 감동의 빛이 섬광처럼 내뿜고있었다.

<<창호씨...>>

인순이는 뒤말을 잇지 않았다. 어두은 조명등의 불빛속에서 인순이의 눈가가 촉촉해있는 것이 보였다.

<<왜요?>>

인순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창호씨에게 이런 부분이 있는걸 몰랐어요. 노래를 들으면서 전 이 사람이 창호씨가 맞는가 놀랄 지경이였어요. 허스키한 목소리때문이였을까요? 남자라는, 아니 북방의 거칠은 남자라는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깊은 상처와 아픔을 견디고 살아온 사람이겠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창호는 노래의 기분속에서 헤여나려고 애쓰면서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창호는 노래를 하면서 눈보라속을 외롭게 헤쳐가는 승냥이 한 마리를 상상했었고 따구쟈를 떠다던 날, 그 잊을수 없는 눈보라의 폭풍과 허름한 이불짐을 어깨에 메고 무릎을 치는 눈길을 헤치던 자신을 보았다. 스물 두 살의 젊은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얼음방울로 되어 붙은 얼굴을 닦으며 목적지도, 갈곳도 약속 없이 떠나던 사람, 그사람이 젊은 날의 창호였다.

<<우리 세대중 아픔이 없고 상처를 받지 않은 사람이 있겠어요? 다 비슷한거지요.>>

인순이는 하향세대가 아닌 삼십대였다.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년대에 태여난 그들에게 그 혁명의 시기는 한낮 아라비안나트같은 이야기일뿐이였다.

<<애수? 숙명?... 치렬한 내적인 싸움?... 창호씨가 노래하실 때 그런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조금은 과장된것같은, 아마 그랬어요.>>

창호는 인순와 같이 하향이나 문화혁명을 집적 체험하지 않는 세대들의 이런 질문을 한두번 받은것이 아니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당시 우리가 어떤 아픔과 갈등을 겪었는가를 정확하게 전달하기는 힘들었다.

<<어느 세대나 나름대로의 아픔과 고통과 고민들이 있을지요. 그러나 피비린 전쟁의 과정을 겪은 우리 웃세대들과 전쟁의 아픔을 물으면 오히려 담담하고 그랬어야 하는거로 생각하는 듯 해요. 과장된것이라... 그럴수도 있지요. 우리세대의 아픔이라는건 오히려 겪는 순간의 아픔보다 지나간후의 아픔이 더 심각했을수 있어요. 리해가 안되지요? 그것이 바로 우리세대의 아픔의 특징이예요. 가슴깊이에 도사리고있다가 어느 순간에 독즙을 내뿜으며 물어뜯는 독사라고 할까요? 언제나 그 독즙의 고통에 시달리는 그런 아픔, 아마 그럴거예요.>>

창호의 말을 듣고있는 인순이의 얼굴이 진지했다. 선이 명확한 얼굴이 조명등의 자주빛 색깔에 물들어 창백해보였다.

<<글쎄요, 창호씨와 같은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어딘가 공동한 점이 있는거 같아요. 콤플렉스같은 것...>>

<<콤플렉스? 세대적인 콤플렉스? 묘한 말이군요.>>

<<그럴지도 모르죠. 전 창호씨가 레이훙을 대할 때 표정이 이상했어요. 어떤 콤플렉스같은 것을 느낄수 있었어요. 무어라고 할까요? 너무 다정했고 무조건 좋게 보려는 노력만 하고있었어요... 머리가 검은 짐승만이 배신을 한다는걸 모르셔요?>>

창호는 한숨을 내쉬였다. 그리고는 앞의 맥주컵을 들고 인순이의 잔에 맞추었다.

<<드시죠. 즐기는 장소에서는 너무 무거운 화제인거 같아요.>>

인순이가 맥주를 마시다가 멈추었다.

<<아니요.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 창호씨 더 매력적인데요?>>

인순이의 표정에는 거짓이 없었다.

창호는 첫사랑을 하던 녀자의 성이 레이훙과 같은 레이씨였다고 말하려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실은 레이훙이 어딘가 첫사랑을 하던 녀자같은데가 있어서요...>>

말하고난 창호는 속으로 이런 제기 했다. 본의는 이것이 아니였었는데 말이 엉뚱하게 나간것이였다. 사실 레이훙이 카이란과 비슷한데 있다고 느낀적은 없었다.

인순이는 흥취가 있다는 듯 몸을 창호의 앞으로 기울였다. 누구인가가 노래를 하고있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럼 첫사랑은 중국녀자하고 한거예요?>>

창호는 어쩔수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와-아! 창호씨 젊은시절부터 넘 랑만적이였네요?!>>

<<랑만적?>>

창호는 쓰게 웃었다. 과연 랑만적이였을가? 그랬다면 오늘까지 품고있는, 아물지 않는 기나긴 상처의 쓰라림은 없었을수도 있었다. 랑만이라...

<<도륙을 당한 랑만이지요. 그때 그시절에는...>>

창호는 저도 모르게 카이란의 이야기를 꺼냈다. 가슴아팠던 첫사랑, 그리고 마음 깊은곳에 죽는날까지 아픔으로 남을 그 이름, 창호는 듣는 상대가 인순이라는 것을 지각하지 못한채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가라오케이라는, 유흥으로 질탕한 곳에서 비극적인 운명의 숙명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창호는 이런 분위기를 의식하지 못한채 자기의 과거에 빠져있었고 이야기를 듣는 인순이도 어린애처럼 감동한 얼굴을 한채 유심히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카이란이 결혼마차를 타는 순간의 부르짖음을 이야기하며 창호는 목이 메였고 인순이는 끝내는 눈물을 보여주었다.

<<너무해요! 다만 우파의 자식이였기 때문에, 그런 아버지가 있다는 리유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헤여놓다니?! 그렇게 강박적으로 결혼을 시키다니?!... 그때는 그게 통했어요? 결혼등기도 안하고 결혼을 시키다니, 그건 강간이예요! 법도 없대요?!...>>

그랬다. 법도 없었을가? 그래, 법도 없었다. 정치적인 합리성만 있다면 인간의 모든 악은 자기의 정당성을 자연스럽게 얻을수 있었다. 창호는 가슴에 가득히 솟아올라 가득해진 추억속의 아픔을 달래려는 듯 오래동안 머리를 숙이고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강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지요. 우파의 아들과 결혼시키지 않으려는 카이란의 가족들 행위는 오히려 우리의 사랑보다 더 깨끗하고 순결한 행위로 취급을 당했으니까요.>>

창호를 바라보는 인순이의 눈길속에서 속성처럼 담고있던 도고함과 도전의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카이란이라는 녀자, 너무나 가여워요. 그래 그후로는 소식이 없었어요?>>

창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따구쟈를 떠난후 전 다시 그곳으로 간적이 없었어요. 떠날 때 영원히 따구쟈라는 곳에 눈길 한번 돌리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었으니까요.>>

<<그래도 지금이야 한번쯤 가보실수 있지 않아요?>>

창호는 무가내한 한숨을 내쉬였다.

<<이제 와서 가본들 어쩌겠습니까? 하물며 따구쟈라는 곳에서도 칠팔십리 떨어진 황꺼우라는 곳에 갔는데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어라 하고 찾겠습니까?... 아마 지금쯤은 애들도 다 키우고 잘 지내겠죠.>>

인순이는 맥주컵을 오른손으로 쥔채 왼손으로 턱을 고이고 이윽토록 창호를 바라보았다.

<<창호씨의 첫사랑이야기 너무 소설적이예요. 하향세대들이 쓴 문학작품을 보면서 전 이런 이야기들은 소설적인 허구라고만 생각했어요. 생각밖에 창호씨에게도 이런 가슴 저린 이야기가 있다니... 전 믿을수가 없어요.>>

인순이는 대담하게 창호의 눈길에 자기의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창호씨와 같은 분의 사랑을 받아보았으면 좋겠어요. 순결하고 고전적이고 청순한, 그런 사랑을 해보았으면 좋겠어요. 그러고보니 오히려 우리세대가 더 불행하군요. 사랑의 스낵시대를 살고있으니...>>

인순이의 말을 듣는 순간 창호의 머리에 갑자기 경희의 모습이 피끗 지나갔다.

<<시간은 모든걸 지워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인간은 아무리 아픈 기억이라도 시간앞에서는 망각하게 되어있는거예요.>>

인순이는 고집스럽게 보일정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창호씨의 눈이 거짓말을 하고있지 않아요. 못하는거죠. 카이란이라는 이름을 말할 때마다 창호씨의 눈에서 애수와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아요. 여자들은 민감해요. 그것이 이성이라면 더 민감하게 감각이 동원되거든요. 모르셨죠?>>

창호는 회억의 분위기에서 헤여나오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쓸데 없는 이야기 너무 길어졌군요. 로맨틱한 소설같지 않아요? 전 좀해서 이 이야기를 안하는데 왜서인지 인순씨한테 해버렸군요. 술맛 다 가겠네.>>

<<뭐요, 염정소설은 젊은 마음을 자극하기 위한것이지만 창호씨의 이야기는 진실한 하나의 과거잖아요. 허구한 이야기는 풍선처럼 떠있지만 진실한 이야기는 언제나 쇠덩어리처럼 갈았는거예요. 들을수록 너무 무거워지지요...>>

<<이젠 그만합시다. 저의 푼전도 안되는 첫사랑이야에 모처럼 온 가라오케기분 다 깨여졌네요. 자, 건강과... 그리구 뭐로 할까요?... 우리들의 시간을 위하여 건배!>>

창호의 건배제의가 우스운지 인순이가 입을 벌리고 웃었다. 얼굴의 선이 선명한 인순이의 얼굴에 순진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인순이는 보는 사람에 따라 미인이라 할수도 있고 수수하다고 할수 있는 스타일의 녀성이였다. 얼굴의 선들이 선명하였고 오관이 균형이 잡혀있었다.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는 멋진 인상을 대번에 받을수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뜯어보면 어느곳이 이쁘다고 말하기 어려운 그런 유형의 얼굴이였다. 가라오케의 어두운 조명이 인순이의 이런 점을 커버해주어 창호는 인순이가 이쁘게 보였고 순수함이 얼굴을 물들이고있어 다정해보였다.

창호는 카이란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에 인순이가 하던 말을 돌이키며 마음의 평온을 느꼈다.

<<인순씨는 언제나 깔깔한줄로만 알고있었는데 제가 착각을 하고있었나봐요.>>

인순이는 아양기같은 표정을 얼굴에 실었다.

<<왜요? 저도 녀자로서는 만점인데요?... 우리 노래해요. 무슨 노래할까요?>>

창호와 인순이는 머리를 맞대고 가요목록을 훝으며 제목을 골랐다. 그리고는 함께 작은 무대로 올라가 이중창을 부르기 시작했다. <<부부>>라는 제목의 노래였다.

인순이의 목소리는 청아하고 깨끗했다. 가사를 뱉는 발음이 정확했고 음절과 박자를 맞추는데도 숙맥이 아니였다. 련습이 되여있는, 감정표현이 적절하게 잘되여있는 그런 목소리였다.

노래의 두 번째 절을 부르면서 창호는 인순이의 목소리가 떨리고있다는 것을 느겼다.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하는 구절에 가서 인순이는 목이 메였고 끝내는 눈물을 머금은채 마이크를 꽂아놓고 혼자서 작은 무대에서 내려 좌석으로 돌아갔다.

창호는 노래의 후렴부분의 가사가 형광막에서 흘러가가는 것을 보면서 마이크를 끄고 무대를 내려섰다. 목메여 울먹이던 인순이의 모습이 가슴에 아련한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비슷한 경력을 가진, 사랑에 목메이는 그런 아픔을 가졌던 녀자인가?

창호는 좌석에 가서 인순이를 마주하고 앉았다. 인순이는 티슈로 눈을 딲으면서 겸연쩍은 얼굴을 하고 창호를 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어느집이나 노래하기 힘든 곡이 있다는 중국속담 있지요? 그렇게 리해를 해주세요.>>

창호는 묻지 않았다. 상대가 녀자라는 의식에 캐여묻는다는 것은 례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고 금방 자신의 아픈 사랑이야기를 했는데 바꾸어 녀자상대의 사랑이야기를 듣기에는 어쨌든 기분이 어설펐다.

<<뭐 그렇게 리해를 하고있어요. 젊음이 있었고 젊음을 지나온 사람에게 눈물겨운 사랑이야기가 있는거야 리치가 아니겠어요?>>

인순이는 대답대신 맥주컵을 내밀었다.

<<취하고싶어요. 오늘은 배갈에 맥주에 짬뽕이 되었는데도 취하지 않네요?>>

가라오케에서 나올 때 두사람은 어진간히 취기가 있었다. 밤이 깊어서인지 날씨가 혹독하리만치 싸늘했고 대부분의 상호들은 불을 꺼버려 거리는 한창 저녁때의 흥성함이 없었다.

<<창호씨, 조금 걸을까요? 술도 깨구요...>>

두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빠득빠득 눈밟히는 소리가 애처로웠다. 거리에 오가는 택시도 몇대 없었다.

<<많이 늦었군요.>>

<<이렇게 걷고 또 걷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살며시 인순이가 창호의 팔에 자기의 팔을 걸었다.

<<창호씨 멋진 남자인거 오늘 발견했어요.>>

창호는 옆으로 인순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로등불빛에 비친 인순이의 얼굴이 술탓인지 발갛게 타고있었다.

<<유감이네요. 오늘 발견했다니까.>>

<<유감이라니요? 발견된것만으로도 행운이줄 아세요.>>

인순이의 손이 창호의 호주머니속으로 쏙 들어왔다. 창호의 손을 잡는 인순이의 손이 사늘하게 차가왔다. 손가락의 뼈가 갸냘프게 작았으나 감촉은 부드러웠다. 창호는 이 손의 감촉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머리속에서 하나의 형상이 지나갔다. 경희!

창호는 바다의 흐느낌소리를 들었다. 공산사의 우거진 측백나무숲, 그리고 혼귀석이라는 바다가의 바위, 그리고 그 바위우에 외롭게 앉아있던 자신을 보았다. 인연이 다하다. 찡관스님의 말이 떠올랐다. 이상하게 경희에 대한 그리움은 없었다. 그 녀자 때문에 죽음까지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모든것이 그토록 담담하게만 다가오고있었다.

<<바다를 보셨어요?>>

인순이는 갑자기 격에 맞지 않는 물음을 물어오는 창호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다요? 왜 갑자기?>>

<<아니, 생각이 났어요. 인순씨하고 이렇게 걸으니 바다가 보이는것 같아요.>>

<<...>>

인순이가 사는 아빠트에 도착하자 창호는 층계앞에서 멈춰섰다. 조명이 없어 캄캄했다. 인순이는 창호의 팔에서 자기의 팔을 빼지 않고 말했다.

<<올라가요. 어두워서 무서워요. 사층이거든요. 몸좀 녹이고 가세요.>>

창호는 멈칫거렸다. 인순이의 말은 혼자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인순이가 살고있는 집은 핵가족을 위해 지은 45평방짜리 아빠트였다. 작은 객실 하나, 침실 하나, 화장실과 주방이 있는 작은 집이였다. 객실에 텔레비 한 대, 두사람이 앉을만한 소파 하나, 그리고 책상이 붙은 책장 하나가 가구의 전부였으나 집안은 어딘가 비좁아보였다.

<<앚으세요. 저 뜨거운 차 가져올게요.>>

인순이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창호는 소파에 앉아 집을 둘러보았다. 마음에 어떤 부담스러움이 있었다. 혼자 사는 녀자의 집이여서일가?...

난방이 잘되여서 집안이 따스했다. 인순이가 차주전자와 찻잔을 담은 쟁반을 들고 나와 차탁우에 올려놓았다.

<<잠간 우러난 다음에 들어요... 집이 스산하지요? 인테리어를 할가 하다가 이담 바꾸겠는데 하고 그대로 이사를 왔어요. 정력도 없구요....>>

<<아담하고 좋네요 뭐, 전 아직 낡은 아빠트에서 사는데요...>>

인순이가 창호의 옆에 와 앉았다. 몸에 붙는 얇은 털내의를 입어 가슴이 이쁘게 솟아있었다. 차를 부으며 인순이가 물었다.

<<정준태사장하고는 아신지 오래 되었어요?>>

창호가 되물었다.

<<정사장이 말씀 안했어요?>>

인순이는 차를 마시느라고 몸을 앞으로 숙이고있다가 무슨 소리냐는 듯 얼굴을 돌렸다.

<<정사장이요? 정사장이 왜 그런 말을 해요? 저하고 정사장은...>>

인순이는 할끗 창호를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언니가 한국에서 식당일을 하고있어요. 정사장은 아마 그 식당의 단골이였는가 보아요. 언니가 좋은 분이라고 소개를 하더라구요. 뭐 그렇게 알게된거예요.>>

창호는 인순이가 정사장을 끄집어내여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해석하는 저의를 어렴풋이 알아차릴 것 같았다.

<<만남이란 그런거지요. 언니의 인연이 저를 인순씨와 만나게 한 것 아니겠어요. 사람의 만남과 리별, 이런것들을 보고 생각할 때마다 전 많이는 숙명적이 되어요.>>

인순이는 창호의 어깨에 가볍게 머리를 기댔다. 창호는 인순이의 어깨를 살짝 자기의 몸으로 끌어당기면 오늘 저녁은 무슨 일인가 있으리라는 예감을 했다. 인순이가 한손으로 어깨를 잡은 창호의 손을 잡았다.

<<사실 전 한국남자들 어떤줄 모르겠어요. 하나같이 나발만 불고 녀자라면 오금을 못쓰고... 녀자한데는 돈 뻥뻥 쓰다가도 시장가서는 십전도 깎느라고 옴니암니 따지고... 이그, 지겨워요. 중국 남자들은 그래도 남자다운데가 있어요. 한마디를 하면 책임을 질줄 알고 진실한데가 있어요.>>

창호는 아래입술을 힘주어 다물어보고 머리를 갸웃했다.

<<정사장은 그래도 좀 틀려요.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게 좀스럽게 굴지 않았어요.>>

인순이는 비웃는 눈으로 창호를 올려다보았다.

<<정사장이라고 뭐 한국남자가 아닌줄 아세요? 오십보 백보지.>>

창호는 무엇해졌다.

<<오늘은 이상하네요. 두사람이 그냥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하고있으니... 우리도 우리의 화제를 만들어보아요...>>

인순이는 말하는 창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창호씨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저가요?>>

<<창호씨는요, 깊은 물같아요.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언제나 다정하고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지만 언제나 그 뒤에는 깊이를 알수 없는 바다같은 무엇이 느껴져요. 중국 사람들은 그것을 영웅의 기(氣)라고 했던가요? 무릎을 굻고있지만 뜻은 하늘에 있는 사람, 그렇게 보여요... 사실은 창호씨가 가라오케이에서 노래를 하는 모습과 카이란이라는 녀자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가슴 깊이에 숨어있는, 집착같은 정열과 그리고 진실이 엿보였어요...>>

창호에게 인순이가 말하는 부분이 있는것만은 사실이였다. 창호도 자기성격의 내면에 감추어진, 가장 진실한 내심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 있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아버지가 우파로 되어 투쟁을 맞는 것을 보았고 아버지가 우파로 된 어처구니 없는 원인을 알았을 때 창호의 이런 성격은 형성되였는지 몰랐다. 진실했으나 타협이 없었고 타협했으나 머리숙이지 않는, 모순된 성격을 조화롭게 간직하고있었다.

<<너무 춰세우지 마세요. 그러다 바지가 벗겨지면 어쩔라구요?>>

창호는 이런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럼 절 꼭 안아줘요. 그렇게 부담스런 보따리 안고있듯 하지 말고...>>

창호는 인순이의 허리를 안아 무릎우에 앉혔다. 인순이가 창호의 목을 두팔로 감았다. 그러면서 조용히 말했다.

<<오빠라고 불렀으면 좋겠어요...>>

창호는 인순이를 안고 침실로 들어가 인순이를 침대우에 내려놓았다. 미황색의 담요가 아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있었다.

인순이의 옷을 한벌한벌 벗기면서 창호는 격정이 없는 자신이 놀라웠다. 술탓은 아니였다. 원래 술에 취하지 않았고 오랬동안 이야기하다보니 술기운은 웬만히 눅잦혀져있었다.

인순이의 라체는 성숙한 녀자의 아름다움을 내뿜고있었다. 적당하게 솟은 젖가슴, 도도록히 부풀어 유연한 굴곡을 이루고있는 배, 그리고 정갈한 숲이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있었다. 창호는 하나의 욕망이 서서히 자신을 태우고있음을 느꼈다.

오래인 시간동안 창호와 인순이는 서로를 탐닉하며 욕망의 나락에 깊이깊이 빠져있었다.

이튿날 아침, 창호가 눈을 떴을 때 인순이의 자리는 비여있었다. 창호가 부랴부랴 일어나 객실로 나갔을 때 긴머리를 자주빛 실크수건으로 살짝 동인 인순이가 기척을 듣고 주방에서 나왔다.

<<외박해도 괜찮아요? 먼저 세수를 하세요. 세면실에 칫솔하고 일회용면도기가 있어요. 그사이 밥상을 차릴게요.>>

엄연 주부가 되어 남편을 호령하는 인순이였다. 외박이 괜찮은가 하는 물음이 이상하리만치 우스웠다.

세수를 끝내고 나오자 인순이는 밥상을 다 차려놓고 걸상에 앉아 창호를 기다리고있었다. 인순이를 마주하고 밥상에 앉은 창호는 이 집에서 오래동안 살아온듯한 착각을 느꼈다. 인순이가 료리를 집어 창호의 밥공기에 놓아주었다.

<<어제저녁 술을 마셨기에 죽을 쑬가 하다가 밥을 했어요. 콩나물국 끓였어요. 해장이 되게 국물 많이 마시세요...>>

인순이의 얼굴에 편안한 즐거움이 가득차있었다.

밥을 다먹고 나자 인순이가 물었다.

<<여기서 집적 출근하실거지요? 사모님 야단 안하셔요?>>

<<아니, 우리는 서로 묻지 않는게 불문률이거든요.>>

인순이는 창호의 대답에 귀조차 기울이지 않고있었다. 어떤 대답이 나올가 관심이 없다는 심기였다.

<<레이훙말이에요, 그애를 그냥 받으시겠어요?>>

창호는 웬일이냐는 눈으로 인순이를 바라보았다.

<<왜요? 애가 문제가 있어보여요?>>

인순이는 커피를 타면서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전 그애가 싫어요. 왜서인지 모르겠지만...>>

<<중국애라고 해서 그래요?>>

<<아니, 그런건 아니예요.>>

<<전 좋아보이던데...>>

<<단지 감이 않좋아요. 그것뿐이예요.>>

<<네?! 감이- 안-좋아요?>>

인순이는 대답이 없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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